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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마음을 쉴 때 알 수 있는 것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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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6-27 19:27 조회5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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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쉴 때 알 수 있는 것들(2)
장현숙(감이당)

마음을 쉰다는 것

내가 명상법으로 처음 접한 만트라 명상은 외부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말(만트라)’에 집중시키는 명상법이었다. 그 단체에서(앞 연재 참조) 만트라를 할 땐 몰랐지만, 유식을 공부하다보니, 만트라 명상은 명언(名言)을 사용하는 인간의 본능을 적극 활용한 명상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만트라)을 사용하여 말(명언)에 의해 산만해지는 마음을 집중시키는 법. 말의 독(번뇌)을 다스리기 위해 말을 이용하다니, 참 오묘하다. 그런데 만트라 명상 외에도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명상법은 많다. 그 중 대중에게 가장 보편화된 것은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들어가는 숨과 나가는 숨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 만트라든 호흡이든 또는 몸의 감각이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다보면, 마음(견분, 상분)을 비추고 있는 마음(자증분)을 자각(증자증분)하게 된다. ‘마음’을 ‘비추고 있는 마음’을 ‘자각’하다니? 이 무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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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우리의 마음은 ‘내가’ ‘대상’을 본다고 생각한다. 이때 ‘나’는 ‘대상’과 따로 떨어져 존재한다. 대상과 따로 떨어져 보는 주체로 존재하는 ‘나’를 흔히 ‘에고(ego)’라고 부른다.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 평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나’는 바로 이 ‘에고’이다. 그런데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에고’와 ‘대상’이 동시에 마음에 들어오게 된다.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을 동시에 본다는 것이다.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둘이 아닌(不二)’ 상태로 본다는 것이다. 이를 유식에서는 자증분(自證分)이라고 한다. 마음이 마음을 비추어 스스로(自) 증명(證)한다는 뜻이다. 만트라 명상 시, 처음엔 내가 소리(만트라)를 내고, 내가 그 소리를 듣는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었지만, 소리(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며 명상을 계속하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나와 만트라가 따로 구별되지 않고, 나와 만트라, 만트라와 내가 둘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가 있다. 명상을 시작할 때,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되는데, 이는 마음을 비추고 있는 마음(자증분)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에고가 대상에 끌려 다니느라 (분별하느라) 몰랐던 마음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 많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명상은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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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 더 진행되면, 즉 집중 상태가 더 진행되면, 이 생각들을 마치 풍경처럼, 또는 마치 딴 사람 생각인 냥 보고 있는 상태가 된다. 유식에서는 이를 마음(자증분)이 마음(견분, 상분)을 비추고 있음을 ‘선명하게 아는 것’, 즉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알아차림’, 또는 ‘지켜보기’의 상태이다. 평소에도 마음은 마음을 비추어 스스로를 알고 있다. 즉, ‘보이는 대상’(相分)과 ‘보는 자’(見分)를 동시(둘 아니게)에 ‘아는 마음’(自證分)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에고는 늘 대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아는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어떤 계기가 있어 잠시 자각한다 하더라도, 나와 대상을 분별하여 보는 마음의 힘(二取習氣)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 자각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면, 에고도 아니고, 대상도 아닌, ‘에고(견분)’가 ‘대상(상분)’을 보는 것을 ‘아는 마음(자증분)’을 ‘선명하게 알게(증자증분)’ 된다. 그리고 이 선명한 앎을 유지하게 된다. 명상을 하면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 선명한 앎 때문이다. 마음이 대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에고와 대상을 풍경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을 때, 마음은 비로소 쉬게 된다. 그리고 마음의 쉼은 번뇌의 쉼이다. 마음은 드디어 번뇌를 멈추고 쉬기 시작한 것이다.

선명하게 알아차림, 정(定)

집중의 힘이 강해지면(집중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으면) ‘선정(禪定)’이란 것이 계발되기 시작한다. 선정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있는 상태(心一境)이다. 즉 마음(견분, 상분)을 비추고 있는 마음(자증분)을 선명하게 알아차리고(증자증분) 있는 상태이다. 정(定)은 “명상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주의와 정념(正念)을 확실하게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번뇌들이 (가라앉아)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정(定)은 대상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과 같다.”(달라이라마, 『달라이라마의 불교강의』 불광출판사, p149) 정(定)은 주의와 정념(대상에 순수하게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한 상태, 즉 나와 대상을 분별하여 보는 마음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알아차림을 순수하게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마음의 산만한 활동과 거기서 비롯되는 번뇌를 조절할 수 있는 강력한 마음 상태이다. 정(定)이 계발되면 일상생활 중에도 마음은 쉽게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태(알아차림)를 유지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내면에 번뇌에 꺼둘리지 않는 평안한 상태에서 ‘대상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心一境)’을 갖춘 셈이 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상태가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말을 많이 쓴다. ‘있는 그대로’는 있는 것(또는 없는 것)을 그 상태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유식에 의하면, 명상에 의해 정(定)의 상태가 계발되어, 마음속에 ‘대상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心一境)’을 갖추게 되어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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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定)이 계발되는 과정에 여러 현상이 일어난다. ‘기맥이 열리면서 온몸에 퍼지는 희열과 지복’도 그 중 하나이다. 명상을 하던 어느 날부터 나도 온몸에 희열과 지복의 느낌이 생겨(?)났다. 정수리에서부터 머리 전체를 거쳐 온몸으로 퍼지는 청량한 희열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세포하나하나가 모두 기쁘고 청량하게 숨 쉬는 듯한 느낌, 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맑고 서늘한 물이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처음 희열과 지복을 느꼈을 때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아 천상(天上)의 나라가 있다면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불교를 공부하며 열반(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이란 개념을 알았을 땐, 어쩌면 열반이란 바로 그런 상태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에고가 대상에게 꺼둘리며 번뇌가 생기는 상태(有漏)에서, 에고와 대상을 거울처럼 알아차리며 번뇌가 생기지 않는 상태(無漏)가 되었을 때(앞 연재 참조), 우리 몸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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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는 나, 아트만?

명상을 계속하다 보니 일상생활 중에도 희열과 지복 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떨 땐 잠시, 어떨 땐 한나절, 또 어떨 땐 하루 종일. 그런데 그 상태는 그야말로 ‘상태’였다. 희열과 지복의 느낌은 마음(견분, 상분)을 비추는 마음(자증분)을 알아차림(증자증분)으로서 번뇌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혀(또는 드러나지 않게)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유지될 땐 일상생활 중에도 희열과 지복의 상태가 유지되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다.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滅) 것이 아니라 일시 정지했던 것이다. ‘열반’이 아니라 ‘마음 쉼’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우파니샤드』를 읽었다. 『우파니샤드』는 인도 베다 경전으로, ‘스승의 발밑에 앉아서 전수받은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이라는 개인적 자아에 대한 언급이 많다. 이 개인적 자아인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라는 우주적 자아와 합일한 상태를 해탈(속박에서 벗어남, 윤회에서 벗어남)이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아트만’이라는 개인적 자아를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아트만’은 변하지 않는 자아, 즉 ‘나’가 실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그 실체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트만’은 생을 거듭하여 태어나고 태어나도 사라지지 않는 불변의 ‘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파니샤드』는 이 불변의 ‘나’가 ‘숨’(호흡)을 통해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과 하나 될 때 깊은 평온과 희열에 잠기게 되고, 태어남과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기쁨의 상태인 해탈을 경험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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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뭔가 비슷하지 않은가? 집중의 힘이 커져 정(定)이 계발될 때도 희열과 지복이 있다고 했다. 인간은 호흡(숨)이든 만트라든 몸의 감각이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게 되면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상태가 되는데, 이 상태가 지속되면 정(定)이 계발되는 것이다. 정이 계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온몸으로 퍼지는 희열과 지복이다. 바로 『우파니샤드』에서 얘기한 평온과 희열에 잠긴 상태. 그러니 『우파니샤드』에서 말한 ‘아트만’은 실제로 불변하는 자아가 있어서가 아니라, 명상 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때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외부 대상,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에고는 늘 변하더라도 ‘알아차리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 변하지 않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불변의 자아를 의미하는 ‘아트만’이라 이름 지은 것.

명상 시 선정이 계발되면서 생기는 희열과 지복은 (집중의 상태에서) 번뇌가 가라앉았기 때문에 생기는 몸의 느낌이다. 집중이라는 ‘조건’에서 생겨난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 즉 ‘알아차림’이라는 ‘조건’에 의해 잠시 번뇌가 쉬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번뇌를 사라지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有)’는 생각이 미묘하게 자리 잡게 된다. 바로 『우파니샤드』에서 얘기하는 ‘아트만’과 같이, ‘개인적 자아’가 존재한다는 생각. 대상은 변해도 그것을 아는 마음은 늘 알아차려지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幻)이다.

마음이 쉴 때 할 수 있는 것

희열과 지복의 느낌은 너무 좋았다. 그냥 그 상태로 라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희열과 지복의 느낌은 왔다가(느껴졌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 느낌이 사라지고 난 다음 번뇌는 언제나 더 치성하게 올라왔다. 마치 눌러놓았던 것이 폭발이라도 하듯. 너무나 좋은 상태를 경험하고 나니, 다른 모든 것은 그 상태에 비해 안 좋은 상태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처럼, 그 좋은 상태를 일으키는 내 속의 참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아(眞我)’가 이것일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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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 집중하는 것에 의해 거친 번뇌는 잠시 쉴 수 있지만, ‘내가 있다’는 번뇌의 ‘뿌리’는 더 견고해 진 것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은 ‘나’를 중심으로 좋음과 싫음을 분별하고, 좋음에는 탐(貪)의 마음을, 싫음에는 진(瞋)의 마음이 자라게 한다. 명상으로 번뇌가 잠시 가라앉았지만, 이는 언제든 다시 생기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번뇌(煩惱障)를 다스리는 방법은 알았더라도, 번뇌를 일으키는 무명(‘나’와 같이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생각)은 다스리지 못한(所知障) 것이라고 하는 걸까? 실제로, 희열과 지복의 상태가 좋으니, ‘이 좋은 느낌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 상태를 방해하는 요소를 생활 속에서 없애고 싶었다. 그러다보다 더 고요한 곳, 더 청정한 곳을 추구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세속은 이 상태를 유지하기엔 너무나 혼탁했다. 그러니 세상 속이 아니라 세상 밖, 혼탁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추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외부 대상에 집착했던 마음이 명상으로 얻은 상태들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명상만으로는 깨달음(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 이를 수 없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명상이 깨달음에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명상도 명상 그 자체로는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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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상은 ‘대상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心一境)’과 같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고, 번뇌가 사라진(滅) 상태, 그리고 번뇌는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정(定)의 상태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지복은 “마음이 감각적 즐거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막아서, 감각적 대상들을 획득하고 지키기 위해 악업(惡業)을 짓는 것을 중단시킨다.”(달라이라마, 『달라이라마의 불교강의』 불광출판사, p159) 명상에서 계발한 정(定), 즉 명상으로 체득한 마음 쉼은 그 자체로는 깨달음이 아니지만, 분명 깨달음에 이르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니 마음이 쉬고 있을 때, ‘대상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 즉 마음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의 상태가 되었을 때,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나’라는 주체를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이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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