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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지성 금강경을 만나다] 보시의 최고봉, 법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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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7-04 19:15 조회1,5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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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의 최고봉, 법보시
이여민(감이당)

내가 참으로 이야기하겠다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일곱 가지 보배로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많습니 다세존이시여.”

재보시를 공부하다 보면 ‘부자들은 재물이 많으니 더 유리한가?’, 또는 ‘재물이 없으면 나는 보시를 못하는 것인가?’하는 의심이 들 수 있다. 그런 물음을 부처님은 짐작하셨는지 수보리에게 아주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신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재보시를 아주 많이 하는 케이스를 상상해보라 하신다. 빌 게이츠가 사회에 기부한 수 조원의 돈보다 더 많은 보물을 세상에 나누는 것 말이다. 재벌 개인이 하는 기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휘황찬란하고 엄청난 양의 재보시를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재보시를 아주 많이 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일체의 부귀영화와 공명이라는 복덕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어마어마한 재물을 보시한 사람이 모두 해탈하고 부처가 됐을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재보시를 이 정도의 사이즈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그런데 이 재보시의 복덕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재보시를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받는 사람이 한정적인 재물을 다 쓰고 나면 그 효력은 끝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보시를 한 사람이 받게 되는 복덕은 때가 되면 사라지는 한계가 있는 유한한(有爲) 복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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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재보시는 물질로 나누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위험성도 있다. 물질은 사람을 분별하게 만들고 상을 일으켜 집착을 놓기 힘들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보시했다 하더라도 물질이 받는 사람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게 할지 알 수 없다. 이를테면 재보시가 받는 사람의 마음에 탐욕을 더 불타오르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어려운 친구에게 매년 100만 원을 도와주었다고 하자. 처음에 그 친구는 0원에서 100만 원이라는 거금이 생기니 매우 고마워한다. 그러나 매년 이 일을 지속하면 어느 순간 친구의 마음이 바뀌어 100만 원 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더 도와주기를 바라는 욕심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재물은 받는 사람의 탐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 또한 재보시의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 보시를 자제하라거나 그만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재보시는 지혜를 만나는 텃밭을 가꾸는 것이라 당연히 필요한 스텝이다. 이 복덕으로 우리는 지혜를 들을 수 있는 인연 조건의 장에 있게 된다. 옛날 부처님은 그렇게 많은 재물이 필요하지 않았는데도 인도의 왕과 왕자들이 부처님께 온갖 공양을 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물을 기꺼이 내 놓음으로써 부처님의 말씀,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함이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이렇게 재보시가 보시의 출발인 것은 맞다. 모든 종교에서도 재보시를 강조하고 있지만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여기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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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재보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궁극의 보시는 무엇일까? 바로 법보시(法布施)다. 법보시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궁극적인 진리 ‘무아’와 ‘무상’의 지혜(法)를 나누는 것(報施)이다. 보살은 모든 현상이 무상하여 어디에도 집착할 바가 없음을 알고 실천한다. 중생들은 반대로 모든 것에 내가 있고 무엇인가 변치 않는 행복이 있을 것이라 집착하여 괴롭다. 보살은 여러 가지 방편을 배우고 익혀 개개인이 집착하는 다양한 괴로움의 원인을 알려주는 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것이 어디서나 어느 때나 응용 가능한 무궁무진한 지혜를 나누어주는 법보시이다. 그래서 유한하게 끝이 나는 재보시와 차원이 다르다. 간단히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 가난이란 조건에 갇히지 않는 지혜를 체득하게 해 주는 것이 법보시이다. 어떤 조건에 살아도 자유로울 수 있는 진리를 알려 주는 것! 그 자체이다. 사실 세상 모든 재물을 얻고 심지어 천하를 다 얻는다고 해도 이는 언젠가 끝이 나는 한계가 있는 유위(有爲)의 복이다. 그러나 진리를 듣고 깨닫는 것은 무한하며 어느 상황에서도 재생산해서 쓸 수 있는 무위(無爲)의 복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보(福報)는 대지혜의 성취”라고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강조 또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등을 받아 지녀(수지독송受持讀訟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한다면(위타인설 爲他人設이 복덕은 위의 헤아릴 수 없는 일곱 가 지 보배로 보시하는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렇다면 법보시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금강경의 지혜를 읽고 이해하여(수지독송 受持讀訟) 옆 사람에게 전하는 것(위타인설 爲他人設)이다. 이 글귀를 보고 사람들은 수지독송(受持讀訟)이 금강경을 소리 내어 읽고 외우는 것이라고 흔히 이해한다. 그래서 수많은 경들 중에 유난히 금강경이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유튜브를 검색해도 많은 이들에게 암송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도 이 글귀 때문에 재판하는 동안 하루에 금강경 28독을 100일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금강경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집중하느라 그 시간 동안은 재판 결과를 걱정하는 불안이 사라졌다. 동시에 경전의 울림이 몸에 새기는 듯 편안한 상태를 맛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금강경을 읽었던 시간들이 나에게 충분히 축복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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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강경을 공부해보니, 수지독송이 그냥 읽고 외우는 것만이 아니었다. 금강경을 공부하여 알게 된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을 잊지 않고 매일 삶에서 되새기면서 끊임없이 그 지혜를 주위와 나누는 것이었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수지독송을 넘어서 부처님의 지혜를 진정으로 이해해야 했다. 결국 지성을 갈고닦아야 했다. 그래야 보시의 최고봉인 법보시까지도 실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재보시와는 차원이 다른 법보시의 방향성을 알고 나니 이제껏 내가 해왔던 보시는 물론이고 지금 내가 하는 감이당과 진료 현장까지도 다르게 느껴진다. 소박하지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모두 금강경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장이 열리고 있다. 나의 잘못된 보시 습관을 이렇게 털어놓아 나와 같이 보시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니 기뻤다. 이렇게 글쓰기로 이제껏 매여 있었던 재보시를 넘어서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법보시를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공부, 부처님의 지혜를 일상에서 놓치지 않는 방법이 글쓰기를 통해 바로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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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서도 소박하게 금강경에서 배운 지혜를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금강경을 통해 환자들이 괴로워하는 생각의 근원에 수자상(壽者相)이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지혜를 환자들과 주로 공유한다. 말하자면 나이 드는 것이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과정 중 하나라는 것을 환자들 스스로 알게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노화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 변화의 생물학적 기전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영원한 젊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현재의 자신을 솔직하게 보게 된다. 질병의 치료나 생활 습관의 개선을 이 지점에서 시작하니 노병사(老病死)에 대한 환자들의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많이 줄어들고 편안해졌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재보시가 불교 수행의 출발일 수도 있지만 결국 지혜를 공부하고 열심히 익혀 끊임없이 나누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여 제대로 이해해야 지금 현장에서 그 지혜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도 꼼꼼히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앞으로도 쭉 무궁무진한 부처님 경전을 읽고 배워 알게 된 것을 흘려보내며 사는 것이 보살의 삶이었다.

이때 “보살은 자신이 짓는 복덕에 대하여 반드시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강조 하신다. ‘나는 보살로써 법보시를 했으니 무량한 복덕을 받을 거야.’하면 이미 보살이 아닌 것이다. 지혜를 공부하고 익혀 이를 나누는 것이 보살이 해야 할 일은 맞지만 이 또한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금강경 사구게 중 하나인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基心)’이 바로 이 뜻이다. 그렇다면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뭘까? 다음 연재부터 이 궁금증을 풀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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