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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 삶 vs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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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7-09 21:50 조회1,0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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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vs 살다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부. 슬기로운 유배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문리스(남산강학원)

<이키루(生きる)>,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일본 영화계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입니다.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羅生門)> 같은 영화를 연출한 세계적인 감독님이고, 우리나라엔 <자서전 비슷한 것>이라는 자서전 비슷한 책도 출간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다 떠나서 이 감독님의 작품들은 재미있습니다. 사실 저쪽 업계에서는 레전드 어브 레전더리한 감독님이어서, 뭐 제가 여기서 몇 마디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무려 <스타워즈> 시리즈 제작+연출한 조지 루카스나 <대부>의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 등이 쿠로자와 키드 감독들입니다. <카케무샤>라는 작품은 쿠감독님이 일본에서 제작비를 구하지 못하자 이 분들이 헐리우드에서 제작비를 지원해 만든 작품으로도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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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목이 <살다>입니다. 한자로는 그냥 생(生)이라고 해도 ‘삶, 생명, 살다, 태어나다’라는 등등의 표현이 모두 가능하지만 한국어나 일본어에선 사정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키루>는 ‘삶'(生; せい)이 아니라 ‘살다'(生きる)인 것입니다.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주인공 이름 등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암튼 <라쇼몽>에도 나왔던 그 남자 배우가 조만간 퇴직을 앞둔 공무원으로 나옵니다. 그는 위암 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이었는데, 그러던 중 공장 노동을 하면서도 늘 쾌활한 여성을 알게 됩니다. 노동은 고되지만 자신이 만든 인형(?)인가로 행복해질 아이들 생각을 하면 즐겁다는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로 인해 남자 주인공은 ‘현타(!)’가 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제기되었지만 번번이 묵살되었던 민원을 찾아냅니다. 한 마을에 아이들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민원이었는데, 그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이 민원을 해결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지막 업무로 삼는다, 는 뭐 그런 이야깁니다. 대충 어떤 주제인지 아시겠죠?

말이 좀 길어져버렸는데, 사실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이키루>를 이야기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저 ‘삶’이라는 말이 너무 당연하게도(!)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세이(生)가 아니라 이키루(生きる), 삶이 아니라 살다라는 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지금 ‘삶’과 ‘살다’를 개념적으로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또는 그 각각의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 등을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제 능력 밖의 주제입니다. 제 말의 요지는 삶은 애초에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입니다. 아니 동사라는 말도 사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주체가 있고 사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살다=삶’은 주체와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언제나 현존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나는 어떤 ‘살다(사는 행위)’로서만 현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는 행위(살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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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다시 양명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을 보겠습니다.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또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此心光明, 亦復何言]” 제가 볼 때, 이 말은 매순간 이 마음으로 오롯이 현존했던 양명 종지의 다른 표현입니다.(이 말이 실제 양명이 한 말인지 아닌지와도 별개입니다. 최소한 양명학적 토대 위에서 이 말이 어떤 의미인가를 말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마음 밖엔 이치도, 물(物)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매순간 마음의 어떤 현상(?)으로서만 우리들 ‘나’는 현존하고 또 현존하는 것입니다. 마치 삶이란 살다(사는행위)로서만 현존할 뿐이라는 말씀을 양명 선생 버전으로 들은 셈이랄까요.

삶을 다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이때 다한다는 것은 ‘끝났다'(終)는 의미로서보다 ‘어떤 힘 등을 다 써서 남아있지 않다'(盡)는 의미로 이해해볼 것을 저는 제안합니다. 힘을 다 쓰는 행위로서의 삶(살다)이 곧 삶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연스럽게 지금 이 삶(살다)이 모든 것인 삶과 삶과 삶이 계속될 뿐이고 계속될 때까지가 이 ‘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소혜가 죽음과 삶의 도리를 물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낮과 밤을 알면 죽음과 삶을 알게 된다.

소혜가 낮과 밤의 도리를 물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낮을 알면 밤을 알게 된다.

소혜가 물었다낮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너는 낮을 알 수 있는가멍청하게 일어나서 느려터지게 밥을 먹으며행하면서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익히면서도 살피지 못하며하루종일 흐리멍텅하게 보내는 것은 다만 꿈 속에서 낮을 보내는 것이다오직 숨 쉴 때도 본성을 함양하고눈 깜짝할 사이에도 마음을 보존하여” 이 마음이 밝게 깨어 있어서 천리가 한순간이라도 끊어지지 않아야 비로소 낮을 알 수 있다이것이 바로 천덕(天德)이며낮과 밤의 도에 통하여 아는 것이니다시 무슨 죽음과 삶이 있겠는가?(<전습록>:126조목)

1508년 봄 외계의 땅 귀주성 용장에 떨어졌을 때, 양명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섣불리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초적인 두려움과 완전히 버릴 수 없었던 원망, 그리고 여러 회한 등이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 연보가 전하는 내용 중에는 양명이 양명동 굴에서 돌로 된 관을 놓고 그곳에서 잠자리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용장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마음을 추스르기는 했지만, ‘끝내 생사의 문제가 남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양명은 이미 용장까지 가는 길에 정적 유근이 보낸 자객에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고, (기록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전당강 물에 빠져 급류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북경에서 이미 40대의 매서운 곤장 세례로 죽음 직전의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고, 거기에 더해 수 차례의 죽음 위협을 거쳐 도착한 용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나, 지위, 부귀 등등의 욕망은 금세 버릴 수 있었지만 끝내 죽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fairy-tale-1180921_640이곳에서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최소한 지금 이 잠자리를 마지막 자리로 삼겠다는 것. 그러니까 양명에게 석관은 혹시 겪게 될 지도 모를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소설을 써보면 이렇습니다. 용장에서 양명이 밤마다 몸을 뉘이던 석관은 아마 양명이 선택한 삶의 마지막 자리였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최소한 지금 이 잠자리를 마지막 자리로 삼겠다는 것. 그러니까 양명에게 석관은 혹시 겪게 될 지도 모를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끝내 생사의 문제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양명은 어떻게 이 질문을 돌파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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