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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집중의 상태에서 능히 관찰을 일으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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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7-13 21:48 조회1,3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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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의 상태에서 능히 관찰을 일으켜라!
장현숙(감이당)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하다

명상을 계속하면서, 일상 중에, 어떨 땐 희열과 지복의 상태가 또 어떨 땐 번뇌의 파도가 집어삼킬 듯 밀어닥치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체계적으로 명상을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 이런 상태가 반복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아주 간단한 원리였다. 마음의 집중 상태가 일상의 산만한 활동과 거기서 비롯되는 번뇌를 조절할 수 있을 땐 희열과 지복 상태가 되고, 없을 땐 번뇌의 파도가 밀어닥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땐 그걸 몰랐다. 들끓는 번뇌는 그저 싫고, 희열과 지복은 ‘특이한 체험’으로 마음에 담고(愛, 取)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체험에 대한 애착이 있으니 이 간단한 원리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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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란 책을 만났다. 인문학 관련 책은 거의 읽지 않고 명상이니 수행이니 하는 책만 읽고 있었는데, 지인이 너무나 강력하게 추천하던 터라 없이 어쩔 수 없이(^^;) 읽게 되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에 대해 쓴 책이었다. 두꺼운 책인데다 평소에 관심이 없는 분야의 내용이라 완독하는데 한 달은 걸릴 것이다 예상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3~4일만에 다 읽었다. 그리고 책을 덮었는데도 연암 박지원이 껄껄껄 웃으며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북학파 박지원’,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으로 역사책속에 화석처럼 박혀있던 그들의 삶이 지금 여기, 내 바로 옆에서 펼쳐지는 듯 했다. 그들의 공부, 그들의 깨달음, 그들의 삶은 200년이란 시공간을 넘어 지금 여기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나를 ‘감이당’으로 오게 했다.

‘감이당’은 인문의역학 공부공동체이다. 존재와 삶, 자연과 우주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며, 자기에게 내재되어 있는 지혜에 대한 열정을 촉발시키는 곳이다. 한마디로 지성을 연마하는 곳이다. 지성이라니. 평소 지성적이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동서양 철학이니 동의보감이니 주역이니 과학이니 불교 등 어마어마한 공부 앞에서 내 지성은 지성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감이당’ 공부는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것은 물론 그걸 바탕으로 렉처(lecture)를 하거나 에세이도 써야 했다. 내 평생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한건 고3 이후 처음이었다. 문득문득 ‘이 나이에 왜 이렇게 힘든 공부를 하고 있을까’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공부를 하며, 비로소 세상을 타인을 그리고 나를 알기 시작한 것 같았다. 공부가 삶을 깨우치고, 그 깨우침이 삶을 바꾸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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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이상했다. 감이당에 인연이 닿았을 즈음에도 계속되었던, ‘희열과 지복’에서 ‘몰아치는 번뇌’로 왔다 갔다 하던 상태가 어느 날부터 다르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희열과 지복감도 점차 옅어지고 몰아치는 번뇌도 점차 옅어진 상태? 굳이 표현하자면, ‘평안하게 기쁜’에서 ‘평안한 번뇌’(번뇌인데 평안하다니)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보니 ‘기쁜’ 상태에도, ‘번뇌’에도 별로 애착하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름(名)’을 사유한다는 것

앞선 연재(‘욕망의 세계, 이름은 욕망이다’ 참조)에서 『금강경』을 사경하며 ‘시명(是名)’이란 말과 맞닥뜨렸던 얘기를 했다. ‘시명’은 ‘그 이름’이란 뜻이다. 『금강경』에선 ‘시명’이란 말을 쓸 때 항상 그 앞에 ‘즉비(卽非)’라는 말도 함께 온다. 예를 들어, ‘부처는 즉(卽) 부처가 아니라(非), 그 이름(是名)이 부처다’는 식으로. ‘즉비’, ‘시명’은 내가 아는 모든 것이 내가 아는 그대로가 아니라(卽非) 단지 이름으로 되어있다(是名)는 것이다. 세상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는 것. 이러한 깨우침은 이름으로 된 익숙한 세상을 해체하고 그 틈으로 낯선 세상과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 낯설음에는 알 수 없는 자유로움과 환희가 있었다. 이름이 잡고 있던 수많은 욕망으로 구성된 세상에서 멀찍이 떨어질 때 느끼는 자유로움. 그리고 그 자유로움에 동반하는 환희.

book-863418_640세상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는 것. 이러한 깨우침은 이름으로 된 익숙한 세상을 해체하고 그 틈으로 낯선 세상과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했다.

이 자유로움과 환희는 명상의 집중에 의해 발생하는 희열과 지복과는 다르다. 집중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묶어 놓는 행위이고, 희열과 지복은 이 묶어 놓음(집중)이 번뇌를 가라앉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앞선 연재 참조). 그런데 『금강경』의 ‘시명’의 경험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름을 ‘사유’하는데 집중한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데에는 생각이 필요 없다. 그러니 지성도 필요 없다. 그런데 ‘이름’에 집중하는 데에는 지성이 필요하다. 어떤 대상(相分)이 이름(名)이 갖는 의미(義) 그대로 자성(自性)을 갖는 어떤 것인지, 그 이름은 실상(實相)과는 어떤 차별(差別)을 갖는지, 이름이 만들고 있는 세상이 어떤지, 이름이 어떤 욕망과 함께하는지 등을 사유해야하기 때문이다. 즉 ‘남편’이란 이름에 있어서, 이 이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 그대로의 불변하는 ‘남편’이 있는지. ‘남편’이란 이름이 ‘실재하는 그 존재’와는 어떤 차별을 갖는지 등을 사유하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이를 사심사관(四尋思觀)이라고 한다.

우리 마음의 변계소집성(‘욕망의 세계, 이름은 욕망이다’편 참조)은 어떤 것(경험)이든 두루 분별(遍計)하여 그것(所)에 집착(執)하게 한다. 그리고 집착한 것에 무의식적으로 이름(名)을 붙인다. 다른 것(他)에 의지(依)해서 일어날(起) 뿐인 ‘현상’(또는 경험)에 이름을 붙이면, 이 현상은 그것만의 고유한 자성(自性)을 지니며 다른 것과는 차별을 가진 특별한 ‘어떤 것’이 되고 만다. 이렇게 이름 짓는 것은 우리에게 내재된 ‘언설의 습기’(『원측의 소에 의한 해심밀경』 김윤수 역주, 한산암, p87) 때문이다. 우리의 아뢰야식엔 이런 습기(명언종자)들이 저장되어 있고, 이 습기는 매순간 일어나는 현상에 이름을 지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사심사관(四尋思觀)은 그 이름의 허망함, 이름은 타(他)에 의지(依)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임시(假)로 시설(說)한 것임을 사유하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상(相)에 ‘이름 그대로의 자성이 없음’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집중의 힘으로 실상을 관찰하라

그래서 부처님은 집중 명상(사마타 또는 止)만이 아니라 지혜 명상(위빠사나 또는 觀)을 함께 하신 걸까? 집중 명상은 만트라든 호흡이든 감각이든 고정된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며 선정을 계발하는 명상법이고, 지혜 명상은 움직이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며 지혜를 계발하는 명상법이다. 집중 명상은 지성을 사용하지 않지만, 지혜 명상은 고도의 지성을 사용한다. 보고(眼識), 듣고(耳識), 냄새 맡고(鼻識), 맛보고(舌識), 감각하고(身識), 생각하는(意識) 모든 것, 즉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세상의 실상(實相)을 집중 관찰하여 지혜를 일으키는 명상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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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명상(止)으론 선정에 도달할 수 있다. 선정은 강력한 집중의 힘으로 마음을 제어한 상태이다. 이 제어의 상태가 깊어지면 ‘상(想)이 적멸한 상태(무상정, 멸진정)’, 그야말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일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상(想)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그에 따라 끊임없이 번뇌도 생겨났다 사라진다. 그런데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출가하신 후 처음엔 선정을 가르치는 스승들을 찾아가 명상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선정만으론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떠난다. 상(想)을 적멸한 상태가 도달하기 어렵고 드문 상태이긴 하지만 이 상태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 없고, 번뇌를 소멸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혼자 보리수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마음을 고요히 집중한 다음(止),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 사유하는 명상(觀)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상정등정각(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지혜 명상은 ‘위빠사나(Vipassana)’라고도 하고, ‘관(觀)’ 수행이라고도 한다. ‘위’는 ‘모든 것’, ‘다양한’, ‘전부’란 뜻이고, ‘빠사나’는 ‘꿰뚫어 보다’, ‘똑바로 알다’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꿰뚫어 보는’ 명상이라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선정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산심의 문(聞), 사(思) 방편”(위의 책, p171)을 일으켜야 한다고 한다. 즉, 마음을 거두어 흩어지지 않은 상태(‘안의 삼매’)에서 ‘능히 관찰을 일으켜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선정상태에서 ‘기꺼이’ 관찰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대상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心一境)’의 상태에서 ‘관찰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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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명상(사마타)으로 마음은 쉴 수 있다. 번뇌도 쉴 수 있다. 그러나 관찰은 없다. 그러니 지혜도 없다. 지혜가 없으니 마음 쉼(집중 상태)이 끝나면 일상은 다시 치솟는 번뇌이다. 이 번뇌는 강력한 집중의 힘으로 가라앉혀 놓았던 만큼 더 치성하게 올라온다. ‘희열과 지복’의 상태에서 ‘몰아치는 번뇌’의 상태로 왔다 갔다 한 것은 이 ‘마음 집중’만으론 진정 나에게 지혜를 일으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의 허상과 ‘이름’이 잡고 있는 욕망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깨우침이 있는 공부, 명상이 되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공부는 ‘능히 관찰을 일으켜 세상의 실상을 꿰뚫어 이해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이당’에서 한 모든 공부가 그랬다. 동서양철학에서는 세상과 인간, 자연과 우주를 탐구하는 철학자들의 지성적 사유를 배울 수 있었고, 『동의보감』에서는 몸과 자연, 몸과 우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심리는 몸의 생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등을 배웠다. 주역에서는 모든 것은 변한다(易)는 이치를 배웠고, 불교는 우리의 마음에 대해 체계적으로 사유하게 해줬다. 사실 배움(聞)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렉처나 에세이 발표, 세미나 등을 통해 사유(思)하는 훈련이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사유’하는 훈련은 ‘마음을 거두어 흩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능히 관찰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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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것(聞)(또는 읽은 것)을 사유(思)하고 그것으로 내 삶을 비추어 깨우침(修)을 얻는 것이 공부이다. 이 과정은 그 자체로 지혜 명상(위빠사나, 觀)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수행에서는 집중(사마타)의 힘으로 획득한 경안(輕安, 몸과 마음이 평안한 상태)에 의지하여 관찰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한 수행의 요점이다. 이런 관찰의 힘이 세상의 실상을 꿰뚫어 이해하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실상을 이해하는 것. 이 이해를 바탕으로 삶의 수많은 번뇌를 관찰하며 자세히 사유하는 것. 이는 존재와 삶에 대한 지혜를 자라나게 한다. 그리고 이 지혜가 우리의 번뇌를 사라지게 한다. 감이당 공부를 하면서, ‘희열과 지복’의 상태에서 ‘몰아치는 번뇌’의 상태로 왔다 갔다 하던 것이, ‘평안하게 기쁜’ 상태에서 ‘평안한 번뇌’ 상태를 왔다 갔다 하며, 희열과 지복에도 번뇌에도 애착하지 않게 된 것은, 삶에 대한 깨우침이 있는 공부 자체가 명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을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집중하며 세상에 대한 관찰을 일으킬 때 진정으로 시작된다. 그때 삶과 세상에 대한 통찰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이 통찰이 번뇌에서 해방되는 길을 여는 것이다. 그러니 번뇌(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한 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공부를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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