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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지성 금강경을 만나다] 응무소주(應無所主) 이생기심(而生其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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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7-15 22:00 조회1,5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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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무소주(應無所主) 이생기심(而生其心)
이여민(감이당)

1. 나무꾼에서 육조 혜능으로

금강경에서 법보시 방법 중 하나가 사구게(四句偈)를 수지독송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 네 가지 게송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다. 이 말 한마디에 ‘탁’ 하고 마음이 밝아진 혜능(慧能)의 이야기 덕분이다.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지금부터 1300여 년 전 중국이라는 시공간으로 이동해 보자.

혜능(638~713)은 영남이라고 부르는 양쯔강 이남 신주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혜능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뭇짐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았다. 당연히 글도 배우지 못했다. 어느 날 혜능이 땔감을 팔고 나오는 길에 스님이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구절을 듣자 마음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분별하는 의식(意)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혜능은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이 글귀를 자세히 배워보고 싶어졌다. 스님에게 물어보니 황매산에 있는 오조(五祖) 홍인 대사를 찾아가라 했다. 혜능은 순간 혼자 남을 어머니 때문에 망설였다. 이때 혜능의 범상함을 알아챈 스님이 어머님 봉양할 돈을 보시해서 혜능은 편안한 마음으로 황매산으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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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은 홍인 대사를 찾아가 “응무소주, 머물지 않는 마음을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한다. 홍인은 영남 오랑캐인 네가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한다. 사람들은 영남이 북쪽보다 문화가 뒤떨어졌다고 이곳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때 혜능은 기죽지 않고 사람들은 남과 북이라는 분별로 오랑캐 취급을 하지만 불성에 어찌 남과 북이 있냐며 받아친다. 이에 홍인은 혜능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본다. 그때 홍인 대사에게는 총망 받는 제자인 신수(神秀) 스님이 있었고 700여 명에 이르는 스님들이 있었다. 홍인 대사는 기존에 있던 수백 명의 제자들의 마음이 이미 신수 스님을 다음 스승으로 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홍인은 혜능이 너무 특출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기존 스님들이 그를 적대시할 것이 염려되었다. “본당에서 떨어진 방앗간에서 방아나 찧어라.”라며 어쩔 수 없이 입산을 허락하는 것처럼 둘러댔다.

혜능이 절에 들어온 지 여덟 달이 지난 어느 날 홍인 대사는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게송을 지어 오라 한다. 그 깨친 바를 보아 부처의 가사와 발우를 전하여 육조(六祖)를 정한다고 선포하였다. 대중 스님들은 게송 짓는 것을 포기하고 신수 스님을 다음 스승으로 밀어 주는 것으로 결의했다. 대중들은 신수가 육조가 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신수는 조사당 남쪽 복도 벽에 게송을 적었다. 글을 몰랐던 혜능은 동자승에게 신수가 쓴 게송을 읽게 하고 자신도 게송을 지었다. 물론 동자승에게 대신 써 달라고 했다. 신수가 쓴 게송은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 먼지가 묻지 않게 하리라”이였다. 마음을 잘 닦아서 청정하게 하자는 뜻이다. 그런데 혜능은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디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가 물들리오.”라고 게송을 쓴다. 혜능은 마음은 본래 무일물(無一物)이라 닦아야 할 마음조차 없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 금강경에서 ‘상이 없다는 상에도 머물지 말라’는 그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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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은 스님도 아니고 일자무식에다가 방앗간에서 일하는 혜능이 게송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 웅성거렸다. 이때 홍인이 뛰쳐나와 게송을 보고 한눈에 혜능이 깨친 사실을 파악했다. 그러나 홍인은 두 사람 모두 깨친 것이 아니라고 하며 글을 지워버렸다. 혜능이 신수 제자들에게 해를 입을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홍인은 이날 밤 몰래 혜능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하고 가사와 발우를 전했다. 혜능이 선종의 법을 이어받을 육조대사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 일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나무꾼이었던 혜능은 육조(六祖)가 되어 선(禪) 불교를 중국에 널리 퍼뜨리고 융성시키는 대단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본인도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는 불경을 남긴다. 그 첫 단초가 금강경의 한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인 것이다. 도대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무슨 뜻이기에 혜능은 이 한 구절을 듣고 나무꾼에서 불교의 큰 스승으로 거듭나게 된 것일까?

2. 머물지 않는 마음, 지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형색()에 얽매이는 마음을 내어서도 안 되고 소리(), 향기 (). (), 접촉되는 것(), 마음의 대상에 얽매인 마음을 내어서도 안 된다.”

응무소주(應無所住)는 ‘마음이 마땅히 일정한 곳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디에 머물지 말라는 말인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에 머물지 말라고 한다. 이는 우리가 눈, 귀, 코, 혀, 몸과 마음으로 만나는 여섯 가지 경계이다. 눈으로 보되 그 경계에 머물지 마라. 이는 대상을 인지할 때 고정된 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집착하거나 분별하지 말라는 말이다.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우리가 대상을 만나는 첫 번째 통로가 눈, 코, 귀, 혀, 몸의 감각을 통해서이다. 이때 대상을 만나는 순간의 감각에 집중한다. 예를 들면 밥 먹는 순간, 음식이 입안에 있을 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끼는 감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호불호에 따라 몸과 마음이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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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중생인 이유는 분별과 자아의식의 상속에 있다.”

곰곰이 따져보니 평소 습관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이전의 경험에 거의 항상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머묾이 결국 정화 스님의 말씀처럼 ‘분별과 자아의식의 상속’이다. 우리가 대상을 만날 때 감정, 기억, 생각, 견해 등을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인연의 흐름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집착하여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조건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실상을 모르고 우리가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서 대상이 지속되거나 사라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괴로움을 만들고 있다. 간단히 보면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더 가지고 싶어 만족을 모르며 욕심이 들끓어 마음이 괴롭다. 싫은 것을 혐오하고 피하게 되는데 상황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화가 나서 고통스럽다. 예를 들면 사과를 2개 깎는다. 첫 사과는 좀 싱거웠다. 두 번째 사과가 더 맛있었다. 이 둘을 비교하는 순간 더 단 사과를 먹고 싶어 한다.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달달하면 달달한 대로 분별하지 않으면 머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 달달한 것을 더 좋다고 느끼며 이쪽 사과를 더 먹고 싶어 한다.

이런 사례와 달리 시간에 대한 의식도 우리의 분별에 영향을 끼친다. 과거, 현재, 미래를 구별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굉장히 생각해 볼만한 게송이 있다. 의식이 과거, 현재,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나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는 망상에 빠진다는 것이다.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마음 모두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또한 현재의 생각은 금세 과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동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찰나를 통과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과거 미래에 붙들리지 않고 오로지 체험해야 할 것은 절대 머무를 수 없는 파도의 파동과 같은 찰나밖에 없다. 우리가 이런 실상을 모르고 과거와 미래의 생각에 집착하며 망상을 만들게 된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제 딸이 “엄마가 한 밥이 맛없어.”라고 했다고 하자. 그 순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가면 머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 ‘싫음’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온다. ‘내가 기껏 해 줬더니 맛없다고 하다니 기분 나빠.’하고 해 준 것에 생색낸다. 그러면 딸을 볼 때마다 자존심이 상한 상황이 떠올라 짜증이 날 수 있다. 과거의 기억에 마음이 머물러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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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쓰는 이름도 마음이 자주 머무는 대상이다. 우리는 언어로 개념을 확정 지어 대상을 고정하고 분별하는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가 엄마, 아빠하고 이름 지어 부르면서 엄마, 아빠는 이래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게 되면서 마음이 머문다. 스위트 홈도 그 예이다. 잉꼬부부, 토끼 같은 자식들을 가지면 ‘스위트 홈’을 이룬 것이라는 확정적인 상을 가지고 자아를 구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 또한 이 견해가 진짜라고 생각했고 이혼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자 큰 괴로움을 겪었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스위트 홈이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우리의 뇌에 심어진 일종의 광고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내가 집착한 이름으로 비롯된 견해가 허상임을 알게 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은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하면 아라한이 아니라고 설하신다. 아라한이라고는 하나 이는 이름일 뿐 아라한이라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자꾸 얽매이고 고착한다.

nikola-saliba-BonFa3wUrnU-unsplash잉꼬부부, 토끼 같은 자식들을 가지면 ‘스위트 홈’을 이룬 것이라는 확정적인 상을 가지고 자아를 구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즉시 아니라는 뜻의 ‘즉비(卽非)’를 자주 말씀하신다. 마음이 분별에 머물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즉시 아니야(卽非)!’라고 하는 지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보살이다’라고 하는 순간 보살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살이라는 분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분별을 부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할 일을 계획하며 시간을 분별하는 것은 필요한 요소이다. 그 마음 자체를 알아차리면서 삶에서 순간순간 계속 즉비(卽非)를 통해 마음이 상에 머물지 않는 것을 훈련하라는 뜻이었다. 결국 ‘우리가 자신의 의식을 이루는 다양한 표상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지성’이 작동하여야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응무소주’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 상이 사라진 무아(無我)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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