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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2] 호랑이 꼬리를 밟아도 괜찮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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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7-17 19:16 조회1,0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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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꼬리를 밟아도 괜찮은 마음
성승현(감이당)

天澤履(천택리

履虎尾 不咥人 亨.

리괘는 호랑이 꼬리를 밟아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

初九 素履 往 无咎.

본래대로 행하여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

九二 履道坦坦 幽人 貞 吉.

행하는 도리가 탄탄하니 마음이 차분한 사람이라야 올바르고 길하다.

六三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

애꾸눈이 보려 하고, 절름발이가 걸으려 하는 것이다. 호랑이 꼬리를 밟아서 사람을 무니 흉하고, 무력을 쓰는 포악한 사람이 대군이 된다.

九四 履虎尾 愬愬 終吉.

호랑이 꼬리를 밟으니 두려워하고 조심하면 결국에 길하리라.

九五 夬履 貞 厲.

강하게 결단하여 행함이니 바르더라도 위태롭다.

上九 視履 考祥 其旋 元吉.

행하여 지나온 것을 보아서 선악과 화복을 상세히 살피되 두루 잘못이 없으면 좋고 길하리라.

5월에 사주명리 기초반 개강을 했다. 나는 튜터로 참여했는데, 강의 기획 단계에서 ‘이번 시즌에는 인문학 세미나를 추가해서 명리에 대한 해석을 폭넓게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변화를 주어 개강을 하게 된 것이다. 매주 조원들과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를테면, ‘재물운은 언제쯤?’이라는 질문 대신 ‘돈의 용법’을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과 돈에 대한 욕망을 쉽게 지우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명리를 공부했고, 사주팔자로 해방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그렇게 운명에 대한 태도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집착하는 부분에 대한 욕망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나는 매년 ‘올해 공부는 어떨까’라는 질문으로 사주를 살핀다. 공부에 대한 욕망은 착한 욕망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다. 이런 질문이 강하게 들 때는 여지없이 잘하고 싶은 욕망,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이 작용한다는 것을 느끼곤 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주명리는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는 학문이다.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길흉으로 해석하기 쉽고, 돈 ‧ 명예 ‧ 사랑과 같은 욕망의 충족 여부를 예측하는 데 쓰기 쉽다. 명리로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도 하고, 타인의 운명을 마치 결정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사주명리 특성상 두려워해야 마땅한 학문인 것이다. 호랑이 꼬리를 잘못 밟으면 물리는 것처럼, 사주명리를 잘못 쓰면 타인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치명상이 될 수 있다. 사주명리가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라면,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예를 실천할 수 있다면, 지극히 위험한 곳을 밟더라도 해로운 바가 없을 것이다. 호랑이 꼬리를 밟더라도 물리지 않아서 형통할 수가 있다(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259쪽)’고 하듯이, 차근차근 밟아나갈 ‘예’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천택리괘에는 ‘절차를 밟아나가다’, ‘예의’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순서를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대의를 이루기 위해 절차를 밟아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상전에서 ‘하늘이 위에 있고 연못이 아래에 있으니, 곧 위와 아래의 정리다. 사람이 이행하는 예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만 하므로, 그 모습을 취하여 리(履)괘가 되었다’(같은 책, 261쪽)고 했다. 하늘은 위에 있고 연못은 그 아래에 처하는 것이 ‘위와 아래의 구분’과 ‘높음과 낮음의 마땅함’이니, 예의 근본이며, 일정하게 이행되어야 할 도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괘의 의미를 보며, 이것이 사주명리 공부에 대한 절차를 새롭게 하기 위한 계기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사주명리를 대해야 그것이 적절한 ‘예’인지도 돌아보고 싶었다.

jake-hills-bt-Sc22W-BE-unsplash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대의를 이루기 위해 절차를 밟아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호랑이 꼬리를 밟아도(履虎尾) 물리지 않는 ‘예’란 게 뭘까. 이는 마음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주명리가 위험해지는 때는, 마음이 혼탁해졌을 때다. 재앙은 싫고, 복은 좋다는 마음이 지배하게 될 때, 두려움이 앞설 때, 욕심이 생길 때, 뭘 좀 안다고 자만하게 될 때 명리라는 학문은 독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니, 마음을 다잡고 다잡는 육이효를 주목하게 됐다. ‘행하는 도리가 탄탄하니 마음이 차분한 사람이라야 올바르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 貞 吉)’고 했는데, 이와 동시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사주명리에 관심을 갖게 해줬던 인물, 갖바치다. 갖바치는 『임꺽정』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인데, 당시에 굉장히 현명한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사주명리로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듯 느껴졌고, 갖바치처럼 인생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다 싶었다. 당시에는 ‘멋있다’, ‘현명하다’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이번에 글을 쓰며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한 사람’ 즉 유인(幽人)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임꺽정』에는 사주명리를 배우는 두 젊은이가 나온다. 이름은 갖바치와 김륜! 갖바치(양주팔)는 천인으로 태어났음에도 의학 뿐 아니라 문식이 뛰어나 백정학자라 불렸다. 사주도 대충 볼 줄 알았다. 그러던 중, 이천년이라는 뛰어난 스승 아래에서 깊이 공부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5년 정도 앞서 공부를 시작한 김륜의 실력은 그만그만했으나, 갖바치의 실력은 몇 달 사이에 일취월장했다. 스승은 그런 갖바치를 아껴서 자신이 아는 학문 전부를 전수한다. 그 사이에 김륜은 스승이 주문에도 능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주문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쓴다. 리괘 육삼효에 ‘애꾸눈이 보려 하고, 절름발이가 걸으려 하는 것’(眇能視 跛能履)이라는 묘사가 나오는데, 김륜이 딱 그렇다. 명리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상태에서 욕심만 부리는 꼴이니 말이다. 이때 스승은 “내가 너의 맘을 바르게 지도하지 못하고 기이한 술법만 가르친다면 나의 죄가 적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맘을 바로잡도록 공부하여라. 정심(正心) 공부가 주문 공부보다 너의 몸에 이로울 것이다”(홍명희, 『임꺽정』 1권, 사계절출판사, 217쪽)라며 혼쭐을 낸다. 정심 공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리든 주문이든 그 무엇이든 배우게 되면, 무인이 대군이 되는 흉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武人爲于大君)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주명리의 첫 걸음이 정심(正心) 공부라는 사실이다. 마음이 바른 사람은 ‘행하는 도리가 탄탄(履道坦坦)’하다. 이를테면, 사주명리로 돈이나 명예를 취하는 등 이익을 탐하지 않을 것이고, 이를 이용해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심을 공부할 수 있을까? 유인(幽人)에 답이 있었다. 유인을 조용하고 고독한 사람, 홀로 있는 사람, 차분한 사람 등으로 표현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홀로’라는 표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홀로’라는 것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음 혹은 선악 · 시비의 이분법에서 홀로 떨어져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이익, 명예의 추구 뿐만 아니라, 좋고 싫음에 대한 분별까지도 하지 않는 상태 말이다. 사심으로부터 거리를 두면,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정해진다. 이러한 상태라야 학문의 이치를 파악할 수 있고, 도리(道)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diego-jimenez-A-NVHPka9Rk-unsplash사심으로부터 거리를 두면,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정해진다.

상전은 유인(幽人)의 덕목인 ‘거리두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늘 아래 연못이 있는 것을 보고, 군자는 위와 아래의 본분을 분별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위(上)의 선비가 덕을 갖추는 것이 본분이라면, 아래(下) 백성은 맡은 일에 힘쓰는 것이 본분이다. 그런데, 이 본분이 무너지면 위에서는 지위와 영달에만 마음을 쓰게 되고, 아래에서는 이익에만 몰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사주명리라는 학문에 적용해본다면, 선비가 덕을 갖추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듯, 공부하는 사람은 정심(正心) 갖추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유인은 이 본분을 어렵사리 홀로 지켜내는 사람인 것이다. 지위, 영달에의 욕망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이 마음 상태가 갖바치와 김륜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갖바치는 본분을 지키려 했고, 김륜은 본분을 잃어 출세에 마음을 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갖바치는 자신이 배운 학문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것을 늘 인식했고, “점치고 사주 볼 줄 아는 것도 지금 나에게는 걱정거리일세”(같은 책 2권, 33쪽)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륜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스승에게 주문을 배우지 못한 것을 못내 아까워하고 있었다. 결국, 김륜은 윤원형 형제의 부탁으로 임금을 방자하는 일을 꾸미다가 시골로 쫓겨나가게 된다.

이번에 사주명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천택리괘와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올바른 공부를 위해 어떤 절차를 밟으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그 절차와 순서의 출발은 정심(正心)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사주명리에 대한 예라는 것도 말이다. 명리 공부를 하는 데 있어, 길흉을 조장하는 수많은 가치 판단에 거리를 두는 ‘유인(幽人의 정심(正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함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

milan-popovic-YjN1l87BUOk-unsplash정심(正心)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사주명리에 대한 예라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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