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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지성 금강경을 만나다] 흐르는 마음, 자비(慈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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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7-24 00:21 조회1,1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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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마음, 자비(慈悲)
이여민(감이당)

반드시 어디에도 얽매인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분별을 알아차려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생기심(生其心)은 어떤 마음일까? 감정, 기억, 견해와 이름에 머물지 않는 마음은 나라고 지칭하여 머무를 고유한 성질 없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우리가 인연의 흐름 속에서 연결되어 서로 역동적인 관계로 상호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이때 우리는 나의 괴로움이 남과 다르지 않고 나의 기쁨 또한 남과 다르지 않음을 자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남을 괴로움에서 구해주고 싶고, 기쁨은 나누고 싶은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과거에 나는 주변 사람들을 잘 보지 않았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나에게만 머물렀던 시야가 주위를 향하자 소박한 변화가 일어났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관심을 공유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아침마다 만나는 1층 가게 하시는 분과는 길고양이 사료 주는 것과 비둘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먹이를 챙겨준다. 비만 오면 물이 새서 불편했던 아래층 사장님과도 날씨가 나쁘면 서로의 사업장을 걱정해 주는 사이가 되었다. 또 거래처 직원으로 10년 이상 가까이 지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 눈에 눈치가 없어 보여 잔소리를 심하게 했었다. 내 견해를 내려놓고 그를 대하면서 잔소리가 줄고 그의 힘들어진 직장 문제를 못 본척하지 않고 같이 의논하고 매듭을 풀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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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현대 물리학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양자역학은 우리를 우주 전체와 얽힌 관계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우주 속에 독립된 한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 우주적 연결 속에 살고 있다. 내가 공기에 내뱉은 말의 파동이 이 세상 만물과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의 말과 행동의 파장이 전 우주에 전달되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 실상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줄이고 기쁨은 고양시키고 싶은 보편적인 마음이 우러나온다. 이 마음을 우리는 자비(慈悲)라고 부른다.

응무소주 이생이심의 생기심(生其心)은 자비의 마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慈) 남의 괴로움을 덜어 주려는 마음(悲)에서 더 확장한다. 타인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면 기뻐하는 마음(喜), 남을 평정심으로 대하는 평온하고 집착이 없는 마음(捨)으로까지 넓어진다. 보살이 가지는 네 가지 자비심, 자비희사(慈悲喜捨)를 한량없는 중생에 대하여 일으키는 네 가지 마음,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도 한다.

얼핏 보면 자비희사를 우리가 실천한다는 것이 어려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순간순간 이렇게 살고 있기도 하다. 세상의 어려움에 공감하여 무엇이라도 도와주고자 실천할 때도 있고 함께 공부한 친구가 책을 출판했을 때 같이 기뻐해 주기도 한다. 평정심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의 친구를 도와준 경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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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마음을 일상에서 계속 유지하려면 금강경에서도 말하듯이 ‘얽매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끊임없이 변하는 시공간에 접속하고 유동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계속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세상과의 연결 속에 존재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기억하여 인식하는 변환이 일어난다. 자연히 우리는 분별하고 머무르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지혜를 닦아 나누고 싶어진다. 머물지 않는 마음, 지혜로 자비심이 흘러넘치는 것! 이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었다.

에필로그 - 일상에서 보살되기

세존이시여위없는 깨달음에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은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 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중략–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모든 중생들, (중 략모두를 번뇌가 다 없어진 열반에 들도록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야 한다.”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하와중생(下化衆生)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사람이 보살이다. 나는 보살이 먼저 깨달음을 증득하고 그다음 중생을 구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 보살이야말로 ‘먼저 남부터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작년 금강경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부처님의 이 말씀은 내게 큰 의문으로 다가왔다. ‘내가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을 구할 수 있지?’ 그러나 공부가 진행되면서 알쏭달쏭 한 이 문장이 금강경 전체를 축약하고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다. 만약 이 질문을 그냥 넘겨버린다면 금강경에 대한 글쓰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처님의 말을 어떻게 실행해 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고민했다.

친구들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자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다. “네가 인문학 강의를 해봐. 금강경의 글을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말을 듣자 꽉 막혔던 길이 확 트인 기분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3층이고 엘리베이터는 없지만 대기실은 아주 넓다. 이 점을 활용하여 인문학 강의를 열 수 있었다. 두 시간인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목요 점심인문학’이라는 한 시간짜리 강좌를 기획하였다. 강좌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김밥, 음료수, 과일 등을 선물해 주었다. 강의 들으러 오시는 분들이 식사도 해결하고 강의도 들을 수 있게 준비가 되었다. 그렇게 ‘보살되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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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주제는 사람들이 늙어가면서 많이 앓고 난치성이라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거라 예상되는 치매, 암 등으로 삼았다. 내용은 먼저 질병의 생리 기전을 설명하고 현재의 생활습관 중 고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첫 강의는 ‘폐경’으로 시작했다. 폐경은 인생의 흐름 중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젊음은 좋은 것이고 그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르몬 약을 먹어야 한다는 소비 광고가 넘쳐난다. 나는 이런 사회적 환경이 폐경을 노화의 징표로 생각하고 감추거나,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폐경이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질병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생겼다고 하셨다.

‘목요 점심인문학’은 한 달에 한 번 강의를 하였는데 점점 오시는 분들이 늘어갔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도 의사인 딸이 인문학 강의를 한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가지고 매번 오셨다. 오십 중반에 접어든 남동생도 암의 작동 기전이 궁금하여 강의를 들으러 왔다. 중년이 된 초등학교 친구들은 점심 선물도 해 주고 본인의 질병과 부모님의 치매 등에 대해 알고 싶어 빠지지 않고 참석해 주었다. 중년 이후 모두가 질병에 대한 걱정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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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의를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고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환자분들을 보고 그들이 진료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들처럼 느껴졌다. 60대 후반의 노년 여성들이 결석하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셨다. 노년기 여성들을 위한 배움의 기회가 적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강의를 진행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하다 보니 결국 중년을 넘어서면 기본적으로 노병사(老病死)가 삶의 고뇌였다. 늙는 것은 아픈 것이고 아픈 것은 곧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자상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픈 것도 삶의 과정 중 하나임을 설명했다. 전문가인 의사도 암과 치매를 무서워한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의사도 감정적으로 질병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나는 따로 지혜를 공부하지 않으면 전문가인 의사도 보통 사람과 같이 두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너나없이 함께 노병사(老病死)를 같이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나는 이 강의를 통해 남들도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많은 방편을 찾아 헤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늘 깨달음을 갈구했던 예전의 나의 모습도 겹쳐 보였다. 그런데 매달 강의를 하다 보니 좋은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잠시 생겼다. 그러나 수강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고 이런 기대 자체도 상(相) 임을 깨달았다. 많은 것을 바라기보다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맨 처음 『금강경』에서 ‘왜 남부터 구제하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이제야 확연히 풀린다. 금강경에서 여러 가지 상에 대해 말했듯이 나, 나와 너, 가족과 국가, 생명과 무생물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 실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을 만들어서 나의 자식, 나의 연인, 나의 국가를 중심으로 보는 습관이 너무나 견고하다. 20여 년 전에 만난 금강경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났다. 고비가 지나고 난 이후에도 나는 ‘특별한 깨달음’을 목표로 아상을 더 견고히 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가 아상을 깨뜨리고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시선을 나로부터 세상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나로 회귀하는 마음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금강경을 세세히 분석하는 공부를 통해 ‘모든 중생을 구하라’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트니 내가 이런 아상에 사로잡힌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nienke-burgers-_775cEX8W-s-unsplash이러한 내가 아상을 깨뜨리고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시선을 나로부터 세상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목요 점심인문학’을 통해 진료 현장이 공부의 장으로 변환될 수 있음을 알았다. 감이당 영역 바깥에서 내가 배운 공부를 실천하며 서로가 도반이 되는 현장이 내 일상에서 벌어졌다. 이 과정 속에서 지혜를 나누니 나는 아상(我相)을 내려놓는 수행이 되어 좋고, 상대는 질병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생겨서 좋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순간들이었다. 지혜를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공부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문학 강의는 멈추었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금강경의 지혜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다. 계속 공부하며 금강경의 지혜를 아는 만큼 소박하게 나누기를 소망한다. 『금강경』에서 배운 상(相)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와 흐르는 자비,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세상과 만나는 매일을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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