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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 스틸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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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7-31 07:18 조회1,0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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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부. 슬기로운 유배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문리스(남산강학원)

소혜라는 제자는 <전습록>에서 재미있는 캐릭터입니다. 양명 학파에서 공문(孔門)의 안회라는 평가를 받는 서애처럼 지적이고 신심이 깊은 제자도 아니고, 육징이나 설간처럼 양명학의 주요 관점이 될 주제들을 자세하게 질문해주는 친절한 사형 같은 분도 아닙니다. 나정암 같은 논적도 아니고, 왕용계나 전덕홍 같은 고제자 같은 분도 아닙니다. 하지만 <전습록>에서 소혜의 존재감은 양명학의 계보나 역사적 평가 등과 상관없이 매우 특별하고 어느 면에선 대체불가입니다. 공문의 자로와 재여의 단점만 살짝 합쳐놓은 캐릭터 같달까요?

사실 <전습록>에 등장하는 양명 선생뿐 아니라 양명선생에 관한 대부분의 평가는 그가 온화하고 인자한 인품의 결정체였다고 증언합니다. 이름만큼이나 아주 밝고 따뜻한 볕의 세계였던 거죠. 간혹 상대가 적대적으로 날을 세우며 까칠하게 질문하거나 말꼬리를 잡으며 몰아세울 때에도 양명선생의 말투는 별로 흐트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반면 유장하고 굼실굼실한 큰 물결 같은 어세와 논리로 상대를 무장해제시켜 버리죠. 훗날 태주학파의 수장이 되는 소금장수 출신 왕심재나 양명보다 나이가 열 다섯살이나 많았지만 양명을 만난 후 정식으로 양명의 제자가  되었던 동라석(1457~1533)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소혜 얘기로 돌아갑니다. 앞의 인용문에서 소혜는 생사의 이치에 관해 묻습니다. 질문 자체가 좀 관념적이고 뜬금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의 어떤 질문들에는 대답을 안해주셨는데, 이를 불가에서는 ‘무기(無記)’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세계는 시간적으로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혹은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또는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 것인가, 별개의 것인가 등등과 같은 질문들입니다. 이런 몇 가지 질문들에는 부처님께서도 대답을 안하시는 것입니다. 소혜의 질문은 이 질문의 전후로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대부분 스승님의 뜻과 어긋나 꾸지람을 받는 모습들입니다. 이를테면 양명선생께 도교와 불교의 깨달음에 관해 묻는 식입니다.(선생께서는 소혜가 스승의 도달한 곳을 묻지 않고 스승이 가지 않는 곳을 굳이 묻는다며 꼬집어 주시죠!^^ 이 대화는  이어서 개그콘서트를 방불케하는 대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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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의 질문에 양명은 대답합니다. 죽음과 삶의 도리? 그것은 낮과 밤의 도리를 알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자 소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낮과 밤의 도리를 묻습니다.(소혜는 스스로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만 자각하지 못합니다.) 양명 선생이 대답합니다. 낮과 밤의 도리? 낮의 도리를 알면 밤의 도리를 알게된다. 그러자 소혜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며 결국 마지막 선을 넘습니다. 낮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면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으니 귀와 코가 듣고 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아니 이 말은 표현이 조금 이상한데, 분명한 것은 눈과 귀와 코 등이 있다고 보고 듣고 냄새맡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각자의 오늘 하루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보았을까요? 흐르는 소리를, 풍기는 냄새를 듣고 맡았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아마 습관적으로 어떤 것들을 보고 듣고 냄새맡았을 것입니다. 소혜의 반문에 대한 양명의 대답으로 바꾸면 그것은 흐리멍덩하게 하루를 보낸 것이고, 꿈 속에서 낮을 보내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소혜가 아닐까요?

지아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원제목은 <삼협호인(三峽好人)> 즉 삼협(산샤)의 좋은 사람입니다. 산샤댐 건설을 배경에 놓고, 그 지역에서 댐 건설 노동으로 살아가는 산샤(삼협)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는 영화입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댐인 삼협댐(산샤댐)은 근대 중국 개발주의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지아장커 감독은 장강의 그림 같은 풍광 너머 그 유장한 물줄기 만큼이나 오랜 세월 이어왔던 사람들의 삶이 파괴(수몰)되는 과정을 한 편의 담담한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담습니다. 댐이 건설되면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아야 할 삶들이 그 댐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스틸 라이프’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림 같은 장강의 유유한 풍경일까요, 근대 개발주의에 박제돼버린 중국 인민의 ‘삶’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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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오늘은 자꾸 곁길로 새네요. 다시 소혜와 양명의 문답으로. <논어>에서 공자는 ‘감히’ 죽음에 관해 묻겠다는 자로에게 아직 삶을 다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죽음을 묻느냐고 문제를 되돌려줍니다. 다시 귀신 섬기는 법에 관해 묻자 사람 섬기는 법이나 먼저 알아보라고 또 튕겨내시죠. 지금 소혜에게 가르침을 주는 양명의 논법은 <논어>에서 공자께서 자로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장면과 닮아 있습니다. 어쩌면 실제로 양명은 <논어>의 공자님을 의식하며 소혜에게 대답하고 있는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양명은 오래 전부터 크고 작은 병을 앓았습니다. 특히 28세 때 회시 급제 후 관료 생활을 시작하는 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보통은 이 사건으로 이후 양명의 삶을 끝까지 괴롭히게 되는 폐병이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양명의 병이 본격화 된 것은 31세 정도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지 낙마 사고 외에도 젊은 양명의 과로가 더욱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하튼 양명은 31세(1501)에 가슴이 답답하고 기침을 심하게 하게 되어 수개월간 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계속되는 과로로 피를 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결국 사직서를 내고 북경에서 고향 소흥으로 내려갑니다. 이때가 8월이었고, 이후 33세(1503년) 9월에 병부 주사로 복직할 때까지 양명은 고향에서 몸을 추스립니다. 

복직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양명은 환관 유근의 참화를 겪었고, 곤장 40대를 맞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귀주성 용장까지 쫓겨납니다. 이미 생사의 문제를 넘어섰다면 넘어섰다고도 할 수 있을만큼 당시 상황은 극단적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죽음이 계속 쫓아오는 것 같은 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양명조차도 막상 용장에 도착하면서부터는 다시 생사의 문제에 끄달렸습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상황이고 미래가 어둡다 못해 깜깜할 뿐인 시절이었음에도, 여전히 생사의 문제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극복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용장에서의 양명의 깨달음은 아마도 이와 같은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man-1292269_640 (1)여전히 생사의 문제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극복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천리가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깨어있어야 낮을 아는 것이고, 밤이란 그 ‘바깥’입니다. 삶과 죽음 역시 마찬가지로 말해보면, 숨 한 번 쉬고 눈 한 번 깜짝일 때를 알아차리는 것이 삶이고, 죽음이란 그 ‘바깥’입니다.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삶이 다하는 것 외(바깥)에는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 삶을 다한다는 것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삶을 다하는 것으로 살기! 이 말의 실감이 조금 전해질까요? 

제가 생각할 때 이것은 개체적인 자아의 삶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혜나 자로처럼) 죽음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아직 ‘지금 이 삶’을 다하는 사람의 질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스틸 라이프> 속 장강과 산샤댐처럼 삶은 흐르고 어느 순간 막아서는 것입니다. 막아서는 것으로 흐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죽음으로 가는 삶을 겪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양명은 소혜에게 좀 더 본질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양명 스스로의 철저하고 처절한 경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확실한 응수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장에서 명예와 부귀 혹은 기타 욕망 등으로부터는 금세 자유로워졌음에도 끝내 생사의 문제를 넘어설 수 없어 괴로웠다고 토로했을 때, 양명은 아직 이 삶을 다한다는 것의 삶을 사유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전히 ‘나’라는 자아의 죽고 사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용장에서 비로소 삶과 죽음은 더이상 둘이 아닌 문제입니다. 죽음은 지금 이 삶의 저 너머 멀리에 있는, 즉 내일이든 모레든 혹은 십년 이십년 후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한 번의 호흡과 한 찰라의 눈 깜빡임에 삶과 죽음은 함께 있습니다. 

light-3151723_640지금 이 한 번의 호흡과 한 찰라의 눈 깜빡임에 삶과 죽음은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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