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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ㅣ새로운 신을 만나다] 기독교와 자본주의, 그리고 나의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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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8-05 19:14 조회1,0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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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자본주의, 그리고 나의 신앙생활
이경아(감이당)

화폐에 대한 믿음

나는 신이란 나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 신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믿는 게 먼저였다. 신은 내가 이용할 대상이었다. 그런 관점으로 인간도, 사물도 나의 필요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신과 연결되어 있다거나,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성당을 다니면서도 열심히 노력해서 내 경쟁력을 키우고 거기서 번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누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래서 하느님 보시기에 예쁘게 교무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신부님들에게도 보시를 많이 하고 싶었다. 재테크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벌면 그만큼 더 많이 나누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스펙을 더 쌓아서 남보다 먼저, 더 많은 물질을 가지기를 바랬다. 그래야 이 각박한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고 아이들을 잘 키우며 살아갈 것 같았다. 그러니 남을 이기는 게 중요했다. 남을 이기려면 정보를 먼저 알아야 하고, 투자도 발 빠르게 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손해였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노후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그러다 상가를 하나 샀고, 노후에 월세를 받아 생활하겠다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 투자에 신중한 남편을 부추겨 빚을 내서 샀다. 맞벌이를 하니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빚을 생각하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는데, 갑자기 회사에 다니기가 너무 싫어졌다. 사표를 내고 나니 원금 상환은 꿈도 못꾸고 이자가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이자가 부담이 안 되려면 상가의 가격이 올라야 했다. 가격이 오르면 같은 이자를 내더라도 투자를 잘했고 돈을 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처럼 상가의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 회사까지 그만둔 마당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남편 앞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불안을 달래려고 더 자주 성당에 나갔다. 성당에 가서 상가 가격이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재테크에 성공하면 그것의 일부를 바치겠노라고, 상가 주소까지 대가며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나는 신이 기도를 들어주길 바랐다. 그래서 봉사도 더 열심히 했다. 내가 신을 더 열심히 믿으면 들어줄 것 같았다. 나는 왜 직장이 있고, 먹고 살 만한 데도 노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정말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에 대한 아무런 질문 없이 그저 남들이 하니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노후 준비도 신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저 믿어서 해결하려고만 했다. 신이 내 부동산까지 관리해준다고 믿다니. 이런 마음으로 성당을 다니니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를 해도 내가 자유로워진다거나 존재가 성숙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일상에선 나와 내 가족의 안위만 중요했고 신앙생활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만 중요했다.

행복하여라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 3)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고 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데, 나는 욕심은 버리지 않고 모든 걸 가진 채 천국에 가길 원했다. 일상은 욕심으로 가득한데도 그것을 보려고 하지는 않고 종교생활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왜 기독교의 윤리가 일상의 윤리로 변주되지 않는 걸까?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서로 결탁을 하면서 윤리의 단절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결탁

기독교는 프로테스탄티즘이라 불리는 청교도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교도 정신은 칼뱅의 예정론에 바탕을 둔다. 칼뱅의 예정론이란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이 모든 개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우주의 사소한 일조차도 다 규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에 인간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저주의 대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자신의 구원 여부를 알 수 있을까? 칼뱅주의는 삶을 통해 구원의 여부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직 신에게서 부여받은 소명을 다하여 세상에 의무를 다하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게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소명이란 ‘신의 부르심’이다. 칼뱅보다 앞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는 직업이 소명을 나타낸다고 여겼다. 루터에게 직업은 신의 사랑을 주위에 전하는 기회였다. 이것은 기존의 노동과는 다른 해석이었다. 기존의 노동은 단순히 먹고 사는 활동이었다. 예수도 이익을 추구하지 말 것을, 그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루터의 새로운 해석으로 인해 노동은 신이 나에게 명한 거룩한 일이 되었다. 이런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칼뱅이 이어받았다.

칼뱅은 철저한 금욕을 주장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1분 1초도 아껴가며 근면 성실하게 금욕적으로 자신의 직업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했다. 이런 모습이 신에 의해 선택받은 자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사람들은 끊임없는 자기통제와 채찍질을 통해서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이 신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게으르고 절제 없는 느슨한 삶은 신의 은총이 결여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소명을 실천하기 위한 합리성과 전문성이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합리성이란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이다. 이런 청교도 정신이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돈을 버는 것이 신의 뜻이니 탐욕과 구별될 수 있었다. 탐욕은 향락에 빠지게 하지만, 금욕적으로 일해서 돈을 많이 모으는 것은 소명에 응해 노력한 산물이었다. 자신의 향락에는 돈을 한 푼이라도 써서는 안 되고 자신의 부를 늘리는 일을 의무로 여겼다. 돈을 버는데 소명이라는 윤리적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이런 신에 대한 소명으로서의 금욕과 이익을 내는 삶이 자본주의와 슬쩍 결합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축적을 제도화했다. 내가 열심히 살아온 증거가 축적이고 그 축적이 선이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과 인간의 분리는 자연스럽게 개인과 개인의 단절로 이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소명의식을 토대로 자본주의가 미국에서 가장 발달했다. 또한, 자신의 구원을 아무도 도와줄 수 없기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런 토대로 개인주의가 나타났다. 이런 단절을 품고 있고, 이익을 내는 게 소명인 프로테스탄티즘과, 자연이란 인간과 별개로서 단지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개발해야 하는 자본주의, 이들의 출발은 닮아 있었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태생적으로 비슷했기에 결탁이 일어나는 것도 쉬웠을 것이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태생적으로 비슷했기에 결탁이 일어나는 것도 쉬웠을 것이다.

경쟁을 통해 돈과 천국행 티켓을 잡아라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은 신이 모든 걸 창조하고 다스리는 신이다. 신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다 알 수 있는 전지전능의 존재다. 우리 시대라고 다르지 않다. 단지 신의 위치에 자본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돈이라면 안되는 게 없다. 돈 때문에 죽고, 살기도 한다. 돈으로 명예도 살 수 있고, 감정까지도 살 수 있다. 자본이야말로 전지 전능하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증식이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낳고 다시 잉여가치가 자본을 낳는 구조다. 자본주의는 그런 증식을 내적 동력으로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어떤가?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내가 믿어서, 신이 나를 사랑해서, 내가 잘해서… 언제나 중심에 ‘나’가 있다. ‘나’의 증식이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를 증식시킨다. 자본이 자기를 증식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고, 내 이익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나’를 증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와 내 가족, 내 소유를 늘리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근면 성실하게 살긴 하지만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기. 19장 18)는 예수의 윤리가 실천되지 않는다. 예수의 윤리와는 반대로 이웃이 아닌 나와 내 가족만 사랑하며 살게 된다. 중간중간 이웃 사랑에 대해 생각은 하지만 내 것을 먼저 채우고 난 뒤에 형편이 풀리면 나중에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욕심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지만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사람들과의 교류의 장으로서 또는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본이 자기를 증식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고, 내 이익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나’를 증식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특징 중 또 하나는 경쟁이다. 승자독식의 경쟁이다. 정규직이라고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경쟁을 하며 살게끔 만든다.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면 이제 어떻게 이길까를 고민하게 된다. 경쟁이 권장되고 재테크가 중요해진다. 그냥 돈을 열심히 저축하고 빚을 두려워하는 건 바보다. 빚이 능력이다. 빚을 내서라도 집이든, 주식이든, 가상화폐든 무언가를 사야 하고 돈을 계속 불려야 한다. 그게 경쟁력이다. 가만히 있는 건 뒤처지는 일이고 불안한 일이 된다. 기독교는 천국을 이 세계 밖에 설정해놓으니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겠다가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게 중요하다. 천국 문은 좁다 하니 다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경쟁을 뚫고 내가 천국행 티켓을 쥐는 게 중요하다. 성직자가 그것을 인도해준다고 하니 서로 성직자에게 잘하려고 경쟁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일상에선 경쟁을 통해서 재테크로 돈을 벌고 성당에선 그 돈을 기부하고자 했다. 돈으로 능력있는 나를 드러내고, 기부도 하고 싶었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그러면서 신의 사랑도 받고 싶었다. 좋은 건 다 하고 싶은 마음, 돈도 벌고, 나누는 것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남을 이겨서 번 것으로 남에게 베풀겠다니. 그러면서 내 탐욕은 아름다운 기부로 둔갑한다. 탐욕은 보지 못하고 기부해서 뿌듯한 나만 있었다. 예수는 약자에게 나누고 베풀라고 했는데

나는 승자가 되려고 했다. 경쟁 과정에서 남을 배제 시켰고 승자와 루저로 나누고 웃고 울었다. 이러니 내 신앙생활이 일상의 원리, 영적 정화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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