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클래식] 노매드 랜드 – ‘작은 나’에서 ‘진정한 자기’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9-02 21:35 조회99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노매드 랜드 – ‘작은 나’에서 ‘진정한 자기’로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부. 슬기로운 유배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노파심에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절의 주제는 ‘죽음과의 정면 대결’입니다. 양명이 머나먼 경계의 땅 ‘귀주’에서 맞닥뜨린 질문에 관해 말해보는 중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자객이 내일 혹은 다음 달 쯤 들이닥칠 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지금 이 하루 하루를 살아야하는 사람의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나를 믿지 못하는 이민족 사람들, 겪어보지 못했던 물과 음식과 동식물들 속에서 ‘사는’ 문제인 것입니다.
루쉰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귀하게 본 자손이라고 해둡시다. 어쨌든 이웃 사람들이 모두 한 마디씩 덕담을 합니다.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돈을 많이 벌 것입니다. 기타 등등.. 그런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불확실한 사실을 말한 사람들은 칭찬을 받고 분명한 사실을 말해준 사람은 오히려 주인의 화를 얻게 된다… 뭐 그런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전제를 뒤틀어버리는 루쉰식 풍자였다고 할까요.
그런데 정말 궁금해집니다. 만약에 우리는 자기가 죽을 날을 알게되면 어떨까요. 몇 날 몇 일, 내 삶이 마지막이다 라고 한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머리로 많이 생각하지 말고 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한 번 말해보시죠. 제 멋대로 생각해보면 아마도 어떤 사람은, 자기 생에 맞춰 삶의 스케일(?) 아니 스케줄을 조절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한 달 쯤 삶이 남게 되면 1년쯤 들여야 할 수 있는 일은 될수록 시작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이런 부류는 삶의 허무주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뭘 더 해, 라는 식이죠.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들? 저는 양명의 대답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체로서의 ‘작은 나’를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넘어선다고 표현하는 것이 또 좀 걸리는데, 의지의 문제처럼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작은 개체적 나를 넘어선 ‘나’의 삶인 것입니다. ‘작은 나’와 똑같이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목구비 사지육신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나’입니다만 개체적인 존재를 넘어선 나는 천지와 하나인 나입니다.
<노매드 랜드>라는 영화 보셨나요? 우리에겐 <미나리>란 영화에 관심이 집중되었었지만 <미나리>가 윤여정 배우에게 아카데미상을 주었던 올해에 최고의 작품상을 받은 작품이 <노매드 랜드>입니다.(이번 절은 자꾸 영화 얘기만 하게 되네요…^^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 참 이상하게도!)
Nomad Land, 니까 저희가 보통 유목에 관해 말할 때 써 왔던 습관대로라면 노마드라고 해야 더 잘 알아들었을텐데, 여튼 공식 제목은 ‘노매드 랜드’입니다. 영화를 보고난 뒤 알게 된 건데,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 유랑민들이라고 합니다. 영화의 초반에 이들은 신자유주의 경기 대침체의 여파로 밴이나 트레일러 등에 살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됩니다. 하지만 이 삶이 이들에게 어떤 결핍과 내몰림의 결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영화의 방점이 있습니다. 자신은 노숙자(홈리스)가 아니라 집이 없을(하우스리스) 뿐이라는 여주인공의 대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주인공에게 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밴이 바로 그녀의 집(홈)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강조하는 ‘노마드’는 정주성에 대한 결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보다 더 나은 무엇도 아닙니다. 하지만 핵심은 누군가에겐 편안하고 안락하고 심지어 잘 가꿔진 정원이 있는 근사한 저택보다도 좁고 화장실도 불편하고 기타 등등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세상(자연)으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작은 밴이야말로 최고의 집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무엇이 무엇보다 좋다거나 못하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 <노매드 랜드>에서 영화가 진행되면서 여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미국의 대자연을, 말그대로 삶과 우주(대자연)이 펼쳐지는 그 느낌을 떠올리며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다시 양명으로! 저는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양명이 보여준 전환이 <노매드 랜드>가 질문하고 있는 집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집 대신 ‘나’라고 바꿔보는 것입니다. 편의상 ‘작은 나’에 대립적으로 설정해볼 수 있는 ‘큰 나’를 ‘진정한 자기’(양명이 직접 쓰는 말입니다)라고 해두겠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이런 이야기가 가능집니다. 이목구비 사지육신에 제약되는 ‘작은 나’로부터 ‘진정한 자기(眞己)’로!
‘진정한 자기’ 역시 이목구비 사지육신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이목구비 사지육신만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번 절의 제일 앞에서 보았더 양명의 마지막 모습을 상기해보아도 좋겠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양명이 제자에게 ‘이제 그만 숨을 거둘 때가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제자는 황망하고 두렵고 또 아마도 다급했을 터이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그럼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씀이라도…’ 우리가 보통 어떤 죽음을 앞두고 늘 보게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양명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 마음이 환하고 밝은데 다시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아마도 이 말은 이제까지 전력을 다해 삶을 다하였으니 죽음에 이르는 것일 뿐이라는 말일 테고, 그러므로 이 삶에 대해 무엇이라도 남거나 혹은 남겨야 할 어떤 것도 있을 리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삶을 다하는 거기에 죽음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언제든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음은 삶이 전부 소진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삶이 없어야 죽음입니다. 이 삶을 다할 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 삶을 다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두려울까요. 말 그대로 삶을 다할 뿐인데? 그러므로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삶을 오로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지금 이 삶에 오로지 하고 있지 못하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거꾸로 돌아온 감이 있지만, 이 생각의 출발이자 도달점이 바로 ‘마음이 곧 이치(심죽리)’라는 귀주 용장에서 터진 양명의 ‘노매드 랜드’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