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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ㅣ새로운 신을 만나다] 매일매일 새롭게, 일신(新)우일신(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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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9-16 20:24 조회1,3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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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새롭게, 일신(新)우일신(神)
이경아(감이당)

새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있다. 매일매일 해가 뜨듯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도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복음, 3장 7)고 말씀하셨다. 위로부터 태어나라는 것은 거듭나라는 것이고 거듭나라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라는 의미다. 나는 새로 태어나겠다고 끊임없이 결심하고 도와달라고 신께 기도했다. 늘 새로워지겠다고 기도를 하면서도 정작 새로움이 뭔지에 대해선 생각해보질 않았다. 그저 막연히 날마다 새로워지고 싶었다. 또한,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거듭나고 싶었고 그렇게 해달라고 빌었다. 참 막연한 기도다. 만약 신이 있다고 해도 이런 기도는 들어주기 힘들 것이다. 새로움이란 게 뭐냐고 오히려 신이 되물을 것 같다. 달라지겠다고 하면서 뭐가 달라져야 하는지는 몰랐다. 내 부동산이 오르길 바랄 때는 정확히 주소까지 밝혀가며 기도하는데 일상에서 달라지고 싶을 때 하는 기도란 참으로 애매모호한 것임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지 나는 왜 새롭기를 바라는 걸까? 나는 어제와 같은 오늘, 어제와 같은 나가 싫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안정된 일상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안정된 삶을 위해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려왔는데 이 안정이 나를 권태롭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안정된 삶이 흔들리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내 것은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워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거나 새로움을 줄 수 있는 뭔가를 찾았다. 보통 쇼핑을 자주하는 것도 무언가 새로움을 느끼고 싶어서 아닌가? 물건에 대해 새로움을 느끼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니 더 자주 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중독되어 있다. 주식도 그렇다.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움을 오르락 내리락하는 주식 차트를 보며 느낀다는 친구도 있다.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새로움이란 무엇인지? 새로워진다는 것이 신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성은 차이를 낳는다

실체란 그 자체 안에 있으며 그 자체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 즉,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제1부, 정의 3)

baruch-spinoza-5689119_1280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

스피노자는 신을 실체라고 이해한다. 실체란 존재하는 데 있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해에 따르면 신은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한 말이다. 맞다 우리가 자연(自然)이라고 쓰는 말의 뜻이 스스로 그러함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누가 명령하거나 조정하는 게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은 누가 명령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러한 거다. 자연이 그러한 것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그 자체로 그러한 것. 그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이고 실체다. 스피노자의 신은 스스로 존재하며 어떤 것에 의존하거나 기대지 않는다. 신과 자연이 구별되지 않는다.

신이 자연이라니 신은 신이고, 자연은 자연 아닌가? 자연 위에 신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연이 신이라니 그럼 나는 그동안 어디에 기도를 한 것일까? 자연이 신이라면 자연과 나는 무슨 관계일까? 스피노자는 자연을 2가지 측면으로 나눈다.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다. 능산적(能産) 자연이란 생산하는 자연을 말한다. 생산하는 자연이란 스스로 존재하며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원리 즉 신으로서의 자연이다. 자연을 원인으로 해서 사계절의 순환과 낮과 밤이 생겨난다. 소산적(所産) 자연이란 생산되는 자연이다. 자연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소산적 자연은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자연은 생산하는 측면과 생산되는 측면 이 두 가지가 다 있다. 그래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분리되지 않는다. 신은 만물을 생산하고 생산되는 것들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만물이 없다면 신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나는 신과 분리 불가능하다. 내가 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다. 신은 끊임없이 생산하고 생산해 내는 과정 자체로 늘 존재한다.

지금까지 나에게 끊임없는 생산이라고 하면 쉬지 않고 하루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이나, 공장이 연중무휴로 24시간 내내 가동되는 것, 돈이 계속 불어나는 것처럼 소유가 늘어나는 것이 었다. 자연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연은 단 한 순간도 같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같은 날, 같은 공기, 같은 태양, 같은 날씨인 적이 없다. 이것이 우주를 무한한 생성으로 이끈다. 이것이 ‘새로움’이다. 매일매일 새롭다는 것은 이런 끊임없는 능산적인 생성을 말한다. 신성함이란 이런 생성의 이치일 것이다. 나는 신과 분리 불가능하니 나에게도 신성함이 있을 것이다.

davide-cantelli-H3giJcTw__w-unsplash자연은 단 한 순간도 같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같은 날, 같은 공기, 같은 태양, 같은 날씨인 적이 없다.

신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가슴 속에 수호신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수호신이 나를 지켜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은 무언가를 낳고 낳는 생성의 이치로서 내 안에 작동하고 있다. 신성함이 내 안에 있으니 내가 새롭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원리에 따라 나도 능산적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과정에 참여해야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이 늘 새로운 이유는 차이 속에서 뭔가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산에 다니다 보면 갈 때마다 산의 모습이 다르고, 갓난아이의 크는 모습을 보면 하루하루가 다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지루함을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차이는 어제와 같아선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제의 것을 내려놓아야 차이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생성은 소유가 아닌 비움이다. 소유란 고정된 것이고 안정이다.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생성할 수 있는가? 안정을 원한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같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유는 권태와 답답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소유와 생성, 안정과 새로움은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동시에 누리는 것은 자연 안에는 없다. 신의 섭리 즉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다. 비우고 생성에 참여할 때 차이가 만들어지고 그럴 때만 새로움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선’이라 하고, 활동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을 ‘악’이라고 한다. 활동능력의 증대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감소는 슬픔으로 이어진다. 우린 보통 착하게 사는 게 선이고,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게 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한한 생성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선이고 기쁨이며, 고정되고 안정되려고 하는 것은 악이고 슬픔이다. 내가 생성에 참여할 때 활동능력이 증대되고 그럴 때 새로움을 느끼니 기쁘다. 내가 생성을 해내지 못하고 안정과 소유에 붙잡힌다면 활동능력이 감소되니 답답하고 슬프다. 그럼 나는 이 생성의 프로세스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 것일까?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독교에서 바치는 기도 중 주기도문 또는 주님의 기도라는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다. 나는 예수님이 이 기도를 통해 우주적 생성의 과정에 참여하는 방법을 알려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스피노자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이 기도를 진짜 하느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으로,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줘서 내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정도로 생각했다.

예수님이 말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의 의미는 초월신이 이 땅에 내려오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생성으로 존재하는 하늘의 질서 즉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며 만들어내는 생성의 질서를 알라는 뜻인 것 같다. 그 무한한 생성의 질서가 우리 삶에 이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의미는 생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성에 참여하지 못했다. 왜?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변화를 원하긴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는 것들을 유지하는 채로 변하기를 바랬다. 그게 무슨 변화인가? 안정되고 멈추려는 것이지. 젊음, 사회적 지위, 자식, 돈 등등을 놓으려고 하질 않고 붙잡고 채우려고만 했다. 그것들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아 꼭 붙잡았고 한편으론 그것들로 인해 답답했다. 내것은 포기하지 않은 채, 변하고 새롭기를 바랬으니 새로워질 수 없었다. 능동적으로 생성의 과정에 참여할 수 없으니 남는 건 권태였다. 

alex-iby-MmEzn_tFZSo-unsplash (1)변화를 원하긴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는 것들을 유지하는 채로 변하기를 바랬다.

능동적으로 순환에 참여하려면 소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다. 평생 먹고 살 양식을 구하라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쫄쫄 굶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 먹을 양식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 이상을 구하는 것은 잉여이고 소유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평생의 양식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물려줄 양식까지 구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말씀하신다. 어제를 내려놓고,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을 살라고 하신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제와 내일만 있었고 오늘은 없었다. 그러니 어제를 붙잡느라 비우지 못하고 내일을 생각하느라 채워야 했다. 또한,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에 대한 감정도 그것이 뭉쳐있다면 그것을 붙잡고 있는 것이니 먼저 용서하라고 하신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감정을 순환시키는 것이고 생성에 참여하는 일이다. 순환되지 못한 감정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우린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내가 먼저 용서한다는 것은 생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린 매일 더 가지려 하고, 더 가지라고 부추기는 유혹에 놓여있다. 이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하신다. 그러려면 무한한 생성의 질서 즉 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나에게 신성함이 있다는 것은 이런 유혹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더 가지려 하고, 멈추고자 하는 것은 나를 생성의 프로세스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내 활동능력을 떨어뜨리니 악이다. 변화에 참여하지 않으면 멈추게 되고 멈추면 가지려 하고 가지면 생성할 수 없고 새로워질 수 없으니 이게 악이다.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게 악에서 나를 구하는 것이다.

신성함이란 소유와 안정에서 벗어나 이런 생성을 일상에서 이어나가는 것이고 그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삶이 신의 섭리대로 사는 삶이고 선이다. 일신우일신이란 무한한 생성이다. 생성이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新)이며 날마다 새로운 것이 ‘신(神)’이다!

yayan-sopian-Oo9fxlhwoVQ-unsplash신성함이란 소유와 안정에서 벗어나 이런 생성을 일상에서 이어나가는 것이고 그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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