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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 마음이 이치다 – 심행합일(心行合一), 바보야, 문제는 앎이 아니라니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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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9-20 23:06 조회9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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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이치다 – 심행합일(心行合一), 바보야, 문제는 앎이 아니라니깐!(1)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 슬기로운 유배 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3-3. 마음이 이치다 - 심행합일(心行合一), 바보야, 문제는 앎이 아니라니깐!

 
문리스(남산강학원)

3-3-1. 지금 여기 저홀로 피고 지는 꽃에 관하여

(물었다) : (선생께서는) ‘천하에 마음 밖에 물(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저절로 피고 지는 이 꽃나무 같은 것은 나의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 그대가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 이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적막함에 들어있었다. 그대가 이 꽃을 볼 때 이 꽃의 색깔이 일시에 분명히 드러난다. 이 꽃은 그대의 마음 밖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전습록> 275조목)

언젠가 양명선생께서 제자와 함께 산길을 걷는 중이었습니다. 호젓한 산 속에는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이 있었습니다. 문득 제자가 양명 선생께 묻습니다. 선생님, 저 아름다운 꽃은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저 자리에 있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마음 밖에는 사물이 없다[心外無物]’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곳에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있는 저 꽃들은 우리 마음과는 상관없이 저렇게 피고 지고 있습니다. 저 꽃들의 피고 지는 것에 우리 마음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nitish-meena-s7rU_y27PJU-unsplash저 꽃들의 피고 지는 것에 우리 마음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전습록>의 재미중 하나는 제자들이 알아서 우리들의 궁금증을 물어봐주신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선생님 말씀을 더 궁금해하고 집요하리만큼 묻고, 또 반복해서라도 다시 물어주어야 후학인 우리로선 선생님의 생각을 조금 더 자세하고 풍부하게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공자께서 ‘안회는 나를 돕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일견 통하는 지점입니다. 공자님의 모든 제자가 안회 같았으면 <논어>는 얼마나 ‘험한'(이라고 쓰고 불친절한이라고 읽습니다^^)책이 되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역시 자로, 자공, 재여 같은 제자들이 얼마나 큰 복을 지으셨는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명선생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네가 이 꽃을 안 봤을 땐 이 꽃과 네 마음은 적막함이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보면 네 마음과 이 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꽃과 마주쳤을 때(꽃을 꽃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그 때) 이 꽃은 비로소 꽃이 된다. 산 속에 피고 지는 대상체 꽃을 비로소 꽃이게 하는 것은 마음이 합쳐졌을 때뿐입니니다. 어떠실까요?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이 대목에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 시를 배울 때 뭔지 모르겠지만 현상학이라는 말로 배웠습니다만, 마음의 현상학이라고 할까요, 비슷한 관점을 양명학에서는 마음의 문제로 제기합니다.

좀 더 거칠게 말해보면, 산 속에 꽃이 피었든 뽑혔든 그것은 이 마음과 만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어쩔 게 없는 ‘적막’ 상태에 불과하다. 세계(물)은 오직 이 마음으로서만 세계(물)가 된다. 이 말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양명학의 기본테제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마음이 이치다[심즉리(心卽理)]."

이 한 마디는 마음학문으로서의 양명학을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언표입니다. 연보에 따르면, 여느날처럼 자신의 석관에 몸을 뉘었던 양명은 별안간 이 한 마디를 외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제까지 이치를 사물(사건)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이치는 이미 이 마음에 충분하다. 마음이 이치다!’

이 대목에서 ‘이제까지 이치를 사물에서 찾으려 했다’는 말은 주자학의 격물(格物) 공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주자학에서 이치는 사물(사건)에 있습니다. 예컨대 대나무의 이치는 대나무에, 뱀의 이치는 뱀에게 있습니다. 하여 사물(사건)의 이치를 찾기 위해서는 사물에 나아가 사물의 이치를 찾기위한(/찾을 때까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치를 하나씩 알게되면 어느순간 그 이치들이 연결되어 앎이 튼실해지고 우리는 그런 앎에 따라 생각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몸을 쓴다는 것이 주자학의 구도입니다. 굉장히 매끄럽고 정교합니다.

natalia-garcia-KtJG4UmqCHc-unsplash그런데 주자학에서 이치는 사물(사건)에 있습니다.
예컨대 대나무의 이치는 대나무에, 뱀의 이치는 뱀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양명의 구도에서는 주자학의 격물 공부에 관한 대전제, 즉 ‘이치는 사물에 있다’라는 전제가 부정됩니다. 저는 지금 ‘양명이…부정한다’라고 하지 않고 ‘부정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양명의 이 전회는 주자에 대한 반동 의식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전적으로 주자의 격물설에 의지하여 용장땅에 내팽개쳐진 자신의 삶을 추스려보고자했던 자리에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한 구간을 끝까지 가야 거기에서 갈림길을 만나고, 갈림길을 만나야 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길을 시작할 수 있는 법입니다.'(feat.<전습록>65조목)

여하튼 심즉리(마음이 이치다)란 이 한 마디로, 양명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쫓겨나듯 추방된 변방중의 변방 귀주성 용장땅으로부터 하나의 길을 찾아내었음을 선포(!)한 셈입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시간의 흔적을 새겨온 문명의 땅을 향해 그리고 그 문명을 지탱하는 주류 학문 저 너머를 향해 이제까지와는 완연히 다른 마음학문의 출발이 선언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실제로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도발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는가에 관해서는 아마 그 당시의 양명 자신도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심즉리. 이 말은 왜 그렇게 중요한 말일까요? 일단 이 말은 주자학의 ‘사물에 있는 이치’라는 전제를 부정합니다. 양명에 따르면 마음이 이치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이치’라는 이 말은 주자학자들은 물론 심지어는 양명의 제자들에게조차 종종 마음에 이치가 있다는 말인 양 오해되었습니다. ‘이치는 사물에 있다’는 주자학의 견해에 대해 ‘이치는 마음에 있다’는 식으로 반론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심즉리는 ‘이치는 사물에 있다’는 주자학의 견해에 대하여 반론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치가 마음에 있다’는 뜻으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사물[物]에 대한 시각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greg-rakozy-oMpAz-DN-9I-unsplash하지만 심즉리는 '이치는 사물에 있다'는 주자학의 견해에 대하여 반론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치가 마음에 있다'는 뜻으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사물[物]에 대한 시각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주자의 생각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현대인인 우리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놀랄만큼 비슷하고, 그만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처럼 보입니다. 요컨대 주자학에서 사물은 그저 낱낱의 대상들입니다. 말 그대로 온갖 것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양명학에서 물(物)은 그저 온갖 것들이 아닙니다. 양명학에서는 온갖 것들에서 마음이 닿은 것이, 마음이 닿아야 물입니다. 양명학의 초급 단계이지만 많은 분들이 이 대목에서 저항(!)이 심합니다. 어떻게 물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물이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닿지 않는 저 많은 것들(그들의 입장에서는 온갖 사물들)은 물이 아니면 그냥 없는 거냐며 거세게 항의합니다. 하지만 양명학의 입장에서 대답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냥 없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물이 아닌 건 아닌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보면, 심즉리(마음이 이치다)에서 중요한 건 이치가 사물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즉리의 핵심은 이치와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그 이치를 탐구하는 마음의 문제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가 아니라 마음의 이치를 탐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온갖 사물들에 나아가 이치를 쫓아다니는 문제가 아니라 이 마음의 이치를 밝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밖으로 치닫던 공부를 안으로 바꾼 형국이지만, 이를 안과 밖의 구도로 보는 것은 또 다시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주자학의 구도로 양명학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 양명학은 주자학에 ‘대하여’ 성립한 학문이 맞습니다. 주자학이 없었다면 양명학은 성립이 불가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명학은 주자학을 반대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양명학은 주자학 너머를 지향하고 환기시키는 학문입니다. 주자학에서는 결국 양명학을 주자학의 한 해석 지류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합니다만 그것은 대단히 공허한 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결론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문의 방식과 외부성에 대한 태도 등 둘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심즉리의 핵심은 이치와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온갖 사물들에 나아가 이치를 쫓아다니는 문제가 아니라 이 마음의 이치를 밝히는 문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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