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기원인일까? 나라는 본질은 실존을 포함하지 않는다. 나는 죽을 수도 있고, 부모가 나를 낳아주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본질에는 존재가 들어있지 않기에 나는 자기원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실존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고, 수많은 것들과의 무한한 인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내가 신의 완전성을 향해 간다는 것은, 내가 이 조건 즉 다른 존재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조건 속에서 스스로 자기원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린 관계를 떠나 혼자 살 수는 없다. 산속에 들어가서도 땅과 나무와 공기가 필요하고, 방안에 혼자 틀어박혀 살아도 공기가 필요하고 음식도 먹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자기원인으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장 18~19절)고 말씀하셨다. 나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에 대해 알려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전에는 신을 믿기만 하면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는 것으로 상상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신다. 여기서 하늘 나라란 저 멀리에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아마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 자기원인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존재하려면 이 땅에서 매어있는 것을 풀라고 하신다. 그것들이 무엇일까? 내가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의지하고 있는 사회적 통념과 관습, 고정관념일 것이다. 이런 외적인 것들에서 풀려나야 자신으로서 충만할 수 있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고, 그것이 구원임을 말씀하신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을 때,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예수님이 말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로마서, 13장, 9절) 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나는 외적인 것에 의지하며 살았기에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대가를 바랐다. 물질을 채워준다든지, 내가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신의 특별한 은총 같은 대가 말이다. 또한, 차별적인 시선을 가지고 나보다 위, 아래를 나누며 이웃을 사랑했고 사랑을 통해서 상대를 소유하려고 했다. 그렇게 억지로, 당위로 사랑을 실천하다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폭발하기도 했다. 봉사도 그랬다. 베풀고 나누면서도 명예와 남들의 인정을 바랐다. 결국 명예가 충족되지 않으면 나중에 남는 것은 억울함과 서운함 뿐이었다. 예수님이 말한 무조건적 사랑은 나로서 충만할 때, 내가 존재하는데 어떤 외적 원인이 필요 없을 때 가능하다. 나로서 충만한데 무슨 대가가 필요하겠는가?
내가 구원이라고 믿고 의지했던 외적 기준들에서 하나하나 벗어날 때, 대가를 바라지 않게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은 스스로 존재하는 힘이 커지는 것이니 허무가 아닌 충만한 삶일 것이다. 이것은 물론 힘든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내적 저항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이 쉽다면 모두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할 것이다. 신성함은 모두에게 흐르는 것이기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 구원은 받거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하는 것이다. 내가 구속에서 벗어나고, 나의 외적 원인에 대해 질문하는 만큼 신성함을 향해 가는 것이고 완전성을 향하는 것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길이다! 구원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