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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ㅣ새로운 신을 만나다] 스스로 존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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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9-30 18:59 조회6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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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존재하라
이경아(감이당)

구원받게 해주세요

나는 카톨릭 신자라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카톨릭 신자가 아니었다면 신을 이해하는 게 덜 힘들었을까? 하지만 함께 세미나를 했던 신자가 아닌 학인들도 스피노자의 신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을 믿든 안 믿든 우린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신이 초월적이고 인격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나에게 그 고정관념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었다. 텍스트를 읽다가도 이게 왜 신이라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면서 신만 생각하면 자동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연결되었다. 저 멀리 하늘에서 우리와 떨어져 있으면서 세계에 관여하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 말이다.

나는 신을 잘 믿어서 구원받고 싶었다. 미사 때마다 구원을 갈구했지만, 막상 구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신을 믿으면 구원받는구나,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 가는 거구나, 천국이란 좋은 곳일 테니 구원을 받아야 하는 거구나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마음에 그렸던 구원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살아서는 좋은 집, 고급 자동차, 안정된 노후, 스위트 홈, 명예, 건강…을 다 누리는 거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이런 것을 다 누리며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구원이었다. 나는 구원을 살아서든, 죽어서든 누리는 완전한 행복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에게 집의 기준은 역세권에 학군이 좋은 곳이어야 했고, 자동차의 기준은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내릴 때 남들이 저 차에서 누가 내리나를 궁금해할 만한 고급 차였다. 안정된 노후란 자식들 잘 키워놓고, 건물주가 되어 월세도 받고, 마음껏 해외여행도 하고… 남들 보기에 부러움을 살만한 것이었다. 이것들이 구원의 기준인 줄 알고 계속 원했는데 어느덧 나를 구속하는 기준이 되어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기에 거기에 비하면 나는 부족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위축되었다. 한편, 나보다 덜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는 상대적 우위를 느꼈다. 이런 외적 원인들로 나를 평가했고 남도 평가했다. 나에게 신은 인간사에 개입해서 이런 것들을 다 가능하게 해주는 분이니 열심히 신을 믿고 봉사도 해서 신의 마음에 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삶의 기쁨은 오래가질 않았다. 외적인 것들을 쫓아다니지만 막상 가지고 나면 허무했다. 그러니 또 다른 것을 쫓아야 했다. 여기엔 만족이란 게 없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채워야 할 외적 원인이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 가지면 가질수록 내 안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채우면 내 마음도 충만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나는 허무함을 느낄수록 구원받고 싶었다. 구원을 완전한 행복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충만함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구원이란 게 뭔지? 구원은 과연 외적 원인에서 오는 것이고 신에게 의지해야 가능한 것인지? 신과 구원의 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dmitry-ratushny-xsGApcVbojU-unsplash나보다 덜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는 상대적 우위를 느꼈다. 이런 외적 원인들로 나를 평가했고 남도 평가했다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

『에티카』를 펼치면 맨 처음 나오는 말이 자기원인이라는 말이다. 자기원인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시작부터 어려워서 좌절하고 『에티카』를 덮을 뻔했다.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라니? 어떻게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 될 수 있지? 원인은 결과에 앞서는 것인데, 내가 존재하는데 나보다 앞선 원인이 나라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기원인이란 나보다 앞선 존재 이런 의미가 아니다. 내가 신을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 이해한 것처럼 스피노자는 신을 자기원인으로 이해한다.

자기원인이란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또는 그것의 본성이존재를 제외하고는생각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1정의1)

자기원인 즉 신이란 자기의 본질이 실존이라는 의미다. 그럼 본질이란 것은 또 무슨 말인가? 본질이란 ‘…그것이 없으면 그 사물이또 역으로 그 사물이 없으면 그것이존재할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그런 것이’(2정의2)다. A가 없으면 B가 없고, B가 없으면 A가 없는 것이 본질이다. 자기원인은 본질이 실존이기에 실존이 아니면 생각될 수 없고, 실존이 전부인 것이다. 실존이란 exist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원인으로서 신은 존재하는 것 즉 ‘있음’이니 실존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다시 말하면 실존을 위해 어떤 외적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원인은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이 신이다. 성서에도 시나위 산의 불타는 떨기나무 뒤에서 신이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I AM WHO I AM)라고 말했다고 쓰여있다. 모세에게 나타난 신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존 즉 ‘있음’이 본질인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인격신이지만 말이다. 인격신이든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이든 신이란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신의 ‘완전함’이다.

그동안 나에게 완전함이란 부족함이 없이 다 가진 것이었다. 신의 완전함이란 부족함이 없고, 모든 것을 다 알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함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말씀인 성서는 완전한 것이고, 오류가 없는,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은 전지전능한데 나는 그렇지 못하니 신 앞에 서면 나는 늘 왜소하고 허점투성이였다. 완전한 신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불완전하다고 느꼈다. 그러니 신과 나 사이에 간극이 더 커지고 그럴수록 그 간극을 줄이려고 신에게 구원을 더 의지했다. 완전함이 소유가 아닌 존재의 차원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스피노자는 완전성은 사물의 존재를 제거하지 않고도리어 확립하는 것이고이에 반하여 불완전성은 사물의 존재를 제거한다.(1정리 11주석)고 말한다. 완전성이란 무언가를 다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기원인인 신은 다른 원인이 필요 없으니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고, 존재 자체로서 충만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전지전능함이다. 자신으로 충만한데 왜 외적 기준에 의지하겠는가? 그럼 내가 일상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늘 외적 원인에 의지하고, 그것을 척도로 삼아서였을까?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 살았지 내가 만들어낸 가치는 없다. 나는 외적 원인들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그것들을 무조건 받아들였다. 내가 만든 게 아닌 외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 이런 삶은 허무할 수밖에.

구원이란 신의 완전성을 향해 가는 것이니 외적 원인에 의지하는 게 아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도 아니다. 신성함을 향해 간다는 것은 외부의 기준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데 아무 조건이 없는, 내가 ‘무조건’이 되는데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나는 구원받기를 원하면서 외적 원인에 의지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신의 완전성에서 멀어지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을 믿어도 삶이 바뀌지 않고 허무했나 보다. 초월신이든, 다른 외적 원인이든 이런 것에 대한 의지와 구원은 양립 불가하다. 외적 원인에 대한 의지는 구속이지 구원이 아니다.

jill-heyer-03ztkGdYWU8-unsplash인격신이든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이든 신이란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신의 ‘완전함’이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나는 자기원인일까? 나라는 본질은 실존을 포함하지 않는다. 나는 죽을 수도 있고, 부모가 나를 낳아주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본질에는 존재가 들어있지 않기에 나는 자기원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실존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고, 수많은 것들과의 무한한 인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내가 신의 완전성을 향해 간다는 것은, 내가 이 조건 즉 다른 존재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조건 속에서 스스로 자기원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린 관계를 떠나 혼자 살 수는 없다. 산속에 들어가서도 땅과 나무와 공기가 필요하고, 방안에 혼자 틀어박혀 살아도 공기가 필요하고 음식도 먹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자기원인으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장 18~19)고 말씀하셨다. 나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에 대해 알려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전에는 신을 믿기만 하면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는 것으로 상상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신다. 여기서 하늘 나라란 저 멀리에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아마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 자기원인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존재하려면 이 땅에서 매어있는 것을 풀라고 하신다. 그것들이 무엇일까? 내가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의지하고 있는 사회적 통념과 관습, 고정관념일 것이다. 이런 외적인 것들에서 풀려나야 자신으로서 충만할 수 있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고, 그것이 구원임을 말씀하신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을 때,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예수님이 말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로마서, 13, 9) 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나는 외적인 것에 의지하며 살았기에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대가를 바랐다. 물질을 채워준다든지, 내가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신의 특별한 은총 같은 대가 말이다. 또한, 차별적인 시선을 가지고 나보다 위, 아래를 나누며 이웃을 사랑했고 사랑을 통해서 상대를 소유하려고 했다. 그렇게 억지로, 당위로 사랑을 실천하다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폭발하기도 했다. 봉사도 그랬다. 베풀고 나누면서도 명예와 남들의 인정을 바랐다. 결국 명예가 충족되지 않으면 나중에 남는 것은 억울함과 서운함 뿐이었다. 예수님이 말한 무조건적 사랑은 나로서 충만할 때, 내가 존재하는데 어떤 외적 원인이 필요 없을 때 가능하다. 나로서 충만한데 무슨 대가가 필요하겠는가?

내가 구원이라고 믿고 의지했던 외적 기준들에서 하나하나 벗어날 때, 대가를 바라지 않게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은 스스로 존재하는 힘이 커지는 것이니 허무가 아닌 충만한 삶일 것이다. 이것은 물론 힘든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내적 저항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이 쉽다면 모두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할 것이다. 신성함은 모두에게 흐르는 것이기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 구원은 받거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하는 것이다. 내가 구속에서 벗어나고, 나의 외적 원인에 대해 질문하는 만큼 신성함을 향해 가는 것이고 완전성을 향하는 것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길이다! 구원은 거기에 있다!

annie-spratt-_WcSWRvpAnY-unsplash내가 구원이라고 믿고 의지했던 외적 기준들에서 하나하나 벗어날 때, 대가를 바라지 않게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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