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가 아무리 생각 없이 수의대에 왔다고 해도, 남들 따라 소동물 수의사를 선택했다고 해도 누군가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만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수의사로서 환자인 동물을 치료하는 데서 직업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의 이런 바람은 곧바로 그다음 스텝에서 막혔다. 동물을 위한 의사라는 게 대체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제인 구달처럼 속세를 떠나 야생에서 동물들과 함께 생활해야 알 수 있는 걸까? 난 그 정도로 용감하진 않은데…. 의사 한번 되려다가 강제로 자연인이 돼야 할 판이라니, 뭐 이런 폭탄 같은 직업이 다 있어?
이런 답도 없던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에, 글을 한번 써 보지 않겠냐는 얘길 들었다. 동물병원에 대해서? 좋지~ 동물병원에서 일어나는 인간 중심적인 행태를 폭로하면 되려나. 너무 자조적인 글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글을 제안해준 언니가 얘기했던 건 완전히 새로운 얘기였다. 수의사의 위치에서가 아닌,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병원 관찰기를 써 보라는 것이었다. 서두는 대충 이렇다. 동물병원에는 세 마리의 동물이 있다. 반려동물 한 마리, 그리고 보호자와 수의사란 두 마리 호모 사피엔스다….
세 마리의 동물. 생물학적으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은 내게 굉장히 참신하게 다가왔다. 세 마리 동물이 좁디좁은 동물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자. 보호자-사피엔스와 수의사-사피엔스는 반려동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치료를 한다는 수의사-사피엔스는 왠지 무기력하게 꾸역꾸역 일을 하며, 반려동물은 제 아픈 대로 난리를 치고 있고, 보호자-사피엔스는 아프다는 반려동물보다 더 아픈 듯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모든 인간적인 상황 설명을 떼어놓고 본 동물병원 치료의 현장은 정말 이상하고, 한편으론 웃긴다. 숨막힐 듯이 병원을 장악하고 있던 인간중심주의도 여기에선 한두 마리 동물의 아집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게다가 그 고집이란 게 또 얼마나 유별난지…. 그리고 그제서야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대체 호모 사피엔스란 동물은 어쩌다 이런 별난 아집을 갖게 된 걸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