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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물병원에 갑니다] 수의사, 한 마리 호모 사피엔스가 되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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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10-06 08:29 조회7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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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 한 마리 호모 사피엔스가 되다(下)
박소담(남산강학원)

호모 사피엔스, 인간의 무게를 덜다

동물 복지의 최첨단에 위치하는 동물병원의 현장마저도 인간 중심적인 치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데 동물병원을 찾아오는 동물들이란 거의 가족이다시피한 ‘반려’동물들이 아니던가. 때는 바야흐로 반려동물 천만 가구 시대. 도시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인터넷을 통해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도 교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점차 많은 사람들이 사람보단 동물과 함께 살기를 선택하고 있다. 반려동물과의 관계란 이미 주위의 얄팍한 인간관계보다 더 큰 의미로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동물을 단순히 제 만족으로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면, 동물과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고민해보지 않았을 리 없다. 혹 동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인간적인 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를. 하물며 그런 보호자들과 반려동물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수의사들에게서랴!

하지만 대부분의 수의사들은 이 문제를 무시한 채 잘만 산다. 인간이 생각하는 고통이 으레 동물의 고통이겠거니 여기거나, 설령 그 생각이 비껴간다 한들 어차피 수의학이라는 게 인간이 만든 학문이니 별수없다는 식이다. 수의사 역시 인간 사회 속에 위치한 직업이니, 인간들 사이에서 의미가 있다면 그만 아닌가. 전문적인 기술을 익혀 보호자를 만족시키고, 다른 수의사들에게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다. 할 공부도 많아 죽겠는데, 동물이 치료를 원하는지 아닌지 고민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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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아무리 생각 없이 수의대에 왔다고 해도, 남들 따라 소동물 수의사를 선택했다고 해도 누군가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만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수의사로서 환자인 동물을 치료하는 데서 직업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의 이런 바람은 곧바로 그다음 스텝에서 막혔다. 동물을 위한 의사라는 게 대체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제인 구달처럼 속세를 떠나 야생에서 동물들과 함께 생활해야 알 수 있는 걸까? 난 그 정도로 용감하진 않은데…. 의사 한번 되려다가 강제로 자연인이 돼야 할 판이라니, 뭐 이런 폭탄 같은 직업이 다 있어?

이런 답도 없던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에, 글을 한번 써 보지 않겠냐는 얘길 들었다. 동물병원에 대해서? 좋지~ 동물병원에서 일어나는 인간 중심적인 행태를 폭로하면 되려나. 너무 자조적인 글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글을 제안해준 언니가 얘기했던 건 완전히 새로운 얘기였다. 수의사의 위치에서가 아닌,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병원 관찰기를 써 보라는 것이었다. 서두는 대충 이렇다. 동물병원에는 세 마리의 동물이 있다. 반려동물 한 마리, 그리고 보호자와 수의사란 두 마리 호모 사피엔스다….

세 마리의 동물. 생물학적으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은 내게 굉장히 참신하게 다가왔다. 세 마리 동물이 좁디좁은 동물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자. 보호자-사피엔스와 수의사-사피엔스는 반려동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치료를 한다는 수의사-사피엔스는 왠지 무기력하게 꾸역꾸역 일을 하며, 반려동물은 제 아픈 대로 난리를 치고 있고, 보호자-사피엔스는 아프다는 반려동물보다 더 아픈 듯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모든 인간적인 상황 설명을 떼어놓고 본 동물병원 치료의 현장은 정말 이상하고, 한편으론 웃긴다. 숨막힐 듯이 병원을 장악하고 있던 인간중심주의도 여기에선 한두 마리 동물의 아집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게다가 그 고집이란 게 또 얼마나 유별난지…. 그리고 그제서야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대체 호모 사피엔스란 동물은 어쩌다 이런 별난 아집을 갖게 된 걸까 하고.

friendly-three-4602625_640모든 인간적인 상황 설명을 떼어놓고 본 동물병원 치료의 현장은 정말 이상하고, 한편으론 웃긴다.

세 마리 동물이 찾아오는 동물병원의 풍경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모습이다. 그것은 그저 인간중심적이기 때문에 빨리 치워버려야 할 것이기 전에, 인간 스스로도 탐구해야 할 호모 사피엔스의 모습이었다. 무기력하게, 때론 호들갑을 떨며 다른 동물을 대하는 호모 사피엔스들. 이들은 왜 이토록 기묘한 방식으로 타 동물들을 대하는가? 인간 수의사의 위치에서는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던 고민이, 한 마리 동물이 되자 여러 질문들이 되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방식으로 타종들과 관계 맺고 있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지도 감이 잡히겠구나. 하여 동물을 치료하기 앞서, 동물을 이해하기 앞서 일단 호모 사피엔스다!

나는 앞으로의 연재에서 나의 일터인 동물병원에서부터 그 너머까지, 한 마리의 호모 사피엔스로서 동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써 내려가려 한다. 돈은 벌어야겠고,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일하고 싶지만은 않은 한 마리 수의사의 임시변통이라 할 수 있겠다. 세 마리 동물이 드나드는 동물병원에서 보호자는 동물의 주인이 아니고 수의사는 동물을 치료하는 자가 아니다. 그저 제 앞가림하기 바쁜 두 마리 호모 사피엔스들일 뿐. 그러니 그들을 새롭게 각각 동거-인간, 그리고 치료-인간이라 부르도록 하자. 인간들과 함께 지내는 반려동물은 동거-동물이 된다. 이러한 동물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모습은 저마다의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이 질문을 하나하나 마주해 나갈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롯한 동물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재가 수많은 동물들과의 만남으로 나아갈 첫걸음이 되기를 바라며. 그래서 지금, 동물병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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