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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 마음이 이치다 – 심행합일(心行合一), 바보야, 문제는 앎이 아니라니깐!(2)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21-10-15 21:11
조회 : 309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 슬기로운 유배 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3-3. 마음이 이치다 - 심행합일(心行合一), 바보야, 문제는 앎이 아니라니깐!

 
문리스(남산강학원)

3-3-2. 마음과 앎 혹은 '앎에 맞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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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고전의 언어는 굉장히 어렵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아시아 고전들은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한자어들이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책으로 읽거나 강의를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아도 막상 글을 써보면 혹은 말로 해보려고 하면 그 말들이 나한테는 써먹어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 저는 고전의 말들을 될수록 자주 입으로 소리내어 말해보라고 주문합니다. 어떻게든 내 입으로 자꾸 써먹어야 한다고, 써먹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되어야 한다고.

양명학을 공부하다 보면 치양지니 앎이니 마음이니 이치니 하는 등의 말을 자주 중얼거리게 됩니다. 일상의 평범한 대화에서라면 평생 한 번도 사용해볼 일이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한, 양지니 격물이니 하는 등등의 말도 자주 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말들을 일상에서 어떻게 내 입으로 써먹을 수 있을까요.

그냥 통째로 문장을 외워버리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낭송(암송)은 정말 좋은 공부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앞과 뒤가 자연스럽게 본래 내 것인양 용법을 갖기 위해서는 뜻도 뜻이지만 그냥 그 소리의 리듬을 무작정 따라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딱히 동양 고전만 그런 건 아니겠습니다만 현대인들에게는 한자로 된 동아시아 고전의 언어가 오히려 알파벳권 문자의 번역 언어들보다 훨씬 이질적이고 외계적인 언어일 것입니다.

‘양지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다만 현재의 기미[幾]를 알 뿐이니……’ 언젠가 양지에 관한 양명의 문장들을 읽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지는 바로 그때의 옳음을 아는 것이고, 한 마디로 치양지는 때에 맞는 앎을 행하라는 뜻인데……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양지(良知)를 마음[心]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양지는 다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시비지심]이다”(288조목). 이를테면 양지는 분명 앎이면서 마음이라는 말인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생각. 아무 생각없이 걸어가던 산책길이 갑자기 눈 앞에서 뚝 끊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앎이 왜 마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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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양지는 분명 앎이면서 마음이라는 말인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생각.
아무 생각없이 걸어가던 산책길이 갑자기 눈 앞에서 뚝 끊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앎이 왜 마음이지?

경신년(庚申年, 1520, 양명 49세)에 건주(虔州)에서 다시 선생을 뵙고 물었다 : 근래의 공부가 비록 핵심을 조금 깨달은 듯하지만 편안히 마땅하며 흔쾌히 즐거운 곳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선생께서) 대답하셨다 : 그대는 도리어 마음에서 각개의 천리를 찾는데, 이것은 바로 소위 이치[理]가 장애가 된다[理障]는 말이다. 여기에는 어떤 비결이 있다.

(구천이) 말했다 : 어떠한 것인지 묻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 단지 앎을 철저히하는 것일 뿐이다.

(구천이) 말했다 : 어떠한 것이 (앎을) 철저하게 하는 것입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 그대가 갖고 있는 한 점의 양지가 그대 자신의 준칙이다. 그대의 의념이 붙어 있는 곳에서 그것은 옳은 것을 옳은 것으로 알고 그른 것을 그른 것으로 아니, 다시 조금이라도 그것을 속일 수 없다. 그대가 다만 자신의 양지를 속이려 하지 않고 착실하게 그것에 의거하여 (무엇이든) 행한다면 선은 곧 보존되고 악은 곧 제거될 것이다. 그러한 곳이 얼마나 온당하며 시원스럽고 즐거운가! 이것이 바로 격물의 참된 비결이며, 치지의 실질적인 공부이다. 만약 그러한 참된 기틀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격물할 수 있겠는가? 나도 근년에 와서야 그처럼 분명하게 체득해 내었다. 처음에는 오히려 양지에만 의거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을까 의심했지만, 정밀하고 자세하게 살펴보니 조금의 결함도 없었다.(<전습록> 206조목/ 강조는 인용자)

‘알맞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이 말을 ‘앎에 맞다’이라는 말고 고쳐 쓰곤 합니다. 실제로  우리말의 ‘알맞다’라는 말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알맞다’라는 말은 말하는 주체의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요컨대 마음이 알맞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마음이 그렇다고 여길까요. 저는 그것이 앎에 맞을 때, 즉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가 때에 맞는 양지 실천일 때라고 생각합니다.

인용된 206조목 속 ‘앎을 철저하게 하다’는 구절은 <대학>의 3강령 8조목중 ‘치지(致知)’입니다. 양명 선생 49세 때의 문답이니 이때는 아직 치양지란 말이 본격화되기 이전이었을 것입니다(cf.양명의 치양지설은 49세~50세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훗날 양명은 <대학> 팔조목의 하나인 치지가 곧 치양지라고 밝혔다). 그런데 구천과의 이 문답에서 사실상 양명은 앎을 철저하게 하는 것을 치양지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것은 마음이 온당하고 시원스럽고 즐거운 상태라고 덧붙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철저히하는 것이 마음의 온당쾌락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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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그것은 마음이 온당하고 시원스럽고 즐거운 상태라고 덧붙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철저히하는 것이 마음의 온당쾌락처인 것입니다.

앎은 어떻게 마음의 기꺼움이 될 수 있을까요? 마음을 기껍게하는 앎이 따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앎 그 자체가 이미 마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의 앎에 마땅한 세상 살이를 겪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앎이 그러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앎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그것, 그 모양이 바로 우리의 앎입니다. 그리고 이 앎이 양지(良知)입니다. 양지가 누구에게나 있고, 스스로 갖고 싶지 않다고 없앨 수도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매사 사사롭게 마음을 쓰려고 노력하는 길, 양지에 거슬러 살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며 사는 길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그것은 진짜 ‘부지런하고(!) 성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힘들고 고된 길이지만, 길이 아닙니다.

마음의 길은 하나입니다. 앎에 맞거나 그렇지 않거나! 앎에 맞지 않다면 길이 아닌 것입니다. 앎(양지)을 가리거나 외면해야 한다면 그것은 지금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지금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면(양명에 따르면 마음이 온당하고 시원하고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면),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앎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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