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고전의 언어는 굉장히 어렵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아시아 고전들은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한자어들이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책으로 읽거나 강의를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아도 막상 글을 써보면 혹은 말로 해보려고 하면 그 말들이 나한테는 써먹어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 저는 고전의 말들을 될수록 자주 입으로 소리내어 말해보라고 주문합니다. 어떻게든 내 입으로 자꾸 써먹어야 한다고, 써먹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되어야 한다고.
양명학을 공부하다 보면 치양지니 앎이니 마음이니 이치니 하는 등의 말을 자주 중얼거리게 됩니다. 일상의 평범한 대화에서라면 평생 한 번도 사용해볼 일이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한, 양지니 격물이니 하는 등등의 말도 자주 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말들을 일상에서 어떻게 내 입으로 써먹을 수 있을까요.
그냥 통째로 문장을 외워버리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낭송(암송)은 정말 좋은 공부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앞과 뒤가 자연스럽게 본래 내 것인양 용법을 갖기 위해서는 뜻도 뜻이지만 그냥 그 소리의 리듬을 무작정 따라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딱히 동양 고전만 그런 건 아니겠습니다만 현대인들에게는 한자로 된 동아시아 고전의 언어가 오히려 알파벳권 문자의 번역 언어들보다 훨씬 이질적이고 외계적인 언어일 것입니다.
‘양지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다만 현재의 기미[幾]를 알 뿐이니……’ 언젠가 양지에 관한 양명의 문장들을 읽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지는 바로 그때의 옳음을 아는 것이고, 한 마디로 치양지는 때에 맞는 앎을 행하라는 뜻인데……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양지(良知)를 마음[心]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양지는 다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시비지심]이다”(288조목). 이를테면 양지는 분명 앎이면서 마음이라는 말인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생각. 아무 생각없이 걸어가던 산책길이 갑자기 눈 앞에서 뚝 끊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앎이 왜 마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