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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ㅣ새로운 신을 만나다] 신은 끊임없는 연결이다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21-11-16 22:24
조회 : 150  
이경아(감이당)

내 탓이오, 아니 네 탓이오

기독교에서 신을 찬양하는 호칭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많이 쓰는 호칭 중 하나가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다.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란 하늘에 계시면서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다스리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존재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알려주듯 정의로운 심판자, 잘못하면 엄하게 꾸짖는 무서운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 덕에 편하게 먹고 사는 자식들 등등 이런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거룩하다는 의미가 뭘까? 나는 기도 때마다 거룩하신 신을 찾고 불렀지만, 막상 신의 거룩함이 무엇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신의 거룩함이란 초월적으로 존재하면서 만물에 베푸는 신의 사랑이나 은총 같은 것으로 여겼다. 나는 신은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과 떨어져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며, 기적과 계시를 통해 만물을 다스리고, 만물에 관여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니 신은 저 위에, 나는 이 아래에 존재하며, 신의 은총으로 내가 별 탈 없이 살아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신이 만물에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나도 주변에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간이 많아지기도 했고 남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봉사를 안 했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서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여겼고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봉사는 내가 신에게서 받은 사랑을 남에게 나눈다는 의미가 있었기에 가능한 한 기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봉사 현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나는 봉사하는 곳은 갈등이 없고 서로 양보하며 지내는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직장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그 안에는 늘 반목과 이기심이 넘쳤다. 반목의 한가운데에는 사제에 대한 쟁총 경쟁이 있었다. 사제를 신의 대리자로 생각하니 사제의 눈에 더 들려고 하고, 사제에게 관심과 사랑을 더 많이 받으려고 했다. 사제의 관심 정도가 신의 사랑의 표지라고 여겼다.

우린 입으로는 형제님, 자매님을 외치지만 그건 말뿐이었다. 각자 자신이 신의 사랑 또는 사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또는 사랑을 더 받겠다는 욕심이 있었기에 봉사를 할수록 화합이 아닌 반목이 계속되었다. 서로 자기를 내세우고 싸우지만 미사 때는 각자의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기도했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아마도 마음속으로는 네 탓이요)를 외쳤다. 그럴 때마다 궁금했다. 대체 거룩한 신은 어디에 계시고 이럴 거면 봉사를 왜 하는 걸까?

나도 그랬다. 사제에게 잘 보이는 게 신에게 잘 보이는 거라고 착각했기에 봉사할 때도 사제 눈에 들려고 했다. 그래서 사제의 사랑을 두고 일어나는 봉사자들 간의 질투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사제랑 친한 사람을 보면 신이 예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한, 나는 나고 타자는 타자였기에 봉사도 별개의 존재들이 모여서 자신이 받은 소명과 사랑을 실천하고 신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나와 신과의 관계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했다. 신을 섬기면서도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거나, 신을 섬긴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신의 거룩함이란 무엇인지, 신과 나는 무슨 관계이며 나와 타자는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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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자신이 신의 사랑 또는 사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또는 사랑을 더 받겠다는 욕심이 있었기에 봉사를 할수록 화합이 아닌 반목이 계속되었다.

신은 공감과 연결로 존재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이란 우리 삶과 분리되어있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신은 삶의 현장에 내재한다. 신이 만물에, 우리 삶에 내재한다는 건 신을 높은 데서, 특별한 기적 속에서 찾을 게 아니라 내 삶의 현장이 신성함을 향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처음에 신이 내재한다고 하니 앞으로 힘들 때 어디에 기도해야 하는지, 어디에 잘 보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예전처럼 의지하고 기도할 대상부터 찾았다. 나에게 신은 초월적이든 내재하든 여전히 뭔가 힘 있는 대상이었고, 신성함이란 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신이 내재한다면 더 이상 무언에게 의지하고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나 스스로가 성스러움을 실현하는 존재가 되라는 의미인 것 같다.

또한, 신이 만물에 내재한다는 것은 만물이 신성함을 가지고 있기에 모두가 신성한 존재임을 말한다. 섬겨야 할 것은 저 홀로 높으신 분이 아니라 만물이다. 하지만 나는 만물이 아닌 나에게 은총을 내려주는 신만 섬겼다. 그러니 신의 은총을 더 많이 받는 것 같은 사람을 질투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을 사랑하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신을 사랑하면서 인간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만물을 섬겨야 한다면 나와 뜻이 안 맞고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도 섬겨야 한다는 것인데 그냥 나 혼자 신성하게 살 수는 없는 걸까?

스피노자는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1정리18)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내재성은 만물이 원인과 결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연결 자체가 신이고 신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다. 만물 안에 인과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만물은 멈춰있을 것이다. 멈춰있다는 건 죽은 것이니 만물이 존재할 수 없다. 만물이 끊임없이 생산하고 존재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니 나 혼자 신성하게 산다는 것은 모순이다. 신성함이란 연결이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만물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주변의 몇몇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내가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모든 개물즉 한정된 존재를 갖는 유한한 모든 것은마찬가지로 한정된 존재를 가지는 유한한 다른 원인에 의해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결정되지 않는 한 존재할 수도 작용하도록 결정될 수도 없다그리고 또이 원인도 한정된 존재를 갖는 유한한 다른 원인에 의해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결정되지 않는 한 존재할 수도 작용하도록 결정될 수도 없다이와 같이 무한히 이어진다.(1정리28)

모든 개물 즉 만물은 한정된 존재를 갖는 유한한 것들이고 이런 개물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만물은 다른 것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무한한 인과 연쇄 속에서 존재한다. 아메바조차도 태양과 공기가 있어야 살 수 있다. 나를 예로 들어보면 나랑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20명이라고 해보자. 나는 20명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다. 또한, 이 20명은 각자가 20명 이상이나 이하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이고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이다. 이렇게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인간과만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마시는 공기, 습도, 온도, 옷, 음식…등등 수많은 물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게 나는 무한히 이어지는 우주의 다른 모든 것들과 상호 인과의 결과로서 존재하고 작용한다.

나는 무한한 연결 속에서 존재하고 이 연결이 신이다. 그러니 오로지 연결되는 것으로서만 신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신을 사랑하지만, 신이 연결이라는 것을 모르니 사람들과의 연결은 뒷전이고 초월신과의 관계, 신부님과의 관계가 먼저였다. 그것이 신앙심이 깊은 거라고 착각했다. 신과 연결되고자 하면서 오히려 스스로 고립되고 신과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봉사를 할수록 갈등이 생기고 신앙이 깊어지지 않을 수밖에.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그로 인해 내가 사는 것이라면, 끝없는 연결이 나를 살리는 존재 조건임을, 그것이 신임을 안다면 적어도 나 혼자 은총 받겠다고,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떻게 세상과 연결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더 연결되기 위해 타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을 통해서 만물을 연결하는 신의 거룩함에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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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는 무한히 이어지는 우주의 다른 모든 것들과 상호 인과의 결과로서 존재하고 작용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시다

타자와 더 연결되고 공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나눈 대화에서 그 방법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길에 지친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말을 건네셨다. 당시 유다인들에겐 공적인 장소에서 여인에게 말을 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불어 사마리아인과는 더더욱 상종하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고 이교도의 율법을 따른다고 멸시했고 예루살렘 성전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별했다. 이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을 걸고 물을 달라고 한 것은 그 자체가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여인 입장에서도 가족이 아닌 남자와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기에 처음에는 두려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처음 만난 예수님의 태도에서 진심을 느꼈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남편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여인을 하나의 인격이 아닌 생활의 도구로 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속 상처와 고통을 공감하시고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다가가셨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 이 성서 구절을 읽었을 때 사마리아인들이 차별을 받고 사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신 거라고 여겼기에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는 것도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사마리아인을 멸시하는 게 당연시되고, 여인이 생활의 도구로 대해지는 시대였어도 예수님에게는 누군가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마리아 여인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셨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받은 사랑으로 인해 그동안의 상처받고 고립된 삶에서 벗어났고 마을에 달려가서 메시아가 오셨음을 전했다. 그녀는 자신이 예수님에게 받은 사랑과 기쁨을 혼자만 가지고 있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녀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였다. 심지어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요한복음, 4, 40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그렇게 싫어했던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이틀간 머무르기까지 하셨다.

편견과 관습에서 벗어나고 계급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에게든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타자와 공감하고 연결되는 모습 아닌가? 예수님으로 인해 이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과 연결되고 마을 사람들과 연결되었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연결되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복음, 4,34예수님은 내가 존재하는 것도 무한한 타자들 덕분이니 내 생명을 가능하게 한 무한한 타자들과 연결되려고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신다. 무한한 연결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일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공감하고 연결하는 존재가 되라고 그것이 신의 거룩함에 다가가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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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연결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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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팔랑   2021-11-18 10:03:28
 
경아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신을 스피노아에게서 배운 대로 막연히 자연의 법칙성으로 이해했지 그것을 개체들의 무한한 연결로 까지는 사유하지 못했었는데 샘의 글을 읽으며 많은 것들을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결된 존재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저도 다시 고민해 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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