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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죽음의 길, 또 다른 삶의 문이 되다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7-07-13 17:02
조회 : 149  


죽음의 길또 다른 삶의 문이 되다



배서연(화요 감이당 대중지성)

 


문득 어릴 적 죽음에 대한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골목 맨 끝집 할머니하얀 솜뭉치 같은 머리를 뒤꼭지에 매단 할머니는 평상에 앉아 콩을 오물거리면서 오늘 죽는다고 했다죽는다그 말에 겁을 먹은 나는 공기놀이를 하다말고 집으로 내달렸다다음날 큰 숨을 몇 번이나 들이쉰 끝에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골목 안을 살폈다그런데 할머니는 여전히 콩을 입에 넣으며 죽는다나 죽는다” 하고 있는 게 아닌가안도감과 실망감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나는 집으로 오며 생각했다. ‘죽는다고 했는데...콩을 계속 먹으면 죽나?...죽는 게 뭐지?’


소세키가 1908년에 발표한 갱부의 주인공 에게서 끝집 할머니 못지않은 아이러니한 죽음의 냄새가 난다이는 생명줄을 움켜잡고 있으면서 죽음 타령을 하고 죽어 가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있는 우리네 인간의 자화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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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자의 욕망


 ‘는 세상에 드러나는 게 두려운지 아니면 수시로 바뀌는 자신을 하나로 단정지울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인지 내내 이름도 밝히지 않는다임자자네이봐로 불리는 나의 신상을 들쳐보면 19세의 청춘으로 부모가 상당한 지위를 가진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이다몇 번 죽음을 넘겨다본 경력이 있는데 이유는 두 소녀로부터 시작된다내 마음을 뒤흔드는 소녀와 부모님이 정해준 착하고 고전적인 소녀 사이에서의 갈등이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불화를 겪으면서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결국 나는 게곤 폭포에서 멋진 최후를’ 결심하며 도쿄를 떠나 북망산으로 향한다불안과 피로로 지친 나는 길가 찻집 앞에서 멈칫거리다 조조 씨에게 포착된다그는 갱부 후보생을 낚아 광산으로 데려다 주는 걸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조조 씨나를 재빨리 스캔하듯 훑어보더니 미끼를 던진다. “임자일할 생각 없나?(같은 책 25) 일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자 또는 살려고 하는 자나 하는 행위다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 일을 한다일은 곧 생명 살림이다바꿔 말하면 죽은 자죽으려는 자에게는 일이나 돈은 하등 필요가 없는 품목이다그런데 조조 씨세상이 싫어 죽음 길에 나선 도련님에게 일을 권유한다필요 없다는 돈까지 많이 벌게 해주겠다고 장담을 한다일꾼을 낚는데 어지간히 때가 묻은 조조 씨가 헛다리를 짚은 거라고참말로 괜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쓸데없는 예단일 뿐이다. 세상에는 앞뒤 안 맞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 나는 조조 씨의 그물에 맥없이 걸려든다낯선 곳에서그 누군가가비록 꾸질꾸질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지언정 나를 불러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뻐 발길을 돌린다. “일해도 됩니다만.”(같은 책 26) 그렇게 죽겠다고 호기롭게 옷 뒷자락을 허리에 찔러 넣고 삶으로부터 줄행랑친 사람이 일을삶의 활동을 하겠단다도련님의 말이 황당하긴 해도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에티카』 비홍출판 168)다고 하니도련님의 변덕을 운운하는 건 생명 본성에 위배될 뿐이다그래서 그런지 몸과 마음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고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하나지만 다른 나라는 것이 오직 나만의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다한참 청춘인 나는 한술 더 떠서 세상을 통틀어 자신만큼 갱부에 적합한 인물이 결코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까지 한다하긴 사람도세상도 다 싫어 자신을 어둠 속에 감추고 싶으니 쇠망치로 돌을 꽝꽝 깨는 지하세계야말로 나에게 안성맞춤인 것이다나는 잠시 죽음을 유예한 굿길을 향해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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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나를 만나다


세상에 염증을 느낀 나는 모든 인연을 끊으려고 길을 나섰다하지만 그 길은 만남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일 뿐이다길 위의 만남은 길든짧든 상대가 누구든 인연 아닌 것이 없고 허튼 것이 없다내가 만난 사람들나에게 어떤 존재들일까?


나는 굿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눈이 짓무르고 부스럼투성이인 사내를 맞닥뜨리자 자리를 피하고 창밖으로 침을 뱉는다그저 살아서는 부잣집 귀한 도련님이요 죽는다 한들 게곤폭포의 영웅이 될 몸이니 이런 지저분한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조차 용납할 수가 없다삶의 가장 밑바닥을 향해 가면서도 아직 미추(美醜), 정갈함과 지저분함에 대해 시비분별을 하는 나나는 여전히 부잣집의 고상한 도련님일 뿐이다그런데 사내의 얼굴처럼 나의 어떤 곳혹 마음이 이렇게 짓무르고 부스럼투성이가 아닐지?


기차에서 내려 여기저기 기웃대던 조조 씨는 간이식당에서 나온 붉은 담요에게 작업을 건다나를 갱부로 낚을 때와 똑같은 태도와 말투다나는 신분지식외모 무얼 따져 보나 붉은 담요보다 질이 높은 인간이다그런데 무지몽매하게 생긴 촌뜨기 붉은 담요와 나를 동등하게 대하다니요만치라도 내가 더 갱부로 적합하다고 얼굴을 세워 줄 만한데 무심한 조조 씨 아주 공명정대하다내 마음 몰라 줘서 화나고 억울해서 집을 나왔는데 길 위의 세상도 다를 바 없으니 참으로 억울할 만도 하다하지만 나는 짐승기계가 되러 가는 길 위에 서 있다이 상황에서조차 인정받고 싶고 어깨를 올리고 싶어 하는 나는과연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런데 잠깐내 눈에 한없이 바보같이 보이는 이 자걸음걸이도 힘이 있고 체격도 좋고 땅에 떨어진 까맣고 축축하고 께름칙한 고구마를 좋은 고메라며 냉큼 입에 넣는 낙천주의자가 아닌가지금 여기는 문명의 도시 도쿄가 아니고 첩첩 산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이 길에서 필요한 건 풍요에 길든 신체가 아니다두 여자 사이에서 저울질하다 줄행랑 친 비겁함도 아니다상대보다 낫다는 우월감이나 허영심이 아니라 험한 산길 거뜬히 오를 수 있는 튼튼한 다리와 말라비틀어진 고구마든 풀잎이든 뭐든 먹을 수 있는 식성이 필요할 뿐이다이렇게 보면 나는 붉은 담요보다 한참 하수가 아닌가? 어쨌거나 순진한 바보 둘을 굴비처럼 엮어 가던 조조 씨다리 건너편 쪽에서 꼬맹이를 발견한다이 꼬맹이는 고구마를 건네자 낚아채듯 받아먹고는 인사도 없다조조 씨 직업의식이 발동되어 신상조사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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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디로 가는 거냐?” (중략)

아무 데도 안 가요.” (중략)

그럼 어디로 돌아가느냐? (중략)

아무 데로도 안 돌아가요.” (같은 책 104)

 

이 작은 떠돌이가 하는 말인 즉 여여부동(如如不動)’이며 불거불래(不去不來)’자연 속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오고 감이 없는 삶을 사는 꼬맹이굳이 체면도 차릴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타자에 대한 기대도 원망도 우월감도 없다. 물론 자괴감도 없고 타인의 마음을 구걸하지도 않는다다만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 속에서 뒹굴 듯 살아갈 뿐이다문명과 제도 속에서 풍요를 누리고 살아온 나세상과 사람들 눈치를 보며 부초처럼 흐느적거리다 여기까지 오게 된 나에게 꼬맹이는 묘연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깊은 산속 어둠을 뚫고 앞서 간 꼬맹이그의 딱딱거리는 막치 짚신 소리가 너는 누구냐고어떤 존재로 살고 있냐고 묻는 듯하다.

 


또 다른 삶의 문


한바에 작은 봇짐처럼 내던져진 나는 격한 노동으로 찌든 갱부들의 야유와 질타 속에서 굿길 생활을 시작한다하쓰 씨를 따라 간 갱내그 길은 어디 하나 만만한 게 없다허리를 폈다가는 이마가 깨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고좁고 낮은 자루 같은 굴을 엎어져 기다 보면 얼음 같은 차가움이 온 몸으로 파고든다허리를 내밀어 몸을 접지 않으면 끝 모르는 낭떠러지로 직행할 일밖에 없다다이너마이트의 화염에 숨은 막히고 구십도 각도의 절벽에 세워진 사다리는 한 발 떼기가 잔도처럼 위태롭다.

 

  손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시커먼 어둠 속으로 거꾸로 곤두박질칠 것이다....나는 일곱 번째 사다리의 중간쯤에서 화염과 같은 숨을 내뱉으며 노동의 어려움을 절감했다그러자 뜨거운 눈물이 눈 안 가득했다(같은 책 262)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갱의 가장 밑바닥, 8번 갱도까지 가게 된 나는 온갖 고통과 곤비와 처참을 온 몸으로 체득한다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정나미 떨어질 만큼 극한 속에서 나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그 사이사이 마음은 쉴 새 없이 요동을 치며 원망오기로 변하고 오기희망이 되는가 하면 어느새 희망절망이 된다그 절망이 얌전을 낳고 얌전은 공중제비 하여 오만이 되기도 한다삽시간에 생겨났다 흩어지고 사그라지다 또 생겨나는 마음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이 마음이란 물건의 까불림이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임을 신라의 고승 원효는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데 나는 아직 해골바가지를 찾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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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미굴처럼 퍼져 있는 갱도 안을 헤매다 야스 씨를 만난다절망 속에서 만난 그는 짐승처럼 적대감을 드러내는 만 명의 갱부와는 사뭇 다르다야스 씨의 품격 있는 말과 고상한 행동배려겸손삶에 대한 진솔한 태도는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울림그건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삶을 진솔하게 대면한 자들의 공명이다한 줌의 햇빛도 허락지 않는 갱도의 막장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 마주앉은 두 사람의 만남한 사람은 자신의 윤리에 따라 전락의 밑바닥에서 진지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자멸과 전락의 사다리를 경험했다자신의 삶을 치열함으로 직면한 그들은 서로의 삶을 공감하며 염려한다특히 나에게 야스 씨의 말은 천금 같이 귀하고 초지(初志)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갖는다.(같은 책 263) 전락했지만 결코 전락한 적이 없는 자가 내뿜는 아우라그 아우라는 나에게 또 다른 삶의 길을 열어주는 희망이 되고 문이 된다.


우리 모두에게 주워진 삶과 죽음그 곳에는 결코 사느냐죽느냐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 사이에는 어떻게어떤 존재로 살 것이냐는 엄연하면서도 진지한 것들이 존재한다. 갱부의 는 귀띔한다지금까지의 삶을 멈추고 싶다면방향을 틀거나 또 다른 길을 내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무아(無我)을 알아채라고. 고정된 내가 없음과 일체유심조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당신의 삶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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