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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꽃상여를 타고 가신 어머니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7-11-03 20:05
조회 : 277  

4. 내 몸의 주인이 되자(2008~2017)

 

 

꽃상여를 타고 가신 어머니

 

오창희

 

 

영정 사진 속 어머니 

2015년 7월 14일 화요일 오전. ‘화요낭송스쿨’ 암송 오디션이 한창이었다. 작은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슴이 철렁한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고 했다. 아, 결국엔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런데 돌아가신 ‘것 같다’고? 나중에 들은 그날 아침의 상황은 이랬다. 여느 날처럼 아침 7시쯤 죽을 드렸는데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예 입을 벌리지도 않으셨다. 두어 번 더 권했지만 계속 입을 다문 채 고개를 가로저으셨고 올케가 두 다리를 주무르자 평소 구부러졌던 다리가 쭉 펴지며 바닥에 닿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보니 어머니는 평온한 얼굴에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씀이 없었단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없이 가셨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과 안 보고 싶은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결국 나는 다음날 예정대로 도서관 강의를 끝내고 어머니를 만났다. 이미 입관을 한 뒤였다. 큰오빠와 언니에게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가기 전에 입관의례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큰오빠가 전화를 했다. 그곳 상황이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으니 서운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참 동안 자꾸만 잠자는 듯한 그 모습이 떠올라 힘이 들었다. 그냥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의 그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영정 사진 속 어머니는 염주를 들고 미소를 짓고 계셨다. 뭔가 평소와는 다른 모습. 어머니는 스물네 살에 구안와사를 앓으셨다. 입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눈꺼풀의 신경이 죽어서 연세가 드신 이후로는 한쪽 눈꺼풀이 많이 쳐져서 거의 덮인 채 생활하셨다. 그리고 오른쪽 이마에는 콩알 만한 혹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사진에는 눈도 반듯했고 혹도 사라지고 없었다. 장례가 끝난 뒤 내가 사진 애기를 하자 큰오빠는 그렇게 반듯하게 해 놓으니까 얼마나 좋으냐고. 어머니도 생전에 그런 모습을 갖고 싶으셨을 거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의 삶 한 귀퉁이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평소의 그 모습 속에는 어머니의 삶이, 애환이 담겨 있었는데…….

 

넓은 영안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디에도 슬픈 구석은 없어 보였다. 그럴밖에. 흔히 말하는 호상이니까. 향년 아흔 일곱. 게다가 아들 내외의 봉양을 받으며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신 게 아닌가. 오랜만에 친척들과 지인들이 군데군데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늘 어머니가 주관하셨는데, 지금은 말없이 영안실에 누워 계신다. 오빠들은 문상객을 맞이하느라 여념이 없고, 올케들과 조카들도 모두 발걸음이 분주하다. 문상객이 뜸한 틈을 타서 다시 빈소로 갔다. 영정 사진 속 어머니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다. 한쪽 눈이 덮인 어머니, 『법화경』을 읽을 때 한 손으로 왼쪽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책을 읽으시던 그 모습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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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광중에 닿던 순간

7월 16일, 음력 유월 초하루. 절기로는 소서(小暑).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향했다. 바람이 불고 하늘은 드높고, 흡사 가을 날씨 같았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오빠들을 위해서 날씨가 큰 부조를 해 준다. 어린 시절 방학이면 어머니와 참 자주 가던 길이다. 아버지가 퇴직하신 뒤 고향에 계실 때 자주 가던 길이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 길을 갔지만, 그땐 그래도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렇게 허전하진 않았다. 이제는 고향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언제 다시 내가 이 길을 가게 될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안 계신 이 먼 고향을 다시 올 날이 있을까. 아마도 이 길이 마지막이 아닐까. 산도 길도 그 옆을 흐르는 물도 다 그대로인 듯한데 이제 어머니가 안 계시는구나. 

 

고향집 앞에는 꽃상여가 기다리고 있었다.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를 맞이해 주었다. 영구차에서 내려 어머니를 태운 상여가 집을 한 바퀴 돌았다. 대문을 통과하여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사랑마루를 지나, 이제는 고목이 된 감나무가 서 있는 곳, 그 옆의 상방, 어머니가 시집와 거처하던 그 방을 지나 뒤뜰을 돌아 안방을 지난다. 그 옆엔 지금은 베어버린 배나무가 있던 자리, 서울 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한참을 서성이셨다던 그 나무, 그곳을 지나 정지를 돌아 고방을 거쳐 마당에서 다시 잠시 머물렀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네 분 어른들 모시고 젊은 날을 보내셨던 곳이다.

 

할아버지 정자를 한 바퀴 돌고 앞산 아래 공터에서 노제를 지냈다. 우리가 왔다가 돌아갈 때면, 두 분이 우리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계시던 그 자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의례를 행하는데 그때와는 달리 왜 이리도 쓸쓸한지. 그때만 해도 집안 어른들이 고향을 지키고 계셨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와 고락을 함께 하던 분들은 모두 가셨다. 어머니가 워낙 고령이시라 친지들을 모두 앞세우셨다. 그제야 어머니가 말년에 느꼈을 외로움이 실감이 난다. 친척이자 친구였던 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실 때,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크셨을까. 언젠가부터 어머니의 시외전화도 뜸해졌었지. 오래 산다는 건 그만큼 오래도록 외롭게 지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제가 끝나고 어머니를 태운 상여는 장지로 향했다. 상두꾼이 메고 가는 상여 뒤를 천천히 따른다. 고향집이 점차 멀어지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누워 계신 그곳으로 가신다. 지금 이 길이 어머니와 함께 걷는 마지막 길이구나. 상두꾼 소리가 이 산 저 산에 울린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어~어야 어~어야 (……)” 조카들의 부축을 받으며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포크레인으로 닦은 흙길이 울퉁불퉁하다. 다칠까봐 조심조심, 관절을 걱정하는 내가 우습다. 이게 유명을 달리한다는 건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지 몸을 걱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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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묻힐 곳, 뒤에는 병풍처럼 산이 둘러져 있고, 앞이 트인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이다. 7월의 흙은 부드러웠고 묘소 주변은 녹음이 싱그러웠다. 지관이 하관 장면을 보면 안 되는 사람들을 호명한다. 거기에 내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천천히 내려가는 어머니의 관을 지켜보고 있었다. “턱”하고 관이 광중에 닿는다. 순간,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마음이 편안하다. 엄마가 이제야 그 고단한 삶을 마치셨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어쩌면 나도 은연중 이런 순간이 오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어머니의 고통에 마침표가 찍힐 그날이, 그와 함께 그런 어머니를 보는 나의 괴로움이 멈추어질 그 순간이 오기를. 상주들의 취토가 이어졌다. 내 차례가 왔다. 삼베 치마에 흙을 받아 세 번에 나누어 어머니 관 위에 뿌렸다. “취토, 취토, 취토!” ‘엄마, 아무 염려 말고 이제 편히 쉬세요’ 하고 마음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 무덤에 흙 한 줌을 뿌렸다는 게 이렇게 위로가 되다니. 장례 절차는 남은 자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시간인가 싶다. 

 

 

사랑 앞마루에 앉아

장지에서 내려와 고향집으로 갔다. 안채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이방에 이렇게 들어와 보는 것도 마지막일 테지. 어머니가 열일곱에 시집와 거처하시던 방. 내가 요양 차 왔을 때 기거하던 방. 뭔가 서먹함이 있다. 인연이 끝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정화, 정의, 영민이와 사랑 앞마루에 앉았다. 조카들이 어렸을 때 스무고개 놀이를 하던 그 마루다. 나지막한 돌담 너머로 저 멀리 다리 건너 장싯골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 그 앞 영해로 넘어가는 신작로에 오가는 차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퇴직을 하신 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곳에서 7년을 지내셨다. 우리가 서울에서 오는 날이면 두 분은 여기 이 마루에 앉아 신작로를 바라보고 계셨지. 앞산 중턱의 향나무도 여전히 건재하다. 저 나무에서 연상하여 할아버지 호를 지었다는 그 나무.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창호지로 따스한 햇살이 비치던 어느 날 오후, 아버지는 한자가 가득 적힌 책을 펴 놓으시고 내게 설명하셨다. 할아버지 정자에 “송원정”이라는 명을 붙인 내력을. 이후 죽 잊고 살았는데 왜 갑자기 저 나무가 눈에 띌까. 

 

대문 오른 편의 라일락도 잎이 무성하다. 마구간 옆 담 모퉁이에 아버지가 심으신, 해거리를 하던 대추나무 이파리가 넘어가는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인다. 대문에서부터 사랑과 안채, 변소로 이어지는 보도블록은 붉은빛이 많이 바랬다. 비가 오면 진창이 되곤 하던 마당에 어느 해 여름 오빠, 언니, 조카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저걸 까느라 어둑해져서야 저녁을 먹었지. 그날 그 저녁 어스름의 왁자지껄하던 마당의 분위기가 새삼 그립다. 그 사이사이로 작은 풀들이 줄지어 자랐고, 담 밑에도 뒤뜰에도 잡초들이 자랐다. 기와 위에도 풀이 삐죽삐죽 올라왔다. 이 동네에 ‘멸종위기 동식물 복원센터’가 들어선다니 이 집도 어머니와 그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우리 곁을 떠난다. 

 

구식 여자라 소박맞을까봐 초하루 보름으로 편지를 쓰며 마음을 졸이시던 어머니, 그런 며느리가 안쓰러워 장에 갔다 오실 때면 십전 소설을 사다주셨던 할아버지, 기나긴 겨울, 한가한 밤이면 동네 친척들에게 소설을 읽어주며 함께 웃고 울던 날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그 날들이 눈에 보는 듯 선하다. 어머니의 애환이 서린 집. 

 

이곳을 우리들도 조카들도 모두 좋아했었다. 여름이면 저녁을 먹고 이 마루에 앉아 수박을 먹고, 밤이 깊어지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하늘 가득 총총한 별을 보며, 북두칠성, 카시오페아를 찾다가 때로는 별똥별을 보기도 하고. 추석이면 마당 가득 고서들을 펼쳐 통풍을 시키는 것도 재미있었고, 수십 짝이나 되는 문을 바를 때는 또 얼마나 신이 났던지. 어느 해 여름인가 갑자기 고향집에 오고 싶어 작은오빠를 졸라 하룻밤을 지낸 그 날이 지금도 선명하다. 하루살이의 날갯짓이 창호지에 부딪는 소리까지 들리던 고즈넉한 그해 그 여름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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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머니도 고향집도 우리 곁을 떠났는데,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고향집이 건재했을 때는 잠자던, 그런 소소한 기억들이 마구 살아 움직인다. 어머니께 듣고 또 들어서 흡사 내가 그곳에 있었던 양 착각을 일으키는 많은 일들까지도 두서없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들도 내 입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어쩌면 소멸은 사라져 없어지는 게 아니라, 결코 소멸하지 않는 것으로 새롭게 인연을 맺게 하는 또 다른 존재 방식이 아닐까.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 내 몸에 새겨진 어머니와 새로운 인연의 장으로 들어가는 듯. 꽃상여를 타고 가신 어머니도 또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시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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