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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대칭성 세계로의 여행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8-03-14 15:05
조회 : 314  




대칭성 세계로의 여행


임 경 아





사랑, 내 안의 타자를 만나는 계기 

 

  엄마가 즐겨보셔서 몇 번 같이 보게 된 “황금빛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처음에 이른바 흙수저 여자가 재벌 3세 남자를 만나는 상투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재벌 3세가 사랑 때문에 집을 나온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래서인지 여주인공(서지안)도 남자에게 어차피 못버티고 집에 들어갈텐데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거 신경쓰인다고, 헛고생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남주인공(최도경) 대답이 재미있다. 최도경은 생전 처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한 달치 방세를 내지 못해 매일 3만원씩 열흘간 부담하기로 하고 셰어하우스에서 살면서도 자기가 집을 나온 건 단지 서지안 너 때문만은 아니다. 재벌 3세의 삶이란 할아버지가 세팅해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인데, 본인은 독립을 하고 싶어서 나온 것이니 간섭 말라고 한다.

  드라마 내용이 생각보다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지점이다. 사랑을 통해 자기 삶의 양식을 바꾸는 주인공을 중년층이 즐겨보는 주말드라마에서 보게 될 줄이야. 여기서 최도경은 서지안이 자신에게 던진 질문. 당신은 뭘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물음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면서 일종의 각성을 하게 되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러 길을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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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육체노동은 처음이라​
 

  이렇게 보면 사랑을 통해 진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이 지점에서 최도경은 니체식으로 말하면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을 정직하게 실현한 인물이다. 최도경은 재벌그룹 후계자로 태어났고, 재벌 1세 할아버지가 정해놓은 규격에 딱 맞게 교육을 받고 자랐다. 자신도 후계자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 실천하며 격에 맞게 살고자 했다. 재벌 3세라는 타이틀은 최도경에서 잘 맞는 옷이었다. 그런데 서지안이란 인물을 통해서 기존의 익숙한 자기 자리 또는 자기의 세계를 버리고 낯설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갔다. 

  재벌 3세 최도경 안에 자기 두 손으로 땀 흘려 돈 벌어 먹고 사는 생활인, 프로젝트 하나 하는데도 기획안 준비부터 모든 단계를 직접 실행해야 하는 실무자의 모습이 함께 있었으나, 이미 세팅된 환경 안에서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기에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랑을 실마리로 하여 이미 익숙해서 벗어나기 싫은 ‘지금의 나’라는 견고한 정체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서지안 덕분에 독립하였고, 두발로 세상에 서는 즐거움을 맛보았기에 그녀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 싶다 ^^

  이렇게 내 안의 또 다른 나, 즉 타자를 경험해본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나와 타인의 경계가 흐릿하고 모호한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류학에서는 그렇게 나와 세계가 혼융되는 경험을 이니시에이션이나 내면으로의 여행을 통해 설명한다.
 


기존의 나를 떠나는 인류학적 장치들

 

 멕시코의 고원지대에 사는 위촐족은 ‘페요테 사냥’이라는 특이한 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전부터 유명했습니다. 선인장의 일종인 페요테는 강력한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인장은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까지 가지 않으면 페요테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위촐 사람들은 원정대를 구성해 페요테 사냥을 위해 길을 떠납니다.
 페요테 사냥을 위한 원정대에는 처음으로 참가하는 젊은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페요테의 환각작용을 체험하는 셈이므로, 신성한 식물을 만나는 자격을 얻기 위해 아주 혹독한 이니시에이션의 시련이 부과됩니다. 마시는 것도 먹는 것도 극도로 억제하고 몸을 깨끗이 한 채, 선배들의 엄격한 지도에 따라 길고 고통스런 여행을 해야만 합니다.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나카자와 신이치, 150쪽>
 페요테와 같은 환각성 식물은 섭취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의 내면으로의 여행을 체험하게 하는데, 그때 ‘내면’으로 불리는 공간은 바로 유동적 지성=무의식이 활발한 활동을 하는 곳의 한가운데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페요테 사냥’이라는 의식은 유동적 지성의 운동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대칭성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또 다른 이상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위촐의 순례자들에게 깊이 인식시키려고 하는 셈입니다.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나카자와 신이치, 153쪽

 

  앞서 언급한 드라마에 나오는 최도경 엄마는 영민하고 기품 있어 한 때 예뻐했던 서지안이지만 그녀는 흙수저이기에 절대 재벌가에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교집합이 전혀 없이 동떨어진 다른 세계. 극명하게 분리되어 구별된 비대칭의 공간. 그것이 현실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뭐든지 그렇게 명백하게 가르는 것을 더 편하게 받아들인다. 회사에서도 업무분장에 따라 각자 할 일의 구획이 정해지고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소재를 물을 수 있기에 그 지점이 명확해야 한다. 

  이와 같은 비대칭의 논리로 사회를 구성하는 아프리카의 렐레족은 인간/동물, 남/여, 노인/젊은이와 같이 뭐든지 두 개의 항으로 분류하고 엄격하게 이 질서를 유지한다. 그런데 일상에서 이렇게까지 선을 분명하게 긋는 렐레족이 이 원칙을 무너뜨리는 특별한 의식을 거행할 때가 있는데, 페요테 사냥과 같이 이니시에이션도 겸해 ‘천산갑’이라는 동물을 먹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천산갑은 물고기, 도마뱀, 포유류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어 렐레족의 분류표 어디에서 속하기 어려운 일종의 ‘괴물’이다. 일정한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않기에 통념적이지 않은 천산갑은 존재 자체로 성년식, 이니시에이션을 거치는 소년들에게 혼돈을 안겨준다. 그 동안 교육과 문화를 통해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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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갑_렐레족의 엄격한 분류표를 무너뜨리는 존재 



  페요테 사냥은 환각성 식물을 섭취함으로써 나와 세계가 혼융되는 감각적 경험을 하게 만든다면, 렐레족의 경우 자기들 세계를 구성한 분류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예외의 존재를 잡아 먹음으로써 인습적이었던 기존의 자신을 해체한다. 이를 통해 대칭성이라는 유동적 지성을 경험하여 나와 타인이, 인간과 동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이런 의식을 이니시에이션과 연결하였을까? 많은 부족들에게 이니시에이션은 단식, 고행을 통해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경험으로, 실제로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치는 까닭은 실제로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통해 기존의 자아와 결별하게 만드는 것인데, 성인이 된 후에도 주기적으로 비대칭적 현실세계를 떠나 대칭성을 경험하기 위해 그들만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이처럼 기존의 자아를 벗어나는 경험은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사실 자기 안의 자기를 멸망시키는 태풍을 작동시키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도 깊이 하려하지 않는다. 설렘과 기분 좋은 긴장감 딱 그 선에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드라마에서 최도경은 빈털터리로 쫒겨났다.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넘어지고 다치는 과정들은 좀 과장하자면 이니시에이션을 할 때 젊은이들이 겪는 위험과 오버랩 되었다. 재벌가라는 울타리를 박차고 나온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런 냉혹한 의식(?)을 통과해야 비로소 용수철처럼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태풍을 가동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일까?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호모 사피엔스는 대칭성 세계, 유동하는 지성을 접할 때 지복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랑을 하면 타인과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느낌과 더불어 그를 통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타자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은 고양감을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지복감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외부의 자극에서 비롯된 즐거움이나 쾌락이 아닌 내 안에서 지복(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치료의 시작, 일상의 동선 살피기 

청나라의 명의 오국통은 ‘축유祝由’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했다. ‘축유’는 주문이나 기도를 통해 병을 치료하는 무속적 의료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그는 “‘축祝’이란 알리는 것이고, ‘유由’란 병이 생기는 원인”(오국통, 안세영 옮김, 『의의병서역소醫醫病書譯疏』 집문당, 78쪽)이라고 하여, 축유의 본래 뜻과는 다르게 해석했다. 즉 글자의 뜻을 살려 축유를 ‘병이 생기는 원인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오국통이 굳이 축유라는 어휘를 재사용한 것은 병이 생기는 원인을 알려주는 행위가 주술이나 기도를 통해 병을 치료할 때처럼 신묘한 치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동의보감, 양생과 치유의 인문의학』, 안도균, 작은길, 109쪽

  여기서 축유는 스스로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할 때 도와주는 장치이다. 현대의 우리는 아프면 무조건 병원에 가서 내 몸을 맡기기 때문에, 병의 원인을 찾는다는 말이 생소하겠지만, 동의보감에서 보면 병은 삶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내인(內因)으로 과도한 감정인 칠정과 적절하지 못한 음식은 당연히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고, 외인(外因)인 육음(六淫,풍·한·서·습·조·화 등 육기六氣가 지나친 것)도 나의 면역력이 강하면 방어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 생활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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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유를 말했던 오국통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릴 때부터 두통과 복통을 자주 겪었고, 20대 후반에는 극심한 두통으로 매일 오후마다 구토를 해야 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내가 스스로 아픈 이유를 찾는다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 병원을 전전하였는데, 하나같이 스트레스성이라며 회사일 혹은 집안일에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고 했다. 뭔가 병명이 확실하면 안심하겠는데, 자꾸만 맘을 편히 가지라고 하니, 정말 더 신경 쓰이고 더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되었다. ^^;; 솔직히 직장생활 하면서 이정도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다.


  이럴 때 ‘축유’를 해주는 의사가 있으면 어찌되었든 그 처방에 따라보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두통은 비위가 음식물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그런 거다. 비위를 좋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사지를 많이 움직이는 게 좋으니 일단 많이 걸어라. 그리고 소화를 못시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상황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는 관련이 되니 지금 본인이 뭘 회피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뭐 그런 식으로 조언을 들었다면 아픈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것이든 일단 실천해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일상을 살피다보면 어떤 지점에서 걸려 넘어졌는지, 문제를 어떤 식으로 회피하고 대충 뭉개려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감이 잡힌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나는 외적으로 볼 때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으나, 대운에 인성이 들어와서 그런 건지 뭔가 가치 있고 심도 있는 일을 하거나 책을 통해 인생의 통찰을 얻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너무 잡스럽게 느껴졌고 그런 일에 시간을 소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망상만 가득하니 땅에 발을 붙이지 못했고, 아마도 아무 의욕 없는 직원이었을 것이다. 

 잡스러운 걸 싫어했던 당시 내 마음 때문에 소화가 안되고, 그렇게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위는 외부의 지기를 받아들여 그 기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단 뭐든지 잡탕으로 잘 섞어야 하는데, 꼭 필요하거나 의미 있는 일만 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런 작용을 가로 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비위가 좋다’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일 때를 보면 그 사람은 완전히 이질적인 사건이나 일을 만나면 일단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소화시켜서 새로운 변화를 만든다.

 

  당시 나의 경우 재성을 써서 인성을 제어했으면 아마도 쓸데 없는 망상에 빠지는 대신 사소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일들에도 힘을 쏟으면서 흔히 말하는 삽질이 왜 필요한지 그 의미를 깨닫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병이 있으면 스스로 그 원인을 추적해보고, 사주명리를 통해 삶의 무게 중심을 바꾸는 것. 이것은 이전과 다른 삶의 양식을 창안한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사랑이나 인류학적 장치들과 통하는 면이 있다.

 

 축유와 벡터는 다르지만 결국 욕망의 배치를 바꾸는 방식이 앞서 말한 드라마에서 나타난다. 서지안의 아버지는 한때 중소기업 사장님이면서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였으나, 사업이 망하면서 가족들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뼛속 깊이 느낀다. 그래도 끝까지 가족이라는 끈을 붙들고 있다가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들에게 외면당하자 말 그대로 죽고 싶다고 느낀다. 그래서 상상임신처럼 상상암을 겪게 되는데, 막상 죽음을 준비하게 되니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자 하며 어릴 때부터 로망이었던 클래식 기타를 사서 배운다. 이 아버지는 병을 낫기 위해 자기 일상을 살핀 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이 병이 너무 커서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결국 그 병으로 인해 그 동안 자신이 살던 방식,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한걸음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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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것은 이 아버지는 위암을 상상암으로 겪었다. 가족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이데아가 있었기에 가족끼리 신뢰가 깨질 수도 있고, 서로 보듬기는커녕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오롯하고 순정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있으면 잡스러워지는 걸 참을 수 없고 그런 사람들이 아무래도 비위와 관련된 병을 많이 겪게 된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아닐지!

 

  어찌되었든 자기 힘으로 혹은 축유의 도움을 받아 병의 원인을 찾으면 그것 자체로 신묘한 치료효과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를 통해 이전과 다른 일상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 그럼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인가? 융이라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 융은 하나의 강력한 감정, 즉 단일한 콤플렉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다양한 콤플렉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고정된 삶의 방식은 빈곤한 콤플렉스를 만들어내고 당연히 병을 일으킨다고 답할 것이다. 


 융은 이 경험으로 신경증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한다. 문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보겠다는 자아의 고집이었다. 자연이란 변화 그 자체이기에, 한때는 적합했던 삶의 태도도 시간이 자나면 적합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려는 마음이 병의 원인이었다. 요컨대, 새로운 삶의 관계기능인 무의식의 방문을 회피하는 자아가 만든 병이 신경증인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 언제나 다시금 새로워지는 삶』, 신근영,  북드라망, 187쪽~188쪽


  앞에서도 말했지만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낯선 세계에 들어서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확장을 통한 고양감이 그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의역학적으로 보면 변화가 두려워 새로운 삶을 창안해내지 않으면 결국 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어딘가가 아프다면 일단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걸려 넘어지고 있는지 일상의 동선을 살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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