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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함성에세이> 당연하기에 놓치고 있던 것들
 글쓴이 : 이달팽 | 작성일 : 18-05-30 17:22
조회 : 170  



당연하기에 놓치고 있던 것들

한수리

 

루쉰 선생의 ‘잘 살라’는 평범하고 뻔한 말

 

 이번에 결혼을 하고 아이 낳을 준비를 하면서 경제적인 책임감이 강하게 들었고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학기 루쉰을 읽으며 ‘생계’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루쉰은 여러 작품에서 먹고 사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루쉰이 『화개집』에서 청년들에게 해준 이야기이다.

 

 

“첫째는 생존하는 것이요, 둘째는 배불리 먹고 따듯이 입는 것이요, 셋째는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누구이든 그에게 반항하고 그를 박멸해야 합니다. 하지만 ... 제가 말하는 생존이란 결코 구차한 삶이 아니며, 배불리 먹고 따듯이 입는 것이란 결코 사치가 아니며, 발전 또한 방종이 아닙니다.”

- 루쉰,「베이징통신」,『화개집』(루쉰전집4), 이주노 옮김, 그린비, 82쪽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는 뭔가 강렬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읽다 보니 문득 너무 당연한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으면 누구라도 살아야 하고 먹고 입어야 하며 좀 더 잘 살려면 발전도 필요하다. 거기다 구차하거나 사치와 방종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하라는 것은 너무 당연했고, 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 평범해 보였다. 그래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뻔한 말을 루쉰은 왜 그렇게 청년들에게 강조했던 걸까? 또 그런 말이 왜 나에게 강렬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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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스스로의 생명을 쓰는 삶

 

  루쉰은 가정 먼저 구차하지 않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구차함' 이란 오로지 생존만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삶을 원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이 아편을 피워 밖에 나갈 수 없어 가산을 탕진하지도 않고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아편에 중독돼 정신이 몽롱해도 그저 '안전'하게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루쉰은 그런 구차한 삶을 진정 원한다면 베이징 제1 감옥을 추천한다. 먹을 것도 주고, 잘 곳도 주고, 거기다 지켜주는 간수까지 있으니 이보다 더 안전하며 생을 오래 유지하기에 좋은 곳이 없다고 여겨서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유다. 루쉰은 자유가 없는 이런 구차한 삶은 생존을 도모하지만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말하는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를 말한다. 

 

  루쉰은 “생명은 제 자신의 것이기에, 제 스스로 걸어갈 만하다고 여기는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면 그만(위의 책, 82쪽)”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루쉰이 말하는 생존, 즉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에게 생명은 “내 생명의 일부분은 바로 이렇게 소모 되었으며, 또한 바로 이런 일을 했던 것이다 (『무덤』​(루쉰전집1)「『무덤』뒤에 쓰다」, 411쪽 )” 처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쓰는 힘이나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는 생명은 자신의 것이므로 스스로 써야할 곳을 선택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자유'이다.

 

루쉰은 그런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는 청년들을 위하여 자신의 힘을 썼다. 또 공리를 내세우는 정인군자들과, 혁명의 이름으로 청년들을 사지로 내모는 자들과의 싸움에 자신의 생명을 쓰는 길을 택하였다. 또한 그것들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졌다. 살아있는 존재는 그런 자유가 있을 때 생기를 가진다. 스스로 원하는 것에 생명을 쓰며 변화를 만들어가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질 때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먹을 것을 찾아 길을 떠나고 싸우고 도망치는 동물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생명력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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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에 구차한 삶을 사는 자들의 삶은 우리에 갇혀서 먹을 것만을 기다리는 가축과 같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루쉰이 그렇게 미워하던 정인군자들이다. 정인군자들은 공리라는 대의명분으로 자신을 숨기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지키기 위하여 청년들과 루쉰을 공격한다. 그들은 항상 한발 물러나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킬까 궁리만 할 뿐이다. 그들은 루쉰처럼 자신의 생명력을 써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생각도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삶을 루쉰은 진정 살아있는 삶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산 게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게 죽은 것이 아닌 구차한 삶(위의 책, 84쪽)"이라 말한다.

 

 구차한 삶이든 아니든 먹을 것은 필요하다. 그렇기에 루쉰은 ‘배불리 먹고 따듯이 입는 것’을 강조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충족되어야 살아 있을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부분은 생계를 중시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 삶은 '생기'대신 쾌락의 강렬한 만족감을 통해 자신의 '살아 있음'을 느끼려 한다. 쾌락에는 보고 먹고 듣고 만지는 것과 같이 감각적인 것부터 뭔가를 사거나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 까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생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소모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당장의 쾌락은 우리에게 강렬한 만족감을 주지만 충만감을 주진 않는다. 그리고 그 강렬함에 익숙해지면 점점 더 쎈 것을 원하게 되고 더 많은 힘을 소모하게 한다. 그렇지만 거기서는 어떤 차이도 발생하지 않는다. 차이가 없는 삶은 무료함과 공허함을 만들어 내며 단지 생명을 계속 고갈시켜간다. 이것이 바로 루쉰이 마지막으로 말한 발전이 아닌 방종이다. 그렇기에 루쉰은 구차한 삶이란, “삶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이끈다(위의 책, 84쪽)”고 말한다.

 

당연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에세이를 쓰기 전에 내가 '생계'에 꽂혔던 이유는 내가 좀 더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민이가 8월에 출산해서 아이와 함께 살 집을 구해야 했다. 그런데 방이 2개는 있어야 하고, 햇빛도 잘 들어야 하고, 깔끔해야 하고, 연구실과 가까워야 한다는 조건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가진 돈도 버는 돈도 얼마 안 되고, 국가 지원과 대출도 여의치 않다 보니 집을 찾기가 참 어려웠다. 한 달 동안 여러 집을 보고 계약하려다 실패도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처음 생각했던 조건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보니 결국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학원 일도 늘고, 과외도 생기고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점점 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좀만 돈을 더 벌면 내가 원하는 집에서 살 수 있겠구나!' 하지만 동시에 '그럼 지금 하는 공부는 어떡하지?', '공부야 뭐 조금 늦어져도, 나중에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들이 들었다. 거기다 루쉰이 '생계'가 중요하다고 하니 내 생각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 같았다. '맞아! 루쉰도 생계가 중요하다잖아! 일단 잘 먹고 잘 살아야지 공부도 하는 거 아니겠어? 지금 애 키우는 게 중요하지 공부가 중요해?' 하면서 합리화를 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루쉰의 「베이징 통신」을 가지고 에세이를 쓰다 보니 그가 말하는 생계는 내가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그에게 '생계'는 단지 생기 있는 진정한 삶을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것, 즉 자신이 원하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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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길 원하는가? 나는 공부하며 사는 삶에 내 생명을 쓰며 살아가고 싶다. 당장 돈이 되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꽤나 힘들지만 말이다. 특히 글을 쓸 때 가장 힘들고 괴롭다. 조금만 틈이 나면 딴 짓을 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다. 정말 안간 힘을 다 써야 겨우 겨우 써나갈 수 있다. 그런데도 왜 하고 있는 걸까? 글쓰기는 나에게 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나를 괴롭게 한다. 너무 알고 싶은데 알듯 말듯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한다. 마치 갈증이 심한데 물이 저기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어 마시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 괴로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 힘을 다하다 보면 정말 ‘생명’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할 때 나 자신을 조금도 놓칠 수 없고, 진정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또 그 질문이 조금이라도 풀려서 진전이 되어 나아갈 때면 뭔가 알 수 없는 충족감이 밀려온다. 그런 것들이 내가 진정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글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온 생명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쾌락에서 느낄 수 없는 그런 충만감과 살아 있다는 느낌이 내 삶에 생기를 불어 놓고 나의 일상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공부하고 있다.

 

  이제 처음에 품었던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루쉰이 청년들에게 당연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들을 했던 이유 말이다. 그것은 평범해 보이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의미였다. ‘잘 먹고 잘 입는 것’은 안락함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것 자체가 목적도 아니었다. 루쉰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스스로가 원하는 길을 나아가는 것이며, 그럴 때만이 살아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쉰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살아가고 싶다면 당연해 보이는 것들부터 놓치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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