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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 vs 니체] 너 자신을 찾으라
 글쓴이 : 장순2 | 작성일 : 16-07-16 09:52
조회 : 3,043  


횡단 에세이    이탁오 vs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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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  신  을    찾  으  라 


니체와 이탁오가 말하는 앎의 용법

 





장순 (대중지성 3학년)





1.도덕이 만드는 세 가지 병증


탁오와 니체는 앎에 대해서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다. 앎이 고통을 해소해야한다는 것. 몸에 대한 앎이 병자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듯 다른 지식도 삶에 기쁨을, 몸에 활기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런 앎의 쓸모를 잊었다. 니체가 살던 독일이나 탁오가 살던 명나라 모두. 배움은 뒤집혔다. 앎은 고통을 경감시키기는커녕 가중시켰다. 그런 앎을 니체는 도덕, 탁오는 견문·도리라고 부른다. 그들은 병을 만드는 앎을 비판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 본 적이 없다.”(p.337)고 말한다. 이 말의 골자는 우리의 앎과 신체 사이의 상관관계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지금의 앎이 신체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조사한다. 그런 측면에서 <도덕의 계보>는 일종의 심리학적 진찰기록이다. 니체에게 진단서를 끊어보자.




(니체)는 아프다. 일단 숨을 못 쉬겠다. 니체말로는 그 시절 독일의 공기가 너무 안 좋다.(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공기가 나쁩니다! 공기가 나빠요!, <도덕의 계보>, p.381) 보통 사람은 1분에 17회 정도 숨을 쉰다. 공기가 나쁘다는 말은 그만큼 자주 불편함이 느껴진다는 거다. 그 말뜻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부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병의 원인은? ‘지금의 도덕이다. 이것이 자기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몸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도덕은 기본적으로 관습적인 명령의 성격을 띤 지식이다. 도덕은 선과 악을 나눈 후,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한다. 그 옛날, 고대의 선은 자기에게 좋은 것이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선이고, 아닌 것이 악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들이 잘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늑대와 양의 비유를 든다. 양은 늑대처럼 다른 짐승을 잡아먹을 힘이 없다. 양은 그 힘을 악으로 규정한다. 양은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게 불가능한데 마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했다. 복수할 수 없는 것이 복수하고자 하지 않는 것으로 불리고”(<도덕의 계보>, p.380). 그런 자신을 선하다고 말한다. 가치의 전환이 일어난 것. 이제 선은 자기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 된다. 무능한 것이 선이 된 것이다. 이를 니체는 약자의 도덕이라고 부른다.




약자의 도덕이 가지고 있는 메커니즘을 좀 더 파헤쳐보자. 크게 세 가지다. 원한, 양심의 가책, 금욕주의. 약자의 도덕은 기본적으로 타인 중심이다. 타인의 무엇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니까. 어느 날 타인의 뛰어난 점을 발견한다. 남이 잘 되는 것이 고통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없다. 그때 가지게 되는 것이 원한이라는 감정이다. 마음속으로 타인을 욕하고 원망한다. 아큐처럼 조용히 째려보면서 남이 잘 안 되기를 간절히 발원한다.




그 다음, 내가 아무리 째려본다고 해도 상대가 아플 것 같지 않은 순간이 온다. 나의 고통도 해소되지 않고, 허무하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가슴속에 품은 공격성을 어떻게든 발현하려고 한다. 자기마저도 타인처럼 대상화 시킨 후 공격한다. 객체가 된 자신에게 이 못난 놈!”하고 실컷 욕을 한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이다. 밖으로 발산되지 않았던 감정을 안에서 터뜨리는 것. 니체는 이를 자기 폭행혹은 영혼의 호두까기라 비유한다. 거대한 펜치로 호두를 빠개듯 너는 왜 걔처럼 안 되는 거야. 너는 어찌 그리 못났냐!”며 자기 머리를 짓누르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여기까지도 문제가 상당한 데 한 스텝 더 나간다. 양심의 가책에 여러 번 시달리다 보면 자기를 공격하는 것에 쾌감이 섞여들고 그것에 중독된다. 원한감정을 자신에게 돌리는 내 탓이오가 항시적으로 작동하는 회로가 생긴다.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마음에 늘 품고 자기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자책과 비난을 스스로에게 한다. 이를 니체는 금욕주의라 부른다.




요즘의 도덕, 약자의 도덕에 물든 사람들은 원한과 양심의 가책과 금욕주의를 키우고 있다. 고통을 더욱 더 원한다. 확실히 이 도덕은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 그것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자책하면서 굽실거리게 만든다. 이런 도덕에 빠진 사람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교양인이라고 한다. 계속 교양인의 삶을 살다보면 아무리 멀쩡한 사람도 간기울결, 음허화동 등등으로 병들 것이 뻔하다. 니체도 교양인 생활을 했고 그것이 끔찍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독일에는 이런 교양인 문화가 만연해 있다. 는 교양인이라는 환자들이 풍기는 악취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짜증이 난다. “대지는 이미 정신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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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도덕에 물든 교양인들은 스스로를 고통에 빠뜨린다




니체는 사람들이 병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명쾌하게 밝힌다. 당시 지식이 병을 만든다는 주장은 센세이션한 발언이었다. 니체가 살던 근대 유럽은 앎이 신체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거의 없었다. 우선 에 대한 연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식이라는 것은 삶과 섞이지 않는 객체다. 진짜를 아는 것이 중요했을 뿐, 아는 것과 내 삶의 문제는 별개다. 일상이 어떻건 간에 계속 교양인일 수 있다. 참인 지식을 최대한 많이 늘어놓으면 된다. 또한 심리적 고통신체에 대한 연관성도 없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파진다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었다. 이런 시대에 앎과 삶과 신체를 연결지으려는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니체는 시대를 벗어난 사유를 했다.

 



2.순진한 사람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다. 왜 약자의 도덕이 활개를 치는 것일까? 니체는 이런 도덕이 인간의 지배 형태를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병을 앓고 치료되면서 길들여진다. 사회는 상처에서 오는 고통을 가라앉히면서, 동시에 상처에 독을 뿌린다. 죽지 않을 만큼 고쳐주고 다시 상처 입도록 채찍질하기. 원한과 자책이 반복되면 건강한 자는 병들게 되고, 병자는 유순하게 된다. 그들은 다스리기에 편한 선한 양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것이 어떤 의사나 구원자보다 더 필요하다. 상처를 치료해주려면 먼저 놀부가 제비다리를 부러뜨리듯 아프게 만들어야 한다. 약자의 도덕이 활약하는 영역이다. 이것은 가혹한 명령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일종의 관습처럼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양이 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양으로 만들려고 한다. 힐링을 유행시키고(니체 시대에는 고해성사 등등의 기독교의 프로그램들이 이런 역할을 담당했다), 환자가 되는 것을 권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걱정들을 죄다 끌어들여 주위 사람들을 병자로 만든다. “당신은 고통 받았군요. 이제 치료 받을 시간이에요.” 하지만 이 힐링으로 완치되는 사람은 없다. 이런 문화 속에서 강한 힘을 가졌던 사람들도 병과 치료의 반복 속에서 쇠약해진다. 약자들이 강자를 무너뜨리는 방식이다.




이런 병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순진함(naive)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현대의 영혼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거짓이 아니라 도덕적 기만에서 습관이 되어버린 순진함이다.”(<도덕의 계보>, p.506) 여기서 말하는 순진함은 순수함보다는 어리석음에 가깝다. 아무 것도 고민하지 않으면서 그 시대 통용되는 논리를 대충 받아들이는 자세다. 지식을 많이 쌓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한다. 희망을 말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말일 뿐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거다. 초췌한 얼굴로 지금의 도덕에 따라 살면서 나는 괜찮아”, “좋아지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니체는 그런 교양인의 순진함에 망치질을 가한다. 사실 너 아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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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현대 교양인은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





이 순진함에 반기를 든 인물이 명나라 말에도 있었다. 바로 이탁오(李卓吾). 그는 여느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편안하고 잘 살고자 했다. 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고 자식의 죽음을 겪는 등 감당하기 힘든 큰 고통을 맛본다. 그러면서 기존 삶의 방식에 회의가 들었. 나이 마흔 무렵, 그는 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을 접한다. 양명은 진리가 각각의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 닿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것이라 말한다. 성즉리(  卽理)에서 심즉리(心卽理). 탁오는 이치가 자기 마음에 있다는 양명의 말을 깊이 새겼다.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어디 따로 있지 않다. 자기 안에 있다. 경전의 구절도, 성현의 말씀도 내 마음에서 어떻게 받아 들이냐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54, 탁오는 집을 나섰다. 부처는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승을 찾아 출가했다. 그도 부처처럼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는 집을 떠나 배움의 길을 갔다. 그 길은 자기 마음을 만나는 일이며 한 번도 탐구해보지 못한 자신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니체가 자기 체험을 근거로 약자의 도덕을 발견한 것처럼 탁오는 책 속에 비친 자기 마음을 보면서 자신이 견문과 도리에 사로잡힌 따라 짖는 개였음을 발견한다.




유교와 불교, 도교를 섭렵하면서 그는 마음의 문제를 더욱 파고든다. 그의 탐구에서 두드러진 것은 일상적 감정에 대한 긍정이다. 기존 유학에서 세속의 정은 가려져 있고 닦아내야 할 것으로 본다.(存天理去人慾) 그것에 있어서는 양명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런데 이자는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세속의 정 그 자체를 주목한다.




질병을 물리쳐주는 부처 약사불(藥師佛)에게 바치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병이 들었는데 너무 아프니까 살만큼 산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리거나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변화가 없으면 당신이 자비롭지 못한 것이라고.기도해도 부처님이 혹 그 일을 알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 이는 부처님의 귀가 밝지 못한 것으로 그런 부처는 부처가 아닙니다.”(<분서 2>, p.66) 약사불에게 기도를 드리고 병에 차도가 있자 이번에는 자기가 아는 젊은 중의 병도 고쳐 달라한다.




이 부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상당히 독특했다. 도를 추구한다는 자가 첫째로 몸의 안위를 걱정했고, 둘째로 신비한 효험을 구했다. 너무 천박하다고 생각되는가? 하지만 탁오는 일상생활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이 깨달음의 시작이라 생각했다. 탁오의 도는 항상 삶의 현장에 있었다.




양명은 몸이 아플수록 밝은 지혜 찾기를 쉬지 않아야 한다 했다. 시련도 크니까 깨달음도 클 거라고. 물론 몸이 아픈 탁오도 양명의 말처럼 깨닫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실제로 올라오는 감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너무 아팠고, 아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만 간절했다. 아프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사소하고 편벽될지 모른다. 하지만 진실했다. 그 마음을 지극히 키워나가면 도를 만날 수 있다. 재물에 대한 욕심,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 명예에 대한 욕심도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세정(世情)이 넘치면 그것이 바로 도정(道情)인 것이야.”(<분서 2>, p.41) 그는 도를 만나는 출발점이 진실한 감정이라 봤다. 잡소설인 <수호지>, <서유기>, <서상기>를 높이 평가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세속의 정을 긍정하고 보니 사람들의 허위가 보였다. 예의를 갖춘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말엔 진실함이 없었다. 예는 오히려 도를 가리고 방해했다. 입만 열면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백성을 생각한다는 이들은 명예욕과 물욕, 지배욕을 숨기고 그 시대에 통용되는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조차 모른다. 순진(naive)하다. 그들은 명예나 부를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면서 견문과 도리를 끌어 모으며 자신을 들볶고 있다. 탁오는 제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보다 지금의 고통스런 삶을 슬퍼하라”(<분서 2>, p.104)




 

3. 건강을 위한 앎의 용법


금욕주의는 고통을 갈망하게 하고, 견문과 도리는 진실한 마음을 잃게 한다. 이제 앎이 어떻게 삶을 병들게 하는지 알았다. 순진한 인간에 머물러 고통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앎의 용법을 찾아야 한다.




앎은 이중적이다. 순진한 도덕을 전파하는데도 쓰이고, 도덕이 퍼뜨리는 순진함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쓰인다. 고대 중국에서는 약재를 독()이라 이름 했다. 기운이 아주 센 것을 의미한다. 약재는 얼마나 어떻게 처방하느냐에 따라 몸에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 있다. 앎도 독과 같다.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앎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용법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건강을 위한 앎은 어떻게 사용해야하는 지 살펴볼 차례다.




건강을 위해 앎을 사용하라. 그러기 위해 우선은 그들이 말하는 건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건강은 객관적 수치로만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함을 표현하는 방식은 외양뿐만 아니라 글이나 말, 행동 등 다양하다. 니체는 건강함의 척도를 생명력, 생명감이라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활력, 몸에 힘이 찬 느낌이라 생각하면 된다. 생명력이 충분하면 넘쳐흐르는 힘, 삶의 확실성, 미래의 확실성 등등이 생긴다. 반면 생명감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정서가 차가워지고, 속도가 느려지며, 본능 대신 변증법이 나타나고, 얼굴이나 몸짓에 진지함이 나타나 있다.”(<도덕의 계보>, p.529)




탁오의 척도는 동심(童心)이다. 그는 우리에게 동심을 찾으라고 말한다. 동심은 순진함(naive)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심은 마음의 처음 모습”(<분서 1>, p.349)을 뜻하는 것으로 거짓을 끊어버린 진실한 마음이 되었을 때 만날 수 있다. 동심을 태초의 생명력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생명 각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힘, 생기(生氣)라고나 할까.




동심에서 나온 글은 언제 누가 지어도 훌륭한 글이 된다. 그리고 훌륭한 글에는 기력(氣力)이 있다고 탁오는 말한다. 좋은 글은 기교(奇巧)가 아니라 기력이 있는 글이다. 그런 글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저절로 마음을 찌를 것이고 저절로 마음을 움직이며 저절로 사람을 통곡하게 만들”(<분서 2>, p.43) 것이다.




니체의 생명력이라는 말과 탁오의 동심은 통한다. 생명력과 동심에서 나오는 기력, 이 두 힘은 창조하고 산출하는 데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다. 앎이 삶과 만나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산출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건강한 앎의 용법이었다. 니체는 어느 책에서 말한다.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너는 왜 아무것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데 글을 읽느냐고. 그것이 바로 근대인의 병폐인 교양 쌓기라고.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기존의 순진한 자신을 버리고, 자신과 만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가려져 있는 본래 마음, 동심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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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말하는 생명력(Geist)과 탁오가 말하는 생기(生氣)는 뜻이 서로 통한다





탁오와 니체는 자신의 앎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 냈다. 허나 고통 없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들이 앎을 통해 자기 고유의 탁월함을 선보이는 순간 약자들은 그들을 공격했다. 약자들은 강한 자들의 힘을 시기하니까. 자만이네 잘난 척이네 하면서 비난을 했다. 선한 도덕을 따르는 사람들은 집요하게 그들의 생명을 갉아먹었다. 삶을 위한 앎을 추구하는 일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그들은 고난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끝이 났는가? 병 들었고, 지기를 찾아 떠돌았다. 결국 대지가 정신병원이라고 말한 니체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죽었고,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인이고자 했던 탁오는 감옥에 갇혀서 죽었다. . 생은 아이러니한 것 같다. 이들의 마지막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쌍한 그들을 위로해줄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다를 바 없다고 깎아내릴까? 이는 약자들의 방식이다. 나는 앞선 그들의 삶에 이미 모든 결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죽음은 문장의 마침표였을 뿐이다.





결론은 무엇인가. 견문과 도리·도덕에 가려져 있던 자기 자신을 만났다는 것. 자신만의 생기 넘치는 글을 남겼다는 것. 그것만으로 그들은 충분했다. 탁오와 니체를 평가하기 이전에 자기 탐구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가끔 공부할수록 생기를 잃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피로해져 책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느낌. 그때 탁오와 니체를 떠올리자. 앎으로 을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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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생을 기르는 데 앎을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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