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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vs 아함경] 부처가 되는 길을 보여주는 『서유기』
 글쓴이 : 짱숙 | 작성일 : 17-01-09 14:36
조회 : 1,853  
부처가 되는 길을 보여주는 『서유기』   

장현숙(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서유기』속의 숨겨진 길

『서유기』를 읽고, 10권의 긴 여행기를 드디어 다 읽어냈다는 기쁨보다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다. 서천에 도착한 후 석가여래가 삼장범사 일행을 불러 직책을 수여하는 장면에서이다. 다 같이 힘을 합쳐 경전을 가져갔는데, 삼장법사와 손오공은 각각 전단공덕불과 투전승불이 되고, 저팔계와 사오정은 각각 정단사지와 금신나한이 된다. 한마디로, 삼장법사와 손오공은 부처가 되었지만, 저팔계와 사오정은 부처가 되지 못한 것이다. 이건 저팔계와 사오정으로선 상당히 불만스러울 수 있다. 실제로 저팔계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처가 되었는데, 어째서 저만 정단사자란 말씀입니까?”(『서유기』 오승은 지음, 솔 출판사, 10권, p283)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다 같이 죽을힘을 다하여 경전을 얻으러 갔는데 누구는 부처가 되고 누구는 되지 못한다니. 삼장법사는 리더로서 삼장일행을 서천까지 데려오는데 공이 크고, 손오공은 요괴를 무찌르는데 누구보다 공이 크다. 그러므로 둘은 부처가 될 수 있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려 해도, 부처란 것이 공이 크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다른 의문이 남게 된다. 

공이 큰 것만으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면,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 마음이란 걸 닦는다는 애매하고도 번거로운 일을 떠나, 적금을 들 듯 끊임없이 보시를 하다보면 누구든 언젠가는 부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 『금강경』에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 같이 무한한 양의 보석이나 목숨으로 보시하더라도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지니고 있는 것 보다 그 공덕이 크지 않다’고 한다. 무한한 양의 공덕보다도 마음 한 자락 바꾸는 것이 더 큰 공덕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공이 크기 때문에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다른 의문을 가져야 한다. 삼장법사와 손오공은 어떻게 부처가 되었는가?이다. 그들이 서천으로 가는 길은 다른 사람과는 어떻게 달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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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의 천방지축 서천여행기쯤으로 생각했던 이야기 끝에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부처가 되는 장면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의외의 장면이었다. 경전을 가져간 공을 인정받아 죄를 면하게 되고 원래 관직으로 돌아가는 소소한 해피엔딩을 예상했는데 부처라니. 그러니 『서유기』 속에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길이 숨겨져 안내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부처가 되는 길. 『서유기』를 더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그들은 왜 길을 나섰나?

부처가 되는 길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전에, 먼저 ‘정과를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한다. ‘정과를 이룬다’는 말은 서유기 전반에 걸쳐 자주 나올 뿐만 아니라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이 서천으로 길을 나서는 이유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서천으로 길을 나선 다음 그 길을 완주했고 그리고 그 끝에 부처가 되었으므로, 그들이 길을 나선 이유는 부처가 되는 길을 탐색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정과’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오행산에 갇혀 있는 손오공과 관음보살이 만난 장면(1권, 제8회)에서 이다. “이미 후회하고 있소”라며 자신이 하늘궁전에서 난동을 부렸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손오공을 보고 관음보살은 “너는 그의 제자가 되어 우리 불문에 들어와 정과(正果)를 닦는 게 어떠냐?”며, 서천으로 가는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어 그를 보호하기를 권한다. 여기서 관음보살이 말한 ‘정과’가 무얼 의미하는지, 이 대화만으론 확실하지 않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른 결과’라는 뜻이 되는데, 바르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리고 결과가 무엇인지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정과’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2권 제14회이다. 여섯 도적을 죽인데 진노한 삼장법사를 떠난 손오공이 동해 용왕을 찾아 간 장면이다. 이때 손오공은 “남해의 관음보살이 나한테 선행을 권하고 정과를 얻으라고 하시면서, 동녘 땅 당나라의 스님을 따라 서방으로 가서 부처를 찾아뵈라는 거야.”(2권, p119)라며 자신이 삼장법사를 따라 길을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니 두 대화에 의하면, 손오공이 처음 길을 나선 것은 대승경전을 얻는 것이나 부처가 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자신의 정과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거 정말 축하할 일이군요! 축하할 일이예요! 이게 바로 나쁜 걸 바로잡아 올바름으로 돌아가고 착한 마음을 일깨운다는 것이로군요. 
(『서유기』 오승은 지음, 솔 출판사, 2권, p119)
동해 용왕이 손오공의 말을 듣고 대답한 말이다. 여기서 ‘정과’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나쁜 걸 바로 잡아 올바름으로 돌아가고(正) 착한 마음을 일깨우는 것(果)’이다. 

그러고 보면 삼장법사나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길을 나서게 된 경위가 비슷하다. 삼장법사는 원래 전생에 석가여래의 둘째제자인 금선자로 설법을 듣지 않고 큰 가르침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동녘 땅에 태어났으며, 손오공은 제천대성이라는 신선이었으나 분노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늘궁전을 소란하게 한 죄로 오행산에 갇혔으며, 저팔계는 은하수의 천봉원수였는데 반도대회에서 술에 취해 선녀를 희롱한 죄로 짐승의 태에 들어갔으며, 사오정은 하늘의 권렴대장이었는데 반도대회에서 유리잔을 깨는 실수를 한 죄로 유사하에 떨어진 것이다.(10권 제100회 참조) 이들이 길을 나서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살펴보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간절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 기회가 있어야 그 다음으로 착한 마음을 일깨울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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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들에게는 서천으로 가는 이 길이 간절했다. 힘든 여정 속에서도 그들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이었다. 실제로, 삼장법사에게 두 번째 쫓겨난 손오공이 관음보살을 찾아가 처음 하소연 한 것도 “저는 다만 참된 정과를 이루어 그간의 죄업을 씻고 사악함을 없애기만을 바랄 따름이었습니다.”(6권, p186))이고, 가짜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기절시켰을 때 사오정이 처음으로 걱정한 것도 “어쩌면 좋지, 어쩌면 좋아, 이야말로 정과도 얻지 못했는데 중간에 그만두게 생겼잖아?”(6권, p193))였다. 

세 가지 나쁜 것(三毒)과 방일(放逸)

그런데 여기서 ‘나쁜 것’이 무엇일까? ‘나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그걸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다시 10권 제100회에서 석가여래가 삼장일행에게 직책을 수여하는 장면으로 가보자. 석가여래는 각자의 ‘나쁜 것’을 언급한다. 삼장법사의 경우 ‘내 설법을 듣지 않고 나의 큰 가르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고, 손오공의 경우 ‘하늘궁전에서 크게 소란을 피’운 것이며, 저팔계의 경우 ‘반도대회에서 술에 취해 선녀를 희롱한 일’이고, 사오정의 경우 ‘반도대회에서 유리잔을 깼던 일’이다. 

언뜻 들어보면 이 ‘나쁜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우리에겐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의 시간에 조는 것이 나쁜 것인가? 몰랐다. 소란피우는 것이? 물론 술에 취해 누군가를 희롱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유리잔을 깼다고 하늘나라에서 추방하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우리 일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런 일들로 삼장일행은 그 어려운 하늘 신선이란 것이 되고도 단번에 하늘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것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람에겐 아주 ‘나쁜 것’이다. 그들의 방심(放心)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심결에 하는 우리의 행동은 자각(自覺)없이 집착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이랴.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으니라.
(『아함경』 마스터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 현암사, p147)

붓다는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탐(貪), 진(瞋), 치(癡). 이를 삼독(三毒)이라 표현하는데, 사람의 마음을 헤치는 세 가지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제 성질을 못 참았거나 단순한 실수 정도로 보이는 삼장일행의 하늘에서의 행위가 ‘나쁜 것’인 것은 우리의 인생을 괴로움으로 가득 차게 하는 탐, 진, 치의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손오공은 분노하는 마음을, 저팔계는 탐하는 마음, 사오정은 자신의 행위에 깨어있지 못하는 어두운 마음을. 그런데 여기서 삼장법사는 좀 헷갈린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나쁜 것이야 탐, 진, 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지만, 삼장법사는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 

누군가의 가르침에 소홀한 것은 ‘나는 안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마음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지. 하지만 삼장법사는 무능해보이기는 하나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는다. 서유기에서도 삼장법사는 어리석음 보다는 삼장일행을 끝까지 서천으로 가게 하는 역할에 중심을 둔다.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에 대해 단 일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마음이다. 정진, 불방일(不放逸).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기에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아함경』 p152)할 정도로 불방일은 수행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방일(放逸)은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아함경』 p153). 석가여래의 설법을 듣지 않고 졸았던 삼장법사는 가르침을 받는 순간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지 못한 방일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고집(苦集)에서 멸도(滅道)로 

그런데, 나쁜 것을 바로잡아 올바름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나쁜 것보다 착한 것이 더 좋지 않냐 하는 단순한 이유만으론 그들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쁜 것을 바로 잡을 기회가 왔을 때 그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 만큼 간절했다는 것이다. 

삼장법사는 관음보살에게 대승경전에 대해 얘기를 듣자마자 그걸 얻으러 서천까지 가겠다고 한다(2권, 제12회). 승려로서 칭송받으며 살 수 있는데 그것을 한순간에 버리고 떠난다. 십만 팔천 리나 되는 길을 방일하지 않고 가내는 것. 그것은 삼장법사의 방일했던 나쁜 것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간절함은 손오공이나 저팔계, 사오정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보인다. 손오공은 여섯 도적을 죽였다는 이유로 삼장법사가 잔소리를 하자 바로 떠나버린다. 분노를 참지 못하는 손오공의 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동해용왕이 『이교삼진리』 그림을 설명하며 ‘요망한 신선’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자 마음을 바꾸어 삼장법사에게 돌아간다(2권, 제14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손오공에게도 자신의 나쁜 것을 바로 잡을 기회는 소중했던 것이다. 저팔계는 더 멋있다. 손오공과의 첫 만남에서 피터지게 싸우다가도 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간다는 소리에 쇠스랑을 내던지면서 공손히 인사를 올린다. 이 쇠스랑은 ‘여러 해 동안 지니고 다니며 떨어져본 적 없고 몇 해 동안 나와 함께하며 하루도 떨어지지 않았지.’(2권, 제19회, p247)라고 할 만큼 저팔계가 애지중지하던 것이었다. 탐심 많은 저팔계가 그러한 쇠스랑을 단번에 내던진다는 것은 그 만큼 올바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절실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7~800벌의 가사를 가지고도 삼장법사의 금란가사를 탐내던 관음선원의 노스님에 비하면 저팔계의 마음은 탁월하다. 사오정조차 유사하 강바닥에 숨어 있다가 경전을 가지러 가는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도끼에 목이 날아갈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급히 물결을 뒤집어’(권3, 제22회, p78) 나온다. 

그러니 나쁜 것을 바로잡아 올바름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이 있는가?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아함경』 마스터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 현암사, p142)
 열반이란 ‘마음속에 타고 있는 격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격정의 불꽃은 탐욕과 노여움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격정의 불꽃은 끊임없이 괴로움을 만든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나쁜 것(탐, 진, 치)을 바로잡을 기회가 중요하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에게 서천으로 가는 것은 자신들의 ‘나쁜 것’을 바로 잡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탐, 진, 치로 말미암아 격정의 불꽃(苦)을 일으키는 고집(苦集)의 길에서 그 불꽃을 끄는 멸도(滅道)의 길로 들어서는 기회. 자신들의 괴로운 상태를 벗어나 열반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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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서 집착을 떠나는 것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 의문은 왜 삼장법사와 손오공만이 부처가 되었나?이다. 시작은 모두 간절했다. 그런데 왜 삼장법사와 손오공만이 부처가 되었는가? 이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 아니라 해도 결과적으론 어떻게 부처가 되었나?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이것이 바로 올바름을 닦는 집약된 길이요, 부처의 길로 들어서는 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서유기』 오승은 지음, 솔 출판사, 2권, p263)
반야바라밀은 ‘지혜로서 피안(彼岸)에 도달하다’라는 뜻(『반야·유마경』 이시다 미즈마로 지음·이원섭 옮김, 현암사, p29 참조)이다. 피안은 고통이 없는 상태, 즉 격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은 지혜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공의 이치를 잘 체득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일”(『반야·유마경』 p40)이며, “반야바라밀에 머무는 것은 ‘집착을 떠나는’ 일에서 얻어”(『반야·유마경』 p37)지고,  반야바라밀에 머무는 것은 ‘올바름을 닦는 집약된 길이요 부처의 길로 들어서는 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서 집착한 것을 떠나는 일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는 것 즉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저팔계와 사오정과 달랐던 것이 있다. 그들이 집착하고 있던 것을 지혜로서 놓아버린 일들.

삼장법사는 하늘나라에선 석가여래의 둘째제자였고, 이생에선 태어나자마자 강물에 버려져 스님이 된다. 뼛속까지 스님이라는 거다. 어머니를 만나는 일 말고는 따로 세간의 일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 관음보살을 만나 당나라 황제의 부탁을 받고 서천으로 떠나게 된다. 삼장법사에게 ‘나는 스님’이라는 아상(我想)이 없었을까.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 세간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마음이 없었을까. 삼장법사의 이러한 마음은 두 번에 걸쳐 놓아지게 되는데, 처음은 통천하에서이다. 통천하에서 얼음을 건너갈 때, 아침 일찍 얼음 위를 걸어가는 장사꾼들을 보며 삼장법사는 “저들은 이익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지만, 우리가 명을 받들어 충성하는 것도 오로지 명예를 위한 것이니 저들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5권, p252)며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멸법국을 떠나 남산대왕에게 잡혀 나무꾼을 만났을 때다. “나는 본래 동녘 땅에서 서천으로 경전을 가지러 가던 사람이라오. ...경전을 가져다가 저승의 정처 없는 외로운 영혼들을 제도하려 했소.”라며 자신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에 나무꾼은 “당신이 죽는 것은 겨우 그 정도지만” 하면서 자신의 얘기를 하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나 임금을 섬기는 것이나 모두 같은 이치인지라, 당신은 어버이의 은혜를 생각하고 나는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는구려.”(9권 p161)하며 다시 크게 깨닫는 바가 있다. 이 두 번의 이야기는 스님과 중생, 세간과 불세간의 경계에 대한 삼장법사의 집착을 관(觀)하여 허문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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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손오공은 자기와 똑같이 생긴 가짜 손오공을 맞이하게 된다. 똑같이 생겼으나 다른 마음을 품은 가짜 손오공. 석가여래는 “저것 보아라. 두 마음이 서로 싸우며 오고 있구나.”(6권, p225)며 손오공이 자기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두 마음을 얘기한다. 진심(瞋心)은 분노하는 마음이다. 산목숨에 대해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 이 마음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다. 삼장법사는 당나라를 떠난 후 내내 무능력한 모습이었다. 실제, 보림사에서부터 손오공은 입만 열면 “사부님은 정말 쓸모가 없다니까요.”(4권, p164) “사부님이란 양반은 그저 경문이나 외고 앉아서 참선이나 할 줄 아시는 분이니”(4권, p214)하며 삼장법사의 무능함을 꼬집는다. 72가지 변신술에 근두운을 타고 하루에도 수십 번 서천을 다녀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손오공에게 삼장법사는 너무 무능해보였을 것이다. 거기다 번번이 저팔계를 편애하는 모습에선 분노가 느껴졌을 것이다. “나 혼자서 서방에 가 부처님을 뵙고 경전을 구해서 그걸 동녘 땅에 가져가련다. 그렇게 나 홀로 공을 이루어... 천추만대에 길이 이름을 남길 생각이야”(6권, p200)라는 가짜 손오공의 말처럼, 요괴를 무찌르는데 아무 능력 없는 삼장법사가 모든 공을 다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데에 대한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가짜 손오공 소동은 손오공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이러한 마음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가짜 손오공은 여섯 귀의 미후임이 밝혀지고 손오공은 그 놈의 머리를 단번에 때려 죽여 버리는데, 이는 가짜 손오공의 마음이 자신이 집착하고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단번에 놓아버린 손오공의 마음을 보여준다.

부처, 그 쉽고도 어려운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부처가 된 것은 서천으로 경전을 가지러 가는 임무를 완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임무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도 아니다. ‘나쁜 것’에서 올바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출발은 다 같이 했다. 하지만 그 길에서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과 얼마나 정면으로 대면했는가, 그리고 그 대면에서 얼마나 그것을 놓아버렸는가가 다르다. 석가여래는 자신은 왜 부처가 되지 못하느냐는 저팔계에게 “아직도 어리석은 마음이 남아 있고 여자에 대한 욕정도 사라지지 않았다.”(10권 p283)며 그 이유를 말한다. 저팔계는 세 보살이 삼장법사 일행을 시험했을 때(3권, 제23회)와 같이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욕망과 대면할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망신은 당할지라도 계속 그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그렇지만 집착을 떠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그것을 어떤 인식이라고 안다면 큰 오해를 범한 것이 된다. 그것은 인식을 넘어선 지행(知行) 일치의 세계, 아니 지행 이전의 더 근본적인 하나의 체험이었던 것이니, 불교가 행(行)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 하겠다.  
(『아함경』 마스터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 현암사, p251)
『서유기』에서 십만 팔천 리나 되는 먼 길을 설정한 것은 부처의 깨달음이 인식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직접 행해봐야 하는 길. 알아서 가는 길이 아니라 가다보면 저절로 알아지는 길. 변화무쌍한 길이 주는 뜻밖의 만남과 사건들은 견고한 우리의 인식을 흔들어 버리고, 그 흔들린 틈을 따라 깊이 감추어져 있던 욕망이 올라온다. 그 욕망과 정면으로 대면하고 놓아버리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행하는 것. 불방일.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깨달음의 대여정이 될 수 있는 것은 매순간 그것을 행하고 있음을 분명히 자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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