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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고전에 묻다 ③ 절망은 어떻게 힘이 되는가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3-01-26 15:58
조회 : 2,072  

사마천 - 궁형의 치욕에 빠져있던 그 … 셀프 힐링의 경지 이뤄
김시습 - 책 불사르고 떠돌이 생활 … “백성이 무슨 죄 있나” 통곡


모두다 어렵다고 합니다. 세상은 잘 살게 됐다지만 사람들은 뭔가 항상 부족해 보입니다. 절망에 빠져 자기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바닥을 알아야 다시 일어설 힘도 얻게 된다고요. 중앙일보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는 ‘동양고전에 묻다’에서 중국의 사마천과 한국의 김시습을 다시 읽었습니다. 극도의 불우한 처지에서도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죽비를 놓치지 않았던 그들의 행적을 돌아봅니다.


사마천이 답하다
처절한 고통, 죽음 넘어선 깨달음으로 안내하다


김영수
중국사·『史記』 전문가
우리 사회가 고통을 앓고 있다. 치유라는 말이 자주 거론될 만큼 고통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수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대개가 일회성 처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통의 근본적 원인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기가 우리에게 없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몰아치고 있는 힐링바람이 진정한 치유인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역사학의 성인이란 뜻의 ‘사성(史聖)’으로 불리는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기원전 90년?)은 직언(直言) 때문에 옥에 갇히고 설상가상 반역죄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49세 나이에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궁형(宮刑)을 자청하고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한 비운의 인물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재물도 없었고”,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는 절망적 상황에서 사마천은 죽음을 면할 수 있는 또 다른 극한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궁형 이후의 자신의 상황을 사마천은 이렇게 술회한다.

 “저는 비천한 처지에 빠진 불구자입니다. 무슨 행동을 하든 남의 비난을 받으며, 잘하려고 하여도 반대로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습니다.”

 궁형으로 인해 여성처럼 변한 목소리에 수염은 없어지고 노파처럼 일그러져 밖에도 나갈 수 없었다.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장이 뒤틀리고, 집에 있으면 망연자실 넋을 놓고 무엇을 잃은 듯” 했으며, 어쩌다 집을 나가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이 치욕을 떠올릴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마천은 이런 극한 고통 속에서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자신이 왜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됐는지, 또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 억울하기만 했다. 절망은 울분으로 바뀌었다. 울분은 다시 지독한 원한으로 사무쳤다. 복수의 일념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수시로 어른거렸다. 절망이 반복됐다. 하루에도 수없이 자결을 생각했다. “천한 노복이나 하녀도 얼마든지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 왜 자결하지 못하겠습니까.”

 사마천은 모든 것을 다시 생각했다. 세상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심했다.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하여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九牛一毛)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다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는 생사관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생사관은 인간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으로 수렴됐다. 그는 경제와 인간의 처지를 이렇게 설파했다.

 “세간에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이 길거리에서 죽는 법은 없다’고 하는데 빈말이 아니다. 무릇 보통사람들은 자기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헐뜯고, 백 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의 노예가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화식열전’)

 이어서 정치에도 경지가 있다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정치의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하여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고, 가장 못난 정치는 (부를 놓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화식열전’)

 사마천은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을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처절한 의문과 연계시켜 마침내 그 고통을 절대 역사서 『사기』 저술로 승화시키고 나아가 사회와 인류를 위한 가치로 전환하는 극적인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 셀프 힐링이다.

 치유는 고통을 전제로 한다. 고통을 온전히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치유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고통을 견뎌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힐링의 최고 경지는 자기치유를 통해 강력한 면역력을 획득하는 것이며, 그렇게 획득한 면역력에서 항체를 뽑아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면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마천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의 모범이며, 문화적 힐링의 텍스트이다.

김영수 중국사·『史記』 전문가


김시습이 답하다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 … 시와 소설로 존엄 지키다


심경호 교수
고려대 한문학과
김시습은 천재로서 소문이 났지만 가문이 뛰어나지 못해 주류사회에 들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정의관이 투철해서 당시 유학자들이나 불교도들이 염치를 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유학에서는 이익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만 많은 지식인이 세조의 정권 찬탈에 가담하거나 동조했다. 불교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지만 여러 승려가 왕실의 법석에 초대되어 보신에 급급했다.

 김시습은 아무리 높은 사상과 이념도 현실을 구원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더구나 그는 ‘하루 노동을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를 말라’는 가르침을 굳게 지켰다. 1472년(성종 3) 이후 서울 수락산 폭천정사에 거처할 때는 도연명의 시에 차운하여’권농’(勸農)시를 짓고 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풍속이 노비에 의지하여 게을리 노는 자들이 많고 불교를 믿어 기식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한가하게 노니는 우족(右足·양반사대부)이나 무료하게 지내는 좌도(左道·승려)가 모두 손을 놀리고 있으면서 백성들이 떠 먹여주길 바라고 있다.”

 이렇게 김시습은 일하지 않는 자들을 미워하고 남에게 베풀지 못하는 자들을 사갈처럼 여겼다. 자기 재산을 가로채려는 자가 있자 소송을 벌여 승소한 뒤에는 껄껄 웃고 재산문서를 찢어버렸다. 부당한 자들이 높은 지위에 임명될 때마다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사람이 그런 임무를 맡는가”라고 통곡했다.

 농부의 형상을 100여 벌이나 깎아두고 종일 응시하다가 문득 통곡하고는 태워버리기도 했다. “뱀과 돼지 횡행하여 길이 아득하고, 승냥이 이리 날뛰어 풍진세계 어두워라!”(蛇豕縱橫迷道路, 豺狼跳暗風塵)라고 탄식하며 현실을 변혁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했다.

 1455년 윤6월,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사흘 동안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통곡 끝에 책을 불살랐다. 이듬해 1456년(세조 2) 6월 사육신이 처형되자, 그들의 시신을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 1458년 봄, 동학사에서 단종의 제사를 지낸 이후로는 중의 옷을 걸치고 ‘탕유(宕遊)’ 혹은 ‘청완(淸翫)’이라고 일컫는 방랑을 시작했다. 1462년에는 경주 분황사에서’무쟁비’(無諍碑) 시를 지어, 원효처럼 속박 없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

 “아! 인생이 천지 사이에 생겨나 명리에 근심하고 생업에 급급하여 그 몸을 고달프게 하기를, 뱁새가 들의 완두를 그리워하고 박이 나무에 매달리듯 한다면 어찌 괴롭지 아니하랴?”라며 자유롭게 시를 쓰는 길을 택했다. “어디가 가장 길손의 한을 더하는가. 무너진 담에 봄비 내려 풀이 무성한 그곳” “옛 속인 승려에게 시주하고 지금 승려는 속인에게 시주하니, 윤회하여 덕 갚음도 무방하다” 같은 그의 문장에는 시인이자 철학가였던 그의 면모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이후 김시습은 경주 남산 금오산실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인간 존재는 ‘슬픔의 그릇’이란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신화’는 새 이야기란 뜻이니, 당시에 널리 읽히던 소설과 다른 소재와 발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엮었다는 뜻이다. 폭력과 억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 등 기존의 가치에 저항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1472년부터는 서울 수락산 폭천정사에 거처하면서 서울을 드나들며 준엄한 비판을 내뿜었다. 거리에서 공신 정창손의 행차에 마주치고는 “이놈아, 그만 쉬어라!”라고 일갈했다. 58세 되던 1492년부터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 머무르며 “봄비 흩뿌리는 이삼 월/선방에서 병든 몸을 일으켜 앉는다/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고 싶다만/중들이 거양한다 부산떨까 두렵구나”하고 심경을 토로했으며, 이듬해 봄날 영원한 안식처로 떠났다.

 정조대왕은 그에게 이조판서의 직을 추증하고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민중들은 김시습이 맹호를 부리고 술을 피로 변화시키며, 기운을 토해서 무지개를 만들며, 오백 나한을 청해 온다고 믿을 만큼 그를 사랑했다. 부조리에 저항한 그의 광기는, 정의의 관념이 퇴색한 우리 시대를 아프게 고발한다. 현실에 남아 있으면서 현실을 부정한 그의 방랑은, 어떠한 좌절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격려가 된다.


『매월당집』(梅月堂集)=김시습의 시문집. 그의 사망 18 년 뒤에 중종의 명으로 유고를 모아 엮었다. 총 23권 중에 15권이 시집이다. 자연과 인간, 세태를 다뤘으며, 섬세한 시정과 유불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결합했다. 특히 관동 유람길에서 쓴 시편을 모은 ‘관동일록’은 40대 후반의 무르익은 문학적 경지가 담겨 있다.

심경호 교수 고려대 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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