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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뒤흔드는 허구의 힘-<픽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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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oong 작성일13-05-09 23:15 조회7,152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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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뒤흔드는 허구의 힘

 
풍미화(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푸코는『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거기에는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지리가 각인되어 있는 사유의 친숙성을 깡그리 뒤흔들어 놓는 웃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성주의가 꿈꾸던 유토피아가 균열을 일으키는 자리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의 공간을 발견했던 것이다. 푸코는 사물의 질서에 대해 매우 생소한 시각을 던져주는 책을 발표하면서 보르헤스의 텍스트가 자기 책의 탄생 장소라고 밝혔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자기 생각의 토대를 변경하거나 새로운 생각의 물꼬를 트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그것이 원래 독서의 목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하는 생각의 내용물을 조금씩 담아가는 과정이 글쓰기일 것이다. 보르헤스는 푸코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수많은 작가들과 사상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보르헤스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학의 기준으로는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그런 그가 어떤 내용으로 세계의 문학계 내지는 사상계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떨칠 수 있었을까. 17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그의 대표작인『픽션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자.
 
경계를 산책하는 작가
 
보르헤스는 1899년 8월,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가와 외가의 조상 중엔 군인이 많았다. 보르헤스는 작가가 되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는 자의식을 갖기도 했다는데, 개척시대의 정신적 유물로 전선에 나가 무훈을 세우는 것이 떳떳한 일이라는 사회적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전병과 더불어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 덕분에 보르헤스는 평생 행동하는 인간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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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집안에는 실명의 유전병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으면서 암송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의 집에는 문학가가 되고 싶었던 변호사 출신의 아버지가 모아들인 장서들로 빼곡한 도서관이 있었다. 보르헤스는 영국인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시작한 독서의 세계를 그의 집안 도서관과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을 거쳐 세계의 도서관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영국인 할머니의 강력한 문화적 권위로 인해 보르헤스와 아버지는 물론 스페인어를 사용하던 어머니마저 영어를 배워야 했다. 보르헤스는 집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밖에서는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중언어의 환경에서 자랐다. 집안 도서관의 많은 책들이 영어책이었으므로, 보르헤스는 영어책을 읽고 외우면서 작가로 성장했던 것. 이후에 보르헤스가 북미 대륙에서 많은 강연을 할 때에 스페인어로 글을 쓰는 변방의 작가가 유려하고도 풍부하게 영어를 사용하고 영어 텍스트를 암송하는 것을 보고 미국의 지식인들이 열광했음은 물론이다.
 
보르헤스는 청소년기에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식 교육을 받고 성년이 되어 돌아온 아르헨티나에서 주변인 취급을 받게 된다. 유럽인도 아니면서 아르헨티나 토착민도 아닌 처지의 지식인이 자기의 세계를 열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했을까? 그가 찾은 것은 보르헤스가 ‘오리야스’라고 부르는 도시의 변방 지역이었다. 그는 실명하기 전까지 도시 외곽으로 자주 산책을 했다고 한다. 그곳은 날로 비대해져가는 도시에 밀려 사라지는 자연과의 경계이고, 신화의 메아리가 남아있는 장소였다. 보르헤스는 드넓은 대초원의 목장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거친 카우보이들(가우초)에 대한 향수와 도시의 변방(오리야스)에서 찾은 신화를 시작으로, 민족과 문화의 혼합으로 유동하는 아르헨티나 문학의 독창성을 만들어 나갔다. 뒤섞이고 갈라지는 문화는 ‘다름’을 통해서 구분되고, 이러한 차이들을 선택하고 절단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변방인들의 특권이자 작가(作家, the maker)의 의무였다. 일례로 보르헤스가 텍스트들을 절단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룩한 문학적 방법은 ‘저자의 부재와 독자의 탄생’이라는 간결한 말로 정의되는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유명한 문학이론을 낳게 된다. 이 이론과 연관되어 빈번하게 인용되는 단편이「피에르 메나르『돈키호테』의 저자」이다. 
 
사라진 원저자
 
이 소설은 피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세르반테스의 유명한 소설을 온갖 고심과 심혈을 기울인 노력 끝에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소설로 써냈다는 것이 내용이다. 보르헤스는 그의 에세이에서 “하나의 문학은 텍스트 자체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읽혀지는 방식에 따라 이전이나 이후의 문학과 변별된다”고 했다. 아래의 텍스트를 읽어보면 보르헤스의 말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글자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메나르의돈키호테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비교해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세르반테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진리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돈키호테1, 9

재치 넘치는 평민 세르반테스가 17세기에 이런 열거들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에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 ‘진리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픽션들,피에르 메나르돈키호테 저자중에서)
 
처음에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위의 두 글이 완전히 다른 글이라고 착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참을 더 읽다가 두 인용문이 글자 하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일이 확인하고는 한참을 웃었던 일이 있다. 메나르의 글에는 줄까지 그어가며 역사에 대한 그의 풍부한 비유에 감탄을 해가며 읽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세르반테스의 글과 똑같은 글이었던 것이다. 우째 이런 일이. 보르헤스에게 깜빡 넘어갔다. ‘반면에’라는 수식어 하나의 힘을 철썩같이 믿고 위아래의 글이 당연히 다를 것이라고 내심으로 결정을 내리고 읽어버린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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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문학이라는 것은 이전의 텍스트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형식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원저자’라는 개념은 부정된다. 실제로 그 어떤 글도 다른 글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로 완벽하게 창조된 글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텍스트는 읽는 사람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에, 피에르 메나르가 17세기의 스페인어로 쓰인『돈키호테』의 일부를 20세기에 스페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똑같이 쓰더라도 저자와 쓰인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쓰기와 읽기에 절대적인 중심이나 진리가 없다면, 다양한 글쓰기와 독서가 가능하다. 보르헤스가 세계를 보는 눈도 역시 이와 비슷하다. 세계에는 절대적인 중심이나 진리가 없다는 것. 복잡 다양한 세계를 읽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방에 선 보르헤스는 그곳에서 중심을 해체시켜 버림으로써 스스로 범세계인이 되었다.

비연속의 가상 세계
 
보르헤스는 어려서부터 백과사전 읽기를 좋아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지역 백일장에서 수상하고 받은 상금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사는 일이었다.『픽션들』의 첫번째 소설은「틀뢴, 우크바르, 오리비스 테르티우스」이다. 이 소설을 단편집의 첫머리에 실은 이유는 뭘까. 소설에서 화자인 보르헤스는 우크바르를 발견한 것은 거울과 어느 백과사전을 연관시킨 덕분이라고 말한다. 거울과 백과사전이 만들어내는, 지식이라는 진리를 덮어쓴 절대 세계가 결국엔 거울에 반영되는 허상의 세계일 수도 있다는 것이 보르헤스 사상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우크바르는 백과사전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나라이다. 틀뢴은 우크바르의 한 지역이라고 소개되다가 나중에는 새로운 혹성으로 지칭이 된다.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틀뢴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어느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 거짓 국가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발견한 이후, 몇 년 후 알려지지 않은 행성의 전체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가 담긴 백과사전인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의 일부가 발견된다. 이것들은 모두 2세기에 걸쳐 일부 지식인들이 대를 이어 만들어낸 가상 세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백과사전에만 존재하는 가상 세계의 문화와 역사가 실제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대체하고 있으며, 가상 세계의 물질이 실제 세계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실제라고 믿고 있는 세계에 균열이 발생했다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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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는 하나의 낯선 세계가 있다. 그것은 관념속에서만 존재하는 혹성으로 그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비연속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행성의 남반구에는 명사가 없고, 부사적 기능에 의해 수식되는 동사들만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달’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명사는 없지만, ‘달뜨다’ 혹은 ‘달비추다’라는 동사가 있다. 그리고, 이 행성의 북반구에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들만 있다. 그들은 ‘달’이라고 말하지 않고 ‘어두운-둥그런 위의 대기의-밝은’ 혹은 ‘주황빛의-부드러운 하늘의’ 등의 형용사들로 달을 지칭한다. 형용사들의 복합체는 실제 사물인 명사에 해당하지만, 그런 현상은 완전히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곳은 독립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것들은 연속적인 실체를 이루지 못하고 동일화되지도 못한다. 무한하게 파편화되는 것들은 또한 무한하게 결합하면서 변화할 수 있다. 고로 이 세계에는 명사로 고정화되는 주체가 없다. 그러니까 가상 세계라는 걸까? 보르헤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반대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 명사화될 수 없는 것들을 명사화하는, 즉 고정될 수 없는 것들을 고정하고 주체화시키려는 세계이다. 약속과 법칙을 만들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 세계, 그러나 시공간이 변함에 따라 결국에는 약속도 법칙도 미로처럼 얽혀버리는 세계, 우연을 필연으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세계,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푸코가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통해 우리 세계의 균열 지점에서 불연속을 찾았듯이, 우리도 보르헤스를 통해서 질서의 세계 밑바닥에 놓인 허구에 대해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불균질한 밀도의 시공간
 
보르헤스에 관한 해설서들을 읽다보면 한결같이 그가 시간을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설명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게다가 시각 장애를 운명으로 안고 사는 그에게는 언제나 심연과 같이 어두운 공간보다는 소리를 통해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시간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수사학의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의식할까? 보이는 것들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들이 달라지는 것을 듣고, 기쁨이나 고통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시간을 의식한다. 즉 우리는 변화를 느끼면서 시간을 의식하는 것이다. 변화와 시간은 어쩌면 같은 내용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보르헤스도 감각이 주는 이런 변화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는 잠언을 되뇌이며, 시간을 흐르는 강에 비유하거나 "인간은 결국 망각과 시간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즉 시간이 정지한 공간만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공간만의 세계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보르헤스는「비밀의 기적」에서 한 컷의 필름 조각을 보여주며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맞춰보라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대인 작가이다. 그는 제3제국의 군대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며칠을 지낸 후에 총살을 당할 운명이었다. 그는 남은 시간 동안 그가 살아온 날들을 정리해보았다. 이런 저런 책을 읽고 쓰며 친구들과 어울린 것이 그의 일생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편의 희곡이 미완성인 채로 남은 것이 그에겐 하나의 과제로 생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과제를 꼭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이면 죽어야했다. 그는 꿈속에서 신을 찾아 도서관에 갔고, 거기서 자신이 희곡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허락받았다. 다음날 아침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사형장에 선 주인공에겐 무슨 일이 생겼던가. 총알이 발사되기 직전, 빗방울 하나가 그의 관자놀이 곁을 스치는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그렇게 멈춘 상태로 일 년이 흘러갔고, 그동안 그는 자신의 희곡을 완성했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자 빗방울이 그의 뺨으로 굴러내렸고, 그를 향해 총알이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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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컷의 필름은 일 년이라는 시간을 담은 채로 다른 필름들과 함께 역사 속으로 흘러갔다. 시간이 멈춘 공간은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처럼 시간이 고정된 공간이다. 이 소설은 그 평면의 공간 안에 얼마나 많은 입체적 시간이 담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흘려보내는 시간의 어느 찰라는 누군가에게는 수많은 나날들이 압축된 하나의 평면 공간으로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나 공간에는 다양한 밀도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 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세계는 균질적이지 않고, 그러므로 법칙이나 질서라는 틀 하나로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의 필름 중에 어느 한 컷만 선택해서 확인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확인할 수 없다. 영화를 멈추고 필름들을 일일이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필름들이 어떤 시간을 함축한 공간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세계는 감각 가능한 것과 감각 불가능한 것들이 혼합되고 갈라지는 미로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해 혹은 오해
   
아마도 내 최고의 단편일「남부」에 관해서는, 그것이 소설적인 사건들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뿐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픽션들』,「1956년의 후기」중에서)
 
보르헤스는 1944년『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기교들』을 묶어『픽션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위의 인용문은 1956년에 다시 소설집을 손질할 때에 3편의 단편을 추가하면서 쓴 후기에서 한 말이다. 쓴 사람의 의도와는 다른 식으로 해석되는 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방식으로 읽힌다. 읽는 사람에게 수용된 텍스트는 쓴 사람의 텍스트와는 이미 다른 텍스트가 되어있기 마련이다. 같은 사람이 쓰고 읽는다고 하더라도, 쓰여지는 시공간과 읽혀지는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부」『픽션들』의 마지막에 실린 단편이다. 주인공 달만은 계단을 뛰어올라가다가 사고를 당한다. 폐혈증으로 발전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병원에서 힘겨운 치료 과정을 거친 다음, 남부에 있는 자신의 시골 목장으로 혼자 요양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꼭 동시에 두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은 가을날을 보내면서 고향 땅을 조용히 걷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병원에 갇혀 체계적인 치료를 받고 있었다. … 달만은 자기가 ‘남부’를 향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과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 차장은 그의 차표를 보더니 항상 정차하던 그 역이 아니라 조금 앞에 있는 역에서 내려 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달만이 잘 알지 못하는 역이었다. …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거나 꿈꿀 수 있었다면, 이것이 그가 선택했거나 꿈꾸었을 죽음임을 알았다.
                                                                                                                         (『픽션들』,「남부」중에서)

「남부」는 운명과의 우연한 만남에 대한 은유로 읽히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죽는 방식을 다른 경로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죽음의 공간에 시간을 혼합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설 속에서 달만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은 것인지, 아님 치료를 마치고 고향으로 휴양하러 가는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소설의 사건만을 따라가더라도 모호한 요소가 많다. 치료를 마치고 휴양을 가는 경로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달만은 알지도 못하는 역에 내려져서 낯선 사람과 목숨을 건 칼싸움을 벌여야 하는, 전혀 뜻하지 않은 상황의 전개를 처음에는 당황해하다가 결국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병원에서 자신이 꿈꾸었던 행복한 죽음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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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만이 병원에서 치료 중에 이미 죽었고, 휴양하러 가는 길에 결투에 휘말리는 것은 그가 꿈꾼 죽음에 대한 단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장면을 대하면 뭐랄까, 시간이 앞쪽에서 뒤쪽으로 끌어당겨졌다가 다시 앞쪽으로 튕겨져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낯선 경험이 분명한데도 어쩐지 전에 겪은 일 같다는 생각이 들 때와 마찬가지인 셈이다.「남부」에서 달만은 서로 다른 방식의 죽음을 경험하는 중인데, 이는 그가 이미 다른 시간에서 접했던 경험들을 다시 재생하는데 불과한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죽음이란 어쩌면 이전의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반복 재생하는 과정에 속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남부」를 읽으면서 들었다.
 
픽션은 무질서한 세계와 대면하면서 하나의 질서 혹은 의미를 구축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과학도 결국엔 하나의 픽션으로, 임의의 약속된 기호를 가지고 질서와 의미를 만들면서 세계를 고정화하려고 한다. 감각하지 못하는 비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환상은 픽션에 반영되어 드러난다. 보르헤스가 자주 사용하는 거울의 이미지는 세계는 복제되는 허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소설이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는 뜻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 같다. 소설의 모호한 틈에서 엿보이는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도 푸코처럼 오랫동안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목록

세경님의 댓글

세경 작성일

저명한 명성을 듣고 도전했다 신속히 포기하고 한동한 상심했었는데... 선생님 글을 읽으니 보르헤스가 다시 흥미로워집니다. 물론 친절 가이드를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길잡이로 찬찬히 읽어보며 보르헤스를 다시 만나봐야겠습니다!

poong님의 댓글

poong 댓글의 댓글 작성일

어디서 저명한 명성을 들으셨나요? 헐~ 저는 작년에 저 책을 4학기 교재로 읽어야 할 때까지 책이고 작가고 이름도 못들어봤는데요....ㅠ.ㅜ 아 정말, 감이당 다니면서 세상에 이런 책들이 있구나 하는 쇼크를 자주 받게 됩니다. 년말에 졸업하면 다시 일자무식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보르헤스의 책들도 최소한 번역된 책이라도 다읽어야겠구요... 책읽는 일에 욕심내다가 밥줄도 끊어지게 생겼어요  ㅠ.ㅜ 이거 참, 일하기가 싫어지는데, 참아야겠죠? 보르헤스 같은 인텔리가 고달픈 하급 도서관 사서직을 십여 년이나 견디면서 고독속에서 자기 글을 썼는데, 저는 맘내키는 짓만 하려고 하니 이건 근기가 부족한 거죠. 보르헤스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갈가랑비님의 댓글

갈가랑비 작성일

혼자 읽었을 땐 너무 어려워서 중도포기했었는데, 샘의 글을 보니 보르헤스에게 한 발 다가간 느낌도 드네요.
'비밀의 기적' 부분은 좀 이해가 안되는데, 시간을 사유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릴때,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나인지 남인지 분간이 안되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삶 속에서도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네요^^

poong님의 댓글

poong 댓글의 댓글 작성일

비밀의 기적은 작년 4학기에 에세이를 썼던 소설입니다. 시간이 압축된다는 것은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하는 것이겠지요. 한 순간에 1년이나 압축하는 건 정말 신의 도움이 없고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한 시간을 십분 정도로 압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멍 때리고 앉아서 많은 시간 보내는 일이 자주 있는 저로써는 가슴에 와닿는 소설이었습니다. 다시한번 픽션들에 도전해보세요~ 읽으면 읽을수록 아주 잼나는 글입니다. 강추*^^*

시연님의 댓글

시연 작성일

선생님이 '픽션들'로 에세이를 쓰신다고 하실 때 그래서 책은 뭐냐고 다시 묻는 제게 책 이름이 '픽션들'이라고 말씀해주셨죠. ㅎㅎㅎ 픽션들이 보르헤스가 쓴 책이었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분 좀 유명한 분이신듯~^^;그런데 쌤~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랑 피에르메나르의 돈키호테가 같다는거예요? 다르다는거예요? 저 위에 들어주신 예문에서만으로는 정말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은데 쓴 저자가 다르니까 다른 글이라는 건가요? 흥미로운 부분이지만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ㅠㅠ그리고 보르헤스의 유전병이요. 이 사람은 그럼 실명인 상태로 글을 썼던건가요? 신체의 장애가 그에게 원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poong님의 댓글

poong 댓글의 댓글 작성일

죄송합니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댓글을 이제야 읽었네요 .... ㅠ.,ㅜ 메나르의 돈키호테랑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불어와 서반아어가 동시에 가능한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똑같을 수도 있겠지요? 실제로 쓰여진 내용이 똑 같다는 거니까... 그러나 같은 책도 번역자에 따라서 다르게 번역이 되듯이 읽는 사람에 따라서도 받아들이는 점에선 달라지겠지요... 시연쌤 질문에 대답드리자면....  말 그대로 두 개의 돈키호테는 같은 내용이지만, 쓰여진 시대와 저자와 언어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 아우~ 헷갈려~~ 에 또... 보르헤스는 40대에 거의 실명을 합니다. 그 상태로 40년을 살면서 글을 썼는데, 운율이 있는 정형시나 짧은 단편을 썼지요. 책은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었고, 평생을 어머니의 보호 아래 살았어요. 어머니가 90세까지 사셨거든요. 신체의 장애가 그에게 원동력이 되었는지는 안물어봐서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실명에 대비해서 글을 줄줄 암송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니,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사는 동안 세계에 대한 사유에 집중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다음 학기 에세이는 인물톡톡인데, 보르헤스로 하려구요... 매력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보르헤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