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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자의 조용한 전복! <말과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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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달집 작성일13-05-12 06:58 조회7,119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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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사물글자.jpg
 
 

이영희(감이당대중지성)
 
여기 웃기는 분류법이 있다.
 
동물이 a)황제에게 속하는 것, b)향기로운 것, c)길들여진 것, d)식용 젖먹이 돼지, e)인어(人魚), f)신화에 나오는 것, g)풀려나 싸대는 개, h)지금의 분류에 포함된 것, i)미친 듯이 나부대는 것, j)수없이 많은 것, k)아주 가느다란 낙타털 붓으로 그린 것, l)기타, m)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것, n)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것
『말과 사물』, 7쪽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 백과사전’의 분류다. 『말과 사물』은 이 분류법과 함께 시작된다. 웃긴가? 푸코는 이 분류법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웃기다기 보다 황당하다. 아무튼 좋다. 웃기든 황당하든 이 난데없이 다가오는 것. 이 반응의 정체는 뭘까? 아마 이 분류는 우리가 사유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보여주고 그래서 우리의 사유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유할 수 없는 것과 사유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리고 그 한계는 어떻게 생성되는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이것을 해명하려고 한다. 『말과 사물』의 지적 탐사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동일자의 역사
 
『말과 사물』은 말과 사물의 관계를 통해 서양의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탐사한 책이다. 지식의 대상인 사물과 시대별 에피스테메(episteme, 특정 시대의 인식체계) 속에서 말해지는 담론들(무엇인가 주장하는 기호들의 집합체). 말은 주어진 에피스테메 속에서 말해져 왔고 사물은 그 담론들 속에서 지식이 되었다. 에피스테메는 시대마다 인과율없이 단절되었다. 푸코는 그 불연속지점을 포착하고 그 단절된 시대들을 르네상스(16세기), 고전주의(17세기)  근대(19세기)로 구분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을 근거지은 에피스테메는 ‘닮음(유사성)’이었다. 닮음의 에피스테메에서 말과 사물은 일체적 관계를 이루며 하나의 거대한 단일성 속으로 끌어들인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동일성과 차이에 의해 분류하고 질서화하는 ‘재현’의 에피스테메였다. 재현은 동일한 것과 다른 것에 관한 명료한 “일람표”를 만드는 일이다. 이때 말은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다.

마침내 근대에는 ‘인간’이 지식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등장한다. 인간이 본래부터 있었는데 근대에 와서 지식의 대상이 되었다니? 이 말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다. 지금 우리의 인식은 그것을 너무도 자명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고전주의 시대의 인간은 동일성과 차이로 구성되는 도표 속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린네가 생물의 분류표에서 모든 생물 종에 대한 학명을 부여하듯이 분류표 속에 하나를 차지하는 종, 호모 사피엔스에 불과했던 것이다. 근대의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지식을 구성하는 존재다. 지식의 중심에 인간이 서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즉 인간은 지식에 제기된 가장 유구한 문제도 가장 지속적인 문제도 아니다. … 그것은 근본적인 지식의 배치에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였다.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시대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이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만약 그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지기에 이른다면,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이 …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말과 사물』, 525~526쪽

푸코는 근대 지식 배치의 전면에 나선 ‘인간’을 르네상스가 그랬고, 고전주의가 그랬듯이 이  배치가 흔들리게 되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왜? 지식의 배치는 “지금으로서는 형태가 무엇일지도,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의해” 다르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짐(동일자).jpg


이 지식의 배치, “사물의 질서에 관한 역사는 동일자의 역사”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동일자조차도 시대별 에피스테메에 의해 변해왔다. 이는 동일자 자신의 역사를 보더라도 결코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 또 한 가지! 동일자와 타자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동일자의 역사는 타자를 계속해서 배제함으로써 만들어진 역사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이 동일자의 역사를 파헤쳐 드러낸다. 푸코는 웅변한다. 타자는 서양 문화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꿈틀거리면서 이 지층을 뒤흔들고 있다고.
 
타자, 또 다른 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푸아티에(Poitiers)에서 외과의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아버지의 바램을 저버리고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 프랑스의 최고 학문기관인 고등사범학교에 수학하면서 두 번의 자살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그 시절 푸코는 행복하지 않았다. 공부가 과중해서도,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해서도 아니었다. 그때 푸코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적 혼란과 두려움이 혼재한 가운데 난폭하게 행동하거나 광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푸코는 이 혼란을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책을 탐독하면서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동성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훗날 푸코가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 재직하면서 쓴 『광기의 역사』는 자신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다. 자유를 찾아 떠난 스웨덴이었지만 오후 두시면 시작되는 길고 긴 밤의 여정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견디기 어려웠다. 푸코는 “어떤 자유의 형식은 억압사회와 똑같은 억압적 효과를 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과 존재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유를 찾아 떠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하는 길밖에 없음을 알아차렸다. 온전한 자유는 그 속에서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광기의 역사』는 쓰여졌다. 이 책은 푸코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낯선 주제, 기존의 논문에서 볼 수 없었던 파격과 기괴함이 거기 있었다. 한 인터뷰에서 푸코는 『광기의 역사』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내 개인사 속에서도 내가 배제되었다는 것, 진정 배척되었다는 것, 사회의 그늘 속에 속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성 정체성이 바로 자기 문제일 때 그것은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과적 문제로 변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면 당신은 비정상이라는 의미고, 당신이 비정상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환자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디디에 에리봉 지음, 『미셸 푸코, 1926~1984』, 53쪽)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광기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다. 『광기의 역사』는 이러한 시각에서 광기의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는지 방대한 자료에 의존하면서 끈질기게 추적했다. 그가 밝혀낸 광기는 병이 아니었다. 역사에서 배제되고 이성으로부터 망각되어 버려진 침묵의 얼굴이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은 악마라는 초자연적인 힘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때 광인은 죄에 빠진 사람의 구체적 모습으로 공동체 내에서 신앙을 가져야 하는 살아 있는 교훈이었다. 그러다 17세기 이후 광기와 사유를 대립적으로 보는 인간주의 관점이 뿌리를 내리면서 광인은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 세계는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표준적인 인간만이 사는 장소가 되었고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은 조직적으로 배제되었다. 이른바 17세기 ‘대감호’ 시대. 이 시대에 이르러 사회는 인간 표준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사회적 타자들을 감금했다. 광인을 비롯하여 기형인, 부랑자, 실업자, 거지, 빈민 등 다양한 비표준적인 개체들이 강제적으로 격리되었다. 표준화는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과격해졌고 근대 유럽의 감금 시설에는 자유사상가, 동성애자, 무신론자, 주술사에서 낭비벽이 있는 사람까지 표준에서 일탈한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갇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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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8세기에 들면서 여기에 새로운 경계선이 그어졌다. 감금의 제도가 종식되고 대부분의 사회적 타자들에게 자유가 허용되었지만 광인만이 별도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었다. 광기는 이성의 지혜와 조화로운 질서를 위험에 빠뜨리는 부정적인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19세기 정신의학은 광기를 인간의 비정상적이고 반자연적인 정신구조 혹은 정신적 질병으로 이해하고 치료의 대상으로 삼았다. 광인의 증상은 관찰되고 분류되어 병리학적 징후로서 범주화되었다.

광인에 대한 사회적 수용의 변화는 바로 침묵 속에서 억압된 광기의 수난사를 보여준다. 광기의 역사는 이성 중심의 사회가 정신과의사를 대변자로 만들어 광인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고 정상인들의 사회로부터 배제한 “타자의 역사”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이성이라는 동일자는 역사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타자를 통해서만 보편적인 정상성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언제나 타자를 통해서만 자신을 규정하는 이성이란 이름의 동일자의 위상. 이것은 동일자와 타자는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은 허물어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밖을 고집하니 안이 생기고 안을 고집하니 밖이 생긴다. 동일자를 고집하니 타자가 생긴 것이다. 동일자가 없으면 타자도 없는 법! 그렇다면 타자는 또 다른 동일자, 나였던 것이다.
 
익명의 사유, 주체 없는 앎, 동일자 없는 이론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광기는 원래 비정상적이고 반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이라는 동일자의 역사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동일자의 역사 또한 타자의 역사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말해준다. 그래서였을까?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에 “이 연구는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를 기술하는 작업과 어느 정도 메아리처럼 호응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동일자 역시 역사를 통해 구성된 것이라는 것. 우리는 『말과 사물』에서 ‘광기의 역사’와는 다른 ‘지식의 역사’에서 광인을 다시 만난다. 이 광인은 돈키호테다. 
 
광인은 … 사물을 실제의 사물이 아닌 다른 것으로,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낯선 사람을 알은체하고, 가면을 벗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면을 씌운다. … 광인은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존재이고, 도처에서 닮음과 닮음의 기호만을 보는 자이며, 광인에게는 모든 기호가 서로 유사하고 모든 닮음이 기호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문화 공간의 다른 극단, 그러나 대칭을 이루기에 바로 인접해 있는 극단에서 시인은 명명되고 언제나 미리 규정된 차이 아래 파묻힌 사물들의 친근성, 흩어져 있는 사물들의 유사성을 다시 찾아내는 사람이다. … 광인과 시인 사이에서 어떤 지식의 공간이 열렸는데, 이 공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서양 세계에서의 본질적인 단절 때문에 유사성이 아니라 동일성과 차이이다.
『말과 사물』, 89~90쪽
 
광인은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는 지식인이며 동일자다. 마치 마법사와 같이 닮음을 저렇게 많이 인식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는가. 모든 기호 사이에 닮음을 끊임없이 확산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고전주의 시대, 동일성과 차이에 의해 재현의 에피스테메의 공간이 펼쳐지면서 광인은 “망상과 정신착란”으로 바뀌고 “자연과 책을 단일한 텍스트로 읽어 낸 박학은 공상으로 치부”된다.  

광인과 시인 사이에서 열린 지식의 공간은 유사성이 아니라 동일성과 차이다. 광인은 유사성을 자신의 인식 조건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고 시인은 거기에서 차이를 인식하는 존재다. 여기서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인 재현이 등장한다. 『광기의 역사』가 광인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배제했는지 다뤘다면 『말과 사물』에서 광인은 지식의 공간에서 어떻게 단절되었는지 드러낸다.
 
 
존재하는 이유.jpg


이후 고전주의 시대와 근대의 불연속지점을 포착하게 되는데 그곳에 사드(프랑스의 소설가, 1740~1814)가 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언어를 포함한 기호 자체가 갖는 물질성이 있었다. 사물이 곧 기호고 기호가 곧 사물이었던 시대다. 그런데 고전주의 시대가 되면 그 물질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이것과 저것의 비교에 의해 이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고전주의 시대가 재현의 차원에서 이 언어의 힘을 지워버린 것이다. 사드는 그 자리에서 언어의 물질성을 다시 발견한 사람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끝에서, 즉 퇴조의 시기에 사드의 작중인물들은 돈키호테에 대응한다. 이것은 이제 닮음에 대한 재현의 얄궂은 승리가 아니라, 재현의 한계를 강타하는 욕망의 모호하고 반복적인 폭력이다. 『쥐스틴』은 『돈키호테』의 2부에 상응하고, 돈키호테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재현의 대상인 동시에 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는 재현 자체이듯이, 쥐스틴은 욕망의 순수한 기원인 동시에 욕망의 한없는 대상이다. 쥐스틴의 마음속에서, 욕망과 재현은 이 여주인공이 욕망으로부터 가볍고 아련하고 외적이고 싸늘한 재현의 형태만을 인식하는 동안 그녀를 욕망의 대상으로 상상하는 타자의 현존에 의해서만 서로 연결될 수 있다. … 이 점에서, 돈키호테가 고전주의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이 이야기는 고전주의 시대를 닫는다.
『말과 사물』, 302쪽
 
사드의 작품에서 재현의 한계를 나타내는 욕망이 출현한다. 욕망은 가시화할 수 없는 어떤 차원이다. 가시화할 수 없다는 것은 재현할 수 없다는 것, 곧 욕망과 재현이 분리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언어 자체가 대상화되고 재현의 질서로부터 독립되었다는 얘기다. 이제 언어는 언어 스스로 말한다. 이 전환의 지점에 사드가 있다. 사드를 통해서 19세기에 출현한 문학은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언어라는 존재, 글이 글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질문한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정의하고 확정짓는 토대인 에피스테메는 누가 생산하는가? 그 시대의 모든 담론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대인은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역사적 선험성인 에피스테메는 누가 만들어내는가?
 
『말과 사물』이 출판되고 ‘인간의 죽음’이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푸코는 아주 독특한 인터뷰를 몇 번 가졌다. 그 중에서 『라 켕젠 리테레르지』와의 인터뷰에서 푸코는 ‘체계’(systeme)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열정을 피력했는데 여기에서 나는 그 해답을 만날 수 있었다.  
 
푸코: (사르트르의 의미와의) 단절의 시점은 레비 스트로스가 사회들에 대해서, 그리고 라캉이 무의식에 대해서 우리에게 의미란 아마도 일종의 표층적 결과, 혹은 반사나 물거품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 주었을 때, 그리고 우리 내부를 깊이 관통하는 것, 우리보다 앞에 있는 것,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체계라는 것을 보여 주었을 때부터입니다. … 라캉의 중요성은 환자의 말과 신경증의 징후를 통해, 말을 하는 것은―주체가 아니라―구조들이며 언어의 체계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 준 데 있습니다. … 모든 인간의 존재 이전에 이미 앎과 체계가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재발견하기만….
 
질문: 그렇다면 누가 이 체계를 생산하는 겁니까?
 
푸코: 주체 없는 익명의 체계 도대체 무엇일까요? 누가 생각을 하는 걸까요? ‘나’는 폭발하여 공중분해되었습니다(현대의 문학을 보십시오). 그것은 ‘~이 있다’의 발견입니다. ‘누군가가 있다’이지요. 어떤 점에서 그것은 17세기의 관점입니다. 다만 차이점은 인간을 신의 위치에 놓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사유, 주체 없는 앎, 동일자 없는 이론 등을 신의 위치에 놓는 것이지요.
디디에 에리봉 지음, 『미셸 푸코, 1926~1984』, 288~289쪽, 강조는 인용자
 
시대의 불연속지점을 포착하게 만드는 선험적 여건인 에피스테메는 푸코가 말하는 체계에 해당된다. 그것은 구조주의의 구조와 다르다. 레비 스트로스는 서구와 비서구를 구조의 이름으로 동일화하고 동등하게 보려고 했다. 거기에서 구조는 고착성, 안정성, 질서의 함의가 있다. 하지만 푸코가 말하는 체계는 유동적이다. 에피스테메는 하나로 고착된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달라져 왔고, 그 안에서 안정성과 질서를 가지고 있지만 한없이 그 질서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흔듦이 점점 증폭되어 이전의 에피스테메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한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에피스테메가 변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확정되고 고정된 동일자는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누구라고 확정할 수 없는 이름이다. 

마침내 푸코가 다다른 것은 무수한 타자들의 웅성거림이다. 그 타자들의 공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e, 다른 이질적인 공간) 그곳은 “사물들이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있어서,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언어를 은밀히 전복하고, 이름 붙이기를 방해하고, 보통 명사들을 무효가 되게 하거나 뒤얽히게 하고, ‘통사법’을 무너뜨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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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수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누가 말하는가? 무수한 타자들이 여기저기서 내가, 내가, 내가 말한다고 외친다. 그 소리는 수천억겁을 생성과 변화를 거듭한 것들의 목소리다. 그 카오스의 공간. 누가 동일자이고 누가 타자인지 모르는 공간. 중첩되어 누구의 얼굴인지 분간되지 않는 상태. 말과 사물이, 앎이 거기 있다. 그러나 푸코가 서 있는 지점은 사이(중립지대)다. 존재의 축이 선 지점!
 
그곳에서 푸코는 “기존의 기억에서 배제된 망각의 영역을 뒤져서, 이미 씌어진 것에 의해 감추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또는 추론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담론 구성체 또는 그가 ‘담론의 축적된 실재’라고 부르는 것, 즉 비가시적 ‘고문서’를 찾아내 분석하고 서로 다른 담론 영역들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렇게 『말과 사물』은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말과 사물』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책이다. 어떤 것을 규정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기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나는 에세이를 쓰면서 무척 곤혹스러웠다. 도대체 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혼란스럽고 토할 것 같은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책이 나를 전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 틀도 완고했다. 책을 읽었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던 것이 책을 덮고 돌아서면 어느새 내가 원래 사고하는 방식대로 하려고 했다. 나는 푸코가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적 금욕을 스스로에게 부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방향은 달랐다. 내가 동일자로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면, 푸코는 주체 없는 익명의 심연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돛대에 묶었다. 어쨌든 성과는 있었다. 강요하지 않으면서 나의 사유 전체를 다시 의심하게 하는 이 조용한 전복! 하여 나는 외친다. 『말과 사물』은 동일자의 조용한 전복이다!
 
* 게재된 사진은 김아타 작가의 사진임을 밝혀둡니다.
댓글목록

달집님의 댓글

달집 작성일

푸코가 말하는 주체는 이런 것일 거라고 생각하고 동일자와 타자를 포커스로 잡고 썼는데 종희샘이 딱 지적을 해주시니 황공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이 된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어요. 푸코가 글을 어렵게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가 텍스트와 씨름한 결과가 그렇다는 겁니다. 텍스트와 이렇게 맞짱 뜰 수 있는 근력은 두고두고 배워야 할 일이지요. 우리는 텍스트를 너무 쉽게 흘려버리는 데 익숙해 있어요. 씨름하지 않죠. 푸코의 글은 근기를 키우는데는 제격이죠. 저는 오히려 푸코의 글이 너무 아름다워서 거기에 빠져버리곤 했답니다. 특히 <정신병과 심리학>을 읽을 때 홀딱 반해가지고 발제를 하는 건지 아름다운 문장을 추려내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지요. 저의 아주 나쁜 습관이죠. 푸코의 글을 읽을 때 '사이'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를 아래로 모으고 캄다운을 외치세요. 그럼, 즐거운 책읽기가 될 거예요.^^

김종희님의 댓글

김종희 작성일

사전지식이 없어 좀 어렵지만 아주 재밌게 보았어요.  서양철학에 대한 편견이 무너지는 체험이라니 큰 기쁨이겠어요.

달집 글 읽으면서 제 식으로 이해하려 노력해보았어요.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인 '닮음'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드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인류학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인 '재현'=명료한 일람표=린네의 생물분류표. 이런 식으로 보면 재현은 현대의학의 병리학적 해부학적 기술과 같은 것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주의'라는 근대 에피스테메는 고전주의 에피스테메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자유연상을 하게되었어요.
 
르네상스시대에 갖고 있던 언어의 '물질성'이 고전주의시대에 와서 사라졋다고... 예를 들어 음양오행처럼 닮음의 무한확장 인식시스템이 개별적 일람표와 같이 나열형 두꺼운 책자로 고정지어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언어의 '물질성'이란  뜻이 구체적으로 아직 뭐라고 딱 꼬집어 이해하기가 저는 어렵네요.  언어의 물질성이란 아마도 추상성? 재현이란 추상화를 배제한 지시성?

레비 스트로스 구조주의의 고착성과 달리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유동성을 강조하고 있어요. 주체없는 역사란 말을 본 적이 있는데, 라캉(말을 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구조들, 언어체계 그 자체)입장에서는 줄에 매달린 인형극 놀이처럼 '주체(인형)'는 '구조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주체'라는 것으로 보면 될까요? 푸코는 구조주의와 달리 주체를 어떻게 보나요?

인식의 한계를 지우는 에피스테메를 누가 생산하는가는 주체가 아니라 구조라고 했는데요. 이 구조를 만드는 것은 '주체없는 익명의 체계', 즉 '무수한 타자들의 웅성거림'이라고 했는데요. 결국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을 넘어, 구조주의의 프로그래밍된 주체를 넘어, 타자들로 구성된 주체를 말하고 싶었던 거? 달집 글을 읽으면서, 왠지 푸코는 주체없음이 아니라, 내 안에 내가 너무많다고 아우성치는 타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려는 실천적 철학자란 느낌이 들었고, 그 주체는 불교의 무아와 연결되는 거 같기도 하고... 근데 푸코는 글을 어렵게 쓸수 밖에 없겠다는 이유도 느껴지나요? 어렵게 글쓰는 푸코 문제 많아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즐 붓다생일.

달집님의 댓글

달집 작성일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
푸코를 통해서 제가 가지고 있던 서양철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깡그리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텍스트와 씨름한다는 것은 존재를 건 싸움. 용호상박과 같은 과격한 싸움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푸코는 극기복례한 사람입니다.
시연샘도 2학년 꼭 통과하셔서 <말과 사물>에서 이런 경험 해보시길 바래요.ㅎㅎㅎ

시연님의 댓글

시연 작성일

"말과 사물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책이다. 어떤 것을 규정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기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선생님이 에세이를 쓰시면서 느끼셨을 혼란과 경험이 느껴져요. 사유의 조용한 전복의 결과, 에세이 잘 봤슴돠. 2학년 암송교실 들어오셔서, 암송수업 나가라고 할 때는 곤란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수업하는 것이 무척 즐겁다시면서 "여러분도 2학년과정 꼭 통과하셔서 3학년때 이런 경험 해보시길 바래요ㅎㅎㅎ"하셨던 쌤의 모습이 무척 자극적이었어요.^^자극존재 영희쌤~~ 저도 쌤께서 전복에 전복을 거듭하시기를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