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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농부철학자를 꿈꾸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3-05-14 09:21
조회 : 7,477  
 
노래하는 농부철학자를 꿈꾸며
 
박기옥(감이당 대중지성 1학년)
 
 
글쓰기 장에 들어선 이유 
 
루쉰은 ‘부술 수도 없는 철방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의식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 중 몇 몇이라도 깨어나, 철방을 부술 희망이 있을 수 있으니, 글을 쓰라는 친구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되었다’ 고 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지금 나는 에세이 시험 문제로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제목이 주어졌기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매일 직장에서 보고서 형식의 문서를 작성한다. 아무리 복잡한 보고서라도 개인적인 삶이 담기지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쓴다’라고 하지 않고 ‘작성한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나는 ‘작성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쓰는 것’에는 낯설다. 내가 내 삶을 담아 ‘쓰는’ 유일한 글은 일이년에 한번 정도 아내에게 쓰는 편지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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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험에는 글쓰기의 주체와 이유에 대한 철학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들어 있다. 이 지점에서 편지글과는 비교되지 않는 집중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이제, 금 간 나이가 됐는데/세상의 뜨거운 맛에 망가졌는데/소리하나, 키우지 못한/오십 줄의 술대접" (윤중호 『균열』) 같은 나이에 들어 선지도 오래 전이다. 이 나이에 글쓰기를 하고 타자他者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 이런 글쓰기는 할 수 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감이당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 고로 나는 써야 한다. 이것이 지금 글쓰기 장에 들어선 이유이다.
 
나는 ‘글쓰기를 하는 나는 누구인가’ ‘배려로서의 글쓰기, 단단한 글쓰기 기술’로 나누어, 이런 물음이 내게는 어떻게 표현되는지 하는 관점에서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
 
 
글쓰기를 하는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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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혹 명상을 한다. 그때마다 내가 누군지 알고자 선불교의 스님들처럼 “이뭣꼬”의 화두를 들고는 한다. 허나 여전히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래도 굳이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지금까지 내가 겪은 경험이나 사유 통해 인식하고 있는 앎의 수준에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는 진리다. 해석의 수준에 따라 그의 우주의 폭과 깊이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우주가 상대성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고, 개체들은 상호 의존하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생주이멸하고, 끝없는 순환의 고리 안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자기의 고유한 놀이를 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본래 실체가 있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아프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나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진 시공간 속에서 사건과 사유를 엮으며 여행하는 길 위의 존재이다.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인 것이다.
고로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내가 겪는 모든 칠정은 과거가 되고 미래로 이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도 찰라에 바뀌고 있다. 명상을 해보면 안다. 찰라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흘러가는 지를! 따라서 나는 수많은 과거의 사건과 사유의 결과물로 구성되어 있는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취향에 따라 과거의 전체 흐름을 조망해보고, 그중 일부를 절취하고 전개시켜 보는 방법도 나를 아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푸코도 “자기로 전향한다는 것은 외부에 대한 관심이나 야망에 대한 염려, 또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서, 바로 그때 우리는 각자 자기의 고유한 과거로 되돌아가, 과거를 수집하고, 눈앞에 마음내키는 대로 전개시키면서, 자기 과거와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할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3』)라고 했다. 따라서 나를 알기 위해서 먼저 숨 고르고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 내가 겪은 나만의 고유한 과거를 수집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등교할 시간이 되면, 준비물을 살 돈을 달라고 가난한 어머니를 향해서 큰소리로 떼를 쓰다가, 수업시간이 임박하거나 어머니가 화가 나서 쫓아오시면 학교까지 도망가곤 했던 아이였었고, 난생 처음으로 일등이란 것을 해보고 으쓱하던 시골 중학생이었다. 또한 벼락같은 인연으로 성경공부에 꽂혀서 대학 사년 내내 기독교 초기 신앙공동체처럼 금욕적이고 소명의식이 불타던 공동체 생활에 올인 하던 청년이기도 했었다. 군 제대 후 나는 공동체와 기독교를 완전히 떠났고, 청년 백수 시절 만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를 시작으로 넓고 깊은 사유의 세계와 좌충우돌 하면서 우주와 접속하는 여행을 떠났다. 그 곳에서 세계의 종교와 인류의 스승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이는 기독교를 떠나자 나에게 찾아온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 후 나는 금과 목이 고립인 사주처럼 군에서 배운 담배를 피우면서 골방에서 취업공부를 하다가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었고, 삼일 만에 깨어나는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었다. 나는 편재偏財격의 캐리어우먼과 결혼도 했었고 십년 후 그녀가 떠났을 때 무너진 자존심으로 몇 개월을 비현실 같은 마음의 지옥을 맛보았고, 몇 개월 후 지금의 정재正財격의 단아한 아내를 만났다. 내가 겪은 인생의 마디마디에서 눈앞의 사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전체를 볼 수만 있다면, 언제나 특별한 향연을 준비하고 있는 우주의 초대장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반드시 또 하나의 문이 열렸다. 누구든지 시간이 흐르면 그 열려진 문을 통과한다. 통과할 때의 마음 상태만 각각 다를 뿐! 어떤 이는 스스로 두 번째 화살을 맞고 원한감정의 기억을 증폭시키고, 어떤 이는 시리도록 아프지만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통찰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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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주중에는 정규직 직장인으로, 주말에는 도시농부로 살고 있다. 그리고 5년 후 즉 2018년도에는 귀농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소농과 유기농의 철학을 배웠고, 풀과 나무와 그리고 숲을 배웠으며, 나무의 생리를 좀 더 깊이 알기 위해서 분재도 공부하고 있다. 또한 팔구십평 정도의 밭농사를 하는 6년차 도시농부다. 집에서 오줌을 받은 후 전철을 타고 가서 마늘, 무, 배추 등 작물에 웃거름으로 주기도 한다. 삽 한 자루로 무념무상을 맛보면서 밭을 갈기도 하고, 조그만 개울너머로 지는 해를 보면서 귀가할 때의 노곤한 평온을 맛보기도 한다. 또한 언젠가는 두레 회원들과 밀 타작을 할 때 지친 몸을 땅바닥에 뉘어 유월의 하늘과 뺨을 간질이는 바람을 즐기기도 했다.
  
이처럼 내 안에는 여러 삶이 중첩되어 있다. 137억 년 전 빅뱅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먼지이기도하고, 곰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규성의 『역학원리강화』를 보면 모든 것이 태극에서 나와 상대성의 우주 삼라만상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순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우주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도시농부로서의 나’로 한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도시농부로서의 삶에 가장 소중한 가치를 두고 있고, 내 삶의 일상이 이것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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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신을 도시농부라고 부르고, 귀농을 꿈꾸고 있는가? 내 사주는 병화丙火일간에 병화가 시간時干에 하나 더 있어 병화가 병존한다. 나는 뜨거운 불이며,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한 직장에 머물지 못하고 여러 차례 직장을 옮겨 다닌다. 그리고 육친을 보면 신금申金과 유금酉金으로 구성된 재성과다이며 편재와 정재 중 정재가 많고, 인성印星인 인목寅木과 편재인 신금申金이 충한다. 나는 정규직이지만 자발적으로 네 번 직장을 바꾸었고, 가는 곳마다 취급하는 돈의 규모가 크던지 일이 많던지 둘 중에 하나였다. 조성된 토지를 분양하기도 하고, 몇 백억의 오피스텔을 건축해서 판매하기도 했다. 연구소라고 이름을 가진 국가기관에 임용되었지만 갓 창설된 그곳에서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고, 일인 다역을 해야 했다. 현재 재직하고 있는 직장에서도 처음 맡게 된 업무가 재물관리였는데 제대로 된 장부조차 없었다. 거의 일 년에 걸쳐 야근을 하면서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재성 사주답게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난 어느 날, 텅 빈 사무실 어두운 창문에 비친 초췌한 사십대 중반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과거 한때 영혼의 스승으로 살고자 했었다. 그러나 창문에 비친 그는 월급의 대가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노예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도시의 편리함과 소비적인 문화, 교육과 의료에 대한 자유로운 소비의 대가를 치루기 위해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엄청난 역설! 대가치고는 치명적이었다. 가족을 위해서라고 핑계를 대보았지만 그것도 하나의 기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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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나는 삶의 구체적인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때가 2007년도 갑인甲寅 대운이 시작하는 해였다. 인성印星 중에서도 편인偏印이 찾아온 거다. 원국에 편인으로 인목寅木이 두 개나 있는데 대운까지 찾아온 거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 제도권이 아닌 강호에서의 공부를 통한 인생역전의 기회. 나는 우연히 귀농학교와 격월간 『녹색평론』을 만나게 되었다. 니어링 부부, 조지 소로우, 웬델 베리를 만났다. 내가 처음 『녹색평론』 읽었을 때 받은 충격을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고민했던 사유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리고 있는 자본주의, 그 속에 깊이 잠든 내가 탈주해야 할 구체적인 삶의 공간은 농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식량, 에너지, 온난화, 자원고갈, 로컬푸드, 제철음식, 수입농산물 문제는 나의 문제가 되었다. 자본주의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사는 삶, 그것은 소농의 삶, 자립 자치의 마을 공동체를 꿈꾸며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나는 귀농하기로 결심했고, 귀농을 위해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아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병화丙火 일간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때로는 산업혁명 이후 문명의 흐름과 자본주의의 소비적 삶의 비천함과 그 한계 등을 동원한 논리로, 때로는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끈질기게 설득작업을 펼쳤다. 아내는 모든 인적 관계망을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고 있었고, 도시에서의 삶도 소박하지만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귀농하자니 몹시 놀랬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내는 5년 후 귀농하는 것으로 동의했고, 침뜸 공부를 하고 요법사 자격도 취득했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러나 귀농 후에는 참 잘한 선택이라고 만족하리라 생각하기에 크게 미안하지는 않다.
  
나는 오랜 꿈처럼 역학과 한의학을 공부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아내의 침뜸 기술과 나의 한의학 지식이 접목을 해서 내 오랜 욕망도 실현하고 마을 공동체에도 기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EBS에서 도올과는 전혀 다른 매력적인 분위기로 열하일기를 강의하는 곰샘을 보았고, 그 분의 책을 찾아 읽게 되어 감이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지금 감이당 학인으로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과거의 수많은 나’ 중에서 ‘귀농을 꿈꾸는 도시농부’인 것이다.
 
 
배려로서의 글쓰기, 단단한 글쓰기 기술
  
글쓰기는 푸코가 말하는 ‘자기로 전향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수렴하고 발산하는 기운을 같이 사용하는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단단하게 할 뿐 아니라 타자를 배려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명상도 글쓰기처럼 자기로 전향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호흡에 집중하고, 자기 몸의 미세한 감각, 감정, 생각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자기 욕망의 흐름을 바라보고, 자기의 고유한 욕망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명상의 기술이든지 명상에서 얻은 지혜이든지, 타자에게 시공간을 횡단하여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한 글쓰기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의 경험과 사유의 흐름을 포착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서사를 엮고, 자신과 타자의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힘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집중해야한다. 이런 기운을 쓰면 몸과 마음의 배치가 바뀌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글이 단단해지면 생각도 단단해지고, 행동도 단단해지고, 그 결과로 일상적인 삶과 관계도 단단해질 것이다.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아는 것이 곧 삶이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 욕망에 꺼둘리지 않고서도 그 욕망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낭떠러지로 폭주하는 자본주의 열차에서 깊은 잠에 빠진 이들 중 다만 몇 몇 이라도 깨울 희망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만큼 자기와 타인을 동시에 배려하는 도구도 없을 것이다. 자기로 전향하여 자기 자신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 새로운 삶의 나침판을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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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글쓰기를 하려면 ‘왜’라는 물음을 활용해 자신의 감각, 감정, 생각 그리고 구체적인 자신의 일상에서의 습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힘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기존의 가치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의문은 차이를 생산하는 기운이며, 그 차이는 어떤 에너지의 흐름을 새롭게 흐르도록 욕망의 배치를 바뀌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왜’라는 물음이 없는 글쓰기는 기존의 권위적인 가치를 반복하는 기계적 삶, 고정관념으로 형성된 습을 무한 반복하는 잉여를 생산하는 쓰레기에 불과할 것이다. 제대로 물으면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다. 묻는 실력만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선불교에서도 화두를 들 때 대의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축의 시대 인류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기존 가치를 의심하고 묻고 또 물었다. 그 의심의 결과물이 시공간을 넘어 인류의 나침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와 푸코가 위대한 것도 기존의 가치에 위대한 의문을 갖고 가치의 뿌리를 찾아 내려간 용기 때문이다. 내가 도시농부로 살고 귀농을 꿈꾸는 것도 자본주의 가치와 내 삶의 방식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이 있기에 과거의 삶과는 다른 배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단단한 글쓰기를 하려면 언어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한다.  글쓰기는 어떤 가치로, 혹은 어떤 세계관으로 개념화된 언어를 사용하느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쓰고자 하는 언어가 구체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고 한 것처럼 존재는 구체적인 언어 속에서 생생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나무공부 하기 전에는 참나무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무공부를 하고서야 참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없고 상수리, 굴참, 신갈, 떡갈, 졸참, 갈참나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이 나무들을 통칭하여 참나무(육형제)라 부르는 것이다. 나는 이제 참나무라고 부를 때와 상수리나무 같이 그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름을 불러 줄 때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내가 철학적인 성찰을 하고 그 언어가 들어간 글을 쓸 수 있으려면, 언어마다 가지고 있는 미묘한 차이를 알아야 하고, 그 고유한 맛이 몸에 스며들 수 있도록 발효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일상의 대화는 철학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기호로 된 언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철학이 몸에 익도록 멋진 문장을 암송하고, 감이당 도반들과 니체와 푸코가 쓴 언어로 농담도 하고, 자기와 세상을 의역학의 언어로 해석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리고 글쓰기는 몸을 움직여 ‘쓰는’ 구체적인 행위를 요구한다. 글쓰기는 지독한 육체노동이다. 겨우내 쉬었던 몸을 움직여 봄에 농사일을 시작할 때 근육에 알이 박히고 힘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하는 과정이 넘어가면 좀처럼 근육이 뭉치지 않는다. 글쓰기도 내공이 생길 때까지는 알이 박히고 풀리고 하는 반복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글을 쓴다는 것은 타자에게 보여 준다는 전제가 들어 있고 보면 자의식을 내려놓아야 하는 용기와 비판에 대한 배짱이 필요하다. 몇 번이나 에세이를 고쳐 쓰고 있는 지금 축시를 넘긴지 오래다. 나는 머리에 쥐가 날 만큼 힘이 든다. 에세이 제출 마감시간은 눈앞에 닥쳤지만 글은 괴발개발이고, 체력은 바닥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근육이 생길 때까지 견디어내야 한다.
 
 
노래하는 농부철학자를 꿈꾸며
  
역학과 한의학 공부 때문에 감이당에 들어왔는데 어느덧 인문학 암송과 글쓰기 비중이 엄청나게 커져 있는 것을 느낀다. 오십 줄의 술대접 같은 내게 암송과 글쓰기는 부담이다. 이미 본 영화도 새롭게 볼 수 있고, 한 번 읽었던 책도 처음 읽는 듯 읽고 있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을 모아 삶의 서사를 엮기에는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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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경험하고, 읽고, 생각한 것을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이 욕망이 복 되기를! 귀농 후 농촌이라는 공간속에서 몸과 삶과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얻은 통찰로 농부들과 도시민들에게 삶의 위안이 되는 농부철학의 에세이를 쓸 수 있기를! 농산물만 나눠주는 농부가 아니라 철학이 담긴 우주적 농담도 나눠 주고 싶은 것이다.
  
2007년부터 들어온 공부 대운 갑인甲寅이 끝나도 을묘乙卯 대운이 그 뒤 십년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우리 집 거실에서 물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동서고금의 인류의 스승들과 감이당의 길벗님들이 있으니, 철학하는 농부, 글쓰는 농부, 통기타 치며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 조합이 불가능 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편인偏印은 예술적인 끼를 나타내므로! 삶 자체가 예술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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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세경   2013-06-07 10:20:32
 
'왜 글을 쓰는가'는 분명 훌륭한 주제고, 내 생활과 생각이 고루 녹아든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그런데 이렇게 잘 담아내신 분들의 글을 읽으니 안풀리고 넘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우 선생님의 강추는 익히 들었지만 저도 잘 읽고 갑니다^^
오우   2013-05-15 09:31:25
 
단단한 글쓰기!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백북   2013-05-15 07:34:33
 
에세이 발표날에는 몸이 안좋아서 선생님이 발표하신 글을 제대로 듣지도 읽지도 못했었더랬습니다. 지금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읽어 보고 참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글은 저렇게 현장성이 넘쳐야 하는 거구나, 자신이 밟고 서 있는 대지위에 단단하게 발을 딛고 우주와 세상의 이치를 고민하고 그것을 단단히 움켜 쥐어여 하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세이 발표날 제가 왜 그렇게 몸이 안좋았는지를 지금은 서서히 깨닫아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통(不通)하는 저의 마음과 몸의 습이었습니다. 주변과 활발발하게 통하지 않고 살아온 저의 삶이 에세이 발표날의 그 현장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이당에서 서서히 주변과 소통하고 저를 열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참 소중한 인연이지요. 많이 배우고 많이 깨닫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말씀처럼 '특별한 초대장을 준비하는 우주의 초대장'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약선생   2013-05-14 19:13:25
 
에너지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글쓰기. 정말 단단한 글쓰기를 해야겠구나라고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시연   2013-05-14 10:25:14
 
박기옥쌤~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주제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거군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키워내는 농부님스러운 글이네요. 글에서도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저는 풀집에 살고 있는 3호인데요. 저희 풀집도 어제그제 모종 좀 심었습니다. 과거의 저였다면 "어차피 죽을거 심어서 뭐하나, 피었다가 질거 길러서 뭐하나"하면서 거들떠도 안 봤을 것들이었죠. 니체 덕분에 '어차피'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연습중이라고나 할까요. 저도 농부놀이로 지금 여기를 사는 법을 좀 배워보렵니다. 한수 가르쳐주셔요.~글 잘 봤습니다. 같이 공부할 수 있어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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