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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봉 등반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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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5-18 13:40 조회7,507회 댓글3건

본문

       
글쓰기봉 등반기

김연실(감이당 대중지성 2학년)
 
            
들어가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글을 쓰려고 하니 참 막연하고, 난감할 따름이다. 1학년 때도 같은 질문으로 에세이를 쓰긴 했지만, 2학년이 된 지금, 오히려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곰샘께서는 항상 일상에서의 글쓰기, 현장에서의 글쓰기를 강조하신다. 이 말을 들으면 ‘도대체 어떻게 항상 똑같은 일상이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글쓰기가 가능한 현장은 어떤 현장일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위대한 문장가들도 보면 다들 고난의 삶,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너무나 평범하고, 편안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글쓰기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들일까? 아니면 글을 쓰기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일부러 만들어야 되나? 하지만 말씀하신 의미는 분명히 그건 아닌 것 같다. 거기다 덧붙여 ‘뭔가 특별한 게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글쓰기는 그냥 일상이어야 한다. 일상은 단순해야 하고, 그 일상이 글쓰기로 이어져야 한다’ 고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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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혹시 문성환 샘께서 강의 중에 말씀하셨던 ‘반복 안에서만 차이가 가능하다’ 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의 차이가 곧 글쓰기가 되고, 다시 일상적으로 하는 글쓰기가 나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상에는 뭐가 있나? 라는 생각과 함께 평소에 잠깐씩 썼던 글들을 보게 되었다. 살림, 주말마다 하는 등산, 그리고 감이당 공부가 내 생활의 대부분이다. 이런 일상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운명처럼 다가온 등산, 그리고 글쓰기
  
사주의 일간이 각각 물과 불인 우리 부부는 모든 면에서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일치하는 것이 있다면 뒷동산을 포함한 어떤 산도 우리 삶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0.1톤에 가까운 육중한 몸매의 소유자였던 남편은 ‘아니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힘들게 올라가는 거야?’를 외치는 부류였고, 나는 목 기운이 하나도 없는 사주 탓(?)에 몸에 근육이라곤 단 한 근도 없다. 게다가 하체부실 체형을 타고 난 나는, 제주도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백록담을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존재였다. 우리가 파주에 꽂혀서 둥지를 틀게 된 큰 이유도 아마 파주가 평지라는 것 때문일 거다. 이랬던 우리 부부의 삶에 운명처럼 산이 들어오고야 말았다. 남편이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나서 수술하고,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600고지만 매일 올라도 살 수 있다는 얘기나, 아예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살면서 완치했다는 얘기들을 듣게 되었다. 우리는 산에 올라야 살 수 있을 것 같은 절박함이 생겼고, 그렇게 산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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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글쓰기다. 남편의 병으로 장기간 병원 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곳의 실상을 낱낱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의사나 간호원에게 뭘 좀 물어보면 최악의 경우만을 얘기하면서, 그 어려운 의학공부를 안하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만 하질 않나, 막상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면서 엄청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자나 보호자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전적으로 병원에 의존하도록 했다. 하지만 나는 몸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그런 의료권력 아래 그저 ‘네네’를 연발하는 자신을 보면서 너무 한심하고, 답답했다. 그래서 내 몸을 내가 알아야겠다는 절실함이 생겼고, 그 절실함이 감이당에 접속하게 했던 것이다. 남편이 아프기 전에 나는 수유너머에서 왕초보 의역학 강의를 듣고, 내 사주를 보게 되었다. 오행 중에서 목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육친으로는 식상에 해당한다. 이렇게 식상이 하나도 없는 사주이니 내가 글쓰기를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주인 사람은 글쓰기가 아주 좋은 개운법이란다. 몸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고, 글쓰기로 개운도 된다니 감이당에서의 공부는 나에겐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이렇게 평생 한 번도 안 해보고 죽었을, 등산과 글쓰기가 운명처럼 들어온 것이다.
   
 
살아있네 살아있어 사~사 사~사 
 
동네 뒷동산 같은 낮은 산만 가다가, 드디어 이제는 북한산도 도전해 보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북한산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인 우리는 그 많은 봉우리 중에 하필 찍은 것이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이나 간다는 인수봉 다음으로 험하다는 의상봉이었다. 우리가 올라간 코스는 1.7km를 가면 의상봉에 도착하는 코스였다. 6km 넘는 심학산 둘레길을 걸었던 우리는 ‘이 정도 쯤이야 좀 험하다 해도 별거 아니겠군’ 하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좀 힘들다 싶던 차에 내려오는 아저씨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여자가 가기엔 너무 힘들 거라고 하셨다. 순간 겁이 덜컥 나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남편은 더 가고 싶어 하는 눈친데, 내가 그냥 좀 편한 코스로 가자고 설득했다. 방향을 틀어서 가려고 하는 찰나, 올라가시던 아저씨 두 분이 왜 그냥 내려 가냐고 하신다. ‘초보가 가긴 힘든 코스라고 해서 다른 쪽으로 가려 한다’ 고 했더니, ‘무슨 소리야, 충분히 갈 수 있는데. 좀 힘들어도 분명히 그만한 기쁨이 있을 거야’ 라고 하셨다.
그 말에 그만 마음을 바꾸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좀 더 올라가니 이게 왠 암벽 등반인가? 내 몸뚱아리를 고스란히 루프에 맡긴 채 올라야 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떨어질 위험이 커 보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게 재밌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것만 넘으면 끝나겠지 했지만,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었다. 온 몸의 죽어있던 감각들을 살아나게 하는 느낌, 왠지 낯설었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 순간에는 어떤 과거의 잡념이나 감정도 내 몸이나 마음에 끼어들어 올수 없었고, 바로 앞에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현재만 존재하는 순간이었고,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음을 아는 순간이었다.  
 
  죽는다는 것은 완전히 마음을 비우는 것을 뜻하며, 그것의 일상적인 소망, 쾌락, 괴로운 격정들을 비우는 것이다. 죽음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변화이며, 그 안에서 생각은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각은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을 때 거기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죽음이며, 그러면 당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p122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크리슈나무르티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갈 수 없었던 길은 갈 수 있는 길로 바뀌고 두려운 미래는 이미 내가 건너 온 과거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머리로는 오르는 게 불가능했던 의상봉을, 몸으로 오르고야 말았다. 그리고 올라가는 내내 돌아 내려가기가 더 무서워서, 나는 이 길을 절대 내려 갈수 없다고, 정상에 가면 그냥 거기서 살든지, 119를 불러 주든지 하라고 협박을 해댔다. 그런데, 막상 우여곡절 끝에 정상에 가고 보니 내려가는 등산로는 올라갈 때와는 다른 완만한 코스가 있음을 알았고, 그 걱정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다. 현재에서 미래를 걱정하느라고 그 현재는 더 무겁게 느껴지고 제대로 살지도 못했는데, 걱정했던 미래는 결국 오지 않은 것이다. 
    
사실 6개월 넘게 매주 심학산 둘레길을 걸을 때는 거의 의무감 때문이었고, 체력이 점점 좋아지고, 몸이 가벼워진다는 느낌 정도만 있었다. 하지만 북한산 의상봉과의 첫 만남은 내가 정말 나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고, 나로 하여금 자발적인 산행을 하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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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글쓰기는 또 어떤가? 작년 1년 동안에 있었던 글쓰기 과정을 돌이켜 보고, 지금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매 학기 마지막에 글을 쓰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나는 내 생활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고, 모든 감각들이 예민해졌다. 끊임없이 나를 관찰해야 했고, 욕망이나 감정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낱낱이 봐야 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발표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현재의 자리에서 신파조로 재구성 해버린 과거의 일들이 타자의 눈으로 보면서 객관화되고 비워지기도 한다. 또한 알 수도 없고 실체도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현재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앎은 방 안에서 뱀과 더불어 사는 것과 같다. 뱀과 같이 방 안에 살 때 우리는 그것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이 내는 극히 작은 소리에도 매우 민감해진다. 그런 주의력의 상태가 바로 ‘온 힘(total energy)’ 이다. 그런 앎 속에서 자신의 전체성은 한 순간에 드러난다.

- p49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크리슈나무르티
 
사실 작년에는 감이당 공부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외워도 시험지 제출과 동시에 까맣게 지워지는 의역학 공부도 힘들었지만, 결정적으로 매 학기마다 해야 하는 글쓰기와 발표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 이유는 평소 습관대로 대충 살고자 하는 욕망과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는 반드시 보기 싫은 나, 예를 들자면 합리화하고, 게으르고, 인정받고자 하고, 폭력적인 나를 봐야 하는 아픈 과정이 있다. 동시에 그렇게 나를 보는 행위는 외부적 가치와 관념들을 거부하는 나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매 순간 ‘살아 있는 나’를 보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은 나로 하여금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감이당으로 가게 하고,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오랫동안 지녀오던 그릇된 것을 거부할 때, 그리고 모든 짐을 벗어던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은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추진력, 더 큰 강도와 생명력을 갖는다.                                  
 
-p27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크리슈나무르티
 
어디 어디 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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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등산을 하다 보니, 산의 기운도 다 제각각 달라서 전혀 다른 산행이 된다. 한 번은 파주에 있는 앵무봉에 갔을 때다. 거기서도 루프를 잡고 가야하는 힘든 등반이었다. 북한산하고의 차이라면 북한산은 대부분 단단한 바위이고 앵무봉은 미끄러지기 쉬운 모래흙이라는 것. 그 차이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부딪혀보니 엄청난 차이였다. 밟고 서야 하는 곳이 견고하고 단단한 바위일 때는 전혀 흔들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유동적인 모래흙은 제대로 설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고, 내가 발을 딛는 순간 바로 낭떠러지 행이 될 수도 있다. 내 삶에서 나의 현재는, 지금까지의 모든 과거의 축적된 경험지나 사유지 위에 서있다. 내가 서있는 곳이 모래흙이 아니라 바위가 되려면 과거의 경험이나 사유들을 강력하게 응축시키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응축시키는 에너지, 수렴의 에너지는 바로 글쓰기에 있다. 우리의 일상이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일상들은 여러 가지 감정의 찌꺼기, 불순물들이 섞이면서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변질이 되고 물러진다. 또는 화 기운인, 생각이나 감정들로만 이루어져서 산만하게 흩어져 버린다. 이것은 우리가 모래알 같은 시공간 위에 서서 언제 어디서 미끄러질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는 내가 딛고 설 그 자리를 단단한 바위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질문이 하나 생겼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죽을 각오로 올라갔던 앵무봉 등산로에서도 깃털처럼 가볍게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한테 앵무봉과 그 사람한테 앵무봉은 다른 산이었다. 그 차이가 뭘까? 그건 산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로 남게 된다. 어떤 시공간에서도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려면 내가 설 자리를 만드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단순한 일상의 반복
 
한동안 북한산을 계속 가다가 처음 다른 산으로 갔을 때다. 어, 이건 또 왠 낯선 느낌인가? 더 힘든 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훨씬 힘들게 느껴졌다. 그때서야 나는 내 몸이 북한산을 읽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쯤에서 속도를 좀 낼 것인지, 어디쯤에서 숨고르기를 할 것인지, 또 어디쯤에서 간식을 먹을 것인지를 몸이 먼저 아는 것이다. 그만큼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일들은 내 몸이 거기에 붙어 있는 것처럼, 아니면 그것이 나에게 와서 달라붙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우연히 발레의 달인 강수진의 글을 보게 되었다. ‘나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로운 날들의 반복이었다. 잠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연습,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다시 연습(...). 지금은 내가 마음 가는대로 춤을 추면 발레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느낌이 든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글쓰기의 달인이신 곰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일상에서   
                                   
계속 글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글들이 자기를 써달라고 찾아온다고. 나는 이것을 산에 오르면서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결국 달인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한 끝 차이다. 그것은 일상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는데, 산만하게 살 것인가 단순하게 살 것인가 그뿐이다. 또한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어떤 시공간에서도 깃털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의 대강은 이해하기 쉽다.”는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다만 후대의 학자들은 알기 쉬운 것을 소홀히 여겨서 따르지 않았고, 알기 어려운 것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여겼다. 이것이 는 가까이 있는데 멀리서 구하며, 일은 쉬운데 있는데 어려운데서 구하는 까닭이다.  

                                                                  - p398 <전습록> 왕양명

주말마다 산에 오르다 보니 오늘은 원효봉, 내일은 임꺽정봉, 그리고 다음 주는 무슨 봉을 올라갈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등산마저도, 꼭 정상까지 가야하고, 끊임없이 다른 봉우리를 가고자 하는, 목표 지향적인 등산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 왜 꼭 정상까지 가야하는 거지?’ 산을 오르는 것마저도 습관처럼, 성취감을 갖기 위한 목적만 남은 게 아닌가. 삶에서 끊임없이 목표를 설정하고 도달하고, 다시 다른 목표를 설정하고 또 도달하기 위해 애쓰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산에 왜 오르는 거야?’ 그것은 산에 오르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다. 내 몸과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음을. 한 주라도 등산을 거르면 몸이 바로 안다. 그 사이에 벌써 몸과 마음에 뭔가 들러붙어서 무거워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일상처럼 산에 오른다. 높은 산뿐만이 아니라, 둘레 길도 좋고, 평지를 걷는 것은 또 그것대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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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글을 잘 써서 그것이 나의 밥벌이가 될 거라는 생각이나 글쓰기로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은 솔직히 거의 없다. 아마 그런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다면 처음부터 포기 했을 것이다. 지금 나의 등산 실력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르겠다면 어떻겠는가? 아마 등산 준비를 하기도 전에 그만 둘 거다. 그렇게 되면 지금 나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고, 그런 지금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지금 그냥 오르는 것이고, 그냥 쓰는 것이다. 우리는 뭐든지 ‘왜?’ 라는 질문을 받으면 습관적으로 ‘무엇, 무엇 때문에’ 라는 답을 내리려고 한다. 하지만 ‘왜 글을 쓰는가?’ 라는 질문에는 무엇 때문이라는 이유가 정답으로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글을 쓰고 난 뒤에야 나만의 답을 하나씩 찾게 되고, 쓴다는 행위가 있을 때 거기에 수반되는 앎이 생긴다.
 

나가며
 
곰샘의 채찍질로 우리는 글쓰기봉에 오르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훌륭한 하체 근육 덕에 수월하게 올라가기도 하고, 또 나처럼 누군가는 단 한 점의 근육도 없어서 많이 힘들어하기도 한다. 힘들어서 가끔은 표절이나 모방이라는 케이블카로 오르고 싶기도 하지만, 빨리 오르는지 늦게 오르는지, 혹은 정상에 도달 했는지 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야말로 자기 힘으로 지금 그 자리에서 한 발 더 내딛어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공부고, 스스로 나아간 그 만큼은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된다. 글쓰기에서의 내 발로 내딛는 힘이라는 건, 온전히 나의 힘으로 나를 직시하는 힘이다. 외부적인 가치, 관념, 도덕, 제도 등은 항상 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사욕 또한 땅 위의 먼지처럼 날마다 쌓여간다. 때문에 글쓰기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곧 내 안에서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 차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된다.
 
곰샘 말마따나 특출한 외모를 타고 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일상을 반복하고, 그 안에서 차이를 만들어 내고, 나로 존재할 것인가, 등산? 글쓰기? 이쯤에서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지도 모른다. 등산이 자기를 덜어 내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고, 과거와 미래로 중첩되지 않은 청정한 현재를 살 수 있게 한다면, 등산만 하지 왜 힘들게 글까지 쓰나? 라고. 사실 등산은 자기 수행의 아주 좋은 도구다. 하지만 거기엔 타자와의 공명이 없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양명이 나에게 와서 울림을 주고, 크리슈나무르티가 나에게 와서 공명이 되는 건 바로 글뿐이다.

 
양명, 크리슈나.jpg
(양명,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예전엔 글 좀 쓰라고 하면 피하기 바빴고, 내가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건 더더욱 그랬다. 누구 하나 관심 갖지 않는 일기조차도 아무도 못 보는 곳에 꽁꽁 숨겨두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난 4학기 에세이를 쓸 때부터 글쓰기에 대한 내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일상 속에서 짧은 글이라도 쓰려고 하고, 가족들에게 내 글을 읽어 주면서 코멘트를 부탁하기까지 하니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공부가 턱없이 부족해서 깊이 파고 들어가는 건 버겁긴 하지만, 글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고, 또 그 변화가 글이 되는 걸 보는 게 좋다. 내 사주의 지지 네 글자가 모두 역마살, 즉 계절의 시작을 뜻하는 , , 와 동네 역마인 로, 그야말로 역마살 뻗친 사주다. 이 사주 그대로 예전의 나의 삶은 산만함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뭔가를 시작하고 변화하려는 욕망을 타고 났으니, 일상 속에서 매 번 새로 시작하는 글쓰기에 그 욕망을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에겐 훌륭한 개운법이 아닐까.
댓글목록

세경님의 댓글

세경 작성일

발표 때도 술술술 재미있게 들어 일상을 담아내는 글쓰기는 이런 것이겠구나 했습니다. 담을만한 일상이 없다고만 생각했었거든요. 곰샘의 채찍질로 시작된 글쓰기봉 오르기에 함께하는 동무가 있어 참 좋습니다~

갈가랑비님의 댓글

갈가랑비 작성일

다른 사람 글을 집중해서 읽어보고 댓글 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던데..시연샘의 댓글 수련? 나도 좀 배워야겠당^^
글구 동무 소리 들으니 은근히 기분 좋~네 ㅎ

시연님의 댓글

시연 작성일

"나를 보는 행위는 외부적 가치와 관념들을 거부하는 나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매순간 나를 넘어서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거 같아요. 글쓰기로 수련하기를 함께 하는 우리 동무 연실쌤~~~ 한번 쭈욱 가봅시다. 글이 써지든지, 내가 사라지든지 둘중에 하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