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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묘리를 찾는 글쓰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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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5-20 21:18 조회14,034회 댓글1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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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묘리를 찾는 글쓰기
 
김해숙(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인트로
 
연암 박지원.jpg
굳이 초상화를 보지 않아도 ‘껄껄 선생’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일단은 대갈장군 같은 큰 얼굴일 것 같다. 그리고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하는 후배들 앞에서 눈 가늘게 뜨고 ‘으흥, 으흥’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일 것 같다. 그러다가 가끔씩 ‘그-래? 정말?’ 하며 눈을 크게 뜨고는 상대를 정면으로 깊게 응시하는 그 모습. 상대의 말을 귀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듣고 가슴으로도 듣는 이. 실제로 그의 글에서는 ‘아하!’라는 리액션이 자주 연발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냄새도 풍겨 나온다. 몸 전체에서 미세한 먹 냄새, 약간의 술 냄새, 무엇보다 땀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을 것 같다. 한 마디로 상남자 중의 상남자일 것만 같다. 나에겐 이런 그가 꽤 관능적으로 느껴진다. 우람한 풍채이니 숨소리도 퍽 클 테고, 희끗희끗 꺼끌꺼끌한 수염의 상할아버지 같은 그이지만, 안길 수 있다면 안기고 싶다.
 
무엇보다 그의 매력은 밝다는 데 있다.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밝음이다.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도저히 발산할 수 없는 묘한 밝음이다. 삶의 묘리를 환하게 꿰고 있는. 그래서 낙관적이다. 낙관적인 이에겐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밝고 환한 등불에 벌레들이 저절로 모여들 듯.   
  
방과 창이 비지 않으면 밝아질 수 없고 유리알도 비지 않으면 정기가 모아지지 않느니, 대체 뜻을 환하게 하는 묘리는 나를 비게 해서 남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맑게 해서 사사로운 생각이 없는 데 있단 말이야. 이게 바로 완상한다는 뜻이겠네.

                        나는 껄껄선생이라오/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보리 278쪽
 
지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입안의 밥알이 튀어오도록 호탕하게 세상을 웃어제끼는 그. 혼자 있을 때는 어떠할까? 상상하기 어렵잖다. 무심히 동전을 바람벽에 던지고, 방바닥에 굴리고, 그렇게 한참을 홀로 재밌게 놀고 있을 것 같은 연암. 그때 그의 등판에는 하얀 달빛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하얀 복사꽃 이파리 또한 분분하게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을 것 같은 범범함과 평온함. 
 
그렇게 나는 이 충만한 봄밤, 껄껄 선생에게 매료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아하!’하면서 무릎을 쳤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고, 얕은 곳에서 깊은 곳을 응시하는 그의 눈을 따라가노라면 세상의 묘리가 깨쳐질 것 같았다. 우뚝한 그의 큰 어깨에 무등을 타고 다니고 싶어졌다. 이런 스승 한 분 모실 수 있다면, 참 살만할 것 같았다. 연암선생님, ‘아침나절에 당신의  한 말씀 제대로 깨우친다면 저녁나절에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이 마음. ‘아하!’ 다음으로 당신이 자주 한 말, ‘묘리’를 터득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공부의 묘리- 리듬과 강밀도의 체험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작년에 내가 감이당 대중지성 2학년 과정을 헛다녔다는 것을. 듣도 보도 못한 한자를 제대로 외워본 게 몇 번이나 될까.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책은 잘 읽었는가. 역시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는 채 글씨만 읽고 다녔다. 특히 3학기 때의 과학책읽기는 수학의 정석 미적분보다 더 어려웠다. 암송 역시 마찬가지다. 암송대회 때 나는 우리 조의 메아리였다. 성실한 조원의 입모양을 보고 따라해야 했으므로. 그리고 내 위치는 언제나 곰샘에게 뒷꼭지만 보이는 자리였다.
 
올 봄 목요감이당 1학년 첫 주 의역학 숙제 오행배속표를 받는 날, 나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바빠서 그렇다고 합리화시키기도 싫었다. 할 일 못해서 뭐 팔릴 수도 없었다. 실은 배수진도 쳐놓은 상태였다. 주변 후배들과 함께라면 작년처럼 나태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차에 무더기로 청주 학인들을 싣고 다녔다. 수업 끝나고 내려가는 길에 한글을 소리 높여 외웠다. 집에 가서도 계속 무조건 외우고 또 썼다. 의역학 첫 시험에서 패스를 했을 때 정말 뛸 듯이 기뻤다. 내가 외우는 숙제를 해내다니......
 
이렇게 몇 주를 보내고 나니 나름 리듬이 생겼다. 목요일 다함께 대충 한글을 외우고, 금요일 저녁 후배들을 불러 산책하며 완전 외우고 주말에는 한자를 많이 마스터 해놓는다. 그리고 월요일부터는 아침 출근 전 한번, 저녁 퇴근 후 한번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읽기 숙제를 한다. 굳이 출근할 때 암송거리를 들고 나가지도 않았다. 낮에는 오롯이 사무실 일을 하고 새벽과 밤 시간을 이용해 감이당 공부를 했다.
 
리듬.JPG
감이당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리듬과 강밀도란 언어가 비로소 체득된 것이다. 리듬이란 나에게 오는 시간들을 스스로 조절해서 삶을 규칙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말하는 거였다. 그리고 강밀도란 어려운 한자 앞에서 외우기 싫고 귀찮고 힘든 마음을 억누르고 돌파하는 것을 뜻하는 거였다. 사실 주말을 온통 한자를 찾아가며 이해하고, 완전 외우고 쓴다는 건, 진득하게 앉아서 견뎌야 하는 고통스런 작업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말을 한자와 함께 보내고 나면 그 다음 주가 순조롭게 돌아간다. 거의 매일 오전에 있는 강의도 순조롭게 준비하고, 점심 먹은 후 1시간쯤 산책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오후 몇 시간 주 수입원인 아이들 수업을 한 후 퇴근. 퇴근하자마자 한자 한번 쓰고, 밥하고, 책 읽고 강의 준비하는 일상. 도대체 이 순조로운 일상을 작년 한 해는 왜 그렇게 실행하지 못했을까?
 
내 주변에는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후배들이 많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리듬 없이 강밀도를 느낄 수 없고, 강밀도 없는 리듬 또한 절대 불가능하다’ 라고.
 

글쓰기의 묘리-못된 습관 고쳐버리기

애초에 의역학보다 글쓰기를 하고 싶어 감이당에 왔다. 올해 초 몇 가지 일을 벌였다. 그 중 한 가지가 동네신문에 지면을 달라고 한 것이었다. 글쓰기 근력을 키우고 싶어서다. 지금은 ‘대기만성으로 자녀 교육 달인되기’라는 꼭지로 발도로프 인지학 관련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내심 조만간 사주명리 혹은 인문학으로 자녀교육 하기라는 테마로 글을 쓸 요량으로 지면을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못된 습성을 하나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먼저 자꾸만 책 내용을 내 생각인양 살짝 꾸며서 글을 쓰고 있다는 점. 인용문을 이용해서 내 생각을 펴는 것은 좀 수월해졌지만 인용글 위아래에 내 논리를 집어넣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참을 끙끙대다가 결국은 책 내용을 풀어서 글을 써나가고 있었다. 그런 글은 자연히 생동감이 떨어진다. 자유롭게 내 생각을 풀어 가면 힘도 덜 들고 쓰는 재미도 나고, 글도 살아날 텐데 그게 잘 안되어서 미치겠다는 거다.
 
아! 강의 때 말은 술술 하면서 그걸 글로 옮기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나름대로 프레임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생각과 글이 따로따로 놀고, 글발은 듬성듬성 성글기만 한 것인가. 참으로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사실 젊은 시절, 글쓰기로 겉멋깨나 부리다가 손 탁탁 털고 글쓰기의 장을 떠났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돌아온 탕아처럼 제 발로 글쓰기의 장으로 들어와 놓고도 이렇게 붓방아만 찧고 있다니!
 
원인을 살펴보았다. 나는 경험지만 좀 있는 편이지, 지식을 쌓는 일에는 젬병이었던 것이다. 아니 치밀한 원리지를 공부하는 일에는 게으르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대개 도는 길과 같다. 길 가는 나그네를 들어서 비교하기로 하자. 어디를 가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지방까지의 노정이 몇 리나 되고, 양식을 얼마나 가지고 나서야 하고, 도중의 노정표, 나무, 역말들이 얼마나 멀고 가까운 지를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모두 환해진 다음 실천에 옮기면 언제나 무사히 길을 가게 된다. 미리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딴 길로 잘못 들어갈 까닭도 없고, 사잇길로 빠져서 고생할 까닭도 없고, 중도에서 고만 되돌아설 걱정도 없다. 이것은 지식과 실천이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차차 가노라면 자연히 알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물속으로 잠수질해 들어가서 달을 건지려고 하고, 북을 지고서 아기인줄 아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결국 완적처럼 통곡하지 않고 양주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나는 껄껄선생이라오/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보리 222-223쪽
 
글 쓰는 일이나 도 닦는 일이나 매한가지. 아무리 곡괭이질을 열심히 해도 달력을 무시하면 수확은 어려운 터, 논리를 펴려면 세세한 공부는 당연지사다. 그게 습관이 안 돼 이토록 답답해하는 것이다. 
 
곰곰이 실행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우선 의역학 시험 제대로 칠 것. 한 주 한 주 텍스트 열심히 읽고 씨앗문장 써 볼 것. 그리고 그 텍스트를 내 사유로 체화하기 위해 이해가 되도록 몇 번씩 공들여 읽어낼 것.(어라! 진부하기 짝이 없다. 감이당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소리 아닌가?) 
 
실은 이번 에세이에서 두 개 정도 목표를 잡고자 했다. 하나는 글의 뼈대를 미리 잡아 놓을 것. 그리고 그 뼈대에 살을 붙여나갈 것.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 글쓰기는 대충 스토리만 정해놓고 그냥 써지는 대로 써나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뼈대잡기가 죽기보다 힘들어서였다.(사주에 이 재성인데 고립이니 이해되실 것!) 그러다 보니 글이 원래 방향보다 틀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번 에세이부터는 더 이상 그렇게 마구잡이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요걸 못 지켜내면 요번 글공부는 ‘하나마나’가 될 것이다.  
 
또 하나 목표, 텍스트를 많이 분석해서 쓰기! 이 또한 평생 처음 해보는 글쓰기다. 그리고 이런 식의 글쓰기가 바로 인문학적 글쓰기란다. 작년에 이게 안돼서 말도 못하게 고생했었다. 완전 텍스트 따로, 내 말 따로인 형편없는 에세이였다. 게다가 이번 텍스트는 내가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연암 선생이다. 이번 참에 연암 선생의 진면목을 자세히 살펴보고, 춤추듯, 흐르는 듯, 자유로운 그 분의 글 솜씨를 배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직도 자신이 없다.   
 
껄껄 선생을 읽으며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서 초반부터 연암 선생을 이정표 삼아 에세이를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 분 글, 생각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두운 길의 지남철이 되고, 배 없는 나루의 보배로운 뗏목’ 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 글을 쓰다 보니 내 생각과 이 분의 말씀을 씨줄날줄로 엮어내기가 너무 힘들다. ‘어린 아이가 나비를 잡는 것’ 보다 훨씬 어렵다. 이 분의 말씀 하나 잡고 내 생각을 펼쳐 나가기가 너무 어렵다. 놓치고 나서 ‘씩 한번 웃고 나서 부끄러운 듯도 하고 속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속이 시커멓게 탈 정도다. 하지만 처음 맘먹었던 대로 연암 선생을 놓지 않고 가련다. 

 
우정의 묘리-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하나 있어

뭐니 뭐니 해도 연암 선생에게 최고로 배워야 하는 것은 우정의 달인이란 점 아닐까. 글 초입에서 얘기 한 것처럼 나는 연암의 넓은 품이 좋다. 이는 내 가슴은 그리 넓지 않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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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나는 공동체의 대표다(지금은 대표란 말을 지우고 살림꾼이란 용어를 즐겨 쓰지만). 십 수 년 전에 어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무슨 큰 이념이 있던 것도 아니고 목표도 없었다. 그냥 어찌어찌 하다 보니 사무실 공간이 내게 주어졌고, 뭐 달리 재주도 없고 해서 그냥 빌붙어 약간의 밥을 벌어먹고 있는 정도다. 그 과정에서 망해 본적도 있고, 거의 때려치워 본 적도 있다. 그런데 팔자에 타고 난 건지 거의 구사일생으로 침몰하기 직전에 기사회생하여 지금은 그런대로 운영하고 있다.  
 
감이당과 접속한 지난 1년 동안 나는 명실공히 열등생이었다. 하지만 이런 열등생에게도 우수한 태도가 있었으니, 나는 곰샘의 강의만큼은 정말로 달게 들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앞자리를 고수했다. 일요일 글쓰기 강의를 듣고, 밤 1시에 집에 도착해 노트 필기를 다시 한 번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월요일 아침 우리 사무실 식구들에게 전해주곤 했다.
 
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 사무실은 애초에 공부공동체가 아니었다. 일하는 공동체라고나 할까? 아이들 혹은 엄마들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서로 준비하고 일을 나누는 정도의 단체였다. 일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인문학, 그것도 웬 사주명리에다 동의보감? 왠지 근사해 보이는 제자백가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것? 그게 인문학이야? 거기는 거기 문화고 여기는 여긴데 왜 자꾸 서울 감이당처럼 여기를 운영하려고 하지? 몇몇 식구들 외엔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무슨 물건이나 겉만 치레하고 속이 빈 것을 강정이라고 한다네. 그런데 개암, 밤, 벼와 같은 것은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지만 실상 속이 차고 배가 부르네. 그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도 있고 큰 손님도 모실 수 있네. 대개 문장의 묘리도 역시 이런 것인데 사람들이 개암, 밤, 벼와 같은 것으로 여기면서 깔보기 쉽네. 자네가 나를 위해서 좀 변론을 해주지 않으려는가?

                        나는 껄껄선생이라오/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보리217쪽
   
남대문을 직접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이 싸우면, 후자가 이긴다는 말이 있다. 나는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런 나를 변론해준 것은 곰샘이었다. 물론 곰샘이 직접 거든 적은 없었다. 나는 곰샘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니 감이당의 운영 방식을 주의 깊게 보았다. 밴드로 움직이는 시스템. 전임 강사 같은 도담샘, 곰샘의 제자이자 동생 같은 장금샘, 그리고 집사 시성샘 등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리고 시성샘에게 슬몃슬몃 다가가 감이당의 운영방식을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다.(하지만 시성, 절대 친절하지는 않아요!) 특히 곰샘의 뒷모습을 보며 리더의 태도에 대해 나름 공부해 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나는 그저 온화한 리더가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베풀고, 품이 넓고, 어려운 일은 내가 먼저 하는 게 좋은 리더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헌신적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데 곰샘은 절대 친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권위적이지도 않았다. 체면치레도 별로 안했다. 
 
지금도 웃음 나오는 장면 하나. 재수강 신청 계절이었다. 곰샘이 엉거주춤 반쯤 일어나서 ‘누구 그만 둘 사람 없지?’하며 궁금해 하던 모습. 약간의 불안감? 불편한 사안도 직접 챙기는 소탈함? 아무튼 나는 그렇게 곰샘의 뒷모습을 보며 리더의 자세를 배워나갔다.   
 
특히 곰샘의 직설화법과 장금샘과의 희희낙락한 우정은 내게 새로운 교과서였다. 먼저 곰샘의 직설화법.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잉여를 남기지 않는 대화를 하기로 작정했다. 저녁때 집에 가서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돌아보기도 수십 번. 하지만 소심하면 소심한대로, 치사하면 치사한대로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만 두겠다는 사람도 나왔고, 스스로도 내가 ‘미친년’ 아닌가, 이대로 사람 다 떠나가는 것 아닌가,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인성과다인 나는 엄마에게도 말대꾸 한번 없이 청소년기를 보낸 심약한 사람이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점잖게, 될 수 있으면 베풀려 해도 떠날 사람은 떠났었다. 그걸 믿었다. 감정의 잉여를 남기지 않는 그 자리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싶었다. 의례적인 관계로 일을 해나가는 그동안의 방식에 그만큼 신물이 나있던 참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장금샘과 곰샘 같은 관계를 또한 맺어가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과 눈에 띄게 의식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만들었다. 이 또한 반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누구만 편애한다는 둥, 왜 자기들끼리만 만나느냐 등등(일거리 아닐 때는 냉큼 모이지도 않으면서!). 하지만 나는 일 관계가 아니라 자매 같은 사람 딱 한사람이 필요했다. 그 딱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면, 세 사람도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책만 보는 바보’의 백탑파처럼 우리는 그냥 만나서 이야기하고, 지적하고 삐치고, 우정을 의심하고, 또 풀어냈다. 그 당시 내가 자주 했던 말, ‘우린 늪을 만들어야 해. 늪은 수렁 같지만 재생의 땅이야. 세상에서의 찌든 독소를 공부와 우정으로 다 삭여내고 각자 자기의 생명력을 길러야 해.’ 
 
하늘과 사람의 유래며 도학의 정통과 이단의 구별이며, 역대 정치와 사상의 변천이며, 거기 대처할 선비들의 태도를 따지고 단정하는 견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권면하고 충고하는 말이 모드 간절한 성심성의에서 우러나왔다. 처음에는 벗으로 사귀기로 정했다가 마침내 형제를 맺기에 이르러서 서로 사모하기를 무슨 탐나는 물건이나 욕심내듯 하고, 서로 저버리지 말자고 언약하기를 무슨 맹세나 하듯 하니, 의리가 족히 다른 사람들을 감격시키며 눈물을 흐르게 하였다.........
 ....소외하는 마음과 내력과 위신을 따지는 혐의쩍은 생각이 어째서 없다고 볼 것인가? 그러나 복잡한 인사치레도 집어치우고 까다로운 예의 절차도 떨어버리고 심정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그야말로 간담을 털어놓았으니, 넓고 큰 테두리가 명예, 세력, 잇속이나 바라고 악착스럽게 덤비는 그런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나는 껄껄선생이라오/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보리158-159 쪽
 
그런데 참 별 일이다. 술렁술렁 동요하던 공동체가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 사람 저사람 금방이라도 떠나갈 듯, 당장에 쪼그라들 것 같은 단체에 점점 사람들이 붙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별일인 건, 어느덧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잘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공부하듯이 의식적으로 만들어 가다보니 근력이 붙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말한다. 그렇게 ‘딱 한 사람’이 되어준 너네들이 참 고맙다고.
 

삶의 묘리-아침나절에 만 들으면 저녁나절에 죽어도 좋다.
 
나는 일하는 공동체인 우리 단체를 공부하는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났다. 그게 지겨웠다. ‘돈이 안 된다, 돈에 비해 일의 수고로움이 너무 많다. 내 아이 잘 키우며 학원비 벌려고 했는데 내 아이들 케어가 제대로 안 된다.’ 이게 떠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14년의 경험으로 나는 눈치 채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란 것을. 
 
책만보는 바보2.jpg
사람에겐 일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공부가 더 중요하다. 오죽하면 죽을 때 누구나 ‘학생부군신위’라는 명패를 받아 안는가? 그런데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우리도 그랬다. 일과 연관되지 않은 공부를 사람들은 온몸으로 거부했다. 하지만 나는 ‘자기 구원이 된다는데, 인생역전이 된다는데, 도대체 이보다 더 좋은 게 세상에 어디 있다고?’라는 말을 계속 하고 다녔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마침 안면 있는 도서관 사서에게서 좋은 강의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감이당 강의를 청주에 오도록 사서를 꼬드겼다(제안했다). 그래서 작년 한 해, 올 봄 우리는 감이당과 접속하고 있다. 감이당에서 읽는 책들도 함께 읽는다. ‘책만 보는 바보’에서 ‘바보’에다 방점을 찍자고 설득한다. 그 바보 서자들이 검서관이 될 줄 꿈에나 알았겠느냐고. 자신의 꼬라지를 잘 알고 있다며 자신을 불신하지 말고, 바보처럼 ‘우선은 쓸 데 없어 보이는 인문학’을 함께 배워보자고. 왜 우리는 글 쓸 일이 ‘절대’ 없을 것이며, 어째서 우리는 맹자를 강의할 수 없겠느냐고.
 
우리 공동체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는 얘기는 절대 안한다. 못한다. 일찌감치 우리 집 경제 사정을 천명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연 200만 원짜리 사글세 집에서 산다. 나이 오십에 집 한 칸, 아니 전세금도 없다는 얘기다. 내 수입도 많아야 월 150만원 이쪽저쪽이다. 남편 수입 역시 시원찮다. 쥐꼬리만큼 벌어서 신용회복위원회에 다 갖다 준다. 마치 모파상의 ‘목걸이’에 나오는 부부와 같다고 생각하면 딱 맞다. 빚이란 센 망치에 크게 한번 얻어맞은 형국이다. 그런데도 연 400만 원짜리 공부를 한다(교통비 포함). 요즘 세상 시선으로 보면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공부가 나를 살리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게 있어 란 일엽편주와도 같다. 이리저리 요동치는 세상살이에서 빠져죽지 않으려고 간신히 중심을 잡고 사는 것.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사건들을 하나하나 공부삼아 지켜보는 것. 삶을 이렇게 공부거리로 보면 의외로 재미도 난다.
  
내가 즐겁다 한 자를 써놓으니 거기는 웃는다는 글자가 무수히 따라붙습니다. 이렇게 지낸다면 한 집에 백 대도 살 것입니다. 이 편지를 뜯을 때 그 대는 내 별명을 껄껄 선생이라고 지을 것입니다. 나도 그런 별명을 사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껄껄선생이라오/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보리361쪽
 
그래서 오늘도 나는 청주 인문학 전도사를 자처한다. 역사체험단체에서 발도로프 인지학을 바탕으로 한 통합교육단체로 슬그머니 물길을 돌려놓았듯이, 이제 우리의 물꼬를 살며시 터놓는다. 청주인문학단체로. 거기서 그저 눈 지그시 감고 물꼬바라기로 살면 된다.
 
감이당에서는 사람의 노년을 기운 혹은 기운을 의식적으로 쓰라고 말한다. 노인네는 불처럼 혁명을 일으켜도 별로 지나칠 일은 없단다. 그처럼 조용히 실천적 인문학의 물꼬를 바라보는 게 내겐 혁명이라면 혁명일 수 있겠다. 그러면 戊土처럼 다복한 노년이 되겠지? 요즘 어른들 강의에서도 곧잘 이 말을 써먹는다. 노년에는 戊土처럼 넓은 들판이 되라고. 많아야 둘밖에 안 되는 자식들, 아무리 잘 키워놔도 한 달에 한 번씩 많이 와야 두 번 밖에 더 오겠나. 독거노인이 별 거 아니다. 하지만 주변 새댁들에게 그동안 살아온 지혜를 나누어 줘보라고. 이웃의 열 집 아이들이 체할 때마다 혈자리 따주고, 이사 가는 날 봐주고, 이런 집에 사람의 발길이 쉽게 끊어질까?
 
연암의 무등을 타고 가는 길이 바로 이런 길 아닐까?
 
꿈속의 일은 보기가 어려운 반면에 현실의 일은 따지기가 쉽단 말일세. 이제 자네는 비속한 말을 주워 모으고 곤궁한 사람들의 일을 거두어들였네그려. 그런데 무식한 사내와 무식한 여자들의 천박한 웃음과 일상생활이란 어느 하나 현실의 일이 아닌 게 없으니, 눈이 시게 보고, 귀가 아프게 들어서 신기할 것 없는 당연한 현상일세. 그러나 먹다 남은 장도 그릇을 바꾸어 담으면 새로운 입맛이 나고, 같은 사람의 심리도 환경이 바뀌면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네.  

                    나는 껄껄선생이라오/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보리 21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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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경님의 댓글

세경 작성일

껄껄선생의 '아하'와 '묘리'가 선생님의 글에서 유쾌하게 전해집니다. 춤추듯, 흐르는 듯, 자유롭게.  선생님의 공동체도 감이당처럼 활기차고 왁자지껄 생기있어 보입니다~ 늙도록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할 수 있도록 공부를, 공부를^^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댓글의 댓글 작성일

감사합니다 세경님. 늙도록 낄낄거리며 자알 살겠습니다. 생기있게.

poong님의 댓글

poong 작성일

전화노인이라는 닉네임부터 좀 봐꿔보셔~ 대놓고 火기운 마구 휘두르고 다니려고 나이 50에 노인이라고 떠벌이고 다니는 거 아녀? 송미경쌤이 해숙쌤 글이 살아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을 해서 한 번 들어와봤는데, 역시 재미있네요.^^* 근데... 체할 때마다 혈자리 따주면 버릇 나빠져요.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따줘야 소화가 된다니까~ 배나 문질러주다가 심각할 때만 찌르고 따줘야 효과가 있지~~ ㅋㅋ 이사가는 날은 손없는 날이라고 해서 이사업체가 더 잘 알아요~ 그러니까 이사가기 좋은 방향이나 인테리어 색상, 풍수에 대해 말해줘야 이것저것 궁금해서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지 않겠시유? 암튼, 외우기 시험을 통과하고 계시다니 축하할 일이기는 하오만, 가끔 양 많으면 농땡이도 부리고 그런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용....ㅋㅋㅋ상추 가져다준다는 거 뻥친거 아니죠? 기대하고 있겠시유~~ ㅎㅎ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댓글의 댓글 작성일

풍! 상추 잘 먹었겄지? 풍 가져다 주려고 그런지 주변에서 상추 뜯어자 주는 사람이 많더라구!
글구, 외우기 숙제 양 많을 때 농땡이 안부리면 세상이 재미없제? 정화스님께서도 너무 열씸히 살지말라시잖어. 글구 닉네임은 원래 정화노인인데 잘못 오타쳐놓고도 고칠줄을 몰라 기냥 쓰고 있다네. 이쯤되면 노인 맞제?

임경아님의 댓글

임경아 작성일

우와... 샘~~ 완전 반가워요^^ 이리 재미있는 글을 쓰시다니.. 정말 대박 부럽습니다!!!! 앎과 삶을 제대로 일치시키셨네요.. 그것도 부럽습니다...ㅋㅋ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우와 나도 완전 반가워요. 아들 잘놀고 있죠? 글구 저 위에 글중에서 '암송때 늘 메아리처럼  따라하던 성실한 조원'이 바로 경아씨라는 것 알랑가 모르겄네!

경금님의 댓글

경금 작성일

오! 쌤! 제가 애지간해선 댓글을 잘 안 다는데요.(^^) 안 달 수가 없네요.
쌤의 그 유려한 말빨이 글로도 가능하다는 거죠?
일요일에 정화스님 강의 들으러 오세요~~ 보고 잡네요. ㅎㅎ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댓글의 댓글 작성일

경금? 그언니인가? 아니다 지영씨인가보다 지영씨 그려 육조단경 강의시간 넘 좋다면서요? 나도 지난주 토욜 유마경 들으러가서 스님께 따뜻하지만 따끔한 말씀 듣고 정신이 번쩍나더이다 .그렇잖아도 언제 서울 일욜에 한번 가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짬내볼게요. 그때까지 모두 열!공!

송씨님의 댓글

송씨 작성일

샘이 이 글을 읽으셨을 때, 그 현장은 웃음 한 복판, 감동 한 복판이었겠습니다. 이렇게 읽는 저도 짜릿짜릿 한데. 아... 진짜 짜릿짜릿 하다. 공부를 즐기는 모습을 저도 배우고 싶어요.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송씨면 송혜경씨인가 송미경씨인가? 암마도 송혜경일 테지요? 감사합니다. 짜릿해해줘어서..
근데  어이 송씨 뭐 별일없어요?
실연 그런거?ㅋㅋ
암튼 그런  소식이 없으니 잘 지내고 있는것이겠지요? 은근 보고싶다!

약선생님의 댓글

약선생 작성일

해숙샘~ 정말 정말 감동이오~~ 어떻게 이렇게 글이 생기로울 수 있을까요? 정말 배우고 싶습니다!!!!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약샘! 오랜만이오. 약샘 정말 약 잘치신다. 약샘이 치신 약먹고 무럭무럭 꿈나무로 자라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