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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도 존재하는 ‘삶’을 만나다 -『문화의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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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수 작성일13-05-24 11:12 조회8,16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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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도 존재하는 ‘삶’을 만나다
-루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


이민정(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돈키호테는 말했다. “잠깐 기다리게, 산초, 잠깐이면 한바탕 보여줄 테니까.”
그러고는 서둘러 속바지를 벗고 맨몸과 팬티 바람이 되었다. 그다음 다짜고짜 공중에 발길질을 하며 두 번 뛰어오르다 두 번 자빠지고, 두 다리를 공중에 치켜든 채 머리를 밑으로 박고 떨어지는 바람에 못 볼 것이 튀어나오자 산초는 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서 말고삐를 돌렸다. 그 정도면 나리가 미쳤다고 기꺼이 맹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돈키호테가 둘시네아에게 보내는 편지 심부름을 맡기면서 산초에게 자신의 괴상한 짓을 굳이 보여주는 장면이다.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고 공격하는 모습, 자신이 만든 물약을 먹고 몽땅 토한 후 잠이 들었다가 깬 후 회복된 것을 보고 물약이 ‘명약’이라 생각하는 모습. 이런 돈키호테는 ‘엉뚱한 열정을 가진 우스운 사람’의 대표로 소환되곤 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의 패턴』에서 돈키호테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 가엾은 노인은 예전 세대의 낭만적 기사도를 수호하려다 바보가 되고 말았다”고. 이 말의 의미는 돈키호테의 행동 자체가 이상했다기보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달랐다는 뜻이 아닐까. 어디에나 ‘바보’가 있다면, 어디에나 바보를 만드는 ‘기준’도 존재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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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의 모습

루스 베네딕트(1887~1948)는 어린 시절 열병으로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베네딕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느꼈다. 바로 밑의 여동생과 비교되며 “심술궂고 뚱한 아이”라는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낯가림도 심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보다는 글쓰기에서 자신만의 출구를 찾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영문과에 진학해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다 27세가 되던 1914년,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가정에서의 역할’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인 ‘글쓰기’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마거릿 미드의 평전에 따르면 베네딕트는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했지만 위험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남편은 수술을 반대했고, 이 일을 계기로 부부사이는 더욱 틀어지게 되었다.  

 
‘엄마’라는 역할은 단지 생물학적인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위치를 함께 보장한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자신이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자꾸만 자신의 일상과 부딪친다는 점을 고민하게 된다. 32세인 1919년, 일반인을 위한 인류학 강의를 듣게 된 후 베네딕트는 인류학에 매료되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 34세에는 콜롬비아 대학원에 입학해 당시 지도교수였던 프란츠 보아스(1858~1942)와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문화의 패턴』이 탄생하기까지

인류학에서는 제도, 관습, 결혼, 육아, 종교, 신화 등을 통해 ‘인간’과 ‘사회’가 맺는 관계를 연구한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여 인간의 생물학적인 차이가 문화의 차이를 만든다고 여겼다. 그들은 두개골의 크기와 형태가 인종을 분류하는 영구적인 기준이 될 것이라 믿었다. 보아스는 이러한 ‘근거 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둔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미국 이주민들의 두개골 측정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분류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그가 분석했던 데이터의 양은 무려 1만 7천여 건에 달한다. 이 작업을 통해 보아스는 두개골의 형태가 바로 다음 세대에게도 쉽게 변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결국 ‘순수한 인종’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보아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문화가 미개하거나 발전된 상태의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거나 다른 문화가 있을 뿐이고, 이는 그 문화만의 독특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문화 상대주의’를 주장했다. 베네딕트는 스승의 이러한 인식의 지반 위에서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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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은 진화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결코 변하지 않는 '증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인류학 연구방법은 현지 탐사와 서지 조사로 나뉘었다. 문자로 기록이 전해지는 부족들의 경우에는 민담, 신화 등을 통해서도 연구가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반드시 현지 탐사가 필요했다. 완전히 낯선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관습과 의례를 기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인류학자들은 부족의 일원이 될 정도의 유대감이 필요했으리라. 그래서 보아스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만의 부족’을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때문에 그 부족들을 ‘가족’이라 불렀고, 대개 한 명의 인류학자에게는 하나의 ‘가족’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베네딕트는 사라져가는 부족의 기록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몫이라 여겼기에 현지 탐사를 좋아했다. 몇 번의 현지탐사를 거쳐, 그녀는 1920년대 후반 드디어 자신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또한 현지 탐사를 통해 푸에블로 부족과 평원 인디언들이 대조적인 문화 형태를 보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이러한 발견을 니체의 용어를 빌려와 ‘디오니소스’ 적인 평원 인디언과 ‘아폴로’ 적인 푸에블로 족이라고 표현하며, 자신만의 문화 이론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문화의 패턴』을 집필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보아스 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베네딕트와 동료였던 앨프리드 크로버(1876~1960)를 자신의 후임으로 생각했다. 보아스는 크로버에게 콜롬비아 대학원 강의를 맡겼다. 당시 크로버는 자신만의 문화적 통합형태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강의하려고 했다. 그런데 보아스는 남부 아메리카 고원 문화에 대해 강의할 것을 단호하게 요구했다. 크로버는 스승의 요구에 따라 마지못해 강의에 응했다. 그러니 크로버가 이 강의에 많은 애정을 쏟지 않았으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미드의 평전에 따르면 당시 베네딕트는 크로버의 이 강의가 “건조하다”고 말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나중에 발견된 두 사람의 편지에서 베네딕트가 건조하다는 표현 이상으로 크로버의 강의에 몹시 분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베네딕트는 크로버가 생각하는 문화적 통합형태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깨닫고 직접 책을 쓰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2년 동안 『문화의 패턴』 원고를 준비한다.  

 
자신이 연구하는 푸에블로 부족, 스승인 보아스가 연구한 북서해안 인디언들의 자료로 초고를 쓰던 베네딕트는 이들과 다른 성격을 보이는 다른 부족의 사례도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동료였던 마거릿 미드(1901~1978)와 의논했는데, 베네딕트의 결론은 미드의 남편인 레오 포춘이 연구한 도부족을 마지막 사례로 넣고 싶다는 것. 포춘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미드가 쓴 평전에 따르면, 베네딕트가 『문화의 패턴』에 나오는 각각의 부족들이 책 안에서 정확한 대비를 이루도록 선정한 것은 아니고, ‘믿을 수 있는 자료만 사용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에 따라 선택한 결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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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문화의 다른 사람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문화는 ‘마음’으로 움직인다

『문화의 패턴』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는 관습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인류학을, 2장과 3장에서는 문화의 다양성과 통합성에 대해 서술하였다. 4장에서는 푸에블로 부족을 소개하는데, 여기에 그녀의 ‘가족’인 주니족이 포함된다. 5장은 레오 포춘이 조사한 도부족, 6장은 북서 해안의 인디언이며, 4~6장에는 각 부족의 지리적 환경, 종교적 의례, 주술, 장례식, 성인식, 상업, 결혼, 육아 등 다양한 측면을 분석했다. 7, 8장은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발견한 ‘문화의 통합성’에 관한 자신만의 통찰을 서술하였다. 부족들의 연구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베네딕트가 관습에 내재된 공동체의 ‘가치’를 발견한 지점이다. 5장의 도부족과 6장의 북서 해안 인디언은 경쟁이 사회의 주요한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 깔린 정서적 가치지향은 달랐다.   
 
도부족에게 성공한 인생이란, 누구보다 많이 타인을 속이고 배신하며 타인의 소유물을 많이 빼앗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악의가 매우 강하다. 그들 사이에서는 더 잘 의심하는 자가 더 성공할 수 있다. 베네딕트는 도부족이 ‘인간적’이라 생각하는 본성의 기본에 ‘배신’이 깔려있으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병적인 공포가 그들의 삶과 관습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북서 해안 인디언들은 인생을 사다리라 여겼고, 사다리에 높이 올라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들에게도 경쟁은 중요한 가치였다. 콰키우틀 부족은 ‘포틀래치’라는 관습으로 유명하다. 포틀래치는 결혼이나 거래를 통해 모은 재산들을 특정한 시기에 모두 파괴하거나 분배하는 것인데, 지위나 재산의 양과 관계없이 누구나 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게임에는 늘 상대가 존재한다. 이기는 자의 명예는 모욕을 당하는 자의 수치심 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이 부족은 ‘모욕을 당하는 것’을 극도로 피하게 되었다.

 
베네딕트는 경쟁심이 강한 도부족과 북서 해안 인디언들 중 왜 도부족에는 법이 없고, 북서 해안 인디언들에게는 법이 있는가의 차이를 사회의 미덕에서 살펴보았다. 즉, 도부족은 법이 없어서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 미덕이기 때문에 법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마치 ‘법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을 확 깨는 부분이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경쟁이라는 가치를 경계한다. 라이벌 의식은 삶을 추동하는 동력이 될 수 있지만 “남을 우월하려는 욕망은 너무나 거대한 것이어서 결코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 도부족의 ‘소유를 향한 악의 가득한 경쟁’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게 된다는 사실은 크게 놀랍지 않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사회가 공공연하게 추구하는 미덕이 아니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콰키우틀 부족이 포틀래치에서 사용했던 '코퍼'
콰키우틀 부족이 포틀래치에서 사용하는 '코퍼'를 들고 있는 모습
 
 
베네딕트는 부족들을 분석하면서 편집증, 과대망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그녀가 당시 유행하던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문화’와 ‘개인’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개인의 심리적 요소가 합해져서 문화(사회)가 된다는 입장과 문화(사회)가 개인의 성격이나 심리를 결정한다는 입장은 서로 팽팽하게 맞섰다. 하지만 베네딕트는 이 두 가지 이분법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녀는 문화가 ‘인성의 확대’라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이러한 방법론은 이후 미국 인류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심리학적 방식을 적극 활용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를 통해 사회적 구조를 중시하는 영국의 인류학과는 뚜렷하게 다른 특징을 보이게 된다. 특히, 콰키우틀 족은 모스의 『증여론』에도 등장하기 때문에 『문화의 패턴』과 함께 읽으면 포틀래치에 대한 두 인류학자의 다른 관점을 만날 수 있을뿐더러 영국 인류학과 미국 인류학의 차이점도 느낄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

당시에는 지리적으로 근접할 경우 유사한 문화를 형성한다는 ‘전파론’의 입장을 견지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또한 유사한 지역적 환경을 갖춘 경우 비슷한 문화가 형성된다는 지역주의적인 분석도 많았다. 특히 생물학적 진화론과 연결된 전파론 중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차츰 다른 대륙으로 퍼졌다’는 것과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피부색이 어둡고 일조량이 적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피부색이 밝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그런데 베네딕트는 이러한 이론에 위배되는 인디언 문화를 마주하게 된다. 그녀의 ‘가족’인 주니족이 다른 인디언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주니족에는 샤먼이 없고, 사제만 존재했다. 그렇다고 주니족이 주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베네딕트 역시 이렇게 다른 차이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 고민했으리라. 주니족은 샤먼이 있는 다른 부족들과의 지리적 거리가 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 큰 강이나 협곡 등을 통한 지리적 단절도 없었다. 지리적으로는 이어져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섬’이었던 것! 베네딕트는 관습 연구에서 그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주니족은 어린 시절부터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다른 평원 인디언 부족들은 약물과 고행을 통해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고자 했지만, 주니족은 한 개인에게 초자연적인 경험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눈에 띄게 매력적인 인물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인물로 간주되어 추방되거나 제거되었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관습이 고대 그리스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에 착안해 니체의 용어를 차용해 주니족을 ‘아폴로 적’인 성향으로, 다른 평원 인디언들은 ‘디오니소스 적’인 성향으로 분류한다. 디오니소스 형 인간은 “존재의 통상적 경계와 한계를 파괴”함으로써 가치에 도달하고자 하며, 아폴로 형 인간은 도취의 체험을 이해하지 못하며 중도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베네딕트가 볼 때 이러한 ‘이성적이고 절제하는 인간’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보다 주니족의 문화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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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아폴론, 오른쪽이 디오니소스이다. 둘의 '차이'가 드러나는가?
 

주니족이 기우제를 하면 참여하는 모든 멤버들은 기도문을 똑같이 암송해야 했고, 춤도 틀려서는 안 되었다. 만약 누군가 한 명이 한 단어라도 잊어버렸다면 그 기도는 효력이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주니족의 사제가 권위를 갖는 방법은 모든 의례의 절차를 정확하게 외우는 것이다. 그들의 일상은 이러한 종교적 의례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때문에 결혼, 육아, 성인식 등에 대한 것들은 가볍게 취급되었다. 절제가 주니족의 최고 미덕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의심과 배신이 미덕인 도부족,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미덕인 콰키우틀 족보다 절제가 미덕인 주니족이 더 좋다거나, 더 발전된 문화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 문화의 특징은 다른 문화와 비교했을때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비교의 우위를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보아스와 그의 제자들이 추구하는 ‘문화비교론’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관습은 더욱 공고해지고, 또 어떤 관습은 버려지기도 한다. 문화가 관습을 선택한다는 것. 이는 책 제목인 『Patterns Of Culture』에서 잘 드러난다. 패턴(pattern)은 유형(type)이 아니다. 역자들은 이 책의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지 고심했다고 한다. 『문화의 유형』으로 번역하게 되면 문화가 고정되고 전형적인 성격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문화의 패턴』이라고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베네딕트는 문화가 개인과 마찬가지로 생각과 행동에 지속적인 일관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패턴화(化)된다고 생각했다. 한 개인이 그 문화에 적합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역사로 구성된 관습’의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 그녀는 문화를 하나의 예술품처럼 생각했다. 높이와 빛을 선호하여 시작된 고딕 건축이 13세기의 독특한 예술 양식이 된 것처럼 일상과 결혼, 전쟁, 종교 의례 등과 관련된 사소한 행동들이 문화 내에서 발달된 선택의 무의식적 기준(가치)에 힘입어 지속적인 패턴으로 굳어진다는 의미이다. 어떤 문화는 통합을 이루기도 하고, 어떤 문화는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개인들의 총합을 넘어 문화라는 새로운 실체가 된다는 것. 이 지점이 바로 이 책의 고유한 특이점이 될 것이다.
 

어디에도 존재하는, 비정상인들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어둠이 있다. 마찬가지로 문화에서도 정상인과 비정상인이 ‘늘’ 존재해왔다. 늘 의심하고, 배신을 잘 하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도부족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콰키우틀 족에서는 행동이 때때로 과하다고 받아들여지겠지만, 역시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니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꽤 험난한 삶을 예상해야 할 것이다. 그의 욕망은 관습과 자주 부딪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현명하게 잘 숨기거나, 혹은 관습과 맞대결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될 것이다. 실제로 베네딕트가 만난 주니족의 한 사제는 절제와 중용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때로는 난폭한 행동이 드러나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가 술에 취해 아무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떠벌리며 돌아다녔다. 주니족에서는 이런 술에 취한 상태를 질색한다. 그들은 곧 이 사제가 ‘검은 주술’에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며 그를 잡아들여 심문했다. 이 사제는 관습의 이탈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고문을 당하고, 사용하지도 않은 검은 주술을 썼다고 거짓 고백을 하는 동안 이탈자는 미국 연방정부에 몰래 자신의 전령을 보낸다. 미국 연방정부에서는 그를 구출하러 오고, 그를 가두고 심문했던 주니족의 존경받는 사제는 교도소로 수감되었다. 그런데 이탈자는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인 ‘달콤한 목소리’와 ‘엄청난 기억력’으로 부족의 많은 신화와 의례, 노래들을 암기한 것이다. 인생역전! 그는 결국 통치자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지만, 베네딕트는 그가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가 겪은 불행이 “그의 타고난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런 자질의 배출구를 마련해주지 못한 문화의 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또한 서구 문명이 동성애를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박한다. 이러한 기준 안에서 성 소수자들은 죄책감, 실패감, 좌절감 등을 느끼게 되는데 사회는 오히려 문화의 기준 탓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베네딕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남녀 간의 성차별이 무척 심했고,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때문에 보아스에 이어 콜롬비아 대학원의 인류학과 학장이 된 그녀의 모습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녀가 성소수자였음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베네딕트는 자신을 괴롭히던 성정체성 문제를 풀고 난 이후 남성과는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미드가 베네딕트의 절친한 동료이자, 연인이었다는 점도 두 사람의 서신이 연구된 이후 밝혀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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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의 모습을 통해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베네딕트의 다른 저서인 『국화와 칼』도 고전이지만, 『문화의 패턴』은 그녀가 자신의 삶의 물음과 직면해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의 글쓰기라는 점에서 소중한 책이다. 다른 문화의 관습들을 연구하면서 비정상과 정상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 이 부분을 쓰며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하나 찾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사회적 제도의 규칙성에 몰두했던 다른 인류학자들과 달리 개인의 무의식적 부분까지 탐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베네딕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지속하면서 이 책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과 책은 겹쳐지고, 또한 그녀의 질문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 된다.


댓글목록

세경님의 댓글

세경 작성일

'문화의 패턴'을 읽진 못했지만 작가의 삶과 연결된 글을 읽으니 인디언을 연구하던 인류학이었지만 실은 자신이 잃어버린 퍼즐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을 거라는 말씀에 절로 공감이 됩니다. 베네딕트가 탐구했던 개인의 무의식적 부분도 더 알고싶어지구요. 잘 읽고 갑니다^^

약선생님의 댓글

약선생 작성일

디오니소스의 그림을 보니, 뜬금없이 이런 말이 기억나네요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ㅡ.ㅡ;; 쓰고 보니 별 관련은 없어보이긴 하군요 쩝) 암튼 저렇게 편한 넘이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정말 부러워 죽겠어요~ 아웅...ㅎㅎㅎ

만수님의 댓글

만수 댓글의 댓글 작성일

저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의 포스(!)인가봅니다. 디오니소스적으로 사는 게 쉬워보이진 않네요.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