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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성, 일본인에겐 자연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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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놀배 작성일13-06-01 00:09 조회6,7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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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성, 일본인에겐 자연스러움
 
안순희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국화와 칼』, 고전(苦戰) 중에 탄생한 고전(古典)?
 
“전쟁은 천황이 모르는 사이에, 또 천황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 천황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으시며, 따라서 국민이 전쟁에 휩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일본인은 천황의 명령이라면, 죽창 한 자루 외에 아무런 무기가 없더라도 주저 없이 싸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천황의 명령이라면, 즉각 싸움을 멈출 것이다.”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 김윤식·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2012. 50p, 52p)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본인 포로들의 말들이다. 천황이 모르는 전쟁발발? 천황이 모르는데 천황의 한마디에 돌격이든 종전이든 따르겠다는 건 또 뭐야? 가미카제(神風)특공대라 불리는 비행기 조종사들의 육탄 공격, 오직 싸우다 죽는 것이 천황에 대한 충성이라 생각하고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일본군인들. 도대체 종잡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서양인의 눈에는 모두 비현실적인 모습들이다. 최선을 다하되 불가피한 상황에선 항복할 수 있고, 전쟁의 책임은 전쟁을 일으킨 최고책임자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서양인들의 사고와 매우 상반된 모습 아닌가?

1. 전쟁독려.jpg
이렇듯 서양의 전시관례에서 벗어난 적대국의 특성을 미국은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즉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저돌적인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짓고자 했다. 그래서 미국무부는 1944년 6월, 문화인류학자인 베네딕트에게 일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의뢰한다. 그 결과물이 1946년 책으로 출간된 『국화와 칼』이다.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대응하기 어려웠던 일본과의 고전(苦戰 )중에 미국인 학자에 의해 탄생한 고전(古典)이라고나 할까.
 
베네딕트, 다각적으로 일본을 탐구하다
  
베네딕트(1887-1948)는 미국 뉴욕출생의 인류학자이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다 스승 보아스와의 인연으로 인류학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에 몰두하게 된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특이한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서양인의 안경을 벗고 민족적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학자로서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다각적인 방법으로 일본에 접근한다. 전시(戰時)라서 일본 현지답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자랐으나 당시에 미국에 체류하는 일본인들과의 직접 면담을 통해 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확보한다. 그리고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알아야 할 것들을 체크하며 방대한 일본 관련서적과 기록물들을 읽어 나간다. 
 
또한 일본 영화나 소설 등을 보고 맥락 파악이 잘 되지 않는 부분들을 일본인들과 같이 다시 검토하여 자기가 이해한 것과의 큰 차이들을 메워나간다. 그 검토에 참여한 일본인의 상반된 반응 즉 일본인의 관습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무조건 증오하거나 하는 등의 언행도 놓치지 않는다. 영화 같은 대중매체 속에 그려진 일본은 학문적인 서적이나 연구물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일상의 관계나 감정, 관습 등이 녹아 있어 일본인이 아니라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서양인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눈을 통해 교정하고 보충함으로써 자신의 오해를 최소화하려는 열린 마음과 꼼꼼함이 돋보인다.
 
이러한 베네딕트의 성실한 노력이 일본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처음에 자신을 당혹스럽게 했던 일본인의 행동이 연구과정을 거치는 동안 문화적 차이에 따른 일본적인 삶의 양식으로 비치게 되었음을 베네딕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나는 일본인과 함께 작업을 할 때, 처음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어구나 관념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오랜 세월에 걸친 감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덕과 악덕은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체계는 매우 독특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도 유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같은 책 32p).
 
여기서 ‘일본적인 것’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 의미할까? 섬나라인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오랫동안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들만의 고유한 사회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7세기경 중국문화와 호국종교로서의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일본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4만여 신을 내건 민간종교가 있었다. 신 아닌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다. 그들의 삶과 관련된 해, 바람, 물, 땅, 나무 등 온갖 자연물이 신에 해당하지 않았겠는가? ‘자연(自然)’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존재할 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연을 신으로 삼은 사람들도 좋고 나쁨을 구분하기보다는 그냥 자연에 기대어 살아갔을 것이다. 자기들의  재앙을 막아주거나 어떤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섬겼을 것이라는 뜻이다.

 
2. 인물.jpg
 
그런 관습의 연장선상에 있는 대표적인 예로 가미카제를 들 수 있다. 13세기 말 원나라가 일본을 침략했을 당시 태풍이 불어 원나라 수송선이 뒤집혔다. 일본인들은 그 바람이 자기들을 구해줬다고 믿는다. 그 후 ‘바람(風)’에 신(神)을 붙여 神風(가미카제)이라 불렀다. 이후 일본에선 원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일본 병사뿐 아니라 원나라 병사까지 함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냈다고 한다. 전쟁에서 한꺼번에 많이 죽은 사람의 원령에 의해 자연재해나 인재가 일어난다고 믿는 일본인의 신앙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에는 10만여 개나 되는 신사와 부적 등이 생활 속에 생생히 자리 잡고 있다지 않는가? 과거에 위기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준 바람처럼 일본을 구하겠다고 폭탄을 지닌 채 적군에 돌격한 가미카제, 사람이 죽으면 모두 부처가 된다는 믿음을 가진 일본인들. 이처럼 자연과 밀착된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긴 세월에 걸쳐 형성된 일본인의 의식과 행동은 유일신을 믿는 서양인에겐 매우 낯선 것 즉 일본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베네딕트는 자신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일본군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군사적인 측면이 아니라 문화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접근한다. 그들의 언행에서 표출되는 사상과 의식의 배경을 탐구하기 위해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이 아니라 이면의 관계까지 파악한 것이다. 그 결과 일본 군인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 전체의 중심에 천황이라는 존재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도대체 천황이 뭐길래? 
 
천황, 일본 근대가 만든 신(神)  
 
천황에 대한 일본인의 무조건적 숭배는 어떻게 가능할까? 메이지유신(1868년) 이전까지 일본은 신분에 따른 계층사회였다. 국왕(황실), 귀족(쇼군, 다이묘), 무사(사무라이), 서민(농민, 공인, 상인) 등의 신분은 세습되었고 천황은 그 신분제도의 최고정점에 위치했다. 그러나 봉건사회 대부분 시기에 천황은 아무런 권한이 없는 존재였고 실권은 봉건영주(다이묘)의 수장인 쇼군이 장악했으므로 천황과 쇼군의 이중통치체제였다.
 
그럼 이렇게 무력했던 천황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존속되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천황은 계층상 ‘알맞은 위치’ 즉 최고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일본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계층제도에 대한 신뢰가 깊고 봉건적 계층에 따라 구분된 역할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다시 말해 천황을 최고의 자리에 둠으로써 그 아래에서 쇼군은 실질적인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고, 일본인은 정치나 세속적인 일의 개입 여부와 결부시켜 천황의 신분을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1603년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바쿠후(幕府)정부는, 사무라이와 농민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계층제도를 공고히 함으로써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이러한 제도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을 일본인들로부터 내면화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무사에게는 일정액의 봉록을 주어 살아가게 하고, 농민에게는 농지소유권을 주되 세금납부의 의무를 부과하는 식으로 각 계급에 따라 확실한 삶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자신의 신분에 맞게 자기의 의무를 이행함으로써만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 것이다. 
 
메이지유신 주축 세력은 일본인의 이러한 믿음을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 장악에 최대한 이용한다. 그 중심세력은 바쿠후 말기 부(富)를 축적한 상인 계급과 하층 사무라이 계급의 연합세력이었다. 그들은 ‘왕정복고’를 내세우며 바쿠후정권을 퇴장시킨다. 바쿠후시대의 지배층이었던 쇼군, 다이묘 등을 비롯하여 다른 계급을 철폐하는 대신, 천황만은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에 격상시켜 중앙집권적 지배를 강화한다.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체제에 천황의 존속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 일본신화.jpg
 
그들은 아예 메이지헌법에다 ‘신성불가침한 존재로서의 천황’을 명시하고, 국가 정치에 대한 어떤 책임도 없다는 규정을 넣는다. 즉 모든 사람에게 천황을 숭배하고 따르는 것을 의무화하고, 정치적 책임자가 아니라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시킨다. 아울러 천황은 실질적인 권력의 비호를 받고, 계층제도에서 미미한 신분이었던 유신세력은 천황을 내세워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 국가종교인 신토(神道)를 학교에서 가르치고 국가가 관리한다. 국가신토는 신화시대 이래 왕조교체가 한 번도 없었던 일본역사와 황족만이 천황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신화화한 것으로 천황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이렇듯 메이지시대의 정치가들은 국가와 종교의 중심에 천황을 둠으로써 천황과 일본인 간에 새로운 질서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일본인들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고 불만 없이 살도록 관리해 나간다. 일본인들을 하나로 통합시켜 국가에 충실히 봉사하도록 만드는 구심체로서의 천황의 역할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천황은 일본패전 후 전쟁 책임과 무관한 존재였고, 미군정에 의해서도 천황은 존속되었다.
 
더욱이 일본인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는 큰 채무 즉 온(恩)을 지고 있다는 관념과 그것을 꼭 갚아야 덕을 실천한 것으로 여긴다. 죽을 때까지 갚아도 다 갚지 못하는 끝없는 채무 변제를 기무(義務)라 하는데, 부모에 대한 고(孝)와 천황에 대한 주(忠) 이에 해당한다. 이 두 가지가 상충할 때 천황에 대한 주는 부모에 대한 고보다 우선이다. 그리고 두 개의 기무는 일본인 모두에게 강제적이고 무조건적이다. 마치 서양인의 꼭 갚아야 하는 채무변제와 비슷한 성격이다. 이로부터 자유로운 일본인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과 조건에서 천황은 현존하는 신이 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일본인의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그들의 관점에선 자연스러운 것이지 않을까.
 
악의 세계는 없다
일본인의 인생관은 주(忠), (孝), 기리(義理), (仁), 인정(人情) 등의 표현에 나타난 그대로이다. 일본인은 ‘인간의 의무’가 마치 지도 위의 여러 지역처럼 몇 개의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생이 ‘주의 세계’ ‘고의 세계’, ‘기리의 세계’, ‘진의 세계’, ‘인정의 세계’, 그 밖의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단하지 않고, ‘고를 모른다.’, ‘기리를 모른다.’ 등의 말로 판단한다. 그들은 미국인처럼 어떤 사람을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대신, 그 사람이 해야 할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이기적이거나 불친절하다고 비난하는 대신 그 사람이 위반한 법도의 특정한 영역을 명시한다.  (같은 책 253p)
 
일본인의 인생관에서 주목할 것은 ‘주의 세계’, ‘기리의 세계’ 등에 적용되는 법도라는 것이 그 ‘세계’ 속의 상황이 달라지면 행동기준도 변한다는 점이다. 기리(義理)는 기무와는 달리 자신이 받은 은혜만큼만 갚으면 되는데 세상에 대한 기리와 이름에 대한 기리가 있다. 후자는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기리이다. 예컨대 주군에 대한 기리는 주군이 부하를 모욕하지 않은 동안에는 가능하지만, 일단 모욕을 당한 부하는 모반을 일으켜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기리의 세계’라면서 기리와는 상반된 모반을 허용하는 것이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베네딕트는, ‘기리’는 충성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선 배반을 명령하는 덕이기도 하므로 이 점을 놓치면 일본인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주군은 부하가 자기역할에 충실하도록 할 전적인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해 부하가 모반을 일으키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기리’라는 뜻이다. 상하 간에 서로 공평한 묵시적 계약관계 같은 것이랄까. 쌍방이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경우에만 기리의 세계가 가능하니까. 결국 충성과 배반이라는 모순이 아니라, 달라진 상황에 따른 달라진 행위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모순이 되지 않고 달라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뿐이다.  
 
또, 일본인의 의식엔 따로 분리된 ‘악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세계의 구분이 뚜렷한 서양인과는 달리 인생 자체를 선악의 싸움이 아닌, 어느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마주침으로 보고, 그 세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치 한편의 연극이나 영화를 감상하고 소설책을 읽듯이. 그리고 거기에 그려진 각각의 세계는 그 자체로 선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서양인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온갖 고난을 겪지만 결국 악을 물리치고 선을 수호하는 정의의 사도로서 그려진다. 그리고 관객이나 독자는 그런 주인공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그런데 일본인의 시선은, 주인공이 기리와 인정, 주(忠)와 고(孝), 기리와 기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양쪽 모두 선(善)인 상황 즉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하던 주인공이 그 해결책으로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대개 다른 문화 속의 주인공은 힘겨운 상황을 견뎌내고 해피엔딩을 맞는 것과 대조적이다.

4. 국화와 칼.jpg
이러한 주인공의 행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일본의 서사시〈47 로닌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봉건시대 주군에 대한 기리를 주제로 한 내용이다. 주인공이 신뢰할만한 동료 로닌(사무라이)들과 모의하여, 자신의 주군(시골영주)이 다른 영주(궁정영주)에게 모욕을 당하고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이다. 바쿠후(정부)에 미리 신고하지 않고 복수하는 것이 금지된 상황에서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법을 무시한다. 신고를 하면 권력가인 궁정영주를 죽일 계획 자체를 허가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이 신고하지 않고 행한 복수는 자신의 영주에 대한 기리를 행한 것이지만, 동시에 바쿠후의 법을 어긴 행위였다. 이때 바쿠후는, 주군의 원수를 갚은 행위는 기리를 행한 귀감으로 삼지만 위법행위에 대해선 마땅히 치러야 할 기무(벌)  즉 할복자살을 명한다. 

그럼 왜 일본인들은 목숨을 걸고 복수를 결행할까? 명예를 잃은 삶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비록 살아있다 하더라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일본인의 윤리의식 때문이다. 즉 모욕에 대한 보복은 악이 아니라 명예를 회복하는 행위로서 덕을 실천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리를 위한 귀감이면서 죽어야만 하는 기무’라는 모순된 잣대에 대해 일본인들이 별 저항감을 보이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아마 ‘알맞은 자리’를 지킬 때만 사회적 안전이 보장된다는 계층에 따른 질서의식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집단적으로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국화와 칼』, 왜 고전인가?
 
다음은 인류역사학자이며 저널리스트인 이안 부루마의 평이다.
 
이 책이 고전인 것은 저자의 지적인 명확함, 그리고 유려한 문체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난해한 용어를 쓰지 않고 복잡한 사상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을 지닌 작가였다. 문체는 그의 사람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베네딕트는 훌륭한 인간성과 영혼의 관대함을 지닌 작가였다.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 하더라도 전쟁 시기에 씌어진 가공할 만한 적에 대한 묘사인 이 책이 오늘날 읽어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반세기 동안 일본과 일본인들에게 불어 닥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진실인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읽고 만난 일본』,김윤식, 그린비, 2012, 512p)
  
이러한 평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서양문화권과 완전히 다른, 일본인의 인간관계와 복잡한 덕의 세계 등을 베네딕트가 주관적인 치우침 없이 생생하고 이해하기 쉽게 그려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다른 민족의 문화를 우열이 아닌 차이로 바라보는 베네딕트의 관용성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천황교 광신도!’, ‘미친 사람들’이란 말이 튀어나올 법한 일본군들의 천황에 대한 맹목적 숭배에 대해 베네딕트는 ‘전쟁에 휩싸여 피로한 자들’ 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쓴다. ‘천황을 신처럼 받드는 사상을 가진 일본군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그들의 언행을 이해하는 뜻으로 읽히니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70 여 년 전에 일본을 그려낸 책이니 만큼 지금의 일본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일본인의 독특한 의식의 밑바탕이나 역사, 문화적 특성 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나에겐 모순으로 보이는 것들이 일본인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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