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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접과 확장의 우주적 인식론,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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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담 작성일13-06-03 10:19 조회9,28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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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접과 확장의 우주적 인식론,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도담(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전설 속에 숨겨진 이치를 찾아서
 
결혼 첫 날밤, 소강절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손들의 점을 치고 있었다. 9대손에 이르자 불길한 점괘가 나왔다. 그 후손은 역적누명을 쓰고 죽을 운명이었다. 소강절은 그 후손을 위해 유품을 하나 남겼다. 큰 일이 생기면 풀어보라는 유언과 함께. 300년 후, 소강절의 9대손은 정말 역적누명을 쓰고 멸문지화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는 9대조 할아버지의 유품을 열어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고, 드디어 소강절의 유품이 담긴 함을 열었다. 거기엔 또 다른 함과 함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 함을 형조상서에게 전하라”는 편지 내용을 보고 9대손은 그 길로 형조상서를 찾아갔다. 형조상서는 삼백 년 전 대학자인 소강절의 유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나와 예를 다해 유품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유품을 받기 위해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서까래가 내려앉으며 집이 무너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져온 함 속에 있었던 소강절의 편지 내용이었다. 거기엔 “당신이 대들보에 깔려 죽었을 목숨을 내가 구해주었으니, 당신은 나의 9대손을 구해 주시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서는 그 길로 재수사를 명했고, 9대손의 무죄를 입증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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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9대손의 운명을 예측할 정도로 그의 점복술은 그야말로 최고 경지였다. 이러 전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그는 신비한 점쟁이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소강절은 민담이나 전설 속 인물이 아닌 역사 속의 학자로서, 숫자의 이치(數理)를 성리학적으로 완성한 상수학(象數學)의 대가였다. 상수학은 주역의 해석체계 중 하나다. 주역은 우주의 모든 상들을 64개의 괘와 384개의 효 안에 함축시켰다. 괘는 중첩된 효(3개 혹은 6개)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그림이긴 하지만 양과 음 두 종류의 막대 모양을 쌓아 놓은 기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호를 ‘상(象)’이라 한다. 이 상은 64가지가 있고 상 안에는 수(數)가 내함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상은 수로써 표현할 수 있다. 이렇듯 상과 수 위주로 해석하는 것을 상수역(象數易) 혹은 상수학이라 한다. 참고하자면, 상수역과 함께 주역사의 또 다른 축이라 할 수 있는 ‘의리역(義理易)’라는 해석체계가 있다. 상수역이 주역의 상을 수로서 해석했다면 의리역은 문자언어로 상을 해석한다. 괘상에는 사(辭)라는 해설이 있고, 또 공자의 주석도 달려 있다. 이런 문자를 위주로 철학적으로 해석한 역학의 한 부류를 의리역(義理易)이라 한다.

그러므로 상수역을 근간으로 학문적 체계를 세운 소강절에게 예지력이란, 영감이나 직감이 아닌 바로 ‘수(數)의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수의 구체적인 활용법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 이치를 담아낸 그의 저작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황극경세서’이다. 황극경세서는 원회운세와 더불어 관물내편과 관물외편 그리고 성음율려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책은 무척 난해해서 남겨진 자료만으로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이 난해한 자료를 가지고 후대의 사람들은 예언적 술수로 발전시키기도 했고, 중국사상사 안에서 학문적 시선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술수와 학문, 그 어느 쪽으로도 깊게 해석되지는 못했다. 어려운데다 부족하기까지 한 사료 탓도 크겠지만,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운 그의 학문적 성향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유학자들은 소강절의 학문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학문은 공자와 왕필 그리고 정이천으로 이어지는 주류 의리역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렇다고 점복술로 응용되던 기존의 상수역학에도 속하지 않았다. 게다가 도교의 계보와도 연결되어 있었고 그가 지은 시(時)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가득하기까지 했다. 학문적 경계가 불분명하고 어렵고 부족한 사료. 이런 점들로 인해 소강절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포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북송 5자 중 한 사람임에도 많은 연구서에서도 중국 사상사의 계보에서 종종 생략된 채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은 분리된 틈새가 연접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불도를 넘나들었던 그의 사유는 사상들 간의 학문적 연접들을 낳았다. 강절의 사상은 그 연접 위를 가로지르며 만물의 이치를 특정 사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시선으로 해석했다. 만물의 이치는 곧 자연의 이치다. 자연이야 말로 모든 인위적 경계들을 수시로 넘나드는 흐름의 장이다. 그런 점에서 소강절 사상이 낳은 학문의 연접이야말로 이런 자연의 이치를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강절에 대한 많은 유학자들의 불편함(술수적, 비유학적 성향)도, 술수가들의 고단함(난해함으로 인한 술수적 응용의 한계)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소강절과 그의 학문을 연접과 확장의 키워드로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불편함과 고단함을 낳은 정교한 이론적 해석에 대한 욕망을 채울 순 없겠지만 연접과 확장 자체가 주는 삶과 운명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삶과 운명도 자연의 흐름 안에 놓여 있으니까. 그러니 삶에서 부딪히는 언어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그 흐름을 감지하려면 연접과 확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마음과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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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절(邵康節)(1011~~1077)은 북송시대의 유학자이자 시인으로, 성리학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던 북송5자(주렴계, 소강절, 장재, 정호, 정이)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의 꿈을 키웠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옛 사람들은 시간을 뛰어 넘어 더 옛날의 사람과도 소통하였는데, 나는 지금 내 주위 사방(四方)에도 못 미치는구나”하며, 집을 떠나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도(道)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 후, 다시 나가지 않았고 더 이상 과거공부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이지재가 소강절이 학문을 즐긴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방문했다. 이지재는 주렴계의 스승인 목수의 제자로 고문에 정통한 학자이자 관리였다. 이지재는 소강절에게 물리(物理)와 성명(性命) 공부를 권했다. 이때부터 소강절은 춘추를 배우고 역학(易學)을 전수받았다. 이지재는 그의 잠재력과 학문적 그릇을 꿰뚫어 보았다. 훗날 소강절의 사상이 주자학(신유학)의 사상적 기틀이 된 것을 보면 이지재의 안목도 대단하다고 하겠다. 
 
소강절은 이지재로부터 도교의 연단술에 운용되던 선천도(先天圖)를 전해 받았고, 그것을 재해석하여 ‘선천역학’이라는 역학의 새로운 해석체계를 세웠다. 황극경세서는 이 선천역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선천역학’은 기존의 역학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그래서 ‘선천’이다. 자연히 기존의 역학은 ‘후천’이 된다. 풀어 말하면, 후천역학은 역의 기호(괘)에 주나라 문왕이 제목을 붙이고 공자가 철학적 주석을 달면서부터 시작된, 일반적으로 주역이라는 이름의 역학이다. 그에 반해 선천역은 괘상에 문자가 달리기 이전의 역이다. 즉, 전설상의 제왕인 복희씨가 최초로 만들었다는 선천팔괘 이론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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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역사는 중국 문명의 역사를 망라한다. “천문, 지리, 악률, 병법, 운하, 산술, 방외의 연단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을 원용하여 이론을 만들었다.”(사고전서총목제요) 그런 점에서 선천역학이 주역 이전의 역이라는 것은 그것이 문명에서 벗어나 있음을 뜻한다. 소강절은 선천을 ‘마음’이라 하였고, 후천을 ‘흔적’(황극경세서, 외편)이라 했다. 행하지 않은 상태인 무위(無爲)의 마음은 행함과 더불어 생기는 유위(有爲)의 흔적을 낸다. 이와 같이 선천은 후천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선천은 후천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근본이 된다. 인위적 문명은 분명 유위의 흔적이며 후천이다. 그렇다면 무위의 마음과 선천은 ‘천지자연’이 될 것이다. 그런즉, ‘자연’은 ‘문명’의 근본이다. 소강절이 “만 가지 일은 마음에서 생겨난다.”(외편)고 한 것처럼, 모든 문명은 자연에서 비롯된다. 강절에 따르면 “자연이란 행함이 없고 소유함이 없는 것이다.”(내편) 때문에 권력과 명성 등 일부 유위의 것들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런 욕망을 버려야 마음을 통해 관계의 장 안에서 더 광대한 유위를 누릴 수 있다. 소강절이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렇다고 후천의 흔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행함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억지로 행하지 않는 것"이고, “소유함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니지 않는 것”(내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넓어질 수 있고 커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천이라는 근본은 자연스럽게 후천으로 펼쳐진다. 
 
그런 넓고 큰 세계를 소강절은 일상적인 삶에서 구현했다. 예컨대,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자치통감』의 저자이자 북송 정치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사마광과 둘도 없는 절친이었고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정명도, 정이천, 장재 등과도 잘 어울렸을 뿐 아니라,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배움을 나눠주었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우습게 여기면서도 관직에 있는 자들과 함께하는 것을 불편해 하지 않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도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다. 만일 유위의 후천을 부정하거나 일부의 유위에 집착했다면, 이런 식의 어울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학문에도 경계가 없었다. 유불도를 넘나들고 역학은 물론 시와 역사, 음운학과 천문을 두루 아울렀다. 무위와 유위의 경계가 없는데 어찌 인간관계와 학문의 경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무위에 뿌리를 둔 소강절의 삶에 대한 자세였다. 이렇듯 무위 안에 있지만 유위의 세계와 연접할 수 있었고, 유위와 섞이되 관계의 편견과 학문적 도그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위와 선천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가일배법과 ‘4’의 이치
 
선천과 후천으로 대표되는 마음과 흔적 또는 자연과 문명은 이렇듯 뚜렷한 경계가 없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 연접엔 선후가 있다. 후천은 반드시 선천에서 출발하여 확장되고 구체화된다. 그 발생학적 연결을 소강절은 ‘가일배법(加一倍法)’이라는 단순한 원리로 설명한다. 가일배법은 하나가 둘로 나뉘는 법칙으로 , , ,  ...  식의 배수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배로 분화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만물생성의 이치라는 것이다. 하나의 수정란이 두 개, 네 개의 세포로 분열하듯이 말이다. 소강절은 이러한 수리적 해석으로 태극에서 64괘의 분화를 설명한다. 하나의 태극은 양효와 음효로 분화되고 하나의 양효와 음효는 다시 두 개의 효를 지닌 태양, 소음, 소양, 태양으로 분화된다. 여기에 한 효를 더해 다시 나누어지면 팔괘가 되며, 이런 식으로 16괘, 32괘, 64괘까지 확장하게 된다(16괘와 32괘는 소강절에 의해 처음 제시됨). 태극이 시원의 상징이라면 64괘는 만 가지 변화의 상징이다. 태극이 홀수 ‘1’이 아니라 ‘2의 0승’인 것처럼, 64괘 역시 ‘2의 6승’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2의 n승’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태극이나 64괘나 2의 분화라는 가일배법 안에서 서로 통하고 있다. 
 
소강절은 여기서 시원과 중심이 되는 태극을 ‘마음’이라 보았다. 모든 변화는 중앙에 있는 하나의 마음(心)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천은 후천의 시원이고 흔적을 내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 가지 변화가 하나의 마음에서 시작되고 마음으로 수렴되니, 천지만물의 이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소강절은 이것을 ‘심법(心法)’이라 했다. 그래서 심법은 가일배법과 통한다. 가일배법이 이진법의 논리와 구조로 하나의 태극이 64괘가 되는 이치이듯이, 심법 역시 하나의 마음이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의 만물이 되는 법칙이다. 그리고 64괘가 다시 하나의 태극으로 모이는 것처럼, 만물은 하나의 마음으로 접힌다. 
 
그런데 이 가일배법의 과정 중에서 소강절은 숫자 ‘4’에 주목했다. ‘4’는 하나의 사이클을 가지고 있는 최소의 숫자다. 사방(동서남북)과 사시(봄여름가을겨울)가 ‘4’수의 대표적인 사이클이다. 소강절은 이 사이클을 응용하여 우주의 역법(曆法)을 새로 만들었다. 그것이 소강절의 대표 이론인 원회운세론이다. 원회운세론의 <원(元)·회(會)·운(運)·세(世)>는 우주의 시간단위로서 이것은 <연·월·일·시>의 주기성과 통한다. 즉, 원(元=12회)은 우주의 1년이고 지구의 시간으로는 129,600년에 해당하고, 회(會=30운)는 우주의 한 달이며 지구시간으로는 10,800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운(運=12세)은 우주의 하루로써 지구시간으로 360년이고, 세(世)는 우주의 한 시간, 지구시간으로는 30년이다. 소강절은 이 원회운세를 활용하여 인류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로써 인류를 포함한 만물의 역사는 <원회운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준칙을 갖게 되었고, 천지(天地)와 인간은 같은 패턴의 시간성 안에서 물리와 생리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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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결을 갖춘 자연의 이러한 ‘4’의 주기성은 하늘과 상응하는 인간에게서도 적용된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기에 역사도 역시 ‘4’라는 수의 변천과 순환일 따름이다. <춘·하·추·동>과 <역·서·시·춘추>로부터 시작된 하늘과 인간의 네 국면은 그 순서대로 생(生;낳고), 장(長;자라고), 수(收;수렴하고), 장(藏;저장한다)하는 사이클을 가지고 2배수씩 분할된다(가일배법). 그렇게 분할되어 낳은 것 중에는 <인·의·예·지> 같은 윤리적인 이치도 있고, <문왕·무왕·주공·소공> 같은 역사적 인물도 포함된다. 
 
소강절의 수는 양을 측정하는 산술적 숫자가 아니라 시간적 순차와 공간적 질서를 설명하는 질적인 수이다. 때문에 ‘4’라는 수 안에는 서로 다른 사계의 시간적 패턴(129,600년 Vs 1년)이 공존하기도 하고, 자연현상과 문명적 사건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그것은 수와 관련된 중국적 사유의 전제 때문이기도 하다. 네 가지로 묶인 현상이나 사건에는 ‘4’수가 가지고 있는 특징, 즉 사시(봄여름가을겨울)와 사방(동서남북)의 시공간적 패턴이 내재되어 있다는. 그래서 숫자가 예언의 도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숫자는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해 낼 수 없는, 예컨대 자연법과 문명현상 사이의 인과를 간단하게 연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예지력은 ‘초월적 능력’이라기보다, ‘숫자’와 숫자 사이에 있는 자연의 이치를 읽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이에서 본다는 것
 
사물은 관찰자가 발견하게 될 징후와 기미를 내재하고 있다. 사물 안에는 이미 우주의 운명이 저장되어 있고, 관찰자는 사물이 놓인 사건 안에서 그 운명의 징조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사물을 통해서도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소강절은 사물의 관찰을 통해 미래를 예견했다. 그의 유명한 일화 중에, 천진교에서 두견새를 보고 “남쪽의 선비가 재상이 될 것이며 이로부터 세상이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하여 왕안석의 등장을 예견했던 일이 있다. 남쪽에 있어야 하는 새가 북쪽으로 왔으니 이를 통해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음의 벡터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벡터가 정치세력의 몰락이라는 징조와 기미로 작동한 것인데, 이 예견도 두견새와 관련된 기이한 상황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물의 관찰을 소강절은 ‘관물(觀物)’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사물의 관찰, 즉 관물(觀物)이 이와 같은 징조와 기미를 포착할 수 있으려면 편견의 주체인 ‘나’의 판단을 소거해야 한다. 그래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소강절은 “나로써 사물을 보(以我觀物)지 않고, “사물로써 사물을 보기(以物觀物)(관물내편)를 강조한다. 사물로써 사물을 본다는 것은 ‘나’와 ‘물’ 사이의 경계를 제거하여 ‘나’를 물 속에 깃들게 하는 동시에 물이 스스로의 이치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나와 물 사이의 이러한 연접으로 ‘나’는 우주만물이 되고, 내 마음의 움직임은 곧 천지자연의 변화와 다르지 않게 된다는 사유의 확장에 이르게 된다. 이는 가일배법에 의한 심법의 이치와 같다. 
 
결국 본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일인 동시에 대상과 외부를 함께 통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이를 잘 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이를 본다는 것은 그 사이를 잇는 연접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소강절의 예지력도 그 사이의 연접을 통해서 터득된 것이다. 연접은 확장을 낳는다. 연접되는 순간 대상과 외부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대상은 우주가 된다. 따라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우주를 보는 것과 같아진다. 이로써 대상에 한정되어 있던 편견과 아집 그리고 분별심이 소멸된다. 

 
사이를 잘 봐야 한다
 
 
그것은 인간과 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며, 또한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유위와 무위가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고, 후천과 선천이 연접해서 만들어지는 넓은 대지 위에 서는 일이기도 하다. 거기엔 좁은 길을 벗어난 자의 자유가 있다.
 
눈앞의 길은 모름지기 널따랗게 만들어야 하느니, 길이 좁으면 자연 몸을 둘 곳이 없네. 하물며 사람들을 다니게 하는데 있어서는 어떻겠는가!-『송원학안, 백워학안』
 
‘황극경세서’에서는 수많은 연접과 끝없는 확장을 시도한다. 상(象), 수(數), 소리(聲音), 문자 등 인간의 모든 언어가 연접의 매개로 사용된다. 이 매개들은 이 마치 뉴런의 시냅스회로처럼 수없는 연접을 이루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길에 이르는 정확한 회로도는 없다. 그래서 난해하다. 그렇지만 그 불친절함은 오히려 각자가 회로의 생산자임을 환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연접과 확장의 가능성만을 믿고 스스로 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나와 대상을 연접하고 대상과 외부를 연접함으로써 내가 물(物)이고 또한 우주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영원한 과제인 삶과 운명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면 삶에서 분별되는 길과 흉, 선과 악, 좋음과 싫음 사이가 연접되는 지점에서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확장될 테니까.

덧달기 - 성음율려와 이천격양집
 
황극경세서라는 말은 “지극히 크고(大) 지극한 중심에 있으며(中) 지극히 바르고(正) 지극히 변화한다(變)는 뜻이다. 소강절은 그 안에 천지의 수(數)를 역리(易理)를 이용해 나열하고, 요임금으로부터 당말, 오대에 이르는 역사 연표를 기록했다. 황극경세서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성음율려편’이다. 성음율려는 성음학에 관한 이론이다. 이 성음학은 소강절의 부친인 소길로부터 내려온 중국음운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소강절의 독특한 상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음운학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소강절은 율려와 성음의 수로써 동물, 식물, 날짐승, 들짐승의 수를 탐구하여 천지만물의 이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 속에는 복희와 공자, 천도와 인도가 수리(數理)로 엮이며 변화한다. 
 
“만물은 성색기미(聲色氣味), 즉 소리와 색과 기와 맛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오직 소리만이 글로 구별할 수 있다.”(성음율려론) 소강절은 그 분류의 기준을 고대 중국의 성조변화인 ‘평상거입’으로 삼았다. 이 또한 네 가지 수로 분화되는 바, 소리도 소강절의 역리(易理)로 해석될 수 있다. 더구나 소리는 천지인을 가장 잘 연결할 수 있는 매개이다. 소리가 발생하는 진원지는 다 다르지만 밖을 나온 소리는 천지인 사이에 섞여 경계 지을 수 없는 흐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밖에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고양이가 우는 것인지 애기가 우는 것인지, 혹은 바람소리인지 휘파람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본다고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무를 스치는 저 바람소리는 하늘이 내기도 하고 나무가 내기도 한다. 그냥 섞여서 흐를 뿐이다. 그러니 소리만큼 천지인을 아우를 수 있는 것도 없다. 
 
따라서 소리를 수리적 이치로 잘 구성하면 특정한 소리를 내는 사물 혹은 사람의 운명이 어떤 리듬을 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소리를 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기운과 운명이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옛 선비들은 우주적인 공부를 한 것이 아닐까. 그들이 책을 볼 때는 항상 소리를 내서 읽었으니 말이다. 글공부가 곧 소리 공부인 셈이다. 책속의 지혜들을 눈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소릴 통해 우주와 교감한다. 그래서 소리 내서 읽으면 지혜를 소유물로 축적시키지 않고 타자 속에 섞여 흐르도록 할 수 있는 신체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옛 선비들은 혹 소강절이 펼친 성음학의 원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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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극경세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천격양집’이라는 또 하나의 저서가 있다. 이천격양집은 시집이다. 황극경세서는 추상적 세계를 수리로 객화시킨 고도의 구조적인 사유체계다. 반면 시는 대상을 주로 주관적인 감정 속에 녹여내는 글이다. 그래서 황극경세서와 이천격양집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얼핏 떠올리기에도 수학과 문학이 썩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소강절에게 이 둘은 서로 통한다. 그에게 시는 사사로운 감정을 담은 위안의 노래가 아니라, 인간의 삶으로 펼쳐진 천지의 울림이었다.
 
 하늘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을 뿐,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네. -이천격양집』
 
‘관물’, ‘선천’ 등 황극경세서의 철학적 개념들이 이천격양집에 등장하는 것도 역시 그의 시가 수리론과 연결된다는 뜻이다. 주자가 “소강절 학문의 골수는 황극경세서이고 그 정화로움은 시에 있다”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과 통한다. 개념적 수리는 시의 구체적 현장으로 펼쳐지고, 시적 언어는 다시 수의 이치로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황극경세서와 이천격양집도 선후천의 논리와 통한다. 선천과 후천이 서로 맞물려 이어져 있으니까 말이다.

댓글목록

약선생님의 댓글

약선생 작성일

존경하는 도담샘의 글을 요로코롬 게시판에서 보니, 너무 너무 좋아요~~*^^* 언제면 <황극경세서>를 읽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샘 글로라도 접할 수 있으니 기쁩니다. ㅋㅋㅋ

도담님의 댓글

도담 댓글의 댓글 작성일

ㅎㅎㅎ 약선생님. 여기서 봐도 반갑습니다. 뭐라 답글을 달아야 할지... ㅋㅋ 반가움과 민망함함이 밀려듭니다. 금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