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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베네딕트가 만난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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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경아 작성일13-06-04 22:09 조회5,9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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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딕트가 만난 거울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임경아(감이당 대중지성)
 
 
일본.jpg
 
이 책이 고전인 것은 저자의 지적인 명확함, 그리고 유려한 문체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난해한 용어를 쓰지 않고 복잡한 사상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을 지닌 작가였다. 문체는 그의 사람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베네딕트는 훌륭한 인간성과 영혼의 관대함을 지닌 작가였다.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 하더라도 전쟁 시기에 씌어진 가공할 만한 적에 대한 묘사인 이 책이 오늘날 읽어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내가 읽고 만난 일본, 김윤식, 그린비, 512p
 
유럽인 인류역사학자 이안 부르마가 <국화와 칼>이 고전인 이유를 말한 부분이다. <국화와 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6월 미국부무의 위촉으로 적국 일본에 대해 연구한 역작이다. 다양한 자료조사와 함께 적국에 대한 매우 비상한 관대함을 갖고 일본 문화에 대해 연구한 흔적이 내용 곳곳에 드러난다. 학자로서의 성실함과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유려한 문체로 드러났기에 고전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일본 연구에서 ‘거울’을 찾아냈고 그것에 자기의 영혼을 비추어 보았다. 이것이 그녀 특유의 ‘문체’이다. 그 거울은 본래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 잠시 잊었던 거울이었다.
 
─ 같은 책, 545p
 
이안 부르마의 해석에 더해 역자 김윤식 선생은 이 책에 베네딕트 특유의 문체가 나타난 이유가 그녀가 일본 연구에서 찾아낸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춰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화와 칼>을 고전으로 만든 베네딕트의 유려한 문체에 빛을 더해 준 것이 일본의 ‘거울’이라는 김윤식 선생의 해석은 독특했다. 문체가 사람됨을 반영한다는 것도, 다른 문화를 연구하면서 만난 거울에 저자 자신을 비춰보았다는 것도 모두 흥미로웠기에 그녀가 만나게 된 일본. 그리고 그 안의 ‘거울’을 보고 싶었다.

삶에 희생은 없다! 단지 온을 갚을 뿐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미국인과 일본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비교한다. 여기서 미국인의 삶에 대한 해석은 현재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반면 당시 일본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뭔가 우리와 다른 사고, 행동 패턴을 가진 사람들이 보인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 그 생애를 희생하고, 남편은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한다는 것이 표준적인 서양인의 신조이다. 미국인에게는 자기희생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의 부모는 인정으로서 당연히 아이를 사랑하고, 여자는 다른 어떤 생활보다도 결혼생활에 들어가기를 바라며, 일가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자는 사냥꾼이든 정원사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자기희생이니 뭐니 하는 말을 입에 담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사회가 이런 해석을 강조하고 사람들이 이런 해석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자기희생의 관념은 인정되지 않는다.<중략> 그들은 우리만큼 생활의 불만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또 우리만큼 자주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일도 없다. 이런 현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로 하더라도, 그들은 미국인의 이른바 ‘남들과 같은 행복(average happiness)’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을유문화사 307p

누군가 우리에게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묻는다면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행복한 삶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때 행복이란 30평대 이상의 아파트, 중형차, 고소득의 자상한 남편,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표상되는 중산층의 삶이다. 저자 베네딕트는 이러한 것을 ‘남들과 같은 행복(average happiness)’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어느 정도 규격화된 행복을 얻기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도 가정에 편입되어 하는 모든 일은 ‘희생’이라고 일컫는다. 표준화되어 있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자신은 희생한다고 말하고, 종종 그 희생으로 인해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행복한 가족.jpg
 
반면 일본인들은 이 책 제5장 제목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들’ 이라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조상과 동시대인의 온(恩惠) 덕분에 존재한다. 태어남 동시에 세상에 자동적으로 채무를 진다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 자체가 부채이기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채를 갚기 위해 다양한 의무들을 다하는 것이다. 그 의무들은 아무리 갚아도 도저히 다 갚을 수 없는 주(忠), (孝) 등의 기무(義務)부터 자신이 받은 수량만큼만 갚으면 되는 기리(義理) 등이 있다.
 
작가의 비유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돈을 빚졌을 때 그 빚을 갚기 위해 어떠한 고난을 겪어도 그것에 자기희생이라는 관념을 덧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역경을 이겨내고 채무이행을 완수하면 고결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일본인도 과거와 세상의 은혜에 빚을 갚는 것이 인생 최고의 임무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여기에 자기희생의 관념은 인정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채무변제를 당연시하는 일본의 도덕률은 개인적 욕망이나 쾌락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욕망의 주인 되기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일부러 함양한 후에, 엄숙한 생활양식에서는 쾌락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을 제정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쾌락을 충분히 맛보았을 때 의무를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
 
─ 같은 책, 240p
 
일본인은 온욕, 수면, 식사, 연애 혹은 성적 향락 등을 인정(人情, human feeling)이라고 표현하고 이것들을 즐긴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무나 기리를 수행하는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단지 때때로 기분전환을 위해 탐닉하는 정도여야 한다. 인정은 선악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영역이 아니다. 그것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방식의 윤리는 작동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쾌락 등에 휘둘리거나 굴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두더지 잡기.jpg인정이 기무나 기리의 영역을 침범할 경우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처럼 무자비하게 그 두더지를 때려서 자기 자리로 돌려 놓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두더지를 때려 넣기-개인적 욕망이나 쾌락을 가차 없이 희생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절제와 고통을 겪어내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때문에 일본인은 온욕을 중시하는 만큼 신체적 단련으로 냉수욕을 전통적으로 시행해 왔다. 평소에는 실컷 자는 것을 기꺼이 용납하지만 군대 교육에서는 훈련을 위해 가차 없이 잠을 희생해야 한다고 여긴다. 마찬가지로 요리는 맛뿐 아니라 외관으로도 즐기지만 필요시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견디는 것도 단련의 한 방법이다. 이런 자기 훈련은 일본에서 채무변제를 제대로 해내기 위한 과정이기에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때문에 여기에 자기희생이라는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저자는 이것을 운동선수가 자기 훈련을 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인정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 인생의 목표인 기무를 다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자기 훈련을 강조하는 것. 결국 자기 훈련은 실질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자기희생이나 억제라는 말이 들어서지 않는다는 것. 이것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 ‘자기배려’와 많은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스인들의 자기배려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욕망과 행위를 배분, 조절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르게 처신하고 실천하는 것이며, 자신의 욕망을 지배하는데 필수적인 태도로 간주되었다. 즉 그들은 욕망을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부끄러워했다. 이를 위해 철학을 통해 스스로를 부단히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평정심 잃지 않기
 
자기훈련의 달인이 도달하는 숙달의 경지는 ‘무가(無我)’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무가에 닿아야 외부의 신체적 위험에도 내부의 격정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게 된다. 그럴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힘을 유효하게 사용하여 기무를 자연스럽게 수행할 수 있다.
 
아무리 검술을 잘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능력’의 영역에 속하는 사항이다. 그는 그 위에 다시 무가(無我)가 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는 우선 처음에는 평평한 바닥 위에 서서, 그의 몸을 받치는 겨우 몇 인치의 바닥에 정신을 집중하도록 명령받는다. 그는 아주 좁은 발판을 점점 높여 마침내 1미터 높이의 기둥 위에 서 있어도, 마치 뜰에 서 있는 것처럼 태연히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때 비로소 그의 마음은 현기증을 느끼거나 추락의 공포를 품어 그를 배반하는 일이 없게 된다.
 
─ 같은 책, 322p
 
이와 같이 무가의 상태가 되어야 두려움이나 공포가 스스로를 배반하는 일이 없어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게 된다. 평정심을 유지할 때 어떠한 긴장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사건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신체에 각인이 되어야 가능한 것으로, 훈련 방법으로는 주로 명상, 자기 최면, 정신 집중, 오관 제어 등의 선불교 수행법이 사용된다. 이런 수행법이 가지고 있는 불교적 색채는 일본인의 기본 사상에서도 볼 수 있다. 즉 나의 존재 자체를 조상과 동시대인의 채무라는 그물망 속에서 인지해야 하는 일본인의 사유는 ‘나’는 ‘나’ 아닌 무수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는 연기론(緣起論)과 닮아있다.
 
선수행.jpg

하지만 선불교 수행법의 형식만 빌려왔을 뿐, 일본인이 무가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모두 집중하는 태도를 기르겠다는 지극히 현세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 훈련을 통해 해탈을 하고 윤회에서 벗어난다든지 혹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획득하는 등의 목표는 없다.
 
지극히 현세적인 모습, 훈련을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평정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 이것들은 또 다시 그리스인들의 자기배려와 겹쳐진다. 무가와 마찬가지로 자기배려를 위해 그리스인들은 철학을 통해 사유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이 때 기본은 경청과 독서와 글쓰기다. 이것들은 모두 사유의 자기화 훈련으로 앎을 신체에 새기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에 이르러야 인생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 불행, 불운, 몰락 등을 품위 있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무가의 삼매경에 이르지 않으면 기무와 기리사이, 기리와 인정 사이에서 매번 어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두려움의 상태에 처한다. 때문에 올바른 기무를 행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 외부의 평가에 의존하며 무거운 돌을 매달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그러나 거듭된 자기 훈련을 통한 무가의 상태에서 그들은 온갖 의무들 사이. 그리고 그 의무들과 인정 사이에서 한 갈래의 길을 발견하게 되기에 평온한 마음으로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거울을 통한 숙달

일본인의 자기수양은 일종의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어내는 것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본래 번쩍이는 칼로 태어나는데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것이다. 칼과 마찬가지로 ‘거울’도 일본인이 즐겨 사용하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거울 속에 비추어지는 자신은 본원적으로 선량하다. 그 거울 속에 보이는 ‘나’가 숙달을 통해 닿고자 하는 모습인 것이다.

일본인의 삶에서는 기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 훈련 양식들을 조사하면서 ‘숙달’과 ‘거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거울에 비춰지는 마음의 본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지와 행동 사이에 어떤 걸림도 없는 숙달이라고 보았다. 이 때 삶의 준거는 수치심이나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이라는 외부의 잣대가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갖고 있는 마음의 본체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일본인은 타인의 평가를 기준으로 행동방침을 정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점점 탐사를 계속해 가니 일본인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잘 비춰서 그에 따라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거울 속에서 영혼의 문인 자신의 눈을 본다. (중략) 이 목적을 위해 언제나 몸에 거울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자신의 영혼을 반성하기 위해 집안의 불단에 특별한 거울을 놓아두는 사람도 있다.
 
─ 같은 책, 322p
 
인간의 본성은 선(善)이다. 그런데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칼과 같이 조금만 수양을 게을리 하면 본성이 가려진다. 때문에 매순간 자신의 본래 마음을 쓰기 위해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 붙들리지 않도록, 권력, 재물 등의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 그리하여 매순간 사건들의 현장 위에서 마음의 바름을 얻어서 기무수행을 올바르게 하는 것. 이것을 위해 일본인은 거울을 가까이 두고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되돌아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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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수양, 거울, 숙달 등은 저자 베네딕트가 교전중인 적국의 문화를 편견 없이 연구하려 노력했기에 볼 수 있었던 것들이다. 같은 문명국인데도 미국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일본을 연구하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이 속해있는 평균적인 미국인과는 다른 삶.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 지점에서 그녀는 지금 우리가 당연시 하는 삶의 전제들이 과연 그러한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건 아닐까? 그러한 물음이 있었기에 공동체에 대한 의무 수행, 자기 수양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일본인에게 자기희생의 관념이 없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고 깊이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베네딕트는 당시 미국 사람들이 최고 가치로 여겨는 표준화된 행복과 그 행복을 추구하면서 누구나 자신을 희생한다고 여기는 지점이 불편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지점이 있었기에 일본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자기 수양 방식에 매력을 느끼고 그들의 거울에 그녀 자신을 비춰볼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그녀는 다른 문화에 대해 편견 없이 성실하게 연구하는 인류학자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여기에 다다르기 위해 그녀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을 것이고, 그 덕분에 이 책 <국화와 칼>은 고유의 문체를 가진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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