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이 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감성에세이

감성에세이

홈 > 커뮤니티 > 감성에세이

너 자신이 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임수 작성일13-06-11 01:53 조회6,680회 댓글1건

본문


 
   너  자신이 되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송미경(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1.니체의 독자가 된다는 것

 
책표지5.png 이 책을 읽는 것은 당혹스럽다. 이렇게 불편하게 우리 삶을 공격하는 책을 만나기도 쉽지않다. “책은 우리 내면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카프카)”고 믿는다면, 그런 책을 만나는 고통과 기쁨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이 바로 니체의 이 책이다. 니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직격탄에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 할지를. 그래서인지 책을 출간할 당시에 니체는 스스로 이 책을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하면서도 쉽게 자신이 독자를 만나리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백년만 기다려 보자고 했으며, 아마 그때까지는 자신의 철학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철학이 되리라 예측했다. “모든 이를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이 책의 부제는 이런 정황에 대한 예언적 발언이다. 그는 책, 지성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가진 철학자였다. 철학이 건강한 삶을 위해 있어야한다고 믿었기에 그의 철학은 병든 삶을 치유하는 의학이고 생리학이고 심리학이 되었다. 자신의 삶과 병과의 치열한 고통의 대결 속에서 심오하게 고양된 고결한 삶을 만드는 것, 위대한 건강을 찾아내는 것이 그가 그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그것은 그의 책이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이 작품을 온몸과 삶으로 쓴다고 밝혔다. 그의 이 글 또한 그의 삶과 사색이 담긴 피로 쓴 글이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읽히기를 바라지 않고 암송되기를 바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中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책세상, 20쪽
 그는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적거리는 자들을 미워한다. 또한 남이 써놓은 글에 빌붙어 사는 인간도 경멸한다. 이런 어리석은 자만큼이나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도 더욱더 싫어한다. 그는 시시한 독자 따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독자를 넘어선 독자, 피로 쓴 글에 걸맞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싶다. 그러기에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와 커다란 전쟁을 벌이는 일이고 존경할만한 적이 되거나 친구가 되는 일이다.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그의 말대로 그의 책읽기가 자신을 극복하려는 자기와의 싸움의 전쟁터가 되고, 그런 과정에서 건강한 자기 자신의 삶을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차라투스트라로 탄생되기를 바란다.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세계를 본 사람이다.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했지만 오랜 경험으로 도덕의 오류를 최초로 인식한 자로 도덕이라는 기존 가치를 극복하고자 했던 니체의 염원이 반영된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의 가치를 질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싸워나갔던 반시대적인 철학자 니체는 인간 세상을 향해 낚싯줄을 던졌다. 그리고 온갖 지혜의 말을 미끼삼아 그의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기꺼이 낚이기를 고대한다. 그에게 낚이는 용기를 가지기를!

 우선은 그의 독자가 되어 그의 고독감을 느껴보는 일부터 시작해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정신없이 다 부정하고 다 부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부정과 파괴 끝에 비장함이 주는 피로감이나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며 세상을 끌어안게 된다. 이렇게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가다보면 어느새 위대하게 건강해져서 삶은 고양되고 경쾌해지며 인생은 심오해지고 고귀해지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이다.
 
 
2. 인간의 죽음을 말하다

  차라투스트라가 서른의 나이에 지혜를 찾아 산속에서 10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후 인간세상으로 와서 맨 처음 외쳤던 말은? 그것은 위버멘쉬였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 말했다』中 차라투스트라의 머릿말, 책세상, 16쪽
고뇌.jpg
 그는 인간을 대지의 질병이며 역겨운 존재로 본다. 그리고 부끄러운 인간의 역겨운 본성을 극복하려는 위대한 경멸이 필요하다고 한다. 왜 인간은 병들었으며 역겨운 존재인가. 인간과 대지를 허무감으로 병들게 한 것은 신이라는 저편의 존재이다. 본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저편의 다른 세계를 만든 것은 고통과 무능력,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덧없는 행복에 대한 망상이라고 한다. 빨리 이 지상의 고통과 불행한 상황을 벗어나보려는 병든 자와 죽어가는 자들의 피로감이  신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을 생각해냈다고 본다. 무력하고 약한 그들은 대지와 신체를 부정하고 저 세계를 동경하면서 원한의 감정으로 세상을 본다. 삶의 고통이 죄가 되고 그 고통은 자기 잘못이라는 양심의 가책을 덧씌운다. 무력감이 선량함으로, 겁 많은 비겁이 겸허로, 힘없는 자의 비공격성이 인내로, 복종이 순종으로 오역된다. 이렇듯 저편 세계의 존재는 삶의 가치를 바꾸고 인간 능력과 대지의 삶은 무력해진다. 저편의 다른 세계가 없어져야 대지의 삶이 살아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아직도 신의 세계에 매달려 사는 왜소한 인간들에게 또 신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다시 삶이 불안해지면 신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신의 죽음’을 말한다. 신의 죽음은 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끌어낸 약한 인간의 속성의 소멸을 말한다. 동시에 약한 인간속성을 극복하고 삶을 회복할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말한다. 이렇듯 차라투스트라의 ‘신의 죽’에 대한 선언은  대지의 질병으로서의 인간의 죽음’이며 자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건강을 회복하는 새로운 인간, ‘위버멘쉬의 탄’과 연결되어 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신을 대신할 국가라는 우상이 새로이 등장한다. 국가에는 권력과 돈이라는 가치도 붙어있다. 근대의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이 새로운 가치들 또한 삶을 병들고 왜소하게 만든다. 보편적 가치라는 민주주의와 법 앞에 평등이라는 가치도 권력과 자본이라는 외부의 가치를 신봉하는 노예로서의 인간의 모습이고, 평등에 대한 욕망은 자기보다 더 고귀한 자의 수준을 끌어내려는 왜소한 약자의 욕망일 뿐이다. 이 허구적인 가치들을 자신의 삶의 모토로 삼아 돈과 권력, 쾌락, 명성을 추구하는  천민과 노예근성에 젖은 잡것들이 바로 근대인간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멋있게, 가장 오래, 가장 편안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 왜소한 덕을 지닌 천민같은 인간들에게 고귀하고 건강한 삶을 찾을 지혜의 첫단계는 이렇듯 그동안 진리라 믿고 도덕이라 받들었던 가치들이 도리어 소중한 삶을 망가뜨리고 인간을 대지의 질병으로 만들었음을, 신(국가)의 죽음이라는 지혜의 메시지로 알려준다. 이런 가치를 부수지 않고 인간의 삶이 회복될 가능성은 없기에 저편(외부)의 가치 대신 대지에 충실하라고 한다.
 
 
 3. 나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라

 차라투스트라는 신, 국가 등 외부의 척도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의 삶이 너의 것인지, 네가 믿고 있는 가치가 누구의 가치인지를 질문한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가치판단에서 일체의 외부적인 척도를 내려놓고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의 여부를 자신에게 두지 않고 타자에게 맡기고 타인의 평가대로 살아가는 한 자기를 알 수 없다. 자신에게 좋은지 나쁜지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취향을 알아야 한다. 취향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러니 삶을 무겁게 끌어내리는 죄라는 것도 양심의 가책 따위도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기준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보편적 인식인 선악을 넘어서는 게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에는 선과 악이라 불리는 진부한 망상이 있을 뿐이다고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기준에 적합한지 아니지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초점을 두어야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삶이란 취향과 기호를 둘러싼 싸움일 뿐이다며 타인(사회)의 취향이 아니라 나의 취향을 찾으라 한다.

니체2.jpg
 나란 뭔가? 차라투스트라는 자기의 신체가 곧 자기이다고 한다. 자기라는 커다란 신체에 감각과 정신 그리고 정서들이 있어서 서로 경쟁하고 있다. 신체란 한마디로 이런 복합적인 힘들이 역동적으로 경쟁하는 곳이며 어떤 힘이 잠정적인 우세를 보일 때 그것은 그때의 정체성이 되고, 또 다른 계기에 의해 이 힘들의 관계가 변하면 정체성도 변하게 된다. 그래서 그 힘의 우세에 따라 가치나 기준도 변하게 된다고 본다. 순수하게 정신적인 문제란 없으며신체를 떠난 문제는 없다. 건강한 신체가 정직하며 순수하게 말을 하기 때문에 건강한 신체에서 울리는 음성에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그동안 신체는 철저히 무시받아 왔다. 특히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신체를 죄악시하기까지 하면서 경멸했다. 정신이나 영혼은 신체의 한 부분이고 신체의 도구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진리의 영역을 독점해왔다. 그러니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저편의 망상 대신에 자기존재의 기반인 대지에 충실할 것을, 세상의 선악 대신에 자신의 취향을, 정신의 망상 대신에 자기 자신인 신체를 잘 보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한 신체로서의 자신에 대한 앎이 먼저이기에 자기 속의 여러 속성들, 쾌락이나 지배욕, 이기심을 시선을 타자에게 돌리는 이웃사랑보다 더 중요한 미덕으로 본다. 자기의 가치를 만드는 행위는 자기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한다. 
 
3. 끝없이 몰락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질병이 되어버린 인간들에게  신의 죽음을 알리고 스스로 고귀한 자가 되는 길인 위버멘쉬를 알려준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위에 걸쳐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 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있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中 차라투스트라의 머릿말, 책세상, 20쪽
 
줄3.jpg
 이 말과 겹쳐지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지혜를 말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와 시장터에 처음 나왔었을 때 마침 써커스가 벌어진다. 이 때 외줄을 타는 광대를 넘어버린 익살꾼의 에피소드는 자기극복이라는 것이 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익살꾼은 타인(광대)을 넘어섬으로써 자기존재를 드러내는 자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은 미리 줄을 타고있던 광대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결국 광대는 줄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게 된다. 반면 광대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려는 자이다. 같은 자리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한 순간순간에 집중해서 흔들리는 줄 위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한 발 더 자리를 옮기려는 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자신이 교량이 되어버린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려는 자, 현재를 극복하는 자, 광대는 교량으로서의 인간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에 차라투스트라는 떨어져 죽은 그를 최초의 동료로 삼아 묻어주게 된다.
암벽.jpg
 
심연.jpg
위버멘쉬의 의미를 위의 광대를 통해 보자면 위버멘쉬는 다른 사람을 뛰어넘는 자도 아니고 더 차원이 고양된 인간도 아니며 오직 자기 스스로를 극복하는 인간이다. 위버멘쉬란 어떤 목적지점이 있고 수퍼맨의 탄생같은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현재를 넘어서 다른 존재로 변신하려는 끊임없는 몰락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며 이 과정 속에서 높아지고 깊어져 다른 존재로 되어가는 변신의 과정이다. 즉 인간을 너머선 존재를 의미하기에 이전의 자기몰락이 필수적이다. 몰락이란 자기부정이다. 물론 이때의 자기부정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기고양의 방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몰락이 일회로 그치는 게 아니라 수없이 반복된다라는 점이다. 반복되는 상황에서 인간이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면 위버멘쉬로 가는 밧줄, 즉 과정일 때만이다. 도달하면 밧줄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듯이 이때까지의 인간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몰락이다. 이 몰락이 계속 반복되고 인간은 계속 사라진다. 그래서 자기를 극복하는 과정 즉 삶의 현재성만이 계속되고 남는다. 인간은 사라지고 삶은 남는다. 인간은 자기부정이라는 몰락을 계속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삶은 구원된다는 위대한 발견, 몰락의 역설!
 
 물론 몰락은 결코 쉽지않다. 차라투스트라를 만나 구원을 꿈꾸었던, 평균 이상을 넘는 보다 지체높은 인간들도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경멸, 위대한 경멸을 갖추고도, 나귀제에서 보여주듯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만다. 위버멘쉬한다는 것은 자기를 넘어선 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기꺼이 몰락을 욕망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때 몰락은 자발적이다. 자신의 삶을 높게 끌어올리려는 변신의 욕구와 새로움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용기라는 자기결단을 내야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자신의 가치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곳 대지의 삶을 부정적으로 이끌었던 허구적 가치들이 떨어져나가고 새로운 수많은 가치들이 생성된다. 이렇듯 늘 몰락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며, 다른 새로운 삶을 만나러 안주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다. 삶을 평가하고 용기를 가지고 다시 자기의 삶을 만드는 것이다
 
 
4. 매순간 삶은 새롭게 시작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저편의 세계, 도덕의 세계라는 어두운 구름을 걷어내고 우연이라는 천진난만한 하늘을 열어보였다. 차라투스트라는 섭리도 목적도 심판도 지웠다. 진리도 정답도 의무도 없고 타인의 시선도 비교라는 무거운 삶의 장막도 거두워져버린 홀가분한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삶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한다. 만약 삶의 시작과 끝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원하는 것만 돌아오고 원치 않는 것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게 되거나 우연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사후의 구원을 꿈꾼다거나 하는 목적이 지배하는 세상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영원회귀로 삶은 피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연으로 다가오는 현재에서 늘 새로운 시작을 한다. 삶은 반복되지만 항상 새로운 생성과 차이가 있는 반복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새로운 차이가 과거도 미래도 바꾼다. 과거조차 현재를 관통하면서 새롭게 변화되고 미래의 흐름이 된다. 차이의 반복이 새로운 미래를 낳듯이 현재의 자신을 극복하고 다른 자기가 되려는 과정에 서있는 위버멘쉬의 존재는 기꺼이 우연의 순간을 삶의 소중한 현장으로 받아들인다. 늘 새롭게 시작되는 삶이 있기에 한번만 더!를 외치며 시도하는 일이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자유.jpg


  차라투스트라는 질문한다. 무엇이 대지의 삶을 빈곤케 하고 인간을 병들게 했는가?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를 모색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극복을 통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을 구할 길을 먼저 갔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깊어지고 높이 고양될 수 있는가에 있었다. 외부의 가치, 타인에 대한 동정 등 외부의 시선을 모두 끊은 채 정직하게 철저히 자신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고독해졌다. 그는 고통 속에서 심오함이 생겨나고 병에서 위대한 건강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지의 질병으로서의 인간은 위대한 건강을 되찾고 고귀한 삶, 심오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자기몰락의 고통 속에서 병적이고 왜소한 인간에서 벗어나려는 자기극복을 통해 인간은 질병의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딛고 위버멘쉬의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인 ’인 것이다. 이것이 그가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격정적인 구도의 길을 간다. 니체의 끝없는 자기몰락의 삶의 여정이 그랬듯이, 즐거운 몰락의 길이다.
댓글목록

오우님의 댓글

오우 작성일

우연을 삶의 소중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끊임없는 자기 몰락을 통해 '나 자신이 아닌 나'기 된다는 ~~  아우^^ 다들 왜 그렇게 짜라짜라 하면서 이 책에 영향을 받는지를 엿볼수 있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