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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국화와 칼』-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김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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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6-12 21:42 조회6,449회 댓글1건

본문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루스 베네딕트『국화와 칼』-
 
김정안(감이당 대중지성)
 

들어가며

국화와 칼.jpg

루스 베네딕트는 1944년 6월 일본에 대한 연구를 위촉받는다. 미국이 여태껏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중에서 가장 낯선 적-일본인이 어떤 국민인가를 해명하기 위해서. 베네딕트는 문화인류학자로서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일본인의 사상, 감정, 습관, 행동의 패턴을 연구했다. 이 연구의 결과가 바로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연구를 의뢰한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인 스스로도 놀랄 만큼 일본 민족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 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탐미주의를 숭배하는 국민에 관한 책을 쓸 경우, 동시에 이 국민이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린다는 사실을 기술한 또 다른 책에 의해 그것을 보충하는 그러한 일은 일반적으로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는 날줄과 씨줄로 되어 있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인 것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인 것이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공격적이자 비공격적이며, 군국주의적이고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맞이한다.
 
─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8쪽
 
국화를 사랑하는 동시에 칼을 숭배하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모순된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민족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평소 일본인에 대해 한 가지 의구심을 가져왔다. 가미카제. 일명 ‘자살특공대’라 불리는 이들의 행동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 두렵다. 아무리 국가를 위한, 동아시아의 공동 평화를 위한 명분의 전쟁이라고는 하나 전쟁에 끌려가는 것 자체가 두렵다. 그런데 일본인은 기꺼이 자청해서 참전을 하고,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폭탄을 안고 뛰어든다. 스스로 폭탄이 되어 적진을 파괴한다. 이건 뭔가?
 

가미카제[神風]
 
정신은 전부이며 영구 불멸한 것이다. 물질적인 사물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이차적일 뿐 영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라디오는 자주  “물적 자원에는 한도가 있다. 물질적인 사물이 1000년도 가지 못하는 것은 명료한 일이다.” 하고 외쳤다. 그리하여 이 정신에 대한 신뢰는 전쟁의 과정 속에서 문자 그대로 행해졌다. 그들의 문답서(問答書)는 “그들의 수효에는 훈련으로 맞서며, 강철에는 육탄으로 대항한다.”는 표어를 사용했다. 이 표어는 이번 전쟁을 위해 특별히 지어낸 것이 아니고 전통적인 것이다. 그들의 군인 수첩은 큰 활자로 인쇄된 ‘필독필승(必讀必勝)’이라는 문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의 소형 비행기로 아군 군함 속으로 뛰어들어 자폭하는 조종사들은 물질에 대한 정신적 승리의 교훈이 되었다. 이들 조종사들을 가미카제(神風)특공대라 부르는데, 가미카제라는 것은 13세기에 칭기즈칸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그 수송선을 전복케 하여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을 가리킨다.
 
─ 같은 책, 27쪽
 
죽음 자체도 두려운 나에게 스스로 비행기를 몰고 적의 군함 속으로 뛰어드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자폭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죽음에 대한 일본인의 독특한 태도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궁금했는데 『국화와 칼』을 읽고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본의 천황제 때문이다. 그들은 천황을 위하여 전쟁을 하고, 천황을 위하여 기꺼이 적진에 뛰어들어 자폭한다. 도대체 천황제가 뭐길래?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어떤 존재이길래?
 

천황은 누구인가

중국에서는 걸핏하면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한 번도 그러한 일이 없었으며, 프랑스 혁명 같은 것도 일본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 정도의 혁명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양에선 봉건제도가 자생하는 중산 계급의 힘이 점차 커진 때문이다. 이 중산 계급이 근대산업시대를 열었다. 일본에는 이러한 자생적이고 강력한 중산 계급이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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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의 선각자와 지도자들은 구중 구름 속에 깊숙이 은거하고 있는 천황, 따라서 그 풍모를 각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이상화하여 그릴 수 있는 천황에게 주(忠)를 바쳐야 되는 슬로건을 내걸고 1세기에 걸쳐 도쿠가와 막부와 싸웠다. 메이지 유신은 이 존왕파의 승리였다. 그리하여 1866년은 이 쇼군으로부터 상징적 천황에게 주의 전환을 실현시킨 해로서 천황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림자로 물러났다. 천황은 각하들에게 권력을 부여하였다. 스스로 정부나 군대를 지휘하여 그때 그때의 정치 방침을 지령하는 일은 없었다. 정신적 영역으로서 주가 최고 사제로서, 일본의 통일과 무궁함의 상징으로서 신성한 수장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가 되었다.

일본의 정치가들이 천황을 신성한 수장으로 받들고, 세속적 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함으로써 천황은 전국민을 통일하여 반감 없이 국가에 봉사하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필요하였다. 단순히 천황을 국민의 아버지로 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였다. 왜냐하면 가정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든 의무를 다하여 그 은혜를 갚기는 하지만, ‘대단히 존경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천황은 일체의 세속적 고려에서 떠난 신성한 수장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일본인의 최고의 덕인 천황에 대한 충절, 즉 주(忠)는 속세와의 접촉에 의하여 더렵혀지지 않는 하나의 환상적인 선량한 아버지를 무아경적인 정관으로 받들어야 한다.

근대 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천황에게 집중하도록 해 왔다. 이러한 일본인 특유의 생활 양식으로 그들이 은혜에 대해 품고 있는 모든 편애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황은을 증대시킨다. 전쟁 중 전선의 군인들에게 천황의 이름으로 나누어준 한 개비의 담배는 병사들 하나 하나에게 천황에 대한 은혜를 강조시켰으며, 출격에 앞서 병사들에게 분배해 준 한 모금의 사케[酒]는 다시금 황은(皇恩)에 깊이 감사하게 했다. 가미카제 조종사는 누구나, 일본인의 말에 따르면 황은에 보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의 어떤 섬을 방위하기 위해서 전원 남김없이 죽은 부대의 병사들은 모두 천황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온(恩)을 갚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무[義務]와 주[忠]

전쟁터에서 피는 담배 한 개피, 마시는 술 한 잔이 모두 천황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일본인.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천황을 위해 죽는다. 내가 누리는 아주 작은 삶의 기쁨을 그들은 어째서 모두 천황의 은혜라고 생각할까? 그리고 그 천황을 위해 그들은 왜 가장 소중한 목숨조차 기꺼이 바칠까?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이러한 태도의 배경이 되는 사상을 ‘기무(義務)’로 설명한다. 일본인들은 이 삶을 ‘빚지고, 빚갚는’ 거대한 채무관계의 순환으로 본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조상들의 은덕이며 나의 삶은 이러한 은덕을 갚는 과정이라는 인식. 이때 조상의 상징적 표상이 천황이다. 그러니 일본인들에게 자신이 살아 숨쉬는 것은 모두 천황의 덕이므로 천황을 위해 죽는 것으로 이 은덕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은 생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가미카제는 일본인들의 바로 이러한 인식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갚음은 기무(義務)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이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양친에 대한 보은인 고(孝)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忠)라는, 의무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형태를 함께 배합하고 있다. 기무라는 이 두 개의 의무는 강제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일본의 초등 교육은 기무 교육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정말 적절한 명칭이다. 이 말처럼 유감없이 ‘필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우발적 사건들이 어떤 사람의 기무의 세목을 수정하는 수는 있으나 기무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짊어지워진 것이며 일체의 우발적 사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  같은 책, 108쪽
 
조상 숭배라는 것은 조상들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체에 대해서 인간이 지고 있는 큰 채무에 대한 의식이다. 부채를 지고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매일 매일 접촉하는 것까지도 현재에 있어서 채무를 가중시킨다. 일상적인 의사 결정과 행동은 이 부채로부터 발생된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렇게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혹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단순한 사실 자체까지도 세상 덕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조상과 같은 시대인이 함께 포함되는 공동 채무의 거대한 망상 조직 속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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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자기 희생’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일본인은 주(忠)나 고(孝), 또는 기리의 부채를 갚기 위하여 ‘자진해서’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개죽음’이 된다. 개죽음이란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치 없는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미국인은 목적 달성의 필요 조건으로 ‘자유’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일본인은 ‘의무’를 강조한다.

천황에 대한 채무로서 일본인들은 황은(皇恩)을 무한한 감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즐거워해야 할 때에는, 언제나 동시에 이것들은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라고 느낀다. 일본 역사의 모든 시기를 통해 일본인들이 빚을 지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 속에 최고의 인간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그것은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지방 영주, 봉건 영주, 쇼군 등으로 변했다. 오늘날엔 그것이 천황이다. 그러나 윗사람이 누구인가보다 중대한 의의를 지닌 것은 몇 세기란 오랜 세월에 걸쳐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인의 습성 속에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습되는 것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의 가르침의 큰 부분은, 주(忠)를 최고 지상의 덕으로 삼는 데 할당되었다. 마치 정치가가 천황을 정점에 두고 쇼군 및 봉건 제후를 배제함으로써 계층 제도를 단순화했던 것과 마찬가지고, 그들은 또 도덕의 영역에 있어서도, 하위의 덕을 모조리 주의 범주 아래에 둠으로써 의무의 체계를 단순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전국을 천황 숭배 아래에 통일했을 뿐 아니라, 일본 도덕의 원자론적 상태를 완화하려고 했다. 그들은 주를 완수함으로써 다른 모든 의무를 수행한 것이 된다고 가르치려 했다.
 
그들은 주를 지도 위의 단순한 하나의 영역이 아니라, 도덕적 아치의 근본 원리로 삼으려 했다. 이와 같은 방책에 대한 최상의, 또 가장 권위 있는 표명은 메이지 천황이 1882년에 발표한 ‘군인에게 하사하신 칙유’이다. 이 칙유와 교육 칙어야말로 일본의 참다운 성전이다. 일본은 어떤 종교에도 경전을 용인하고 있지 않다. 신토에는 경전이 아예 없고, 일본 불교의 여러 종파도, 교외 별전이나 불립 문자라는 것을 교의로 하거나, 혹은 경전 대신에 ‘나무 아미타불’ 또는 ‘나무요법 연화경’이라는 문구를 되풀이하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단지 메이지 천황의 칙유와 칙어만이 참다운 성전이다. 그것들은 정중하게 예를 갖춰, 기침소리 하나 나지 않는 청중 앞에서 신성한 의식으로서 봉독된다.
 

나가며
 
인류학자로서 베네딕트는 유사점이나 차이점에서 일본인의 생활을 이해하는 단서를 얻었으며 많은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여러 민족 간에 발견되는 차이와 문화의 비교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어떤 문명국에 있어서도 인간의 행동이라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라는 전제와 어떤 고립된 행동도 서로 어떤 체계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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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인들이 묘사한 일본인의 성격적 모순과 이원성을 일본인의 아이를 훈련하는 방법을 가지고 설명한다. 유아기의 특권과 마음 편하던 경험에 의하여 그 후 여러 가지 훈련을 받은 뒤에도, 다시금 ‘부끄러움을 몰랐던’ 때의 편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미래에 천국을 그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천국을 과거에 지니고 있다. 인간은 본디 선하고 신들은 자애로우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비할 바 없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그들의 유년 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유아기의 경험은 모든 인간 속에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든가 인간은 누구든 죽음과 동시에 가미(神)가 된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끝까지 주장하는 경향과 어떤 종류의 자신감을 부여한다. 이것은 어떤 일이든 비록 그것이 그들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어려운 일인 경우에도 앞장서서 부딪쳐 나가는 태도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자기 나라 정부에 대해서까지도 반대의 입장을 취하여 싸우고, 자살에 의하여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것을 사양치 않는 태도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때로 그것은 그들에게 집단적 과대망상증에 빠지게도 한다.

『국화와 칼』을 보는 시각은 독자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국내 중앙일간지의 책 칼럼에서는 제목을 ‘칼을 숨긴 꽃 일본인의 이중성 해부’라는 이중성에 무게를 두다 보니 우리는 쉽게 일본 문화를 양면의 이중성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본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베네딕트가 일본의 특이성을 논하였던 것처럼 이 책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일본인에 대해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0장-덕의 딜레마, 11장-자기 수양 장의 내용을 읽으면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여러분도 일본의 특이성을 통하여 자신을 보는 기회를 갖기 바란다.
 
 
댓글목록

달집님의 댓글

달집 작성일

<임꺽정> 쓰셨을때 죽음에 대해 고민이 많으신 줄은 알았습니다.
그땐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국화와 칼>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샘의 모습이 보입니다.
구성이 잘 돼 있는 글에서 샘만의 특이성이 보입니다.
감이당에 와서 느낀 것은 모든 사람들이 글쓰기에 목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글쓰기는 모든 사람의 욕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에 대해 계속해서 밀고 나가셨으면 좋겠네요.
그것이 샘에게 가장 절실하게 질문하는 것이라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