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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樂記>, 자기 리듬 어떻게 생성할 것인가?
 글쓴이 : 동철군 | 작성일 : 13-07-01 02:28
조회 : 5,661  

지음(知音)의 수수께끼 
 
김동철(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중국 무협영화를 보면 일류 중고수들이 거문고 혹은 옥퉁소를 들고 들고 등장한다. 고수들은 하수들처럼 치고 받는 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차분히 자리를 펴고 앉아 거문고 줄을 퉁기고, 옥퉁소를 분다. 아주 우아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 기기묘묘한 음악이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은 정신이 아득해지거나 저마다 귀를 막고 미쳐버린다. 옆에 있던 부하들이 그렇게 난리를 치거나 말거나 고수 둘은 한바탕 연주실력을 겨루다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는다. 그렇게 대결은 주먹 한번 내지르지 않고 싱겁게(?) 끝나곤 한다. 이런 식의 겨룸을 보통 내공(內攻) 대결이라 하는데, 그 방식이 왜 하필이면 ‘음악’일까?

옛 고사에서 음악의 용례는 적지 않다. 일례로 나를 알아주는 벗을 지음(知音)이라 부른다. 이 말은 춘추전국시대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라는 두 친구의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백아는 거문고의 달인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 종자기는 연주를 아주 잘 들어주는 청음(聽音)의 대가였다. 둘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들을 표현하면 종자기는 화답한다. “하늘 높이 우뚝 솟는 느낌은 마치 태산처럼 웅장하구나”, 혹은 큰 강을 나타내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이 마치 황하 같구나”라고 맞장구 쳤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백아의 멋들어진 연주도 일품이었겠지만,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종자기의 감각 또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개떡(?)처럼 표현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마냥, 백아와 종자기는 음악을 매개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종자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백아는 슬픔에 겨워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더 이상 없다고 여겨 스스로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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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에피소드는 음악이 그저 듣고 즐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 공자는 이웃나라를 방문할 때, 그 나라의 정치가 잘되고 못됨을 백성들이 부르는 노랫가락만 듣고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군주의 행실이 문란하고 폭정이 행해지면, 음악 역시 잔잔하기보다 자극적이었다고 한다. 고대인에게 있어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음악으로 벗을 사귀고, 성품을 수양하며, 백성을 교화하고 나아가 천지만물을 조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하니, 그러한 옛 사람들의 음악론이 담긴 책이 바로 <악기(樂記)>이다. 


(聲)·(音)·악(樂)
 
<악기(樂記)>는 춘추전국시대 6경(시경·서경·주역·예기·악기·춘추) 중의 하나이며, 오늘날에는 그 일부인 11편이 예기(禮記)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 저자는 확실하지 않아 여러 설이 있는데, 대략 전국시대와 전한(前漢) 초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악기>는 음악책임에도 불구하고 노랫말, 악보, 음표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음악서적의 표상이 <악기>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대신 음악의 기원, 음악의 필요성, 음악의 사회적 기능 등과 같은 담론이 주를 이룬다. 요컨대 <악기>는 일종의 음악 철학서라고 할 수 있을 듯싶다. 

우선 <악기>의 첫 문장은 음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음악’이란 단어와 <악기>에서 말하는 ‘음’과 ‘악’은 다르다. 우리가 ‘음악’을 그저 듣고 즐기는 노래 혹은 음률, 곡조로 한데 뭉뚱그려 생각한다면, <악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릇 노랫가락(音)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바깥 대상(사물, 사태, 현상)이 그렇게 만들기(바깥 대상의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깥 대상에 감응하면 감정이 격동하여 반응을 일으켜 목소리(聲)가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서로 다르게 반응하여 나온) 각종 목소리가 서로 호응하면 (그 가운데)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러한 변화가 일정한 음률과 음조를 갖추면 노랫가락이 된다. 그리고 여러 노랫가락으로 조합되고 구성된 곡조를 악기로 연주하고, 다시 그 위에 간·척·우·모를 잡고 춤추는 것을 악(樂)이라 한다. <악기·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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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선생의 설에 따르면, ‘음악’이란 말은 일본식 조어(助語)이다. 영단어 ‘music’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 ‘음악’이며, 그것이 우리말에 섞여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음악’은 ‘음’과 ‘악’ 두 단어를 어설프게 붙여놓음으로써, 이도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단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음’과 ‘악’은 다른 층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음’이 ‘악’이 되려면 일정한 형식을 갖춰야 한다. 입에서 흥얼흥얼거리는 콧노래는 ‘음’이 될수는 있으나, ‘악’에는 못미친다. 누구나 ‘음’을 낼 수는 있으나, ‘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을 이루는 형식미는 고도의 논리와 비율로 창조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음악에서 음계라 할 수 있는 12율려는 정밀한 수학적 원리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단순히 수학적 논리 외에도, 방위와 계절이라는 변수가 개입한다. 어쨌든 이런 복잡한 절차가 있기에 ‘악’을 알 수 있는 자는 군자 혹은 성인에 국한되었다. 그래서 <악기>에는 ‘악’을 만든 이는 선왕(先王)들이라 하였다. 선왕이 누구냐고? 바로 요(堯) ·(舜)·(禹)·(湯)과 같은 현명한 임금들을 가리킨다. 이러니 누가 '악'을 안다고 쉬이 말할 수 있으랴?

 
 
리듬으로 구성된 세계 
  
왜 이렇게 깐깐할정도로 법칙을 강조했는가?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음악적 리듬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리듬은 마디다. 마디는 통으로 이뤄져 있지 않고, 구체관절처럼 촘촘히 분절되어 있다. 여러 마디가 모여 한 소절을 이루고, 여러 소절이 합해져 노래 한 곡을 만드는 식이다. 사시사철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마디의 순환으로 구성된다. 만약 마디의 순서가 엉키면 엇박자로 스텝이 꼬인다. 예컨대 봄 이후에 겨울이 오거나 하면, 대자연의 리듬에 모종의 교란이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도 일정한 리듬으로 형성되어 있다. 몸을 이루는 뼈마디가 그것이다. 관절이라는 마디로 우리는 걷거나 물건을 쥘 수 있다. 계절 혹은 신체의 리듬을 모르면 어떻게 될까? 농경 사회에서 계절의 리듬에 무지하면 농사에 치명적이다. 언제 비나 서리가 내릴지 알아야 그에 합당한 일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몸의 리듬을 모르면 더 심각하다. 몸은 질병이라는 신호로 몸의 리듬이 순조로운지 여부를 알려준다. 이때 사람과 대자연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의 리듬을 교류하며 함께 어울린다. 인간은 대자연의 리듬에 수동적으로 굴복하거나, 자연을 극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함은 리듬 속에서 자유자재로 ‘논다’는 표현에 더 가까울 것 같다. 그 모습을 나는 윈드서퍼가 파도를 이기려고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파도타는 행위에서 연상한다. 파도의 리듬과 율동에 몸을 내맡겨, 그와 하나되어 어우러지는 것이 곧 조화로움이 아닐까?
 
요컨대 ‘음’을 ‘악’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단순히 듣기 좋은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의 조화로운 순환운동과 더불어 일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였다. 제대로 리듬을 타야, 우주와 맞물린 일상을 슬기롭게 안배할 수 있다. <악기>에서 ‘악’이 백성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쓰이고, 우주만물을 조화롭게 배치하는데 필요했음은 이런 맥락에서 비롯했다. 한마디로 인생살이는 리듬의 문제이고, 이것은 ‘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質勝文卽野 文勝質卽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 본바탕이 아름다운 외관을 이기면 촌스럽고, 외관이 본바탕을 이기면 겉치레만 잘하니, 본바탕과 외관이 적절히 배합한 뒤에야 군자이다”라고 했다. 곧 본질과 격식을 적절히 섞어야 비로소 군자라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일정한 격식, 즉 리듬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그저 ‘성’과 ‘음’의 차원에만 머물 뿐이다. ‘성’과 ‘음’의 수준은 곧 짐승과 범인(凡人), 즉 무지한 자에 해당한다.
 
이런 까닭에 짐승은 소리만 알고 음을 알지 못하며 보통 사람은 음만 알고 악을 모르며 오직 군자만이 악을 안다. 그러므로 소리를 살펴서 음을 알고, 음을 살펴서 악을 알며, 악을 살펴서 정사의 득실을 아니, 이와 같이 하면 나라 다스리는 이치가 갖추어진다. … 악을 알면 예를 아는 상태에 가깝다. 예와 악을 터득한 상태를 두고 덕이 있다고 말하니, 이른바 덕이라는 것은 예악(禮樂)에서 얻음이 있음을 뜻한다.
<악기·악본>
 
‘악’, 즉 일상에서 자기 리듬을 찾지 못하면, 남의 리듬에 끌려간다. 자기 리듬은 존재의 밀도에서 생성된다. 다시말해 외부자극에 쉬이 휘둘리고,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그의 일상은 헝클어지기 쉬울 것이다. 예컨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마디를 생성하기만 할 뿐 맺지 못하게 된다. 마디는 필연적으로 생성과 맺음을 수반하기에, 맺지 못하는 것은 마디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디를 스스로 만들지 못함으로써, 이는 하루의 리듬을 교란하게 된다. 하루가 교란되면 다음날 영향을 미치고, 무한하게 증식되어 마침내 일생 동안 자신의 리듬을 만들지 못하고 생을 다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삶에서 리듬을 생성하는데 ‘악’이 필요하다는 것이 <악기>의 요지라 생각한다. ‘악’은 결국 마디의 논리, 즉 절도(節度)의 문제이다.


소리의 재배치, 절도(節度)
마음이 좋음과 싫음의 정에 대해 절제가 없고 또한 바깥 대상이 끊임없이 유혹하여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천리(天理)’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바깥 대상의 유혹이 끊이지 않아 인간의 좋음과 싫음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할 때 바깥 대상이 나타나면, 사람은 타락하여 짐승이 된다. 사람이 타락하여 짐승이 된다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본성, 즉 천리가 완전히 상실되고 인간의 욕망이 방자해짐을 뜻한다.
<악기·악본>
 
‘악’은 ‘성’과 ‘음’에 일정한 절제를 가하는 것이다. 소리는 마음이 외부와 접속함으로써 비롯하는데, 만약 기쁘다 하여 그 표현이 지나치고, 슬프다고 그 슬픔이 지극하면 한편으로 크게 치우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한계가 있고 적당한 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무작정 매이면 자신의 본성을 망각하게 된다. 예컨대 즐겁다고 술을 마실 때, 취한 마음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은 것이 곧 ‘필름이 끊긴’ 상태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사건사고를 저지를지 모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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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미혹되면 중독 혹은 쾌락과 칠정(七情)에 휩싸여 궁극적으로 존재를 파괴적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그래서 소리를 정제하고 정교하게 냄으로써 감각적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이 원래 지니고 있던 고요함을 견지할 수 있다. 요컨대 <악기>는 음악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도(道)를 논한 책이다. 앞에서 무협고수들이 음악 연주로 대결했다고 얘기했는데, 이는 대결의 진정한 목적이 무력의 우열이 아닌 수양의 수준을 가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수란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자가 아니라 인격이 완성된 자, 즉 군자를 가리킨다. 군자는 바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본연의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 상태에 놓여있는 자를 말한다. 음악으로 상대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음악에 그 사람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악이라는 것은 덕성의 꽃이다. … 감정이 깊고 두터워야 악의 아름다운 선율이 선명하고, 의지와 기개가 왕성해야 악의 변화가 신묘하며, 온화하고 양순한 덕성이 마음속에 쌓여야 비로소 꽃 같이 아름다운 악을 연주하게 되니, 오직 악만이 한 점도 거짓으로 이루지 못한다.
<악기·악상>
 
청정한 마음이면 청정한 음악이, 혼탁한 마음이면 혼탁한 음악이 배어 나온다. 그러므로 합주(合奏)를 하며 상대의 수양과 덕성을 파악하니, 마침내 서로가 고수라는 것을 깨닫고 음악을 멈춘 후 아무 말 없이 사양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것은 존경의 표시인 동시에 기쁨의 표현이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그것은 다름아닌 서로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이뤄졌으니 그것이 곧 지음(知音)이다.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외부 혹은 타자의 소리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포함한다. 소리는 마음상태의 척도다. 내가 지금 어떤 소리를 내는지 주의 깊게 관찰해도 내 마음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일상에서 생성하는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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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일정한 울림과 진동을 수반한다. 내가 내는 소리는 일정한 주파수의 음역으로 파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바깥을 향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서로의 주파수가 맞으면 상대방도 나의 소리에 반응한다. 음성신호의 떨림을 통해 우리는 서로 라디오 교신을 하듯 소통한다. 이를 공명(共鳴)한다고 이른다. 그러나 주파수가 불협화음을 일으킬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감정에 치우쳐 절도가 없이 되는대로 소리를 내뱉거나, 자신도 모르는 말을 웅얼거리면 주파수에 잡음이 낀 것마냥 혼탁해진다. 혼탁함은 나의 의도가 상대방에게 전달되기는커녕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내가 내는 소리가 정제되지 않고 무질서하게 터져나올 때, 상대방은 조응(照應)하기 어렵다. 
 

또한 소리는 외부로 발산되는 한편, 자신의 신체 내부로 울려 퍼지기도 한다. 오장육부는 각각 특정한 소리에 반응하는데, 내경(內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에는 오음(五音)이 있고 사람에게는 오장(五臟)이 있으며, 하늘에 육률(六律)이 있어서 사람에게 육부(六腑)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하늘은 상응(相應)한다.
<황제내경 영추·객사>

 
소리의 생성은 ‘공간’을 바탕으로 한다. 콘서트장이나 음악 연주회장을 가면 소리가 잘 어우러질 수 있게 공간을 배치한다. 현악기, 관악기 등도 악기의 몸체가 공명통의 역할을 한다. 시공간도 공명통의 역할을 한다. 예컨대 자월(子月)에는 일양(一陽)이 생성되며, 자월의 시공간이 대지에 펼쳐진다. 이때 자월이라는 공간에 조응해 나오는 소리가 12율려(律呂) 중 하나인 황종(黃鐘)이다. 이때는 황종을 중심음으로 삼는데, 자연의 리듬에 발맞춰 산다는 것은 해당하는 시점의 중심음을 절도 있게 내고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 인간의 몸을 바이올린이나 기타 같은 악기라고 생각해보자. 내가 내는 소리는 내부의 공명통인 오장육부를 한번 진동시킨 후,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그러니 혼탁한 소리를 내면 단지 외부와 소통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신체장기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오장육부에도 각각의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간(肝)은 분노를 주관하는데, 간에 문제가 생기면 분노를 억누를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내는 소리가 어지러우면 오장육부도 함께 요동치고 연관된 마음도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즉 소리는 잘 듣는 것 못지않게 제대로 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소리를 정교하게 조직화하는 기법은 단순히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일상에서 습득해야 할 삶의 도구라 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이 평상시에 음악으로 수양을 닦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 비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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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배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악기 연주를 말한다. 악기 연주를 배우는 것이 날 것의 소리에 질서를 부여하는 바람직한 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소리에 질서를 부여함은 다시 말해 리듬을 배열하는 작업이다. 리듬은 높낮이, 장단, 박자를 포괄하는 말이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이 세상에 리듬 없는 것이 없다. 사시사철은 4박자의 리듬을 형성한다. 그것이 나뉘어져 24절기로 나뉘고, 더 쪼개면 72절후(節候)라는 세부 마디로 구체화된다. 또한 글이나 영화에도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리듬이 있고, 야구 경기를 봐도 1회부터 9회까지 일정한 패턴과 흐름이 있다. 또 우리의 하루를 살펴봐도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잘 알아차리지 못할 뿐, 일정한 주기성이 있다. 밤10시면 자야 되는 사람이 새벽에 잠들면, 다음날 하루 리듬이 헝클어지는 것처럼 만사만물에 리듬이 있다. 요컨대 악기 연주를 배우는 것 못지않게,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세심히 관찰함으로써 음악, 즉 리듬을 생성할 수 있다.
 
땅의 기운이 올라가고 하늘의 기운이 내려와 음과 양이 서로 마찰하고,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서로 깊이 어우러져 천둥과 번개를 울리고 바람과 비로 떨치며 사계절로 독촉하고, 해와 달로 따뜻하게 해서 풀·나무·새·짐승 등 만물이 왕성하게 생장한다. 하늘과 땅은 이렇게 서로 융화하여 만물을 생성·발육시키므로, 악(樂)도 하늘과 땅을 본받아 아름다운 문채로 만물을 조화시킨다.
<악기·악례>
 
자신의 리듬을 만드는 일은, 곧 천지자연의 율동을 능동적으로 신체에 각인하는 일이다. 내가 내는 말소리, 숨소리,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몸짓의 소리, 걸음소리, 뛰는 소리, 두근거리는 오장육부의 소리가 현재 하늘과 땅의 기운과 상응하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지금이 어떤 시절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다행히 1년은 24절기라는 마디로 나뉘어져 었고, 각각의 마디는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 그리고 소리가 있다. 요컨대 나의 리듬을 생성하기 위해선, 평소 무심코 흘려 보낸 바람의 맛과 햇살의 향기처럼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자연의 소리에 오감을 열어야 한다. 감각을 활짝 열었을 때, 비로소 하늘과 땅이 전해오는 주파수에 접속해 나의 리듬을 재배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에 <악기>가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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