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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의 아이들, 공부와 놀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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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8-02 10:54 조회6,5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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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의 아이들, 공부와 놀이 사이


 

박 성 옥 (목요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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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사라진 교육시장


『홍루몽』을 접했을 때 맨 처음 느끼는 신기함은 등장인물이 400명이 넘고 120회나 되는 이 장대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들이 불과 열두세 살 소년소녀라는 점이다. 요즘 같으면 하이틴 청소년물로 분류됨직한 이 소설이 어떻게 중국 최고의 장편소설로 추앙받게 되었을까. 오늘날 10대는 한없이 어리고 미숙하여, 하루 종일 교육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심지어는 서른 살이 넘도록 교육을 받느라 사회인으로 자립하지 못한다. 이것이 교육시장이 비대해지는 이유다. 교육과 시장의 만남으로 교육은 화폐를 지향하는 사회시스템에 철저히 종속되었고,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불타는 화차가 되어버렸다. 대체 저 화차의 불을 끌 수가 있을까.


그래서 이 글은 홍루몽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교육이 이뤄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홍루몽의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서 어른이 되는가. 중국 청나라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가씨 가문에서 벌어지는 흥망성쇠를 다룬 『홍루몽』은 한 명의 소년과 아름다운 열두 명의 미녀, 금릉12차들과 대저택에 소속된 시녀들이 줄거리를 끌고 간다. 이 소설은 삼국지보다 스케일이 크지만 다른 가문과의 갈등이나 복수, 전쟁 등 무협지 같은 사건들은 없다. 깨알같이 소소한 일상적인 가족소설이다. 주인공 소년 가보옥은 할머니와 부모, 큰집식구들, 사촌, 육촌 형제자매들과 모여 놀고먹는다. 명절이라서 놀고, 생일이라서 놀고, 눈이 와서 놀고, 꽃이 피어서 논다.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놀면서 큰다.


홍루몽16.jpg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홍루몽의 아이들은 놀면서 큰다

이 아이들은 교육을 받지 않는다. 교육은 누군가 가르치는 주체가 있어서 피교육자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육성하는 일이다. 가문에 딸린 서당이 있지만 남자아이들뿐이고 거의 수업을 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보차가 어릴 때 서당을 다닌 적이 있고, 대옥이 잠시 훈장에게 배운 적이 있지만 여자는 서당을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앉아서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교육을 받는 대신 혼자 책을 읽고 뒹굴거리며 논다. 대표적인 놀이는 시짓기다. 놀라운 것은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에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공부와 놀이가 일치하는 홍루몽의 세계와는 달리 오늘날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공부’가 ‘교육’으로 바뀌면서 집과 교육기관도 분리되었다. 예전에는 집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혔던 것들이 외부기관에서 배워야 하는 교육이 되었다. 더하기 빼기도 유치원에서 배우고 그림그리기와 줄넘기도 학원에서 배운다. '영유아는 영어, 초중고는 수학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학습관이 대세가 되어 한글을 가르치기도 전에 영어부터 가르친다. 영어유치원을 다닌 상당수의 아이들이 한글을 잘 쓰지 못한다. 그러니 이해력이 약해서 수학도 못한다. 수학학원을 찾아오는 엄마에게 “이 아이는 계산을 배울게 아니라 먼저 책을 읽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어느 독서학원을 보낼까요?”라고 반문한다. “그냥 집에서 엄마와 함께 책을 읽으세요”라고 해도 그건 못한다고 한다. 1,2학년 초등학생들이 바빠서 책도 못 읽고 놀지도 못한다.


이렇게 ‘자발적 공부’가 ‘타율적 교육’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근대가 있다. 홍루몽식 공부방식과 오늘날의 교육시스템을 비교해 보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적 인식기반을 탐구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특히 ‘시를 배우는 향릉’이라는 캐릭터에서 '스스로 공부하고 깨우치는 존재변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교육의 비전을 탐색하고자 한다.



시 쓰기의 놀이문화


 홍루몽의 어른들은 아이를 만나면 먼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는다. 대옥이 처음 대관원에 온 날, 할머니 가모가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 묻자 대옥은 “『사서』읽기를 막 마쳤다고 대답한다.(1권 86쪽) 희봉이 진종을 처음 만났을 때도 무슨 책을 읽었는지 묻고, (1권 179쪽) 북정왕 수용도 보옥을 처음 보자 올해 몇 살이며 지금 무슨 책을 읽는지를 묻는다(1권, 312쪽) 아이가 대답하는 책이름은 그 아이의 공부수준과 지성을 말해준다. 하긴 체르니를 치는지 바이엘을 치는지 책이름만 들어도 피아노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홍루몽의 아이들에게 독서는 스스로 읽고 터득하는 공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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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옥과 대옥의 달달한 러브라인도 책이 매개가 된다. 보옥이 『서상기』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나는야 ‘근심 걱정 넘치는 병들고 외로운 몸’, 당신은 ‘나라도 성도 무너뜨리는 경국지색’이라네”라고 은근하게 연심을 표현하자 대옥의 두 뺨과 양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대목(2권 82쪽)은 연애소설의 품격을 보여준다.


책을 읽기 싫어 꾀를 부리다가 아버지 가정에게 매를 맞곤 하는 보옥도 남다른 재주가 있는데 그것은 시 짓기다. 대관원이 축성되자 가정이 여러 문객들을 초대해서 건물의 제목을 구상하는 장면을 보자. 한 문객은 옛 시인의 고문을 인용하여 ‘정자가 날아갈듯’하니 익연(翼然)이 어떠냐고 하고, 누구는 ‘옥이 쏟아져 내린다’는 사옥(瀉玉)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가정은 아들의 공부가 얼마나 늘었는지 시험해 보려고 보옥에게 의견을 묻는다. 보옥은 “이런 글자는 아무래도 고루하고 우아하지 않다”고 답한다. 가정이 허허 웃으면서


“자, 자 이 녀석의 말을 좀 들어보세요. 방금 여러분께서 새로 지으니까 이 녀석은 아무래도 옛 사 람의 구절이 좋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우리가 옛 구절을 쓰자고 하니까 그게 고루하여 마땅치 않다 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 너도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

“‘향기가 스며든다’는 심방(沁芳)이 새롭고 우아하여 좋을 듯 하옵니다.” 가정은 그 말을 듣고 그저 수염만 쓰다듬으며 아무 말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양을 떨면서 과연 보옥의 재주가 비 범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조설근,고악, 『홍루몽』(나남),2012, 1권 357쪽)
 



이렇게 여러 건물에 걸리는 편액(현판명)과 대련(칠언대구)들을 열두 살 소년이 즉석에서 척척 지어낸다. 보옥이 글재주를 맘껏 펼칠 수 있었던 건 평소 시를 지으며 놀기 때문이다. 대관원의 아이들이 놀이는 시 짓기, 수수께끼 놀이, 주령놀이, 연극구경 등이다. 이 모든 놀이가 다 시로 귀결된다. 시 짓기는 할머니에서 손자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공통의 놀이였다. 온가족이 모여 노는 수수께끼 놀이의 한 장면이다. ‘일상용품 맞히기’ 문제를 내는 사람이 시구를 읊는다. “모양은 네모로 단정하고, 온 몸은 자체가 단단하며, 비록 말은 한마디 못해도, 할 말 있으면 필시 응하네.” 정답은 ‘벼룻돌’이다. 시 한 수에 술잔을 따르고, 웃고 떠들며 자정이 넘도록 논다.


주령놀이는 더 재미있다. 석장의 골패를 뽑아 한 자씩 운을 떼면 시든 속담이든 알맞은 구절을 만들어 합쳐서 한 벌의 이름이 되게 만드는 놀이다. 평소 책 읽은 공력이 시로 나타나는 것이니 공부와 놀이의 경계가 없어진다. 문자를 모르는 계층도 민요나 속담이나 연극을 통해 인생에 필요한 걸 얼마든지 놀이로 배운다.


어느 눈이 내리는 정월, 식구들이 둘러앉아 ‘즉경연구(卽景聯句)’를 제목으로 오언율시 짓기를 한다.


첫 구절을 하게 된 희봉이 “내 생각에 눈이 내리려면 북풍이 불 것이 분명하지요. 그래서 만든 구 절하나, ‘밤새도록 찬바람 매섭게 몰아치더니’ 어때요? 쓸 만한가요?”한다. 사람들이 듣고 나서 의외라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시구가 비록 거칠고 이어지는 구절이 없기는 하지만 시를 짓 는 첫 구절로는 상당히 좋아요. 뒷사람들에게 많은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잖아요.”(『홍루몽』3권 230쪽)


사람들이 놀라서 서로 쳐다보는 이유는 글을 모르는 희봉이 뜻밖에 한 구절을 읊었기 때문이다. 뒷사람이 이어서 ‘대문 열면 흰 눈송이 펄펄 날아드네’라고 댓구를 만들면서 연작시를 지어간다. 시를 지으며 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포복절도하기도 하고 벌칙도 주고 장난도 친다. 향에 불을 붙여 다 타들어 갈 때 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신다. 잘 지어도 술 한잔, 못 지어도 술 한잔이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이환, 탐춘, 영춘, 석춘, 대옥, 보차, 사상운, 보옥. 이렇게 8명은 해당화 시사모임을 결성하고 서로 멋진 아호를 지어준다. 시모임은 각자 글재주를 뽐내기도 하고 소통하는 자리다. 서로 비평도 하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스승이 된다. 이런 방식의 공부야말로 진정한 자기주도학습이다. 홍루몽 아이들의 공부와 놀이 사이에는 시가 있다.



시를 배우는 향릉


신세를 한탄하거나 좌절하기는커녕
배움의 열정으로 반짝인다

홍루몽의 수백 명 등장인물 중 가장 파란만장한 곡절을 가진 여자는 향릉이다. 그녀의 팔자는 기구함의 대명사다. 향릉은 비록 금릉 12차에 속하지는 않지만 뚜렷한 존재감을 가지고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다. 세 살 때 보름달 구경을 나갔다가 납치되지를 않나, 유괴범에 의해 열두 살 때 첩으로 팔리지를 않나 남다른 풍파를 겪는다. 그나마도 사기매매에 얽혀서 사람을 때려죽인 설반의 첩이 된다. 본처인 하금계의 극악무도한 질투와 구박 삼만리는 구구절절하다. 오죽하면 본처에게 독살당할 뻔했을까. 그래도 향릉은 청승스럽지 않다. 신세를 한탄하거나 좌절하기는커녕 배움의 열정으로 반짝인다. 개망나니 남편이 사고를 치고 집을 떠난 덕분에 향릉은 잠시 대관원 안에 들어와 살게 된다.


향릉은 대관원에서 시를 가장 잘 짓는 대옥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대옥은 “사실 시를 지을 때 시구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가장 중요한건 어떻게 구상하느냐는 것이지. 착상만 좋다면 별다른 수식 없어도 저절로 멋진 시가 되는 것”이라면서 향릉에게 시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는 “왕유의 전집에서 오언율시 백수, 두보의 칠언율시와 이백의 칠언절구를 이백 수쯤 읽고 기초를 다진 후 읽으라”면서 도연명과 응창 등의 책을 빌려준다. (3권, 192~193쪽)


향릉은 밤잠을 잊고 시를 외운다. 그리고 대옥과 만나 시에 대한 감상을 토론한다. 드디어 향릉에게 시를 보는 눈이 생겼다. 이제는 시 짓기다. 시의 삼매경에 빠진 향릉은 시를 짓고 평가를 받으며 다시 고쳐 쓴다.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넋을 놓은 듯 시만 생각하다가 꿈속에서도 시를 짓느라 잠꼬대까지 한다. 잠에서 깨어나 시를 완성하는 그녀를 보고 모두 감탄하며 그녀를 시사모임의 일원으로 초대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대관원의 살림을 통솔하며 수백 명을 호령하던 권력의 절대지존, 왕희봉도 낄 수 없던 시사모임이 아닌가. 이렇게 시를 통해 향릉은 존재변신을 한다. 누구보다 인생의 쓴 맛을 본 자의 깊은 정서를 담아내는 시는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는 앎이 된다.


글쓰기, 그것은 완성된 세계를 이미 만들어진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창조에 참여 하는 것이고,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윤세진, 『언어의 달인』, 북드라망, 341쪽)
 


시가 상징하는 의미는 더 심오하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거의 마지막 무렵에 대옥이 자신이 쓴 시를 불태우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대옥의 별명은 빈빈(嚬嚬)이다. 얼굴을 찡그린다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 성정은 예민하여 조금만 신경을 써도 병이 악화되어 수차례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대옥이 쉽게 병으로 죽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보옥과 대옥, 보차는 소설을 이끌어 가는 굵직한 애정의 삼각형이기 때문이다. 대옥은 연모하는 보옥이 보차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뭉치를 불태운다. 그 때 독자들은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과연 시를 태운 후 이윽고 생명의 불씨가 꺼진다. 대옥에게 시는 곧 존재의 생명력이었다.


근대교육의 국가제도화


20130315000313_0.jpg홍루몽 세계의 시 쓰기는 빛을 잃었다


홍루몽 세계의 시 쓰기는 오늘날 빛을 잃었다. 한 때는 사랑을 맹세하는 연애시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었지만 이제 학교에서 학생들이 직접 시를 쓰도록 지도하는 교사는 거의 없다. 입시와 무관한 시 쓰기는 시간낭비가 되어 버렸다. 불과 한 세기전만 해도 벼슬을 하려면 과거시험장에서 시를 썼던 시대에서 한없이 멀리 와버린 것이다. 시는 입시문제의 일부일 뿐 시상을 가다듬거나 시를 음미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시 감상요령을 주입식으로 외운다. style="font-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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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 공부와 놀이가 이렇게 철저히 분리되어 버린 것일까? 공부와 놀이가 분리되는 인식론적 과정에는 근대적 학교가 있다. 학교는 병원, 교회와 함께 들어온 근대의 상징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학교가 없어도 다양한 방식으로 삶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면서 ‘일하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도제관계나 스승과 제자, 가족, 친구 모두가 배움터였다. 근대는 국가가 교육제도를 총괄하는 중심에 서게 된다. 학교운영이나 커리큘럼, 입시제도 등 모든 교육제도는 국가의 통제 하에 놓여 있다. 국가가 통제하는 학교는 궁극적으로 ‘국가에 유익한 일꾼’을 길러내는 시스템이 되면서 고용시장과 산업체와 결탁하게 된다. 따라서 합리성과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근대사회의 생산기반과 걸맞게 학문이 전문화, 세분화되는 수순을 밟는다. 결과적으로 학력이 모든 의료와 복지, 법률, 고용, 결혼, 문화 등 화폐로 치환되는 서비스의 수준과 사회계층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근대화된 교육시스템 안에서 초등교육이 국민의 의무가 되고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진학과 1974년 고등학교 추첨으로 평준화교육이 확대되었다. 문맹률은 하락하고 진학률은 급상승했다. 세계적으로 남다른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대학까지 적어도 14~16년은 학교를 다닌다. 취업이 안 되는 청년은 학생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한다. 여기에 외국어와 자격증을 취득을 위한 학원수업이 보태진다. 족히 20년 이상을 교육기관에 의탁하지만 학문의 수준은 낮고, 사유의 깊이는 형편없이 퇴락하고 있다. 왜 교육받는 기간은 늘어나는데 공부의 심도는 더 낮아지는 것일까.



중세의 학문은 천리(天理), 즉 우주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을 자 연의 일부로 사유하거나 인간과 자연을 연속적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인식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에 반해 근대적 앎은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이라는 고리를 해체해버렸다. 자연은 그것을 세계라 부 르건 우주라 부르건 간에 오직 분석하고 측량하고, 그 다음엔 지배하고 착취해야 할 대상으로 전이 되었다. (고미숙,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8년, 455쪽)
 


근대 이전의 공부가 자신이 원하는 책을 읽으며 우주자연의 이치와 자신을 사유하는 자발적 공부라면, 근대교육은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피동적인 교육이다. 학교는 스펙을 따기 위한 취업준비과정일 뿐 자발적으로 자신이 궁금한 주제를 탐구하는 공부는 사라졌다. 근대교육이 잃어버린 키워드는 '자발성'이다. 자발성이 사라지니 스스로 탐구하는 깨달음의 즐거움도 사라진다. 국가가 교육기회를 확산시켰지만 이제는 국가주의적으로 획일화된 교육을 벗어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인간에게는 배움을 추구하는 강렬한 본능이 있다. 이 강렬한 열정이 화폐의 영역을 넘어 우주적 비전으로 향하도록 공부방식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스마트한 세상의 공부


근대의 아이들은 이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배우고,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다. 읽고 쓰고 배우는 과정이 바뀌면 세계를 사유하고 인식하는 방식도 바뀐다. 감각이 바뀐다는 것은 신체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홍루몽의 아이들이 시를 쓰고 낭송했듯이 근대 이전의 문학은 서사시나 판소리 같은 ‘소리의 양식’으로 존재했다. 문자를 모르는 계층도 민요나 속담, 이야기 같은 구술문화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배웠다. 근대는 활자문화로 열렸다. 이때부터 활자로 인쇄된 책을 혼자서 묵독하는 양식으로 변모했고, 문자화된 지식이 대량 지식소비 사회를 가능하게 했다. 소리의 세계에서 활자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 근대라면 포스트모던 사회는 다시 활자에서 영상의 세계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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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각적 영상매체가 압도적인 힘으로 활자를 대체하고 있다. 산맥을 뚫고 직선으로 달리는 기차가 근대의 시공간을 바꾸어 놓았던 것처럼 전 세계를 광속으로 연결하는 인터넷은 현대의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종이에 인쇄된 책은 줄고 전자책(e-book)으로 바뀌고 있으며 2014년부터는 학교에서도 스마트교실이 운영된다. 책을 읽으며 여백에 자기 생각을 쓰는 행위는 사라진다. 이제 칠판에 글씨를 쓰거나 삼각자나 각도기로 직접 도형을 그릴 필요가 없다. 도형어플을 이용해 칠판에 다면체 그림을 빔 프로젝트로 쏘고 눈으로 보면서 영상으로 문제를 푼다. 이러면 도형을 그리는 시간이 절약된다. 요점은 시각적 감각만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전하던 편지도 핸드폰 문자로 대체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각종 표정의 이모티콘으로 축약되었다. 글로 설명하는 절차는 생략되고 감정과 생각을 영상으로 시각화한다. 시각만 자극하는 영상이미지가 범람할수록 읽고, 쓰고, 말하고, 손으로 만들고, 촉감과 후각으로 느끼던 신체적 능력은 잠식되어간다. 보이는 것만 믿게 되는 가시성의 극대화는 균형적 사유를 위협한다. 첨단 디지털기술이 거부할 수 없는 생산토대로 발전해가고 있는 지금, 잃어버린 신체성을 찾는 길은 오히려 고전적 방식에 있다.


암송과 연극, 필사와 구술 등 고전의 입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최후의 관문이 글쓰기 다. 고전의 지혜와 나의 몸이 ‘화학적으로 융합되는’ 절정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미숙, 같은 책, 241 쪽)
 


읽고, 외우고, 낭송하고 글을 쓰는 고전의 불편한 방식에서 온전한 감각과 조화로운 신체적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몸이 자연의 상태와 합일되면 사유의 폭도 우주적으로 확장된다. 이런 조화로운 신체성이야말로 잃어버린 공부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길이다. 개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이 공부하고, 즐기는 과정이 되는 지혜를 <홍루몽>에서 찾아볼 일이다. 향릉의 시 쓰기처럼 자기 존재를 발견하고 탐구하는 지혜가 교육의 비전으로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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