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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바 바베의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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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8-04 18:09 조회5,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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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바 바베의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이여민(감이당 대중지성 2학년)
 
 
비노바바베.JPG

비노바 바베를 읽으면서 가장 헷갈렸던 것은 그의 종교였다. 기독교인가 싶으면 붓다가 나오고 코란 공부도 나온다. 그러면 ‘그는 모든 종교를 공부하는 학자인가? ’하고 보면 명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마디를 말한다. 수행자인가? 하고 보면 사회 개혁운동을 하고 감옥에 가고 사상을 사람에게 설파하고자 걸어 다닌다. 도대체 비노바, 너는 누구냐? 하는 물음이 생겼다. 사회 개혁을 하는 명상가, 위대한 걸인이라 불리기도 하는 비노바 바베. 요사이 언어로 하면 비정규직의 자유로운 프리랜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릴 때 좋아하는 만화 영화 주인공은 대부분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했다. 악당을 만나면 주문을 외우고 새로운 인물로 변한다음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하고는 악당을 처치한다. 비노바를 읽으면서 가장 흥미를 끈 것은 만화 주인공처럼 자유자재로 변하는 그의 자유로움이었다. 이 자유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 지점을 찾아가 보면 비노바 바베와 같은 자유로움을 얻을지 모르겠다.
 
 
바노바의 ‘사랑과 사상’의 근원 - 어머니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항상 사랑을 느끼고 사랑으로 인해 감동받고 있다. 사랑과 사상만큼 강한 힘을 가진 것도 없다. 조직도, 정부도, 경전도, 무기도 사랑과 사상을 당할 수 없다. 나는 사랑과 사상이 진정한 힘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믿는다.”
(명상과 혁명, 비노바 바베.P20-P21/실천 문학사)
 
슈퍼맨의 두 주먹처럼 그는 ‘사상과 사랑’ 두 가지만으로도 무엇이든 가능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고, 비노바가 있는 곳은 <기타> 경전이 실제 하는 전쟁터였고, 법륜을 굴리는 곳이었다. 그는 어디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아쉬람’으로 만들었다.
비노바 바베가 타인과 나의 구별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다. 비노바에게 어머니는 신의 존재가 현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노바의 어머니는 많이 배우신 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티-비자이>와 같은 책에 나오는 성자들은 잘 알아 비노바에게 성자들의 일화를 곧 잘 이야기해 주곤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런 성자들은 옛날에만 있었고 요즘에는 찾아볼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우리 시대에도 살아 있는 성자들이 있지만 우리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대답하셨 다.“만일 고행의 힘을 세상에 베풀어주는 성자의 영들이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남아 있을 수 있겠니?” 어머니의 신앙은 바로 그런 것이었고, 그러한 신앙에 기초하여 어머니는 내가 평생 동안 귀중하게 간직할 것들을 가르쳐주셨던 것이다.’
(명상과 혁명, 비노바 바베.P69/실천 문학사)
 
사실 비노바 어머니의 일상은 단순했다. 기도하고 집안일하고 이웃 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녀의 하루였다. 비노바에게 어머니는 지혜를 배우는 보고(寶庫)였다.
예를 들어 이웃 집 아주머니가 몸이 아플 때 어머니는 먼저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이웃집을 가셨다. 어린 비노바의 눈에는 우리 집부터 먼저 챙기는 게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어머니의 행동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비노바에게 어머니는 오히려 이러한 행동이 이타적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왜냐하면 우리 집 밥은 먼저 짓기 때문에 식어 버리지만, 적당한 시간에 맞춰서 간 이웃집에게는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거지가 문간에 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없으셨다. 비노바의 눈에는 건장한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은 구걸하는 사람의 게으름을 키워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히려 그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냐,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 우 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간에 찾아오는 사람이며 누구든 다 하느님처럼 존중해 주고 우리의 힘이 닿는 데로 베푸는 것이란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니?’
(명상과 혁명, 비노바 바베 P69/실천 문학사)
 
이 이야기는 불교의 가르침에도 많이 나오는 대목이다. 신라 시대에 자장스님이 대웅전에 있는데 절 입구에 한 거지가 와서 자장스님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자장스님이 무시하고 나와 보지 않자, ‘문수보살’로 변한 그 거지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고 한다. 자장스님은 지혜의 화신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3년 동안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지가 나타나자 무시해버렸다. 눈에 보이는 모양에 미혹되어 기회를 놓친 것이다. 반대로 비노바의 어머니은 내 앞에 나타난 인연을 판단하지 않고 그냥 도와달라면 도와줄 뿐이다. 그녀는 형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린 비냐가 ‘툴시’나무에 물을 주어야만 밥을 주었고, 집 마당에 있는 ‘인도빵나무’의 달콤한 열매도 이웃에게 선물로 다 돌린 다음에 비냐에게 주었다. 먼저 베풀고 나중에 먹어야한다며 그 내용을 간단한 싯구로 지어 가르치셨다.
 
베푸는 것은 하느님과 같은 일이고
쌓아두는 것은 지옥이라네.
 (명상과 혁명, 비노바 바베.P63/실천 문학사)
 
이러한 어머니의 가르침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토지헌납운동’을 할 수 있는 영감이 되었으며, ‘복지 항아리’운동을 전개 하게 한 동기이기도 했다.
비노바의 어머니는 그저 일반적인 한 여성에 불과 했지만, 사소한 행동이나 생각 하나하나에 신앙이 깃들어 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혼연일체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진심으로 믿었기에 행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양명학에서는 행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녀는 이미 양지를 실천하는 분이셨다.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고, 또 가까운 이웃을 돕는 그런 그녀의 일상적인 일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우리도 다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처럼 ‘진심으로 믿고 행동’하는 것이냐 아니냐가 차이를 만들어 낸다. 비노바는 그를 자유롭게 했던 ‘사상과 사랑의 기초를 어머니에게서 배운 뒤 이를 사회에 실천하고자 길로 나선다.
 
 
구속받지 않는 삶 - 경계 허물기
 
비노바는 집을 떠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자격증을 불사르고 월급 받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한다. 자본과 공적 교육에 포섭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나섰다. 이웃 마을을 방문하기 전에는 그 곳의 언어를 미리 공부하고 배운 말로 그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했고, 타 종교인을 만나기 전에는 상대방의 종교를 연구하여 대화를 했다. 비록 비노바는 브라만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육체노동자로 살기 까지 했다.
 
‘진정한 혁명이란 근본적인 변화,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하며, 그러한 변화는 평화적으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혁명은 생각의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나의 모든 사고의 기초였으며, 따라서 모든 실험들은 이런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다.’
(명상과 혁명,비노바 바베 p141/실천 문학사)
 
이렇게 그는 진정한 혁명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한결같은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 한결같은 마음은 편협한 마음이어서는 안 되며 전체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유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감옥이라는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실천을 통해 오히려 자유로움을 얻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 곳에서 두 가지 형태의 행동을 한다.
 
첫째 그는 독방에서는 시간표를 만들어 취침 열 시간, 두 세 시간 명상하기, 식사와 목욕에 세 시간, 나머지 여덟 시간은 경전 구절을 외우며 걸어 다녔다. 이렇게 독방에 갇혀서도 자신을 위해 시간을 온전히 사용하여 <기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유위(有爲)가운데서 무위(無爲)를 보고, 무위 가운데서 유위를 보는 자는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인도와 세계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모든 언어를 공부하려 한다. 비록 그의 육신은 감옥이라는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지만 그는 지금 그가 있는 그 곳에서 시간을 능동적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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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그가 일반 감방에 보내졌을 때 비노바는 자신이 아닌 주위 사람들을 살피기로 한다. 같이 수감된 친구들이 감옥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답답해하고 반항적인 생각들만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그들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을 그의 일로 삼는다. 그는 감옥에 있는 모든 정치범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들을 격려하고 기운을 북돋는 일은 무엇이든지 했다. 자유 투사도 매일 일정한 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당국과 죄수 친구들 양 쪽 모두를 설득하여, 죄수들이 스스로 일정한 양의 곡식을 가는 일을 하게 만든다. 죄수들은 일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또는 토론을 벌이기도 하면서 지식을 넓혀 나갔다. 그곳은 이미 감옥이 아니었다. 그곳은 ‘아쉬람‘이 되어 있었다. 비노바와 친구들은 감옥 안에서 자신들을 자유의 전투에 참여한 병사로 여기고 <기타>경전에 대한 강의도 하고, 강연록을 만들어 보급한다. 결국 감옥 전체의 분위기가 정신적으로 윤택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강연록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온 나라에 다 읽히게 되었다. <기타> 경전을 삶의 기본 원칙으로 튼튼히 하였기 때문에 그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었다. 이렇듯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자기와 타인을 위해 사용했다. 이를 통해 그는 감옥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점을 우리도 능동적으로 배워보자!
언제, 어느곳에 있든 자신이 있는 곳을 '아쉬람'으로 만들었다.
 
비노바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무어라 규정짓지 않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가 싶다. 그 마음 위에서 독방에서는 자신을 위해 온전히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고, 일반 감방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사용한다. 사회에서 나를 사용할 때는 공부를 통해 쓴다. 언어 종교, 노동도 배우고 실험한다. 아상(我象)없이 배우고 실천하는 것, 이렇게 나와 밖의 경계를 허물 수 있어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연습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다.
 
‘<기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온 평생을 행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평생 동안의 관 습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생애의 마지막 시간은 매일 연습을 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명상과 혁명, 비노바 바베.P379-P380/실천 문학사)
비노바는 무엇이든지 실험하고 연습하였다. 돈이 없이 살 수 있는지, 소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 최저 임금으로 일상을 꾸려 갈 수 있는지 등을 직접 겪어 보았다. 무언가를 공부하면 즉시 그것을 생활에서 실행하며, 현실에 나타나는 것들을 관찰하였다.
그는 심지어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죽음을 연습하기도 했다. 비노바는 잠을 작은 죽음으로 보고 매일 잠들기 전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했다. <기타>에서 이야기 하는 것의 마지막 절정이라는 죽음도 연습하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명상을 하며 잠자리에 드는 매일의 습관을 만든다, 그리고 그 하루가 생애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마무리를 한다. 다음 날 눈을 뜨면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오늘 해야 할 일을 한다. 어제는 잊어버린다. 얼마나 쉬운가? 잠들기 전 시간을 내어서 명상하고, 오늘 하루를 끝내면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면서 잠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꿈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꿈꾸는 것들은 우리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의 사랑과 미움은 우리의 꿈에 반영된다. 그러므로 기억될 정도의 사랑과 미움은 좋지 않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에는 낮에 친구들과 둔 장기 생각이 꿈에도 나타난다고 장기를 그만 두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도 꿈을 통해 내 관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한 번 들여다 볼 수 있겠다. 그 다음 선택은 각 자의 몫이고. 비노바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잠과 꿈을 통제하는 능력을 연구하여 명상 속에서 관념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관찰하였다.
 
‘관념들은 밭에 뿌리고 흙으로 덮어둔 씨앗들과 같아서 며칠이 지나 싹이 땅위로 올라오기까지는 땅 속에서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도와 명상과 성찰을 수행하는 사람의 생각을 잠이 라는 흙 속에 묻어두면, 그 생각들이 그 사람이 깨어 있을 때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문제의 해결책 들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깊은 ‘사마디’에 빠져 있을 동안에도 생각은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잠은 훨씬 유익한 것일 수 있다. 기도를 올린 후에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바로 잠들게 되 면 침묵이나 명상이나 영적인 성찰의 속성들이 잠 속에서 더 풍성해진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서 발견하였다. 샹카 라차리야는 ‘잠은 사마디의 상태’라고 말했다.‘
(명상과 혁명, 비노바 바베.P381/ 실천 문학사)
 
스스로의 질문을 명상 속에서 생각하면서 잠들면 그것의 답을 찾는 길이 깨어나면 보인다는 것이다. 명상과 잠 사이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아야한다. 그러면 잠 속에서 그 성찰들이 훨씬 풍성해진다. 명상하는 시간을 두 시간 정도만 확보해도 잠을 수행의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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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잠자기 전 죽음을 연습했던 비노바 바베
 
그는 죽음을 연습 할 때 호흡하면서 라마의 이름을 외우며, 복되게 죽으려 했다. 그리고 정말 연습했던 대로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단식하며 ‘라마-하리’를 외고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는 우리에게 매일 일상에서 진심으로 믿고 행하면 죽음에서조차도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비노바 바베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자비’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경계 없는 삶’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극복한 ‘일상의 수행’ 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의 자유로운 삶을 보면서 “명의가 되려 하지 마시고, 자기 전에 잠드는 본인의 모습을 그냥 지켜보세요.”라고 하셨던 정화 스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명의가 되겠다는 욕망을 버리면 나와 환자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상대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자연스레 들린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또 잠자기 전에 비노바가 했던 수행을 실천하면, 비노바의 평전을 읽고 제일 부러웠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능해질 것도 같다.
비노바 바베의 삶을 온전히 따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 중에서 공부를 통해 사상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매일 밤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나 시간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것 등을 일상에서 실천한다면 우리도 비노바 바베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진정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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