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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멸의 혁명가, 이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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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담 작성일13-08-06 00:12 조회7,15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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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멸의 혁명가, 이탁오
 
도담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이탁오

 
사대부들은 이지(李贄: 호는 탁오(卓吾), 1527~1602)를 잡아들이고 그의 책을 불살라 버려야 한다고 간언했고 신종황제는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이를 즉시 처리하도록 비준했다. 그런데 참 오묘하게도 사대부들이 불살라야 한다는 이지의 책 제목이 ‘분서(焚書)’ 즉, ‘불살라야 할 책’이었다. 이지가 저술한 책 중에는 ‘장서(藏書)’라는 것도 있다. 이름 그대로 ‘감춰야 할 책’이다. 이지는 왜 태우거나 감춰야 할 정도로 위험한 책을 써야 했던 것일까? 그리고 책 내용이 대체 어떻길래 예법과 형식을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이 법질서를 어기면서까지 이지를 처벌하라고 그토록 광분한 것일까?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에 맞서다
 
이소룡.jpg                  공자맹자.jpg
 
때는 원나라를 물리치고 한족의 지배를 회복한 명 왕조였다. 이민족을 몰아낸 주원장에게 가장 시급한 목표 중 하나는 원대 이전의 당, 송 문화를 회복하여 한(漢) 문화를 우뚝 세우는 일이었다. 그 일환으로 명 왕조는 송대 문화의 핵심인 성리학 중심으로 교육정책을 시행했으며 송대 유학이 계승한 공자 사상을 어느 시대보다 높게 평가했다. 그래서 국립대학에 사당을 지어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자를 ‘지극히 성스러운 스승’이라는 가장 영예로운 칭호로 숭배하도록 했다. 명초의 이러한 정책 탓인지 중기의 이학(理學)은 점점 교조적으로 도식화 되어갔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엿 볼 수 있다. 이지에 대한 사대부들의 광분은 이러한 시대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이지가 공맹(공자와 맹자)을 등지고 정주(정자와 주자)를 헐뜯어 풍기를 문란하게 하며 혹세무민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공, 맹, 정, 주는 한 치의 빈틈도 허락되지 않는 견고한 땅이었고, 그 땅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던 이지는 이단과 다름없었다. 이지의 그러한 시도는 12살부터 시작됐다. 그는 서당의 훈장인 아버지로부터 학생들과 함께 글을 배우고 있었다. 하루는 이지의 아버지인 이백제 선생이 공자의 일화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공자)의 제자 번지가 농업을 배우려는 것을 소인이라고 책망한 공자야말로 사체(四體)를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노동하지 않고 밥 먹으며, 씨 뿌리지 않고 농사하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십니까?” (이지, <신용철, 『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자유인, 이탁오』, 지식산업사> 재인용)
 
 
이로부터 시작된 공자에 대한 그의 불손한 태도는 50대에 이르러 운명적 선언으로까지 이어진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였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이지, 『속 분서』, 한길사, p423)
 
따라 짖었던 대상에는 주자도 있었다. 주자의 형이상학 체계는 ‘태극(太極)’이라는 일자(一者)적 ‘리(理)’에 근원을 두고 있다. 주자에 의하면, 만물은 이 근원적 일자인 태극으로부터 생성되었다. 인간의 본성(性) 역시 그렇다. 주자는 본성의 가장 온전한 모습인 태극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보았다. 즉, 생각과 희노애락이 싹트지 않은 ‘미발(未發)’의 고요함을 간직해야 인간이 우주의 근원적 일자(天理)를 간직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고요한 마음으로 엄숙하고 공경스런 태도를 가져야 하며 마음의 파장을 야기하는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른바 ‘존천리 거인욕’라고 알려진 주희의 이와 같은 이론을 이지는 잘못된 것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애초에 사람을 낳을 때 오직 음양 두 기(氣)와 남녀 두 명(命)이 있었을 뿐, 이른바 ‘일(一)’이니 ‘리(理)’니 하는 것이 없었는데 어떻게 ‘태극’이 있겠는가? ... 만약 이(二)가 일(一)에서 생긴다면, 일은 또 어디서 생기는가?”
 
이러한 사유는 상당히 도발적인 것이었다. 왜냐면 하나인 태극은 하나의 황제로 귀환되는 일자의 정치적 질서로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공맹정주에 맞서는 것은 정치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반체제적인 이지의 행보를 정치 권력자들은 매서운 눈으로 예의주시 했다. 어쩌면 그 불편한 시선 속에서 이지의 고난이 이미 예고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양명도 불교도 아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이지의 이러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양명학과의 만남과 관련이 있다. 이지는 40세에 북경에서 예부사무라는 한직에 종사했다. 이 보직의 급료는 너무 적어서 그는 항상 곤궁하게 지내야 했다. 게다가 관료들은 권위적이고 부조리했다. 이지는 이들과 늘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고통을 받았다. 이 무렵 이지는 반주자학적인 새로운 사상, 즉 양명학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학문과 더불어 평생의 도반인 ‘초횡’과 ‘경정리’ 그리고 양명학파의 거물인 ‘왕간(심재)’ 등을 만났다. 양명학은 이지에게 하나의 돌파구였다. 왕양명은 주자의 이학(理學)에 반대하여 심학(心學)을 주장했다. 심학은 “마음이 곧 리(理)”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주자의 리(理)가 사물의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속성인데 반해, 양명의 리는 자기의 마음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속성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양지(良知)’라 불리는 마음 안의 리(理)를 자각할 수 있다면 누구나 성인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성인은 거리에 가득 차 있다.”고 양명은 말한다. 하나의 군주로부터 시작된 위계적 질서 안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양명의 이러한 사상은 이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서민이라고 해서 낮은 것도 아니고, 제후나 국왕이라고 해서 높은 것도 아니다.” 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과 통한다. 그러나 공자를 대단히 존경하고 유학의 도통을 이었다고 자부한 왕간과는 달리 이지는 공자의 독존적 지위와 성리학자들의 유학적 도통을 전면 부정했다. 그런 점에서 이지의 반시대적인 사상은 양명학으로 대변될 수 없다.

그런가하면 불교의 학설을 깊이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지는 불교 역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초횡과 함께 공맹 유학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훗날 불교에 귀의해 살았지만 불교의 법식을 따르지 않았다. 이지의 삭발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루는 더위가 심했다. 머리가 가렵고 비듬까지 날리게 되자 이지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삭발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삭발을 할 때 수염은 남겨두었다. 승려는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 이지는 삭발을 하고 수염을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승려도 아니고 유가도 아닌 셈이다. 마성에 있는 지불원이라는 사찰에서 화상 노릇을 하던 시절, 이지는 부처상 옆에 공자상을 가져다 놓고 함께 공양하기도 했다. 부처와 공자 그리고 사찰에 모셔진 도교의 토지신까지, 유불도 삼교가 회통하는 모습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이지는 공맹 정주로 이어지는 유교의 정통 사상에 정면으로 대립했지만 그를 양명학자라 하기도 불교도라 이르기도 어렵다. 때문에 이지가 분서 등의 불온한 서적의 집필을 감행했던 이유를 특정 종교나 학파에 대한 신념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지의 사상은 오히려 어떤 프레임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부란 그런 것이 아닐는지. 처음엔 자기 몸에 그 공부의 형식을 구조화시키는 것으로 배움을 시작하지만, 그 틀을 익힌 후에는 형식과 틀을 부수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 그러한 학문적 자유에 대한 열망은 계속해서 기존의 세계를 깨뜨려야 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 길은 참으로 험난할 것이다. 사람들의 질타를 받기도 하고, 때론 자기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에 내 몰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부가 깊어지면 이런 것도 달게 겪지 않겠는가. 자기의 사유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거침없이 항해할 수 있다면 말이다. 공부하는 자에게 그 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을 터이니.   
 
 
질문하지 않고 얻은 앎
 
이지의 대한 사대부들의 분노는 이지의 반유교적인 사상 때문이었겠지만 이지는 오직 유교를 반대하기 위해 이토록 위험한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이지가 부정한 것은 유교만이 아니라 어떠한 의문도 없이 대세를 따르는 모든 앎에 대해서이다.
 
“배우는 사람이 의문을 품지 않으면 이를 큰 병통이라고 한다. 의문이 있어야 그것을 누차 깨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의문을 깨뜨리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다.” (매담연에게 보내는 편지, < 옌리에산, 이탁오 평전, 돌베게, p256 재인용>)
 
그것이 유교적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준칙을 가지고 자득할 수 있는지 아니면 개처럼 따라 짖는지, 그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다들 선하다고 믿는 이야기들도 그에게 가면 추한 본질을 드러내고 만다. 도간의 이야기도 그런 사례이다. 도간은 가난한 집안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하루는 세간에 이름이 알려진 ‘범규’라는 사람이 그 집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도간의 집이 워낙 가난해서 범규의 일행들을 다 대접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담씨는 다른 집으로 가려는 일행을 붙잡아두라고 도간에게 당부한 뒤 그녀의 긴 머리를 잘라 먹거리를 사왔다. 그리고 모두에게 정갈한 식사와 차를 대접했다. 도간은 다음날 백 리까지 범규 일행을 배웅했다. 범규는 도간에게 자신이 낙양에 도착하면 이 신세를 꼭 갚겠다고 말했다. 이 후 도간은 범규의 천거로 출세를 하게 되었다. 도간의 이 일화를 두고 이지는 “이 부인은 공명을 얻기 위해 자식을 가르친 것이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도간의 어머니는 오로지 공명을 쥐고 있는 사람을 위해 머리를 기른 것으로 이는 분명 권세에 빌붙어 아부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뭐 이렇게까지 까칠한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지가 의도하는 것은 도간의 일화에서 악한 마음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의심 없이 믿고 있는 선에 대한 수동적 판단을 전복하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지의 비판 대상이 되는 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은 편할 리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지는 삭발 에피소드와 같은 기이한 행적을 서슴지 않았다. 이지의 삭발 소식은 꽤나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지는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고을에서 유교적 예교의 모범을 보여야 할 62세의 전직 4품관이었다. 그 고을 사또이면서 친구인 등정석이 이지를 찾아와 매우 애처롭게 흐느끼며 다시 머리를 기르라고 간청했다. 그 정도로 이지의 괴이한 모습의 삭발은 미풍양속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사대부들의 심기를 건들인 것은 여성에 대한 태도였다. 사대부들이 여성과 관계를 갖는 일은 정식 혼례를 하거나 기녀나 노비와의 위계적 관계, 이 둘 뿐이었다. 이 이중적 관계를 벗어난 모든 것, 예컨대 양갓집 여자와 비공식적으로 왕래하는 일은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사회적인 문제였다. 이지는 황안에서 살던 시절 알고지낸 매담연이라는 비구니가 있었다. 담연은 마성의 명망 가문에서 출생했다. 바로 매국정 어사의 둘째딸이었다. 이런 가문에서 출가를 허용하는 일이 드물었으나 매국정은 호방한 사람으로 예교에 구애받지 않았다. 과부가 된 둘째딸 담연이 정신의 해탈을 구하고 불법에 귀의하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담연은 이지와 부친과의 서신을 왕래하며 이지를 알게 되었고 그 후 이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당시 이 사건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커다란 사회적 이슈였다. 귀한 가문의 여자와 비공식적 교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남사스런 일인데다, 여자의 신분으로 학문을 하는 것 또한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지는 성별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재능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다면 여성이라고 해서 스스로 비하할 필요가 없고, 그 아버지 입장에서도 단지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지, 『초담집』< 옌리에산, 이탁오 평전, 돌베게, p255 재인용>)
 
이지가 학문을 나누었던 여성들은 매담연 뿐만이 아니다. 담연의 자매와 동서인 선인, 명인, 징연, 자신, 무영(모두 법명) 등 모두 상류층 집안의 여인들이었다. 소문은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퍼졌다. 귀엣말로 소곤대는 이들의 가슴속엔 도덕적 분개가 끓어올랐다. 사람들의 이런 태도에 이지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듯 행동했다. 명인 등 여성들이 사람들의 입방아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오해를 씻으려 했다. 그러나 이지는 <명인에게>라는 편지에서 “지금 우리들은 이미 틀에 박힌 도덕의 범주를 벗어난 장부의 일을 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고 믿기를 기대한다면 바보가 아닌가!”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결국 이지를 감옥으로 가게 한 결정적인 상소의 내용이 되었다.

이지의 이 같은 도발적 공격의 대상 중에 경정향 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경정향은 이지의 절친한 벗인 경정리의 큰형이었다. 경정리와 경정향은 양명좌파로 알려진 태주학파에 속한 유학자들이었다. 이지는 관직을 사퇴하고 벗을 찾아 황안으로 왔다. 고향으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겠지만 그는 발길을 돌렸다. 거기서 경정리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의 나이 55세. 25년 관직생활을 접고 황안에서 머물기 시작할 그 무렵은 이지에게 중요한 학문적 전환기였다. 이지는 경정리의 집에 머물면서 독서와 저술을 시작했다. 경정리를 비롯해 나여방, 초횡, 주유당, 하심은 등,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을 익히고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여기서 이지의 평생 논적이 될 경정향을 만나게 된다. 처음엔 경정향과 아주 잘 어울렸다. 이런 평화스러운 관계는 경정리가 죽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경정리가 죽고 나서 경정향은 자기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지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자기 아이들이 이지의 반유가적인 사상을 본받을까 싶어서였다. 이들의 충돌은 하심은의 죽음과 관련해 증폭되었다. 이지는 경정향에게 분개를 느꼈다. 평소에는 인의도덕을 외치면서 수십 년 지기의 친구가 사지에 빠졌는데도 앉아서 보기만 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한 술 더 떠서 경정향은 하심은의 제단을 차려놓고 ‘양자초혼사’를 목청껏 외쳤다. 이지는 경정향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에 구역질을 느꼈다. 이때부터 이지는 경정향과 사상적 논쟁을 시작했다. 경정향의 아이들 교육문제에서 유가의 인의와 도덕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주고받은 편지만 몇 만자가 되었다(이 기록이 『분서』에 실려 있다). 이때의 상황을 황종희는 “경정향은 명교를 중히 여기고, 탁오는 진기(眞機)를 안다”고 언급했다. 경정향은 윤리와 예교를 중시 여기고 이지는 심성의 본질을 꿰뚫는다는 것이다. 이지의 편지는 “천하의 거짓된 학자들의 간담을 모두 서늘하게 했”다. 헌데 경정향의 성정은 그 시대의 다른 사람과 특별한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지의 위험한(?) 발언은 ‘하심은 사건’으로 한를 품게 된 경정향에 대한 일침이기도 했지만, 공맹 안에 갇혀 사는 그 시대의 학자들에게 보내는 준엄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논리적 궁지에 몰린 경정향은 제자들에게까지 분서의 내용을 반박하는 글을 쓰도록 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지에게 화가 닥친 원인이 경정향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경정향의 수석 제가인 채의중이 한림원 서길사가 되면서 인맥을 이용해 상소를 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의 진위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지의 도발적인 주장에 대한 불편한 심리가 대개의 사대부들의 공통된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모든 앎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면 삶의 태도와 윤리가 매뉴얼처럼 고정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윤리 안에 자기를 가두고 몸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욕망을 억압한다. 그러나 표면에서 거세된 욕망은 내부에서 은밀하게 자라나 결국 이중플레이를 유도한다. 이지는 이런 무리들을 ‘가짜 도학자’라 불렀다. 이들은 욕망을 숨기고 공맹과 정주를 무작정 따라 살지만 실제로는 널리 명예로운 이름을 얻어 부귀를 누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질문 없이 존중되는 ‘존천리 거인욕’이야말로 그 시대에 가장 견고하게 묶여있는 노예적 앎이었다.
 
동심(童心) 혹은 자연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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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는 ‘나는 한 마리 개였다’고 운명적 선언을 했다. 이 뼈아픈 자기부정은 스스로가 노예적 앎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지성을 지탱하고 있는 기존의 도리와 견문을 통째로 버려야 했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동심설’이다.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眞心)’이다. 만약 동심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요, 동심은 마음의 처음 모습이다. 대저 최초의 마음이 어찌하여 없어질 수 있는 것이랴! 그러나 동심은 왜 느닷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원래 그 시초는 듣고 보는 것(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안에서 사람을 주재하게 되면 동심이 없어지는 데서 발단한다. 자라서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사람의 내면을 주재하게 되면 어느덧 동심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지,『분서1』,한길사, p348)
 
어린 아이의 마음라면 도리와 견문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래서 마음을 억압하는 어떠한 학문적 전제와 예법에도 묶여 있지 않는다. 예컨대 동심으로 보면, 논어도 맹자도 육경도 더 이상 초월적 경전이 아니다. 도적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호전 또는 점잖지 못한 잡극과 함께 뒤섞여 있는 글일 뿐이다. 한 때 이지의 식솔들까지 먹여 살렸던 경정향을 향해 이지가 서슴없이 논리의 칼을 들이댄 것도 이런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신세를 졌다 할지라도 공맹과 정주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에 동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정향에게 도리와 견문은 매우 중요한 삶과 학문의 전제였다. 그 전제를 엎은 이지의 행동에 경정향은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나 서운함은 점차 증오로 바뀌어 갔다. 도리와 견문을 버리고 아무런 편견과 전제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은 때론 이렇게 증오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도리와 견문을 버리지 않고 동심을 갖기는 불가능하다. 이지는 도리와 견문이라는 스스로의 억압을 벗고 동심 안에서 펼쳐지는 자연지성(自然之性)을 선택했다. 자연지성은 인욕의 억압에서 벗어난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을 뜻한다. 이지는 “자연지성이 바로 자연스런 진짜 도학”이라고 주장했다. 성색(聲色)과 부귀를 좋아하고, 삶에 연연하고 죽음을 두려하는 것이 모두 사람의 자연지성이니 이는 아주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므로 억압하고 숨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욕을 교묘하게 속인 ‘가짜 도학자’와 비교할 수 있는데, 따라서 이지는 당연히 이런 도학자들이 고취하는 ‘정절의 도덕’에도 찬성하지 않았다. 남녀 간의 정절뿐만이 아니라 군주에 대한 정절에도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간언하다 죽는 것이야말로 절대 불필요하다고 이지는 생각했다. 이런 행위들은 자연지성에 위배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자연지성대로 살기 위해서는 기존의 도덕과 상식을 벗어버려야 하는 반시대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소멸에서 혁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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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디 반시대적인 용기만 필요하겠는가. 자연지성을 억압하는 자기 안의 다른 욕망을 소멸시키는 결단도 있어야 한다. 욕망의 소멸을 통해 자연지성을 획득한다는 말이 어쩌면 모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지성은 모든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지성은 어떠한 기존의 도리와 견문도 개입될 수 없는 자유로운 지성의 장이다. 따라서 자연지성의 욕망과 도리, 견문의 욕망은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흔히 많은 욕망들이 뒤섞여 있다. 먹고 싶은 욕망과 살을 빼고 싶은 욕망,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욕망과 건강해지려는 욕망 등.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것이다. 절실하다면 하나의 욕망을 위해 다른 욕망은 소멸시켜야 한다.

이지가 관직을 사퇴하고 벗을 찾아 황안으로 왔을 당시, 고향으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겠지만 그는 발길을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리로 임관되면 바로 그 벼슬 때문에 속박을 당한다.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도 곧장 그 부(府) 현(縣)의 관리 나리들에게 속박당하고 만다. (...) 그저 남들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벼슬을 버렸고 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나의 본심이자 진실한 뜻이다.” (이지,『분서2』, 한길사, p151)

이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북경 국자감 박사시절에 이지는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그때 흉년이 와서 처와 자식들은 심각하게 곤궁한 처지에 놓였다. 결국 두 딸이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아! 인생이 이토록 괴로운 것이란 말인가”라고 울부짖었다.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그에겐 또 다시 겪게 될지도 모르는 비참한 상황을 가슴속에 묻고 가야 하는 가슴 아픈 결정일 것이다. 때문에 “그저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귀찮은 정도의 쉬운 감정이 아닐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지가 가족을 저버렸다고 윤리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살을 떼어내는 고통을 느끼며 가족을 떠나야 했던 이지의 심정은 그만큼 처절했을 것이다.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지가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자연지성’이었다. 공맹과 정주의 기득권을 스스로 해체한 이지에게 일개 관리의 간섭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억압이었다. 그러나 공맹과 정주보다 현실적으로 더 강한 그들의 권력과 맞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족과 헤어지는 극단의 결단을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혈육을 떼어내고 공맹을 부정하고 부처를 농락한 그 앞에 두려울 것은 없었다. 시퍼런 날을 세운 붓으로 성인들을 재해석하고 사대부들을 공격했다. 그것이 장서와 분서로 엮어져 나왔고 금서임에도 사대부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기존의 인식의 기반을 흔드는 촌철살인 같은 말과 글, 그것이 이지에겐 자연지성이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그는 스스로를 부정했고 크고 작은 인연의 사슬을 끊었다. 이는 자기를 소멸시킴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혁명적 선택이었다. 그 스스로의 선택은 육신의 소멸로도 이어졌다. 감옥에서 그는 머리 깎을 칼을 달라고 한 뒤 그 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시자가 놀라 황급히 이지를 침상에 눕히고 울먹이며 말했다. “대사님 아프십니까?” 이지는 대답이 없었다. 시자가 또 물었다. “왜 이렇게 고통을 택하십니까?” 이지가 처량한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일흔 노인네가 무얼 바라겠나!” 숨이 이틀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극심한 고통 속에 있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 1602년 3월 16일 자정 무렵이었다. 이 마지막 자기소멸은 수많은 개인과 사회의 자기혁명으로 이어져왔다. 5.4 신문화운동 때도, 사회주의를 세울 때도, 이지는 중국 혁명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그리고 또 수많은 개인의 소멸과 혁명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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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자님의 댓글

떡자 작성일

칼끝, 벼랑끝에서 치열함으로 일관한 이탁오의 삶과 학문이 참으로 예리하면서도 슬프게 와 닿습니다. 물론 죽음의 모습이 저같은 범인에게는 이해키 어렵지만 자연사하는 도인의 표상 또한 깨어지는 한 장면같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이탁오에게 육신의 고통이 무에 그리  어려울까도 싶고 자기소멸의 한 정점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명도님의 댓글

명도 작성일

긴~ 글 잘 읽었습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지조와 자기고집이 있는 이탁오의 학문세계가 놀랍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감옥에서 삭발하는 칼로써 자기 목을 찌르는 자학행위가 玉에 티처럼 남는군요.
자연死하고 좌탈입망하는 도인의 모습이 인상적인데,이유는 있었겠지만 스스로 자학행위는 도인의 행동은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