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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민동락의 정치철학자,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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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달집 작성일13-08-20 15:12 조회8,1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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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치철학자, 맹자
    
 

이영희(감이당대중지성 3학년)
 
 
땅을 다투는 전쟁이 쉼이 없어 온 들판에는 시체들로 가득 찼고, 성을 다투는 전쟁으로 인해 성안에는 죽은 사람들로 그득하다.”(맹자, 이루 상14)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맹자는 역사적으로 전국시대 한가운데를 산 인물이다. 전국(戰國)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이 시대는 나라들 간의 전쟁이 일상이 된 시대다. 여기에는 죽임과 죽음의 기운이 자욱하다. 죽임과 죽음을 제 이름으로 삼은 시공간을 지나는 동안 맹자는 사람이란 무엇이고, 과연 사람과 짐승이 무엇이 다른가질문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여 그가 사람에게 짐승과 다른 점이 드물다”, “짐승을 먹이느라 사람의 먹을거리를 탈취하고 급기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이 시대가 나는 두렵다고 개탄했을 때 그 막막한 심정이 전해온다. 그 말 속에는 인간의 처지에 대한 아픔과 세태에 대한 공포, 인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묻어있다.
이 시대, 이른바 백가쟁명(百家爭鳴)’으로 알려진 사상들은 책상 앞에서 인간과 사회를 관념적으로 논한 철학이 아니다.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에서 빚어진 그야말로 처절한 몸부림의 철학이다. 그 중에서도 맹자는 이 공포의 시대를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기’[與民同樂]를 시대적 사명으로 삼았다. 그가 이와 같은 사명을 기꺼운 마음으로 짊어질 수 있도록 한 두 사람. 그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와 공자다.
    
 

맹자철학의 싹 :아들아, 수덕의 길을 가라
 

주지하듯이 동서양의 고대 인물들은 대부분 당대 작성된 신상기록이 없다. 따라서 정확한 연대기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맹자는 특히 그렇다. 맹자의 경우 맹자에 진술된 내용과 사마천의 사기(史記), 후한(後漢) 학자 조기(趙岐)맹자제사(孟子題辭), 청나라 학자 적자기(狄子奇)맹자연표(孟子年表)를 참고한다. 여기서 정확성을 따질 요량이면 할 말이 없다. 모든 텍스트는 누군가에 의해 굴절된다. 기억이든 역사든 언제나 현재에 의해 날조되기 마련이다. 사실 본래의 고유한 것이 있기나 한 건지 되묻고 싶다. 대신 굴절되고 조작된 것 속에서 진실게임은 존재한다. 추정한 맹자의 연대기에서 우리는 어떤 현재를 창조할 것인가? 다만 문제는 여기에 달려 있다.
맹선생의 성은 맹()이고 이름은 가(). ()나라 사람인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맹자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수두룩하다.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서부터 맹모단직지교’(孟母斷織之敎)까지. 거의 다 맹자의 교육에 관련된 일화다. 이 일화들 속에서 우리가 건질 것은 고증이 아니다. 어머니와 맹자의 관계다. 전한(前漢) 말의 학자인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에 수록된 맹모단직지교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어린 맹자가 유학하다가 도중에 중단하고 돌아오자 모친이 짜고 있던 베틀의 씨줄을 자르면서 말했다. “네가 공부를 도중에 그만두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씨줄을 끊는 것과 같다. 여자가 생업인 길쌈을 포기하는 것은 남자가 남자로서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한 수덕(修德)의 길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남자가 되어 공부를 중단하면 도둑이 되든가 남의 밑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는 길밖에 없다.” 그 길로 어린 맹자는 다시 공부하러 떠났다고 한다. 이렇게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리 강했던 모친 밑에서 학문의 중요성을 교육받은 맹자는 열다섯이 될 무렵 노나라로 유학을 떠났다.(맹가 맹자, 안외순 옮김, 책세상, 172)
그동안 우리는 이 일화를 보편적이고 예외없이 이렇게 읽어 왔다. 하긴 요즘같이 엄마의 정보력이 아이의 성적과 대학을 결정한다고 믿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 견해는 일방적으로 엄마의 관점만 제시하고 있다. 그것도 고작 교육열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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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답식 논리에서 한걸음 나가 맹모의 말에 주목하자. 맹모는 맹자에게 남자로서의 길, 즉 수덕의 길을 가라고 다그친다. 입신양명하여 출세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갈고 닦는 공부를 하라는 것. 만약 그렇지 않고 자신을 버려둔다면 남의 것을 훔쳐서 먹고 사는 도둑이 되든가, 남 밑에서 노예처럼 종속되어 살 수밖에 없다는 것. 어머니는 길쌈의 씨줄을 끊어버리는 파격을 보이면서까지 맹자를 독려한다.
맹자의 공부는 우리네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닦달하는 그런 공부가 아니다. 일단 여기서 차이가 난다. 이 작은 차이가 엄청난 간극을 만든다. 교육의 질도, 아이의 미래도, 어머니의 팔자도. 먼저, 자신을 갈고 닦는 공부이니 그 공부의 깊이야 엄청났을 것이고, 짱짱한 근기를 몸에 익혔으니 어떤 것에도 매임없이 자신의 길을 내달렸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 맹자는 그런 공부를 했고 그런 길을 갔다.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폈고 돌아가셨을 때 장례가 너무 거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맹자는 부모님의 장례는 지극한 정성으로 치르는 것이 좋다. 내가 듣기로는 당당한 군자라면 천하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부모님의 장례를 검약하게 하지는 않는다면서 자신은 어머니에 대한 예를 다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교육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그 출발점이다. 그래서 유가의 기본이자, 수신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관계는 부모자식간이다. 그 핵심에 사람다움(사랑), 곧 인()이 있다. 부모 자식 사이는 인의 배양처요, 그 동력은 효().
 

도응: ()임금이 천자였을 때 고요(皐陶)가 사법을 담당하는 관리로 있었는데, 만약 순의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살인을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맹자: 체포했을 것이다.
도응: 그렇다면 순임금이 저지하지 않았을까요?
맹자: 순임금이 어떻게 저지했겠는가? 고요에게는 맡은 직책이 있었다.
도응: 그렇다면 순임금은 어떻게 했을까요?
맹자: 순임금은 천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몰래 아버지를 업고 도망쳐 바닷가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즐거워하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
맹자, 진심 상35
 

세상에! 아버지가 살인을 해 벌을 받게 된다면 순임금은 아버지를 업고 줄행랑, 천하를 잊고 살 것이라는 맹자의 말씀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어떻게 임금이란 사람이 그럴 수 있지? 기가 막힌다. 하지만 맹자가 힘주어 말하는 지점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천하보다 중요한 것은 어버이에 대한 사랑이다. 왜냐? 천하 때문에 어버이를 버린다면 천하는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 건재할 수 없으니까. 아니 천하를 보전하기 위해 아버지를 업고 튄 것이다. 모든 사랑의 궁극적 원천은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다. 그 관계가 무너지면 사랑의 샘은 말라버린다. 그곳엔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난무한다. 모든 사람이 이익으로만 타인을 대한다면 세상은 결국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만이 남을 것이다. 그때 세상은 그 존립조차 위태로워진다. 그러니 맹자에게 이보다 더 절박한 문제는 없다.
사랑[]의 보존! 순임금이 아버지를 업고 튄 저간의 사정이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랑의 원류는 어버이의 사랑이다. 연인의 사랑, 부부 사이의 정, 형제간의 우애도 그 출발은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다. 하여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천하보다 귀중하다. 이로써 보건대 맹자와 어머니의 관계는 맹자철학의 저 밑바닥에 자리하는 싹이다. 그 싹을 틔운 사람은 어머니고 그것을 궁구한 사람은 맹자다. 교육의 대명사 맹모삼천은 허울 좋은 이름뿐, 그 이면에는 어머니이자 스승으로서의 관계가 숨어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은 이것이다.
    
 

도통의 계보 :나는 공자의 후계자다
 

맹자에겐 어머니 못지않게 중요한 스승이 또 있다. 그는 저 유명한 공자다. 중국문명의 서막을 장식하고 성인의 자리에 올라있는 그 분! 근데 의아해 하실 거다. 맹자가 공자에게 배웠나? 공자는 춘추시대 사람이고, 맹자는 공자 사후 백년 뒤의 사람인데 어떻게 제자가 된 거지? 그렇다. 맹자는 공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맹자 자신은 공자의 학문을 사숙(私淑)했다고 한다. 곧 독학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군자의 아름다운 유풍도 그 여운이 다섯 세대를 지나면 단절된다. 그리고 소인의 평범한 유풍의 여운 또한 다섯 세대를 지나가면 단절된다. 나는 직접 공자의 제자가 된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유풍이 단절되기 전에 그 유풍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배워 그것을 몸에 익혔다.
맹자, 이루 하22
 

앞서 언급되었듯, 맹자는 추나라 사람이다.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가까웠고 노와 함께 유가의 근거지였다. 장자』 「천하편에는 유가학파를 추노의 선비라고 일컬었다. 그렇다. 가까운 거리를 허투루 무시하지 말자. 지금 우리의 공간감으로 기원전을 빗대지 말자. 기원전 사람들이 느꼈을 공간감은 이 거리만큼 친근감을 만든다. 이 거리가 공자와의 인연을 불렀을지 모른다. 유가의 근거지에서 태어난 아이가 유가의 핵심에 있는 인물을 흠모하는 건 당연할 터. 그것도 수덕을 제일의 공부로 삼은 어머니의 아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 하여 맹자는 자신의 일생 사명을 공자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선포한다  

 
옛날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리자 천하는 태평해졌고, 주공이 오랑캐를 아우르고 맹수를 쫓아내자 백성은 안심했고,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했다. 나 역시 인심을 바로잡고, 간사한 학설을 종식시키고, 그릇된 행실을 배격하고, 궤변을 추방하여, 우임금·주공·공자 세 성인을 계승하려는 것이다. 내가 어찌 논변을 능사로 여기겠느냐(好辯)? 나로서는 부득이한 일이다.
맹자, 등문공 하9
 

공자의 일생 사명이 문왕과 주공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면 맹자는 성인(공자)의 시대로부터 멀지 않고, 성인의 고장과도 가까우니공자를 계승하는 일을 자신의 사업으로 여겼다. “내 소원은 공자를 배우는 일”. 맹자는 스스로 공자의 후계자임을 자처한다. 그것은 요()임금 이래 계승되어 온 도통의 계보에 공자를 이어 맹자 자신이 적통임을 밝히는 선언이다. 솔직을 넘어 발칙한 맹자의 포부! 이토록 맹렬하게 뿌리내린 자존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면면히 이어져 온 도()에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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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聖王)들의 도는 홍수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고, 오랑캐를 아울러 백성을 안심시키고, 춘추를 완성하자 난신적자가 두려워한도다. 특히, 맹자가 계승한 공자의 도는 춘추의 대의(大義)에서 나온 것일 터. 춘추는 춘추시대 노() 은공(隱公) 원년(元年, BC 722)에서 애공(哀公) 14(BC 481)까지 12대에 걸쳐 242년 동안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역사책이다. 공자가 노()에 전해지던 사관의 기록을 직접 편집하고 수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추에서 공자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지나면서 희미해진 성왕들의 제도를 바루고 그 근거를 부여했다. 이른바 정명론(正名論)’.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계급이 붕괴된 상황에서 나온 공자의 최선책이었다.  

 
제경공(齊景公)이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되는 것입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훌륭한 말씀입니다. 정말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고 한들 임금인 나 역시 어디 제대로 얻어먹을 수나 있겠습니까?”
논어, 안연11
 

각각의 이름들은 그것대로 바른 뜻이 있다. 그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그 사물의 본질 혹은 개념이다. ‘임금이라는 이름의 바른 뜻은 임금을 임금이게끔 하는 본질이다. 공자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당시의 세상을 목도하고 감개한 나머지 이를 바루고자 하였다. 이름을 바르게 함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하고 예()를 회복하고자 한 것. 그것은 문왕과 주공의 도를 잇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증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느니라.
증자가 대답하였다. “!”
공자가 나가자, 다른 제자들이 증삼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다!”
논어, 이인15
 

충은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것에서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남도 통하게 하는 것이다. 서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실로부터 남도 싫어할 것이라고 이해하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충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점검하는 성찰과정이고, 서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충과 서를 실행하는 것은 인()을 실행하는 것이다. 자기를 성찰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인이 실현된다는 것. 증자에게 말한 공자의 일관된 도가 충서라는 말은, 공자의 도가 곧 인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공자에게 이어받은 이 도를 왕도’(王道)라 표현했다. 성왕들의 도를 잇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왕도정치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다. 그 핵심은 통치자의 선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확인되어야만 왕도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 인과 충서에 대한 공자의 논의는 자신의 마음이 가진 내적 가능성이 세상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그래서 주로 개인적인 수양에 국한되었지만, 맹자는 그것을 정치·사회·교육·철학 등 전 분야에 응용했다. 왕도정치는 맹자의 사업이었고 꿈이었다. 또한 공자의 뜻을 계승한 맹자의 변주곡이었다.
   
 

천하주유의 길 :군주여! 이 마음을 확충하소서.”
 

사십대에 접어들자 맹자의 학문은 이미 정점에 올라 있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체계화·집대성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맹자는 공자가 그랬듯 때를 알았다. 도를 세상에 펼칠 때가 도래한 것이다. 공자와 회통해버린 맹자에게 거리낄 것은 없었다.
당시 천하는 천자국 주() 왕실의 위상은 온데간데없고, 부와 군사력을 앞세워 온갖 쟁탈을 일삼던 전국시대의 한복판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곱 나라의 강대국이 천하를 농단하던 전국 칠웅의 할거시대였다. 소진과 장의의 합종연횡술(合縱連衡術)과 같은 각종 책략들이 고안되고 제 한 몸 챙기려는 양주의 극단적인 개인주의[爲我], 혹독한 극기를 통해 평등한 사랑, 평등한 공동체를 꿈꿨던 묵자의 사해동포주의[兼愛]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맹자는 이러한 사회정치적 경향들이 모두 근본적으로 천하를 위협하는 위험한 사조로 인식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먼저, 스스로 천하를 주유하면서 당대 최고 권력자들을 만나 자신의 정치철학을 설득시키는 것이었고, 다음은 그릇된 학설이라고 판단되는 학설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맹자는 천하주유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고국 추나라 목공을 만나 자신의 정치를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추나라 목공은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백성들이 모두 수수방관했을 정도로 정치적 신망을 잃은 인물이었다. 맹자는 목공이 결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할 수 있는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고국을 떠났다.
그후 제나라로부터 송, , 등나라를 왕래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익히고 송견, 윤문 등 학자들과 교제하면서 정치적 횡보를 넓혀갔다. 마침내 오십대에 이른 맹자! 55세에 천하주유의 길로 들어선 공자와 같이 유세를 위한 편력을 시작했다. 수십 대의 수레에 책과 살림살이를 가득 싣고 수백 명의 종자들을 거느린 대규모 정치유세였다.
양혜왕을 만나고 2년 뒤 혜왕이 죽자 그의 아들 양왕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양왕은 군주다운 기상이 없었다. 이에 실망한 맹자는 양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드디어 제선왕을 만났다. 사실 제선왕은 맹자의 사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맹자라는 책에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맹자에 나오는 군주와의 대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제선왕과의 대화다. 또 그만큼 적나라한 대화를 나눈 군주도 없다. 그 대화에는 맹자가 이루고자했던 왕도정치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 그만큼 기대가 컸던 인물이었다 

맹자 말씀하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곧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갖고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인인지심을 가졌다고 하는 까닭은, 지금 누구든 어린 아기가 우물로 엉금엉금 기어들려는 것을 보는 순간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퍼뜩 구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 이를 볼 때, 측은한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곧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의 실마리요, 수오지심은 정의()의 실마리이다. 무릇 사람이라면 모두 인과 정의의 실마리를 갖췄기에 누구나 그것을 키우고 또 채울 줄을 알게 마련이다.”
맹자, 공손추 상6
 

맹자가 말한 왕도는 인정(仁政)이다. 인정의 근거는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에 있다. 이 사실은 곧 누구든지 인정(人情)을 베풀 수 있고 인정(仁政)을 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맹자는 제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가 벌벌 떨면서 사지(死地)로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자, 이 마음이면 충분히 왕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단정하며 말했다. “이 마음을 그대로 남에게 적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따라서 은혜를 확충하면 온 세상을 보살피기에 넉넉하지만, 은혜를 확충할 줄 모르면 처자식조차 돌볼 수 없게 됩니다. 옛 성현이 남보다 크게 뛰어났던 까닭도 오직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잘 확충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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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그 마음을 바탕으로 맹자는 인간본성의 선함을 주창했다. ()은 다시 사단(四端) ,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으로 일컬었다. 사단 역시 똑같이 선한 마음이다. 맹자는 사단이 모두에게 있는 만큼 확충할 수만 있다면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성인은 천지의 선함과 나의 선함이 일치된 사람이다. 그래서 맹자가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요구한 건 이 사단의 확충이다
하지만 선왕은 끝내 무력으로 백성을 강제로 복종하게 하는 패도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연나라를 치는 것도 모자라 약탈과 파괴로 민심을 크게 잃고 말았다. 맹자는 제선왕을 질타하고 제나라를 떠난다. 제나라를 떠나는 맹자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군왕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마치 상갓집 개와 같았다던 공자의 모습이 포개진다.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해 돌아보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맹자의 아쉬움. , 왕도정치를 향한 그의 열정은 이대로 식어버리는 것인가!
하지만 제선왕과의 결별은 맹자의 생애에, 아니 맹자저술의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다. 현실정치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현시킬 수 없다면 다른 식으로 돌려야 한다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 그 뒤 송, , 추나라를 거쳐 등문공의 초대를 받았다. 다시 노나라 평공이 접견을 원했지만 장창의 모략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맹자는 이것을 천명으로 인식하고 천하주유의 막을 내렸다.
  
  

왕도정치의 해법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라
 

맹자는 20년 동안 천하를 편력했지만 자신의 정치를 함께 펼 군주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한 현실은 맹자도 어쩔 수 없는 천명에 속하는 일. 이후 맹자는 현실 정치와 완전히 담을 쌓는다. 대신 고향으로 돌아와 남은 생애를 제자들과 함께 시경서경을 읽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방! 맹자를 저술한다.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맹자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맹자라는 책을 통해 그의 도는 후세에 전해졌다. 대반전! 결국 그의 꿈은 좌절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맹자라는 책 속에 그가 구상한 새 문명의 비전이 시대를 초월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거울삼아 맹자가 제시한 왕도정치의 해법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이었다. 맹자에게 백성은 군주와 더불어 국가를 구성하는 한 주체다. 군주는 다만 백성에게 통치권을 위탁받았을 뿐이다. 왜냐? 군주나 백성이나 똑같은 사람이다. 위대한 성왕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면, 다 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랑의 마음(仁心)이 이를 증거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불가다! 당시 모든 권력은 군주와 그의 가문에 속한 것이었다. 하지만 맹자에게서 군주는 통치권을 가질 뿐, 주권은 백성에게 귀속된다. 군주는 농사꾼이 제 직분에 충실하듯, 포도대장이 제 직분에 충실하듯, 국가관리를 충실히 수행할 때에 밥을 먹을 수 있는, 한 직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맹자에겐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백성과 더불어라는 여민(與民)에는 이같이 횡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그런 관계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동락(同樂), 서로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자율적인 관계를 맺는 예()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군주는 백성을 하늘과 같이 여기고 함께 더불어 즐기라는 것. 지금 들어도 가히 혁명적인 멘트 아닌가? 그런데 이걸 기원전 4세기에 군주를 코앞에 두고 예의 그 적나라한 직설화법을 날렸으니 듣는 군주는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그래서 준비했다. 정말 통쾌한 맹자의 직설화법. 

 
맹자가 제선왕에게 말했다. “여기 가족을 친구에게 맡기고 먼 나라로 떠난 신하가 있습니다. 돌아와 보니 맡겼던 가족이 추위에 얼고 굶주려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선왕: 친구관계를 끊습니다.
맹자: 포도대장이 휘하 군졸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어쩌시겠습니까?
제선왕: 파면시켜야지요.
맹자: 나라 안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어쩌시겠습니까?
임금은 눈을 딴 데로 돌리더니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맹자, 양혜왕 하6
 

맹자의 여민동락은 그의 어머니와 공자, 시대를 공감한 정치철학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고 마음의 용법을 탐구한 맹자의 위풍당당 행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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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 ]을 차마 남의 아픔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惻隱之心]으로, 그 마음의 발화가 마을을 넘어 국가를 넘어 온 세상에 넘실대며 춤추게 하기[與民同樂]! 이것이 맹자가 꿈꾼 세상이다. 들리는가? 이 넘실대는 마음의 삼중주가. 보이는가? 이 위풍당당한 맹자의 행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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