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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者로 살았던 著者,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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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oong 작성일13-09-05 14:30 조회5,89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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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者로 살았던 著者, 보르헤스

풍미화 (감성대중지성 3학년)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속에서 죽고 싶지는 않아.”  
보르헤스는 1985년 파리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도시들 중 한 곳에서 숨을 거둘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도시는 한 무리의 친구들이 있는 도시들, 즉 제네바, 몬테비데오, 나라(奈良), 오스틴,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그중에 일본에 있는 나라는 목록에서 빼버렸다. 그에게 언어는 우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01.jpg
망구엘은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보르헤스의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책을 읽어준 사람이다. 보르헤스는 실명으로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이후로, 아무에게나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책을 읽어준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았다. 망구엘에 따르면, 마구잡이 독서광이었던 보르헤스는 때로 줄거리와 백과사전의 항목만으로도 만족했으며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독자로서의 즐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글쓰는 행위에만 매달리는 일은 보르헤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읽고 발견해내고 망각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쌓이게 되는 하나의 무한(無限)이었다. 보르헤스는 끝끝내 자신을 저자보다는 독자의 자리에 놓아두길 원했으며, 그래서인지 그의 집에는 그가 쓴 책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책을 한 번 쓰지만, 독자는 여러 번 읽기 때문에 책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의 것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글을 쓰는 도중에 잘못이 있어 경솔하게 쓰더라도, 읽는 행위는 절대 경솔하지 않다는 것이 독자로써 그의 지론이었다.


카발라와 無我체험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1986)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이다. 그는 작가 지망생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하는 커다란 서재가 있는 집에서 책벌레로 자라났다. 또한 영국 문화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부모님과 여동생인 노라, 그리고 보르헤스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집안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밖에서는 스페인어를 사용해야 했다. 이러한 이중언어 환경은 나중에 보르헤스가 미국에서 강연 활동을 하며 자신의 문학적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1914년에 아버지의 유전적인 실명을 치료하기 위해서 모든 가족이 유럽으로 떠났다. 거기서 보르헤스 남매는 자연스럽게 유럽식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는 유럽 여행의 두번째 목적이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유럽에서 독일어와 불어를 배우고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탐독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기 이전에 한 권의 작은 소설에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데,  그 책이『골렘』이었다.

『골렘』은 보르헤스가 유럽에서 만난 첫번째 독일어 책으로,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씌여진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신의 비밀을 알아낸 프라하의 한 랍비가 진흙으로 빚은 다음 생명을 불어 넣어 만든 피조물을 자신의 하인으로 부린다는 내용이다. 16세의 보르헤스가 소설『골렘』에서 받은 영감은 60세 되던 해에 쓴, 그의 대표시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골렘」으로까지 이어졌다. 소설에서 랍비는 너무나 불완전한 결점투성이 골렘을 차라리 없애버리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보르헤스의 시「골렘」에도 그런 대목이 들어있다. 

… 고뇌와 희미한 빛줄기 속에서 번뇌하며 
랍비는 자신의 골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프라하의 랍비를 바라보며
신이 느꼈을 혼란스런 감정을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

자신이 만든 불완전한 피조물들을 바라보는 신의 혼란스런 감정.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감정이다. 유일하고도 완전한 신이 만든 세상에 왜 이다지도 결점 많은 인간들과 악이 넘치는지에 대해 카발라 신비주의는 나름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고, 보르헤스는 카발라의 주장에 귀를 귀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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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라는 우주를 한 권의 책이라고 보았다. 카발라는 구약성서 앞부분의 모세 5경을 ‘성스러운 책’이라고 하여 우주에서 유일하고 완전한 원전으로 본다. 따라서 나머지 책은 전부 원전의 완전성을 결여한 모방이며, 우발적인 것이 된다. 또한, 카발라는 방사(放射)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세상의 악을 설명하는데, 무한한 신이 여러 개로 방사되는 동안 신성이 고갈된 상태에서 창조된 것이 세상이라는 설명이다. 이 세상은 신성이 최고로 부족한 하류신의 연습 작품이지, 무한한 지성의 정식 작품은 아니므로 무한한 그분의 신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신성의 허락을 통해 무한을 아주 잠깐 경험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카발라의 체계를 종교가 아닌 자신의 문학 안으로 가져온다. 무한한 지성인 한 권의 책에서 방사된 인간.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일종의 골렘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더욱 더 불완전하고 우연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우연한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완전성에서 방사된 것이므로 완벽하게 우연한 것은 또한 없다는 것. 이러한 생각은 보르헤스의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보르헤스는「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복권과 같은 우연이라고 말하는 듯 싶지만, 사실은 우연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치밀한 설계가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물론 거기에는 시간이라는 미로가 필요하다.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보르헤스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칼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에서 머물다가 1921년에 가족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동료들과 문예지와 잡지를 창간하고, 화가가 된 여동생이 표지를 디자인한 첫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을 출간했다. 오랜 외국 생할로 인하여 아르헨티나의 고유한 전통이 지닌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 청년 보르헤스는 구시가지를 자주 돌아다니고,  지역주의적 색채가 짙은 소재들, 예를 들면 ‘탱고’나 가우초들의 ‘칼싸움’ 같은 소재들로 글을 썼다. 또한 무명작가의 전기를 쓰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풍속사를 복원하기도 하였다. 동인들과 나누었던 문학 평론의 내용들은 아르헨티나 지역주의 문학 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는 문학에 있어서 유럽이라는 중심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지역적이고 대중적인 문학을 혐오하고, 이국적인 소재와 뜻하지 않은 결말의 환상 소설로 나아가게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변두리를 돌아다니던 이 시기에 겪은 無我 체험담은 그가 타고나기를 형이상학적이고 비지역적인 작가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렇다. 적막한 밤, 무늬없는 작은 토담, 원시림의 시골 냄새, 토속적인 흙길 등 순박한 광경을 자아낸 그 모습은 단순히 몇십 년 전 그 모퉁이에 있었던 광경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나 유사성을 뛰어넘어 그때와 똑같은, 바로 <그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동질성에 착안한다면, 시간이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어제라는 시간과 오늘이라는 시간 사이에 내재하는 무차별성과 불가분성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해체시키기에 충분하다.

개체성을 뛰어넘어 초시간적인 전체를 체험한 이러한 경험은 보르헤스의 근본 체험이 되어, 시간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그의 문학적 주제를 전개시키는 토대를 이루게 된다.  


문학, 誤讀으로 재창조되는 텍스트


그가 유럽에서 돌아왔을 당시에 이미 문학계는 순수파와 참여파로 양분되어 있었으나, 보르헤스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의 문학적 회의주의는 정치적인 면에도 이어져 정치 자체를 냉소하는 입장에 섰는데, 이것은 유전적인 실명병과 함께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다. 1930년을 전후로 여러 잡지에서 시와 에세이, 문학 평론를 쓰면서 활동하는 동안,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신진 작가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38년 성탄절 이브에 그는 커다란 사고를 겪게 된다. 여자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아까워서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 굴러 떨어져서 의식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패혈증으로까지 확대되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투를 벌인 끝에 의식을 회복한 보르헤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작가로서의 지적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읽어 주는 글을 듣고 “이해가 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린 보르헤스는, 그 다음부터 자기의 경험에서 길어올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주제로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보르헤스가 쓴  소설들은 실명병을 앓고 있던 남편과 아들을 평생 돌봐주며 그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어머니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첫 단편소설이「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였다. 이 작품은 이후에 포스트모더니즘 내지는 해체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사조에 영감을 주면서 수많은 평론가와 사상가들에게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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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문학이란 이전에 존재했던 글자들을 살짝 지워내고 그 위에 다시 쓰는 양피지사본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책은 앞서 씌어진 책에서 나온 것이다. 양피지 위에 새로 쓰여진 글자의 밑에는 그 전에, 혹은 더 이전에 씌여지고 지워진 글자들이 희미하게 남겨져 있다. 저자는 그 위에 자신의 상상을 덧붙이고 변형시키며 글자를 적어나가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저자이기 이전에 독자였으며, 이러한 독자의 해석이 이전의 글자 위에 겹쳐지는 것을 보르헤스는 문학이라고 보았다. 이는 문학 작품을 저자의 고유성과 결부시켜왔던 전통적인 원저자와 그의 작품이라는 개념에 수정을 요하는 일이었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주인공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소설『돈키호테』일부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똑같이 쓴다. 이로써 메나르는『돈키호테』를 읽는 독자에서,『돈키호테』를 쓰는 저자가 되었다. 소설에서 보르헤스는 메나르의 소설이 세르반테스의 소설보다 훨씬 풍요롭다고 말한다. 그들의 글은 씌여지고 읽혀지는 시공간이 다르고, 또한 그 글을 읽는 독자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소설인『돈키호테』는 독자들의 숫자 만큼이나 다양하게 읽혀지는 그 무엇(저자의 전지적인 고유성으로 인정받는 문학 작품이 아닌, 하나의 읽을 자료로써의 텍스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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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시간은 독자과 함께 새로운 글쓰기의 원천이 된다. 독자는 시간 속에 놓인각을 통해 誤讀에 이르고, 이러한 오독이 생산적인 글쓰기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독이란 저자 자신도 미처 모를 수 있는 텍스트의 내용성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텍스트에 숨어있는 의미들을 다양하게 찾아낼수록 텍스트의 내용은 더욱 풍성해진다. 우주라는 유일한 한 권의 원전에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나머지는 모두 방사된 것들이므로 텍스트들 상호간의 관계는 유기적이고 평등하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저자는 텍스트의 기원도 종결도 아니고 그저 손님으로서 텍스트를 방문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보르헤스가 죽을 때까지 견지한 문학적 태도이기도 했다.


강연자로 시작한 제2의 인생

흔히 보르헤스를 도서관 작가라고 부른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안의 작은 도서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찾아가서 백과사전을 들춰보던 유년시절의 국립도서관, 아버지 사후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9년 간 생계를 위해 보조사서로 일해야 했던 미겔 까네 시립도서관, 페론정권이 막을 내리자 반정부 지식인으로 탄압 받던 위치에서 일약 도서관장으로 명예회복을 시켜준 국립도서관.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거대한 하나의 책, 혹은 우주로 인식했다. 도서관은 그의 작업에서 질료에 해당하는 것으로 많은 작품 속에서 우주의 이미지로 등장하곤 한다. 책읽기를 통해 많은 이들의 꿈을 경험하고 글쓰기를 통해 자기 꿈을 조직하는 작업이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도서관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있었다. 페론 정권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보르헤스 자신은 시립도서관의 미관발직에서 시장통의 조류조사관으로 발령이 나고, 어머니와 여동생 마저 고초를 겪게 되자 보르헤스는 사표를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직업을 잃고 나니 처음에는 참 막막했다. 몇 달 전 어느 영국 노부인이 찻집에서 내게 점을 봐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얼마 안 있어 여행하고 강연하면서 돈을 벌게 되리라고 예언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드렸을 때,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고 말았다. 내가 대중 앞에 서서 말한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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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서 노부인의 점괘가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르헤스가 오랫 동안 글을 써왔던 <수르>의 발행인 빅또리아 오깜뽀가 그를 아르헨티나 영국문화협회의 영문학 교수로 추천했고, 그 뒤로 문학 강의 요청이 밀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무나 섬세하고 소심해서 연애 한번 그럴싸하게 못해봤던 남자였던 보르헤스에게는 대중 앞에 선다는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직이라는 힘든 고비가 아니었다면 결코 시도하지 않았을 모험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으로 강연장 뒷벽만 쳐다보며 하는 강의였지만, 정제된 언어로 치밀하게 구성된 그의 지성적인 강의는 청중들 사이에서 차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공을 들여 꼼꼼하게 강연 준비를 했으며, 어머니나 친구와 함께 강연장까지 걸어가면서 예행연습을 하였다. 강의 도중에 할 말이 떨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는 보르헤스를 보며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일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책하고 소통하는 세상을 중심으로 살다가 47살에 드디어 사람과 소통해야 하는 세상을 중심으로 인생을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망각과 망막 사이의 꿈


『칠일밤』에서 보르헤스는 불교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말한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망상이 바로 ‘자아’에 대한 생각인데, ‘자아’는 망상의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주체는 없음’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일련의 ‘정신적 상태’일 뿐이다. ‘나’라는 주체가 없다면 ‘장님인 나’라는 주체도 없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실명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업(카르마)을 이야기한다.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사건들이 ‘업’이라는 미묘하고 정밀한 ‘정신 구조’에 의해 미리 예정된 것이어서,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들은 자신의 전생에 의해 예정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적인 실명도 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장님이 깜깜한 세계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보르헤스가 말하는 실명의 세계는 ‘失明’이라는 말과는 달리 언제나 희미한 빛이 비추는 세계라고 한다. 주제 사라마구의『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눈먼 자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백색이었다. 보르헤스는 어둠 속에서 잠자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실명은 언제나 눈감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세상을 희미한 빛 속에서 읽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감각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보르헤스가 1955년에 국립도서관장이 될 무렵에는 두 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듬해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된 후에는 앵글로색슨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각을 잃는 대신 청각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그의 실명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삶의 한 방식이며 한 스타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실제로 자신의 집안에 유전되는 실명이라는 불행을 하나의 삶의 스타일로 받아들일 준비를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해왔다. 보르헤스는 꿈을 꾸는 사나이였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망각’이라는 시간과 점점 흐려지는 그 자신의 ‘망막’ 사이에서, 꿈꾸는 일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듯하다. 보르헤스는 어릴 때부터 실명에 대비해서 주요 텍스트들을 암송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언젠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읽지 못하게 될 구절들을 많이 외우고 있는 편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르헤스묘비.jpg그의 평생에 걸쳐 그와 문학의 꿈을 함께 나눈 여성들은 많았지만, 보르헤스의 삶 안에서 그의 고독과 외로움을 함께 나눌 사람은 늘 곁에 없었다. 보르헤스는 99세까지 생존했던 어머니의 과보호 덕분에 마음에 들었던 여성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고, 노년에 들어서 충동적으로 감행했던 결혼 생활도 짧게 끝내야 했다. 88세의 나이로 죽기 몇 달 전에 그것도 국외에서 서둘러 결혼신고를 함으로써, 비서로서 오랫동안 그의 말년을 지켜준 마리아 코다마라는 일본계 여성에게 그는 인간적인 신의를 보여주었다. 

보르헤스가 꿈꾸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저작이라는 결과물을 앞에 두고 저자보다도 독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로는 아마도, 그의 독서 이력에 끼친 많은 사람들의 도움도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에서 시작한 독서의 경험은 시력을 잃어가는 동안 어머니의 도움과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후엔 방문자든 누구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대신 읽어준 책읽기를 통해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그에게 저작물이라는 것은, 책읽기를 통해 만난 그 모든 관계들의 꿈을 그의 꿈으로 변형시킨 하나의 작은 우주였다. 거대한 우주 앞에 홀로 서야 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보르헤스는 문학을 지팡이로 삼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목록

poong님의 댓글

poong 작성일

오랜만에 편집을 해봤더니 다 까먹어서 몇번을 들락거리며 수정을 했네요... ㅠ 늦어져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