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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의 연구자, 루스 베네딕트 -임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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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9-06 06:37 조회5,5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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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의 연구자
임경아(감이당 대중지성)
 
 
요즘 전철, 버스, 인터넷 할 것 없이 어디서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형수술 광고다. 성형 전·후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사진. 이게 정말 같은 사람인가?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놓은 기술이 놀랍다. 그러나 한편 어이가 없기도 하다.
 
광고의 사진은 마치 수술 전 얼굴은 오답이고 수술 후 얼굴은 정답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오답과 정답을 판정하는 시험관은 도대체 누구인가? 왜 비포는 꼭 애프터가 되어야 하는 걸까. 비포의 매력은 몽땅 무시한 채 애프터의 매력으로 나를 바꿔야만 하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갖기보다는 어떻게든 정답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뼈를 깎는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성형외과에 달려가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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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은 우리 사회의 표준화된 삶의 척도에 진입하기 위한 일종의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얼짱, 몸짱은 기본적으로 갖춰야 일등 신랑을 만날 수 있다. 그 후 보장되는 안정된 중산층의 삶-좋은 집, 고소득의 남편, 일편담심 남편의 애정, 건강하고 공부 잘 하는 아이들... 우리 사회는 이런 표준화된 삶의 척도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고 있다. 그러나 ‘남들과 같은 행복(average happiness)'이라는 표준화된 삶이 정말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까?
 
루스 베네딕트(1887~1948)는 ‘성형수술 권하는 사회’에서 단호하게 수술을 거부하고 자기 얼굴 그대로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표준화된 삶의 척도에 자기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 대신 인류학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삶을 살았다. 모두가 원하는 단 하나의 행복은 없다. 그 행복은 모두를 실패자로 만든다. 베네딕트는 진정한 행복은 성공과 실패의 준거 너머,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창안하는 데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베네딕트는 1935년에 집필한 단편적인 자서전에서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소외감의 시기였다고 적었다.  “나 혼자만이 살고 있는 세계, 나 혼자만이 간직하는 귀중한 시간, 그런 것이 행복이었다.” 베네딕트는 과부 생활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호소하던 어머니에게 심한 염증을 느꼈고, 발작 비슷한 아주 심한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베네딕트는 자신이 그런 신경질을 부리게 된 것이 어릴 때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린 베네딕트가 아버지의 관 옆에 서 있는데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라고 채근했다는 것이다. 아주 어릴 적에 그녀는 열병을 앓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그녀는 심술궂은 뚱한 아이라는 질책을 당했다. 반면에 두 살 아래 여동생 마저리는 성격이 밝고, 예쁘고, 배배 꼬이지 않은 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루스 베네딕트, 마거릿 미드, 연암서가, 30
 
베네딕트의 어머니는 19세기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외과의사와 결혼하였기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 딸을 낳은 해에 남편은 질병으로 사망하고 이후 학교교사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힘겹게 두 딸을 길렀다. 배운 여자(^^)였고 전도유망한 남편과 결혼하였으니 당연히 스위트 홈을 꿈꾸었을 그녀가 남편의 죽음으로 갑자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가졌을 상실감은 충분히 예측이 된다. ‘나는 원래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큰딸인 베네딕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베네딕트는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으며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했겠지만 지겨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런 양가감정 속에서 그녀는 죄책감도 자주 느꼈을 것이다. 밝고 예쁜 여동생과 비교당하면서 느끼게 되는 소외감에 어머니에 대한 지겨움과 죄책감까지 더해져 가뜩이나 수줍고 우울한 베네딕트는 더욱 외로운 소녀시절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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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동생과 달리 살림솜씨가 별로 없고 가사 일을 힘들어했기 때문에 대신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여자들은 당연히 집안일과 옷 만드는 일 등을 잘해야 했다. 그런데 베네딕트에게는 그런 일에 대한 흥미도 재능도 없었다.

베네딕트는 아버지가 없는 결손(?)가정의 아이를 시작으로 심술궂고 뚱한 아이, 살림솜씨 없는 여고생까지 자신이 태어난 환경, 타고난 성향과 적성이 모두 사회가 요구하는 이른바 주류 혹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살짝 비켜있었다. 그렇게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베네딕트는 “나는 왜 이런 성격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며, 거기에 부합하는 일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1905년 그녀는 배서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이후 1911년부터 교사 생활을 하게 된다. 교사생활에서 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그녀는 여자에게 궁극적인 삶의 가치는 남편의 커다란 사랑, 조용한 집, 귀여운 아이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는다. 결국 스위트 홈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회적 통념과도 부합한다. 어린 시절부터 소외감을 느끼며 자기 회의의 시간을 보냈던 베네딕트. 그녀는 자신이 본성적으로 당시 미국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자신만의 의미 있는 일을 찾아내지 못했기에 결국은 통념에 따르게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스탠리 베네딕트라는 코넬 의과대학의 생화학자와 사랑에 빠져서 1914년 여름 결혼했다. 사랑만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혼생활은 자기 자신을 헌신하고 모든 걸 쏟아 부을 만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집안 일, 저녁 식사 등에서 면제되어 글쓰기만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남들이 말하는 의미 있는 삶, 정상성의 범주에 들어왔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그 생활에서도 큰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지리멸렬한 결혼생활의 해결책으로 그녀는 아이를 원했다. 그러나 1919년 그녀는 아주 위험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스탠리는 그 수술에 반대한다.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베네딕트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져야 한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인류학에서 찾은 실마리
 
결정적 전환점은 1919년에 찾아왔다. 그녀는 그해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강의를 듣게 되었다. <중략> 그녀는 알렉산더 골든와이저와 엘시 클루스 파슨스의 서로 상반되는 강의를 들으면서 인류학이 아주 흥미로운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 새 학문에서 자신이 존중할 수 있는 어떤 실체를 발견했다. 이 학문에 모든 재능을 쏟아 부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왜 나는 현대 미국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개인적 질문에 답변을 얻을 것 같았다.
 
루스 베네딕트, 마거릿 미드, 연암서가, 51쪽 ~ 52쪽
 
 
인류학을 접하면서 다른 사회를 보았더니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자신의 성격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마다 선호되는 성향이나 정상성의 척도는 달랐다. 당연히 모든 사회에서 스위트 홈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녀는 인류학에서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고 그런 학문이라면 그 안에서 충분히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아이 없는 결혼 생활에 직면하게 된 절박함까지 보태져서 그녀는 인류학에 자기 존재를 건 듯 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일까? 34세가 되던 1921년 그녀는 프란츠 보아스 밑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 컬럼비아 대학원에 입학해서 3학기를 공부하고 학위를 땄다. 당시 그녀의 모습에 대해 “훈련이라는 거친 털 셔츠를 입었고 중노동이라는 보아스의 가혹한 훈련을 감내했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한 것이다.
 
학위를 받고 나서 초창기에 그녀는 명목적인 지위만을 갖고 있었다. 1922년에는 바너드 대학에서 보아스의 조교로 일했고 이후에도 강사 등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이런 보직과 별개로 그녀는 열정적으로 학문에 몰두했다. 당시 그녀의 세미나에는 늘 많은 대학원생들이 찾아왔고, 도서관에서 찾은 불완전한 자료들 사이에서 퍼즐을 맞추듯이 의미 있는 문화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을 즐겼다. 이런 힘들고 따분한 자료 조사를 기꺼이 해내면서 학생들에게는 현지 탐사에서 찾아온 정보를 조직하고 전체를 구성해내는 기술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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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그녀는 인류학을 통해 여러 사회·공동체의 생활양식, 사고방식, 관습 등을 접하면서 한 사회에서 강조되는 문화적 가치가 다른 사회에서는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각의 문화는 인간적 잠재 능력이라는 넓은 스펙트럼의 어떤 한 부분만 강조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타고난 유전적 기질에 의해 그런 문화의 특성과 잘 맞지 않는 경우 - 그녀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소녀 혹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문화적 규범과 잘 맞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 그 개인은 일탈적이고 불안정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와 맞닿아 있었던 만큼 자기 탐구의 정신으로 인류학 연구에 절실함으로 임했고, 여기에 자료를 취합하고 엮어내는 재능이 더해져 그녀는 학문적으로 성숙해갔다.

이런 학문적 확신을 바탕으로 1930년대 초반 그녀는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받아들이면서 남편과 별거 생활에 들어간다. 더 이상 코넬대학 교수의 부인이 아니기에 이때 보아스는 그녀에게 컬럼비아 대학에 조교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사실 그녀의 학문적 성취나 대학 내에서의 역할에 비하면 적합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 확인과 안정된 직장을 구하면서 그녀는 새로운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회의의 세월을 청산하고 문화의 다양성,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명징하게 설명한『문화의 패턴』을 쓸 수 있게 된다.
 
 
내면의 빛을 발견하다.
 
1930년대에 루스 베네딕트는 보아스가 “공공 업무”에 기울이는 시간이 너무 많음을 아쉬워하면서 연구와 집필 시간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나치에 의한 위기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해오면서 공공 업무를 그토록 완강하게 거부하던 그녀도 결국 그 업무에 끼어들게 되었다.
 
루스 베네딕트, 마거릿 미드, 연암서가, 104쪽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1930년대부터 나치는 인종주의를 근거로 유대인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전은 가계(家系)를 통해 후대에 전해지는 것일 뿐, 대규모 복합적 인구의 “인종적 특성”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반유대주의에 맞섰다. 베네딕트도 집필 및 강연 활동 등을 통해 스승 보아스와 함께 반파시즘 운동에 적극 동참한다. 대중 강연을 싫어하는 그녀가 그런 공적 활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바탕으로 당시 유대인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악마로 취급되어 박해를 받았기에 베네딕트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끝까지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두려움을 바탕으로 그녀는 누구보다도 유대인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전쟁이 발발하고 1943년 그녀는 전쟁공보청에 들어가서 우방국가, 적성국가 등 전시 미국과 관련이 있는 나라들의 문화에 대해 연구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그녀는 기존의 발간 자료와 인터뷰 자료 등 2차 자료를 가지고 고도 문명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원격 문화 연구 방법을 개발했다. 그 방법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여 그녀의 대표작인『국화와 칼』을 쓰게 된다. 그녀는 전에 쓴 어떤 책보다 이 책에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베네딕트의 학문적 동반자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미드는 이 책의 지속적인 매력이 인류학적 접근, 아름다운 글쓰기 스타일, 폭넓은 인간성 이해 등이라고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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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에서 베네딕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자기수양’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명상, 정신 집중 등 선종의 수행법을 훈련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일본인의 훈련법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자신의 관심사와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기독교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어릴 때 신앙을 버리게 된다. 인류학에 입문하여 다양한 문화의 수만큼 다양한 정상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하나의 척도만을 강요하는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다른 영성을 찾다가 외부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관(觀)하는 것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선종에서 빛을 발견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조울증에 시달렸기 때문에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으나 자신의 마음 속은 항상 요동치고 있었다.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받아들인 성정체성도 남들에게 들키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녀는 항상 외부적인 시선을 의식해야 했고, 그러한 자기 감시가 주는 부담감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선종을 접하면서 훈련을 통한 ‘무가(無我)’의 경지에서는 그런 감시에서 벗어나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식이 활발해지면 의지는 행위자와 방관자의 둘로 분열된다. 갈등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행위자는 방관자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제자는 ‘보는 나’가 없어졌음을 알게 된다. 이제 영혼에는 미지의 것 혹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스 베네딕트, 마거릿 미드, 연암서가295쪽
 
 
이제 두려움과 긴장감은 사라지고 자신의 에너지와 주의력은 자유롭게 목표의 성취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의 고정된 진리는 없다. 누구나 자기 마음을 관(觀)해야 한다.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자아가 통합되어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 이런 선종에서 매력을 느낀 베네딕트는 일본문화 연구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당시 일본이 적국임에도 불구하고 편견 없는 자세로 연구에 임했다. 덕분에 『국화와 칼』은 베네딕트가 써낸 가장 세련된 인류학 저서로 지금도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루스 베네딕트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사회에서 많은 소외감을 느꼈다. 이후 인류학을 만나면서 자신의 성향이나 기질이 미국사회가 당시 여성에게 요구하는 규범과 잘 맞지 않는 것  뿐이라고 정리하면서 자기 회의의 시간을 청산할 수 있었다.

인류학을 지도삼아 자기 문제를 탐구하면서 사회 내에서 자리를 찾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해 나갔던 루스 베네딕트. 그녀가 인류학에서 뛰어난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학문을 통해 자기 삶을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의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적인 방법 베네딕트는 인류학이 인간의 제도와 함께 “인간의 마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주제로 삼기 시작한다면, 과학과 인문학의 방법이 함께 사용되어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류학을 사회과학으로 뚜렷하게 자리매김하고 싶었던 대부분의 남성 인류학 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아예 인류학의 연구 과제에서 배제하고 싶어 했다. 남성 중심의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적인 방법으로 인류학을 연구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수많은 비판에 직면하였지만 그녀가 자신의 학문적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런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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