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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최고의 인기고전> 루스 베네딕트에 대한 세 번째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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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현진 작성일13-09-08 20:45 조회6,522회 댓글3건

본문

질문하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이현진(감이당 대중지성)


Intro

 
인생의 문제점은 해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부처의 해답....소로, 월트 휘트먼, 칸트 시오도어 루스벨트의 해답 등 아주 다양하다. 그들의 해답은 돌아가면서 나의 필요에 부응한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 나는 나이고 그들 중 어떤 사람도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의 완벽한 해답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소녀 루스 베네딕트의 일기

요즘 텔레비전의 인터뷰 프로그램을 보면 인생에서 자신만의 해답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방영된다. 그리고 다음날, 인터넷에서는 그들의 가슴 먹먹한 감동스토리가 연신 화제가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거나 그것을 이상화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텔레비전 속 유명인의 삶은 보통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들 자신의 삶에 대한 해답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인생의해답.jpg

일기의 주인공인 어린 루스 베네딕트도 그랬다. 늦은 밤, 루스 베네딕트는 일기장에 “인생에 대한 해답은 무수히 많지만, 정작 내게 알맞은 해답은 없다”라고 적는다. 그것은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자조 섞인 탄식인 동시에 앞으로 ‘완벽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루스 베네딕트의 삶을 예언하는 서곡이었다. 과연, 루스 베네딕트는 삶의 완벽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미들타운에서 해답 찾기 

루스 베네딕트는 1887년 6월 5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후의 정치적·경제적 재건이 완료된 미증유의 성장기였으며, 근대 국민국가로 거듭나던 때였다. 산업의 팽창과 함께 미국 최초의 거대기업이 탄생했고, 대량생산된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소비의 핵심단위인 가족주의가 범람하던 시기였다.

루스 베네딕트의 어머니는 당시의 여성으로써는 드물게 대학을 졸업했고, 아버지는 유능한 외과의사였다. 출생은 유복했던 셈이다. 하지만 베네딕트가 두 살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집안의 가세는 기운다. 거기다 루스 베네딕트는 열병을 앓아 한쪽 귀의 청력마저 잃고 만다. 속담처럼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루스 베네딕트는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일찌감치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가?’,‘나는 왜 현대 미국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하지만 유년시절의 루스 베네딕트는 외로웠다. 자신의 질문을 나누고 함께 고민해줄 친구도, 스승도 없었다. 일기장만이 루스 베네딕트가 고민을 토로하는 유일한 출구였다.
 
이 많은 문제가 발생한 것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여자라는 존재는 정말 끔찍한 것이다. 이것을 감당하게 해주는 단 하나의 왕관이 있다. 커다란 집, 조용한 집, 귀여운 아이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만이 정말 가치 있는 것임을 안다.....그리고 우리의 의식 뒷면에는 언제나 제대로 된 남자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울려 퍼진다. 위대한 사랑은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마거릿 미드, 루스 베네딕트, 연암서가, 35
 
자신을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루스 베네딕트는 자신의 가정환경, 장애, 우울한 기질에서 결핍을 느꼈다. 결핍은 시대적 조류 속에서 더욱 커졌다. 당시에도 건강한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교외의 커다란 집에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 바로 ‘미들타운’의 삶이 이른바 정상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정의 붕괴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스 베네딕트에게도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다. 

루스 베네딕트는 “제대로 된 남자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달리 의과대학의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했다. “위대한 사랑을 성취한 소수의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루스 베네딕트는 곧 결혼도 자신의 질문에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주위 사람에게 교수 부인으로 대접 받으며 살아도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토록 바랐던, 남편에게 의지하는 삶이 꼭 남편에게 ‘기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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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는 어렸을 적부터 꿈꾸었던 경제적 자립과 독립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 글을 쓰고, 리듬 댄싱을 하고, 사회봉사를 하는 등.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전력을 다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사랑과 독립적인 삶 사이에서 고민했다. 루스 베네딕트는 아이로 두 삶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일을 유예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루스 베네딕트는 위험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 스탠리는 수술에 반대했고, 둘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제 새로운 삶의 출구를 모색해야 했다.

 
내 노력을 펼칠 수 있는 나의 세계, 나의 출구, 나의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마거릿 미드, 루스 베네딕트, 연암서가,  43
 
 
인류학에서 만난 수많은 질문들

사회봉사를 하던 루스 베네딕트는 우연히 사회 연구 단체인 뉴스쿨에서 일반인을 위한 인류학 강의를 듣게 된다. 그리고 인류학이 자신의 질문에 해답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인류학은 원시부족이나 다른 문명국가 등 타자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루스 베네딕트는 어째서 인류학에서 자신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일까?

초기에 인류학은 제국주의의 척후병으로 서구 열강이 비서구 지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20세기 이후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라는 걸출한 인류학자가 등장해서 인류학의 방향을 새롭게 잡았다. 프란츠 보아스는 문화를 종전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서구 문명이 정상성의 척도이기 때문에 다른 문화는 필연적으로 열등한 야만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대신 프란츠 보아스는 각각의 문화를 그 문화만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문화 상대주의를 제창했다. 당연히 문화 상대주의의 관점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의 도식이 없다.

루스 베네딕트는 프란츠 보아스에게 배우기 위해 컬럼비아 대학 인류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3학기 만에 학위를 받는다. 이처럼 인류학이 루스 베네딕트에게 강한 지적촉발을 일으킨 것은 하나의 정상성은 없다는 인류학과 프란츠 보아스의 태도였다.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을 통해 다른 문화를 관찰하면서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던 삶이 미국(혹은 서양)이라는 국소적인 지역에서 임의로 선택된 정상성임을 실감한다. 다양한 문화의 수만큼 다양한 정상성이 있다는 사실. 그것은 지금껏 미국사회의 정상성을 완벽한 해답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부합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던 루스 베네딕트에게는 하나의 자유였다.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원시부족과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수많은 질문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스 베네딕트가 그토록 고민했던, 미국에서는 비정상의 표지로 분류된 동성애, 정신질환, 신체적 장애도 열등이나 퇴화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미국에서 납득될 수 없는 예외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현 제도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더욱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일탈을 좀 더 침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가 겪는 고통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 전통적인 관습의 지원 부족 탓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그는 점점 덜 고통스러운 차도를 보게 될 것이다....그는 자신의 일탈에 대해 점점 고통을 덜 받고 또 독립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고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하여 적절한 역할을 다하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 문화의 유형, 연암서가,  8

인용문은 미국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일탈자들에게 하는 조언인 동시에 또 한 명의 일탈자인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루스 베네딕트는 자신의 다짐과 별개로 미국 사회가 흑인, 이민자, 여성을 차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사회가 겉으로는 일탈자들을 포용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일탈자를 더 많이 양산하고 배척하는 것을 알게 된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군의 인류학자들과 함께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에 앞장선다. 편견에 맞서 싸우는 무기는 당연히 인류학이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인종, 전쟁,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반 흑인주의에 대항해서 펴낸 『인류의 인종들』이다. 팜플릿 형식의 이 작은 책자에는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 북부 흑인 군인이 남부 백인 군인보다 지능검사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것은 인종에 관계없이 “소득, 교육, 문화적 이점, 기타 기회의 차이”에 따라 지능검사에서 다른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의 인종들』을 발표하고 백인우월주의자를 위시한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는다. 인종에 상관없이 문화적 환경에 따라 지능에 차이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백인=정상’이라는 도식이 뼛속까지 박힌 사람들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루스 베네딕트는 굴하지 않고 진화론과 백인우월주의의 허상에 저항한다. 세 원시부족인 주니족, 도부족, 콰키우틀 족을 인류학적으로 분석한 『문화의 패턴』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주니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를 좋아한다. 반면 도부족은 서로에 대한 악의와 배신으로 가득하며, 콰키우틀족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을 즐긴다. 이처럼 세 부족은 서로 다른 문화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문화는 역사와 환경에 따라 극단적으로 들어난 것일 뿐, 인류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향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들을 비교연구하면서 미국의 인종우월주의,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타인에 대한 악의와 배신을 완곡하게 꼬집고 있다.
 
모두의 마음에는 ‘국화와 칼’이 있다

루스 베네딕트가 인류학에 매진하고 있을 1940년대 중반, 세계는 편견과 차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나치는 아리아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유대인을 학살하고 유럽을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었다. 루스 베네딕트는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비롯한 미국 인류학계의 유대인들과 함께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대항했다. 그리고 전쟁과 파시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자동으로 참전하게 된다. 따라서, 루스 베네딕트도 전쟁수행과 관련된 활동에 동참해야 했다. 미국 전쟁공보청은 미국과 관련된 나라의 문화를 연구하던 루스 베네딕트에게 적국 일본에 대한 연구를 의뢰한다.
 
하지만 일본은 사전지식이 전혀없는 광대한 백지 캔버스 였고, 또 연구를 제대로 해내자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할 과제였다.
 
─  마거릿 미드, 루스 베네딕트, 연암서가,  123쪽

미국 정부는 물론 루스 베네딕트에게도 극동의 일본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보다는 편견에 근거한 허황된 소문이 많았다. 미국 정부가 전쟁을 선동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소문을 유포하기도 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에 대한 억측보다는 학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연구했던 원시부족이나 다른 문명사회와는 달리 ‘적’을 연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본에서 제작된 책, 영화 같은 미디어에 의지하거나 미국 현지의 일본인 이민자를 인터뷰 하는 등 단편적이고 어수선한 자료들로 일본을 연구해야 했다. 이러한 인류학적 연구 방법을 ‘원격문화연구’라고 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약 1년 만인 1946년,『국화와 칼』을 완성한다. 『국화와 칼』은 루스 베네딕트의 인류학적 성취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강조컨대 인류학자들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이론적 입장에 도달하게 된”  (앨런 바너드,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한길사, 28쪽) 것이다.

그런데 몇몇 인류학자들과 전후 일본에서는 루스 베네딕트의 ‘원격문화연구’와 그를 토대로 쓰인 『국화와 칼』을 비판했다. 일본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인류학자 쓴 일본문화연구서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때는 전시상황이라 일본에 갈 수 없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이라는 거대한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퍼즐조각을 하나하나 끼어 맞추었다. 매우 고되고 힘든 작업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연구가 전시와 전후에 미칠 영향력 때문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하지만 전쟁의 양상에 따라 시기적절하게 연구서롤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신중을 기할 수만은 없었다. 타자에 대한 ‘관대한 이해’(이안부루마)와 타문화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다는 인류학적 사명감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국화와 칼.jpg


『국화와 칼』은 적국, 일본에 대한 문화연구보고서이다. 하지만 단순히 일본에 대한 전략적인 정보만 나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국화와 칼』에는 일본인의 내면구조에서부터 일본 문화의 특질까지 세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독자들은 『국화와 칼』을 읽으면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루스 베네딕트가 ‘인류학적인 글쓰기’를 했기 때문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인류가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반성해야할 보편적인 문제까지 함께 녹여냈다.

『국화와 칼』에서 국화는 평화를 상징한다. 반면 칼은 전쟁에 대한 은유다. 전쟁과 평화 이 극단적인 이중성은 일본인의 성향을 잘 표현해준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국화와 칼의 이중성이 비단 일본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단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을 통해 일본인에게서 표출되었을 뿐, 사실은 인류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기질이 아닌가. 평소 인류는 국화처럼 다소곳하다. 하지만 또 다시 하나의 해답, 정상성에 대한 광기가 폭주한다면 인류는 언제든 시퍼런 칼날을 서로에게 겨눌 것이다.『국화와 칼』은 그것을 은근하게 경고하고 있다.

『국화와 칼』을 쓴 이후에도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연구했다. 사라져가는 신화와 의식을 문자로 기록하고 다양한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새로운 질문을 생성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Outro

루스 베네딕트는 만년에 선종에 심취했다고 한다. “선종은 만년에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베네딕트에게 하나의 해결안을 제시했다” (마거릿 미드, 연암서가, 루스 베네딕트, 13쪽) 선종은 경전이나 스승에 의지하지 않고, 공안(公安)이라는 질문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이다. 특이한 것은 선종에서 공안은 해답을 구하지 않는 질문이라는 점이다. 어떤 해답도 부정하고 계속 질문한다. 그것은 하나의 해답에 갇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리라. 나는 인류학을 만난 뒤, 루스 베네딕트의 삶이 선종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수많은 문화를 연구하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사회적 통념에 저항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루스 베네딕트에게는 공부이고 수행이지 않았을까.

이제 처음의 질문에 답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루스 베네딕트는 과연 자신의 삶에 대한 완벽한 답을 찾았을까? 답은 아니다. 아마도 훗날 루스 베네딕트는 어렸을 적 자신의 일기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나만의 완벽한 해답은 애당초 있을 수 없다. 매순간 새로운 질문이 있을 뿐이다’
 
 

댓글목록

이솜님의 댓글

이솜 작성일

현진, 재밌게 읽었어ㅋ_ㅋ  인물톡톡이 이렇게 쓰는거구나~ 하고 어렴풋이 알것같아.
곰댄스도 기대합니당

오우님의 댓글

오우 작성일

'매 순간 새로운 질문!'이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어눌한 현진군의 말투는 사라지고 경쾌한 샘의 목소리가 들리는 긋 합니다.

약선생님의 댓글

약선생 작성일

아마 현진군은 베네딕트를 글로 써내면서 많이 변했을 듯...정말 일취월장 좋은 글이에요. 앞으로도 종일건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