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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천지의 마음이 나에게 왔다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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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갱미粳米 작성일13-09-10 21:46 조회6,7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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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천지의 마음이 나에게 왔다
- 역사를 창조한 사마천
 
정 경 미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1. 역사 혹은 삶의 이야기
 
우리는 흔히 사실의 기록을 ‘역사’라 하고, 허구의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실과 허구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리얼한 현실이 다른 사람에게는 황당무계한 허구가 되기도 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콜럼비아의 작가 마르께스는 작품을 발표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당신은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군요. 정말 환상적인 작품이야.”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작품 속의 이야기들은 모두 마르께스에게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마르께스는 자신이 마을에서 겪었던 이야기, 이웃과 선조들이 살았던 이야기를 전했을 뿐인데, 즉 역사를 썼는데 사람들은 “너 참 거짓말을 재미있게 하는구나”라고 하니 마르께스로서는 참으로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날개 달린 뱀.jpg
작품에 나오는 호세 아르카디아 부엔디아 대령은 우르슬라와 결혼하면서 돼지꼬리를 단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근친 간에 결혼하면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는 말이 마을에 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 그건 전설일 뿐이지. 설마 그런 일이 진짜 있겠어? 그런데 이럴 수가!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어떤 청년-진짜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청년이 마르께스를 찾아와서 “그동안 내 꼬리를 숨기며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얻었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청년에게 자신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일이거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청년에게 자신의 존재는 ‘끔찍한 악몽’에 불과했다. 그런데 책에 자기 얘기가 나오는 걸 보고 ‘아, 나도 있을 수 있는 일이거나 있어도 되는 일 중의 하나구나’라고 생각하고 청년은 기뻐했던 것이다.

『사기史記』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청년처럼 감동했다. 『사기』에는 내가 있었다! 나는 늘 나 자신을 부재不在로 인식해 왔다.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는 역사책에 없었다. 역사는 왕실의 기록일 뿐, 우리는 왕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고향 마을에서 할머니랑 나랑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텔레비전에는 서울 시장 선거 유세가 한창이다. 몇 명의 후보자들이 열심히 유세를 한다. 할머니는 그 중에 가장 인상이 후덕한 후보를 가리키면서 “나는 저 사람 찍을란다”라고 하신다. 하지만 할머니… 우린 서울 시민이 아니예요…

역사의 중앙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유령과 같은 존재와 같았던 나에게 역사는 하나의 지배적 관점에서 서술된 대상화된 지식에 불과할 뿐 내 삶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사기』를 읽으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다.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생생한 삶이 남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내 삶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고대 중국 이천 년의 역사가 인간들의 삶뿐만 아니라 일월성신, 천지만물의 관계와 변화 속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우주적 드라마-『사기』와 만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고대 중국 이천 년의 역사가 내 삶으로 흘러들어왔고, 내 삶 또한 새로운 역사의 일부로 펼쳐졌다. 이 놀라운 책은 도대체 누가 쓴 것일까?
 
 
2.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마천司馬遷은 자字가 자장子長이며 용문龍門(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시韓城市) 출신이다. ‘등용문登龍門’ 할 때의 ‘용문’이 바로 이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황하의 급류로 잉어가 많이 모이는데,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출세를 위한 어려운 관문이라는 뜻의 ‘등용문’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한漢 무제武帝 때 태사령太史令이었다. 태사령은 천문 관측, 달력 개편, 국가 대사의 조정 의례의 기록을 맡는 일이다. 높은 직책은 아니었지만 일월성신 천지만물의 기미를 읽어 인간의 일을 내다보고 준비하는 일이었으므로 사마담은 이 일에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담은 당도唐都에게 천관天官을 배웠고, 양하楊何에게 역학易學을 배웠으며, 황자黃子에게 도학道學을 배웠다. 당대 최고의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황로 사상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황로학은 노자老子 사상을 기반으로 명가名家, 묵가墨家, 법가法家의 사상을 흡수하여 청정무위淸淨無爲의 정치를 주장하는 학파이다. 한漢 나라는 공식적으로는 유가儒家를 국가학으로 내세웠으나 황실 내부에서는 황로학에 깊이 경사되어 방사方士들이 많았다. 황로학은 미신, 점술, 불로장생의 약 만드는 기술-방술方術로 멸시되기도 했다.
 
사마천은 10세 때 아버지가 태사령 직으로 부임하는 것을 따라 장안長安에 와서 당시 경학대사였던 동중서董仲舒와 공안국孔安國에게 고문古文을 배웠다. 당대 최고 석학에게 엘리트 교육을 받은 셈이다. 스무 살 때 중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천하의 형세를 가슴에 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28세를 전후로 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낭중郎中’이라는 벼슬에 임명되었다. 낭중은 황제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고관 자제와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주로 발탁되었는데 가난한 사관의 아들에 불과했던 사마천으로서는 행운이었다. 무제武帝 유철劉徹이 사마천의 남다른 능력과 자질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사마천은 낭중이 되어 무제를 따라 전국을 순행하면서 역사 현장에 대한 감을 익혔다. 이때 이미 사마천은 사관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자신의 숙원이었던 역사서를 완성해 주기를 바랐던 아버지 사마담으로서는 얼마나 뿌듯한 일이었으랴!
 
그런데 사마담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태사령에게 봉선제封禪祭에 참여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사마담은 거기에 참여하지 못 하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원통했던지 사마담은 화병이 들어 앓다가 죽고 말았다. 봉선제는 천자天子가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순舜 임금 때부터 봉선제가 행해져 왔으나 주나라가 멸망하고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봉선제가 끊어졌다. 온 나라가 전란에 휩싸여 제사 지낼 여력이 없었던 때문이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면서 오랫동안 끊어졌던 봉선제를 다시 지냈으나 진 제국이 15년 만에 망하자 봉선제는 다시 끊어졌다. 한漢 나라 7대 무제武帝 때 이르러 나라가 안정되어 대대적이고 성스러운 봉선제를 다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봉선제를 지낸다는 것은 태평성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여기에 태사령인 사마담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마담은 봉선제에 참여하지 못 했다. 몇 대 만에 다시 거행하는 봉선제를 준비하기 위해 사마담은 주남周南에 출장 나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 사마담이 없는 상태에서 무제는 봉선제를 거행해 버렸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사마담이 출장 나가 딴 볼 일로 바빠 미처 행사에 참여하지 못 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추측건대 무제가 사마담에게 참석하지 말라는 통보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황제의 뜻 없이 태사령이 국가대사에 불참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황로 사상 쪽의 사마담이 당시 유생들 중심의 관료들 속에서 배제를 당한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이 일로 사마담은 원통해 하며 죽었다. 죽으면서 아들 사마천에게 자기 대신 반드시 역사서를 써서 선조의 업을 이을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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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담의 죽음(기원전 110년, 사마천의 나이 36세) 이후 3년이 지나서 무제 원봉 3년(기원전 108년, 38세)에 사마천은 마침내 아버지의 업을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이때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국가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石室金櫃에서 수많은 사료를 정리하면서 4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년, 42세) 마침내 정식으로 『사기』 집필을 시작한다.
 
 
3. 이릉李陵의 화禍
 
사마천이 『사기』집필을 시작했을 때 상대부上大夫 호수壺遂가 물었다. 주周 나라의 도道가 쇠퇴하자 공자孔子는 『춘추春秋』를 써서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사람들이 하는 일의 기강을 정하여 의심나는 곳을 풀고 옳고 그른 것을 밝히려고 하였다. 선대의 일을 통해 지금의 일을 묻고자 한 것. 이것이 역사를 쓴 공자의 의도이다. 그러나 그건 공자 때 얘기 아닌가. 공자 시대에는 현명한 군주가 없어서 공자처럼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등용되지 못 했다.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죽음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과 진 제국의 횡포를 바로잡고 한漢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나. 천하가 그릇을 엎어놓은 것처럼 태평한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왜 굳이 역사책을 쓰려고 하는가. 이때 사마천은 “난세에 도를 찾는 것도 사관의 임무지만 태평시절에 천자의 밝은 덕을 드러내는 것 또한 사관의 임무”라고 답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천자를 위해서, 제국에 충성하기 위해 『사기』를 쓰지 않았다. 누가 남을 위해 130권 52만 6500자나 되는 글을 쓰겠는가. 그것도 요즘처럼 컴퓨터로 쓸 수 있는 글도 아니고 한 자 한 자 혼신의 힘을 다해 죽간에 새겨 써야 하는 글을. 사마천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썼다.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그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바로 ‘이릉李陵의 화禍’이다.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년, 47세),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릉은 보병 오천을 이끌고 흉노의 적진 깊숙이 진공했다. 이들은 적은 병사로 무리한 진격을 하였으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결과 많은 흉노 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패전 소식을 들은 지원병들-흉노의 많은 기마 군단이 출동하여 이릉 군대를 포위 공격하는 바람에 이릉은 퇴로가 끊겼고, 지원병마저 오지 않아 곧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한 무제는 노발대발 화를 냈다. 싸우러 갔으면 반드시 이길 것이지, 또 졌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지, 살아서 적의 편에 사로잡히다니 대국의 체면에 이게 무슨 망신이냐! 황제가 이렇게 화를 내니 조정 대신들도 모두 덩달아 이릉을 비난한다. 이때 유일하게 나서서 이릉을 변호한 사람이 사마천이다.
저는 이릉과 함께 시중으로 입사했지만 원래 서로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취향이 서로 달라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없고, 친밀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눈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자신을 지킬 줄 아는 남다른 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이 효성스러웠고, 신의로 선비들과 사귀며, 재물에 대해서는 청렴하고 주고받음에 공정함을 지키고, 상하를 분별함에 있어서는 겸손했고,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언제든지 나라의 위급함에 몸 바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음속에 쌓아둔 바는 한 나라의 큰 선비로서의 기풍이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한서漢書』「사마천전司馬遷傳」보임안서報任安書)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마천은 자신과 이릉이 사적 친분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사마천이 낭중郎中 이광李廣의 부하였다. 평소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손자인 이릉을 도와주었다고 보기도 하고, 또 『서경잡기西京雜記』에서는 사마천이 “이릉을 천거했다(坐擧李陵)”라고도 한다. 천퉁성은 그것을 사마천의 협사俠士 정신에서 찾는다.
사마천이 이릉을 위해 변명했던 것은 이릉이 풍긴 국사로서의 풍모가 사마천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구석에 몰린 이릉을 누군가가 공평무사하게 도와줄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타인을 어려움 속에서 구해내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이 바로 협사의 정신이다. 사마천이 이릉의 누명을 벗기려고 한 것도 타인을 어려움에서 구해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기의 탄생, 그 3천 년의 역사』천퉁성 지음/장성철 옮김, 2004, 231쪽)
 
현실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보다 윤리적 감정이 앞서는 협객 정신이 이릉 사건에 연루된 사마천의 내적 원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천퉁성의 설명이다. 궁지에 빠진 이를 위해 몸을 던지는 기질. 그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고립된 이를 보면 구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질. 사마천에게는 확실히 그런 기질이 있다. 「유협열전游俠列傳」의 여러 협사들,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등장하는 자객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협사의 기질 때문에 사마천은 이릉을 두둔했는지 모른다.
 
사실, 이릉이 잘 한 건 없다. 전쟁에 나가서 졌고, 살아서 포로가 된 게 떳떳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에 대해 무제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 일의 시비를 정확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면 사마천도 분명히 이릉을 욕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보기에 사태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정황을 헤아리지 않고 일의 결과만 보고 그때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병사를 탓하는 황제나, 그 황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보고 맞장구치는 조정 대신들이나 야비하기는 똑같다.
 
그래, 보병 오천으로 수만 기마병을 이길 수 있다고 덤빈 건 판단 미스라고 하자.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 번 실수는 있지 않은가. 이릉은 그동안 나라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온 사람이다. 흉노에 투항한 것도 구차하게 자기 목숨에 연연해서라기보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함인데, 이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당장 눈앞의 결과만 가지고 충신을 하루 아침에 반역자로 만드는 황제가 사마천으로서는 못마땅했다. 황제에게 간언을 하기는커녕 눈치만 보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은 참으로 한심했다. 이것이 옳다 라고 생각되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든 목숨 걸고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기질을 타고난 사마천으로서는 도저히 이 상황 앞에서 그냥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여, 다들 눈치 보며 숨죽이고 조심조심 피바람이 자신을 피해 지나가기를 바라며 엎드리고 있을 때 사마천 홀로 우뚝 서서 마음속의 말을 다 한다. 
 제가 생각하건대, 이릉은 평소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 하면서도 작은 것도 나누었습니다. 이에 부하들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옛날 명장들도 못하던 것입니다. 몸은 비록 패했으나 그 뜻을 보건대 장차 적당한 기회에 나라에 보답코자 했을 것입니다. 일은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그가 적을 무찌른 공은 천하에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서漢書』「사마천전司馬遷傳」보임안서報任安書)
 국가 반역자 이릉을 두둔했다는 죄로 사마천은 옥에 갇힌다. ‘무망죄誣罔罪’로 사형에 처해진다. ‘무誣’는 허위 사실을 꾸며 남을 속이는 것을 말한다. 즉 허무맹랑한 말로 사마천은 세상을 속였다는 말이다.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이광리李廣利를 깎아내렸는데, 이광리는 한무제가 총애하는 후궁의 오빠로서 무제와는 처남 매부 사이였다. 결국 이광리를 비난하는 것은 무제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무제는 사마천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맙소사, 이것이 제국의 일등 사관의 말로인가! 상대부上大夫 호수壺遂가 “너 왜 책 쓰니?” 물었을 때 “천자의 덕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던 자신에게 사마천은 쓰라린 환멸을 느꼈다. 충신이 하루 아침에 반역자로 내몰리고, 황제 비위를 거스르는 말 한 마디면 하루 아침에 댕강, 모가지가 날아가는 더러운 세상!
 
사본 -왕의 죽음(마티스).jpg

 
4.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
 
궁지에 빠진 이릉을 구하려다 자신이 궁지에 빠진 사마천. 사형에 처해진 사마천에게 살아날 길이 한 가지 있긴 있었다. 돈 50만 전을 내는 것. 당시에도 돈이면 죽을 목숨도 살려 주었나 보다. 그러나 가난한 사관 처지에 그런 거금이 어디 있으랴. 그러면 꼼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데… 사형 대신 궁형을 택할 수가 있었다. 국가 반역 죄인으로 주살誅殺(허리를 잘리고 죽는 것)될 것이냐 아니면 궁형을 당할 것이냐. 사형 대신 궁형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궁형을 당한다는 것은 사형을 당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궁형을 당한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 죽음을 뜻한다. 육체적 고통도 극심하지만 정신적 고통-수치심이 거의 죽음에 가깝다. 궁형을 당한 자는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권력이 거세된 존재로서 무슨 일을 하든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하고 멸시 당한다. 사형이냐 궁형이냐. 사마천은 궁형을 선택한다. 당시 궁형을 당한 사람은 일시적으로 어둡고 따뜻한 잠실蠶室로 보내졌다고 한다. 찬바람을 쐬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사마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저와 같은 사람은 몸이 이미 망가졌으니 아무리 수후나 화씨의 구슬과 같은 재능이 있고 허유나 백이와 같이 깨끗하게 행동하더라도 영예를 얻기는커녕 도리어 남의 비웃음거리가 되어 부끄러워하는 것이 고작일 것입니다. (…) 저는 거세되어 잠실에 던져져 거듭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아아, 이런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애가 끊어지는 듯하고, 집에 있어도 망연자실 넋을 놓고 무엇을 잃은 듯하며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한서漢書』「사마천전司馬遷傳」보임안서報任安書)
 
하루에도 아홉 번 애가 끊어지는 듯하고, 망연자실 넋을 잃은 듯하며,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 이것은 일종의 죽음의 상태이다. 이때 사마천의 일부가 죽었다. 이게 나야 라고 하는 모든 자기 삶의 근거를 잃어버렸고, 이게 옳다 이게 좋다 라고 하는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을 잃어버렸다. 완전한 멘붕 상태. 어둡고 따뜻한 잠실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자신의 벌거숭이 알몸만을 오롯이 대한 채 한 마리 애벌레처럼 웅크린 사마천이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왜일까. 이것이 삶이야 라고 하는 이전의 모든 생각이 무너진 다음에도 사마천에게 남는 삶. 그것은 시작한 글을 마저 쓰는 일이었다. 집필을 시작한 『사기』를 완성하는 일. 사마천은 이것을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은 본디 한 번 죽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서漢書』「사마천전司馬遷傳」보임안서報任安書)
 
이전에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선조의 업을 잇기 위해, 천자의 밝은 덕을 드러내기 위해 책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어둡고 따뜻한 잠실에서 사마천은 잠시 다른 우주를 엿본다. 무엇을 위해 라고 하는 모든 의미는 궁형을 당하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이제 사마천이 대면하는 것은 자신의 가냘픈 숨소리, 썩어가는 육체에서 나는 약간 푹신한 흙 냄새, 어둠 속에 희미하게 멀리서 보이는 빛, 뽕잎을 갉아 먹는 누에들의 꼬물거리는 기척, 어머니의 자궁 속과도 같은 따스한 공기가 부드럽게 살에 닿는 느낌 같은 것이었다. 이 낯설고 새로운 삶의 실감에서 사마천은 어렴풋이 이전에 자기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엿보았다. 완전히 무너진 그의 존재 속에 새롭게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글을 썼다. 그것은 천지의 마음이 사마천에게 오는 순간이었다. 치욕을 피해 자기 한 몸 죽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자기 한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천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사마천은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온 우주의 무게를 감당하는 새로운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5. 역사를 창조하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사기』집필을 시작했고(기원전 104년, 42세), 천한 2년(기원전 99년, 47세) 집필 도중 이릉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사형 대신 궁형을 선택한다. 궁형을 당한 이후 3년이 지나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기원전 96년, 50세). 중서령은 황제를 측근에서 수행하며 문서 관리를 하는 직책이었다. 태사령보다 녹봉은 많았지만 내시의 신분이었으므로 ‘이지러진 몸으로 뒷청소나 하는 천한’ 자리에 불과했다. 사마천에게 이제 관직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기』를 완성하는 일에 그는 전력을 다했다. 사마천이 언제 『사기』를 완성했으며 어떻게 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친구 임안에게 편지를 보낸 기원전 91년(55세) 이전에 책이 완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듬해(56세) 사마천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사기』 이전에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같은 역사책이 있었다. 그리고 사마천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사마천은 주공이 죽고 500년이 지나 천하의 도가 끊어지려 하자 공자가 <춘추>를 써서 그 도를 이었고, 공자가 죽고 500년이 지나 자신이 <사기>를 써서 하늘과 인간 사이 끊어진 도를 다시 잇는다고 했다) 공자가 쓴 『춘추春秋』도 있다. 그러나 이전의 어떤 역사책도 『사기』 만큼 방대한 시기를 아우르지 못 했다. 한 왕조, 혹은 한 나라의 특정 시기의 일을 몇 년도 무슨 왕 때 어떤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사기』는 삼황오제 때부터 한무제 때까지 중국 고대 이천 여년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 인간들 중에서 지배자의 역사 뿐만 아니라 식객, 자객, 어릿광대, 무당, 점쟁이, 기인들과 같은 비주류의 다양한 인물들의 삶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인간의 역사뿐 아니라 별의 역사[天官書], 시간의 역사[曆書], 소리의 역사[樂書] 등등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야말로 『사기』에서 말하는 역사는 천지만물의 관계와 변화라 할 수 있다.

 『사기』는 이전까지 중국 역사서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역사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전의 역사책들은 왕조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 방식-편년체編年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완전히 독창적인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각양 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의 특징적인 삶을 입체적인 관점에서 보여주는 이 기전체 형식은 이후 『한서漢書』에서 『청사고淸史稿』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를 서술하는 기본 체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도 기記 · 전傳 · 지志 · 표表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이다.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사상의 표현이다. 『사기』가 편년체에서 벗어나 기전체로 씌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역사를 하나의 지배적 관점에서 서술하지 않고 다양하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구성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중심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주체들을 생산하는-탈주체적인 사유의 표현이다. 사마천에게는 세상의 중심이 따로 없다. 내가 선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할 때, 그곳이 바로 역사의 중심이다. 그때 내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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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일등 사관으로서 어용 역사서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사마천으로 하여금 제국의 중심에서 제국을 해체하는 완전히 새로운 책을 쓰도록 한 힘은 무엇일까?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바로 이릉의 화로 인해 궁형을 당한 일이다. 이 일을 통해 사마천은 사회적 죽음을 체험하고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혈연이나 국가의 경계를 벗어나는 우주적 자아로의 확장! 이전에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글을 썼다. 선조의 업을 이어 천자의 밝은 덕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나 궁형을 겪으면서 사마천을 덮고 있던 한 세계가 무너진다. 세상은 역사의 중앙 무대에 선 몇몇 주인공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떠받치는 더 많은 삶들이 있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잠실에 던져졌을 때 그 보이지 않는 천지의 마음을 만났다. 그리고 역사는 그 천지의 마음의 도도한 흐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마천은 그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기 한 몸이 법에 따라 죽는 것은 ‘소 아홉 마리의 터럭 가운데 한 올이 없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사마천은 그 한 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삶들이 주어졌는가를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글쓰기의 재능, 그 많은 공부의 기회들과 뛰어난 스승과의 만남, 귀한 자료들과 여행의 기회, 현장의 생생한 체험들이 그냥 주어진 것이었을까. 사마천은 그 ‘몫’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빚을 갚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마천은 썼다.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천지의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이나 나라의 임무보다 훨씬 더 중대한 업이었다. 그야말로 ‘태산과 같은’ 업이었다. 그 업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길-그것이 사마천에게는 글쓰기였다. 이 글쓰기를 통해 사마천은 역사에 묻혀 있었던 많은 존재들의 삶을 세상의 빛 속에 드러나게 했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우리에게 열어 주었다.

살았을 땐 『사기』를 썼고, 죽어서는 『사기』가 되었다! 사마천에게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새로운 존재 증명이다. 백이 숙제가 있어서 사마천이 쓴 게 아니라 사마천이 썼기 때문에 백이 숙제가 존재한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한 게 아니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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