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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구한 삶의 중심 : 이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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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씨 작성일13-09-11 21:59 조회6,8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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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구한 삶의 중심
-중국 금원시대의 명의 이동원-
 
송혜경(감이당 대중지성)
 
여기, 태어나기도 전에 금(金)을 선물 받은 도련님이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가족에게 받은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라면? 그야말로 갑자기 뚝! 떨어진 금. 그리고 그 금은 자신을 써줄 주인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사연인즉 이렇다. 가난한 노인이 달빛을 벗 삼아 책을 읽고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서쪽 부근의 땅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더니 한 여자가 나왔다. 노인은 겁내지 않고 그녀에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글자를 남겼다. “허신귀비쌍남(許身愧比雙南)” 노인이 글자를 들여다보는 사이, 그녀는 땅 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노인은 그녀의 정체를 곧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남겼던 문구는 두보 시의 한 소절이었으나 말미에 ‘금(金)’자를 적지 않았다. 노인은 그녀가 곧 금이었음을 직감하고 그녀가 사라졌던 땅을 캐었다. 놀랍게도 그 땅 속에서 궤짝 하나가 나왔다. 궤짝 위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이 금 한 상자를 이씨에게 주니, 자손이 의사로 후세에 유명할 것이다(金一笥畀畀李氏, 孫以醫名後世).” 
 
이 설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국 금원(金元) 시대를 살다간 이동원이라는 의사다. 궤짝에 적힌 예언대로, 그는 생전에 신의(神醫)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훗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의보감』의 서문에서 북쪽을 대표하는 의사 곧 ‘북의(北醫)’로 칭송되기도 한다. 그는 ‘비위론(脾胃論)’이라는 독특한 의론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 몸의 오장육부 중 비위가 건강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즉, ‘비위론’은 비위를 위한, 비위에 의한, 비위의 치료법인 셈!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그는 다른 장부도 아니고 왜 유독 비위를 중시했던 걸까?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논리 너머 무형의 힘으로 의론을 지탱하고 있는 그의 삶을 살펴야 한다.
 
 
까칠한 도련님, 의학의 입구에 서다
 
역수(易水)에 장원소(張元素)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금나라 최고의 의사였다. 어느 날이었다. 그가 책을 보고 있는데, 비단옷을 잘 차려입은 점잖은 청년 하나가 그를 찾았다. 나에게 진찰을 받으러 온 걸까? 얼굴색을 보니 몸에 병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장원소는 일단 어디서 왔는지부터 물었다. “저는 하북의 진정(眞定) 사람입니다.” 진정이라면 장원소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나, 그렇다고 마실 가듯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큰 맘 먹고 몇 박 며칠을 왔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일까? 청년은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의 의학이 높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의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딱 부러지는 말투, 진지하고도 총명한 눈빛이 단번에 장원소를 사로잡았다. 청년은 자신이 데려온 하인에게 눈짓을 했다. 하인은 상자 하나를 장원소에게 공손히 바쳤다. 장원소는 상자의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뚜껑을 열어보았다. 세상에! 그 안에는 커다란 금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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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감자칩마저 금으로 계산하려 들었을 거야...

그렇다. 이 젊은 청년이 바로 이동원이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동원의 생애에는 그의 탄생을 포함해 금에 관한 일화 세 가지가 전해진다. 그 중 두 번째가 바로 스승 장원소와의 첫 만남이다. 의학사에 이렇게 커다란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의학을 배웠다는 얘긴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금의 값어치를 떠나 이는 곧 이동원의 마음이기도 했다. 먼 길 마다 않고 집을 떠난 마음, 천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의학을 배우고자하는 마음. 명예와 권세를 쫓아가느라 바빴을 법한 나이인데, 이 청년은 대체 왜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것일까?
 
이동원은 1180년 중국 금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나라에서도 알아줄 만큼 매우 부자였다. 꼬마는 어려서부터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어린애답지 않게 점잖았기에 집안의 기대가 컸다. 집안 어른들은 이 꼬마를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를 초청해 <논어>와 <맹자>, <춘추>를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책 읽기를 즐긴 나머지, 책과는 다른 세상이 이 아이에게는 불편해져버렸다. 무엇이든 배운 대로 생각하고 행하려 했던 이동원은, 세속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 없었다. 
 
한편 이동원이 태어나서 자라던 시절은 금나라 120년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안정된 시기였다. 중원의 라이벌이었던 남송 역시 평온한 때를 맞았다. 두 나라는 전쟁을 멈추고 사신을 활발히 교류하며 평화로운 시기를 가졌다. 그러나 밖으로 신경 쓸 일이 줄어든 사람들은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술과 여자. 그들의 밤은 이 두 가지로 채워졌다. 하지만 이동원은 환락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동원의 고고함을 봐줄 수 없던, 아니 믿을 수 없던 친구들은 이동원을 시험에 들게 한다. 어느 날 친구들은 이동원을 식사에 초대했다. 영문도 모른 채 자리에 앉은 이동원. 분위기가 조금 무르익자 문이 열리고 꽃 같은 기생들이 들어와 사내들 틈에 앉았다. 각본대로 이동원 옆에 앉은 기생은 요염을 떨며 그의 저고리 고름을 당겼다. 우리의 이동원, 과연 어떻게 했을까? 그는 즉시 화를 내며 일어나, 기생이 만지작거렸던 옷을 불태워버렸다! 얼마 후, 남송의 사신들이 이동원이 있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지방의 향리로써 이동원은 그들의 술자리에 초대되었다. 물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린 군자(君子)라고 소문났던 이동원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 남송의 사신이 이동원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는 친구들 모임과는 달랐다. 모두 어른들이었고 나라 간의 술자리였다. 일부러 술을 권하고 그를 지켜보는 가운데, 이동원은 술잔에 입을 댔다. 다들 서로 눈짓하며 보이지 않게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때! 이동원은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고, 먹은 것을 모두 토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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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동원에게 세계는 뚜렷하게 나눠졌다. 하나는 공맹의 도(道)가 흐르는 세상, 또 하나는 술과 여자로 점철된 욕망의 세상. 불태우고 토해버리는 극단적인 반응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혼탁한 세계에서 등을 돌리고 청정한 세계에만 머물고자 했다. 그는 집 공터에 서원을 짓고 자신의 맘에 드는 고결한 선비들을 불러들여 사귀었다.
 
이동원이 스무 살 되었을 무렵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의 어머니가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던 것. 효자였던 이동원은 급히 명의라 소문난 의사를 모셔왔다. 의사는 맥을 짚고 환자의 증세를 보더니 한(寒)때문이라고 하여 약을 처방했다. 그러나 약을 먹은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이동원은 다시 수소문해 이름난 의사를 모셔왔다. 이번에 온 의사는 열(熱) 때문이라며 새로운 약을 처방했다. 하지만 약을 먹은 어머니는 오히려 병이 악화되더니 결국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의 증상을 놓고 의사들의 의견이 이렇게 엇갈리게 되었던 것일까? 이는 당시의 의학적 현실을 잘 반영하는 일화다. 당시 의학계에는 병을 진단하는 몇 가지 흐름이 있었다. 우선 크게는 병인이 안팎으로 갈린다. 하나는 외부의 사기(邪氣)가 병을 일으킨다는 관점. 또 하나는 내부 장부의 허실(虛實)이 병의 원인이 된다는 관점. 그리고 첫 번째 줄기는 다시 한사(寒邪)와 열사(熱邪)로 갈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점들이 고착화되어 어떤 병이든 자신이 고집한 방식으로만 처방하려 했던 의사들의 태도였다. 특히 첫 번째 큰 줄기의 의론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그 문제가 심각했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가졌던 의사가 바로 장원소였다. 그는 옛 지식에 의존해 지금의 병을 고치려드는 당시 의사들의 태만한 태도를 꼬집었다. 한 마디로 각주구검(刻舟求劍)하고 있다는 것. 이동원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만약 좋은 의원을 만나면 힘써 배워서 나의 과실을 깊이 새길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수소문 끝에 역수(易水)의 장원소(張元素)를 알게 되었고 이 부잣집 도련님은 무작정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간 장원소의 의론을 전수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세무관에서 의사가 된 사나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동원은 과연 무엇부터 했을까? 당대 최고의 의사에게 배운, 최고의 의술을 갖고 병원을 개업했을까? 아니면 홀로 의학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냈을까? 모든 추측을 뒤엎고 이동원은 제원지방의 세무관이 되어 또다시 집을 떠난다. 대체, 왜? 
 
예측을 빗나간 그의 행보에 대해 많은 추측이 돈다. 이동원이 워낙 부자였기 때문에 의사를 생업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과 당시에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기 때문에 이동원이 굳이 의사를 할 까닭이 없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든다. 물론 두 가지 모두 해당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의학에 입문했을 때의 마음가짐이 큰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가 의학을 배우게 된 계기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의학을 배우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던 것.
 
이동원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크게 한탄한 것은, 자신에게 의술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장원소를 찾아갔던 것은 병 고치는 기술 즉 의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장원소는 맥을 짚기만 해도 증세를 알아맞혔고, 그동안 어떤 약을 복용했었는지도 귀신같이 알아냈다. 그는 특히 약의 대가였다. 오랜 병도 그가 지은 약 한 첩만 먹으면 없던 병이 되었다. 장원소의 이름이 의학계에서 드날렸던 이유도 사실 이것 때문이었다. 이동원은 그에게 의학을 배우면서 이런 기술만 터득하면 자신의 가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이동원이 스승에게 배웠던 지식은 그의 집 담을 거의 넘지 못했다. 의사가 되어 돌아온 뒤의 기록을 보자. “항상 고상하고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여 비록 사대부 등 권위 있는 자가 치료를 받으려 해도 원하는 대로 응하지 않았다(『각가학설』).”거나 “사대부나 선비가 간혹 병이 나면 성품이 평소에 콧대가 높은 사람일지라도 다소 굽히곤 하였으며, 위급한 병이 아니고서는 감히 찾아가지 못하였다(『의학입문』).”고 적혀있다. 이동원이 배운 의술은 그를 더 어려운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22살에 제원지방의 세무관이 되어 떠났던 이동원은 53살에도 여전히 세무관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태평시절은 가고, 금과 남송의 피 튀기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 중원에 막강한 강자가 나타났으니, 바로 전쟁 기계나 다름없는 몽고군이었다. 이제 전쟁은 삶의 축마저 뒤흔들어 놓을 정도였다. 집을 떠나야 했고 농사를 포기해야했다. 피란이 일상이 되었다. 이동원 역시 변량의 개봉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개봉성은 금의 배수진이었다. 남송과 몽고연합군은 개봉성을 에워쌌다. 곧 그곳은 생지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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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이 앙상블을 이루는 가운데 삶이 이어진다. 이 균형이 깨지면 삶이 무너지는 법!

3개월 동안 성은 봉쇄되었다. 식량이 떨어져 가죽신을 삶아먹던 사람들이, 이제는 시체를 먹기 시작했다. 허기진 채 전장에 동원돼 싸워야했다. 이동원의 기록에 따르면 거의 3개월 동안 성문 12곳에서 매일 적어도 천 명에서 2천명이 죽어나갔다. 살아 있는 사람 역시 모두 병이 들어있는 상태였다. 이 장면이 이동원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저술한 책 곳곳에 이 장면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동원을 분노케 했던 것은 의사들 때문이었다. 돌팔이 의사 때문에 죽는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기존 습관대로 외부의 사기를 병인으로 보고 이를 빼내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사기를 빼내려다 생명의 근본인 원기(元氣)까지 상해버렸다. 이 원기를 건들이면 어떻게 될까? 곧 죽는다. 말하자면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 꼴이었다. 
 
꾸역꾸역 죽어나가는 사람들. 이동원은 그 안에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사실 피란을 즈음하여, 왕호고(王好古)라는 사람이 이동원을 찾아왔다. 그 역시 장원소의 제자였다. 장원소는 죽기 전, 왕호고를 불러 자신의 원고를 이동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들인 장벽(張壁) 역시 의사였지만, 그는 이동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동원은 스승의 원고를 받아들고 한참을 울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고는 한 의사의 모든 것이었다. 의사는 의론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 일이 이동원의 마음을 다시금 흔들었던 탓일까? 그는 53세의 나이, 아비규환의 성에서 의사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의학, 삶을 만나다
 
이동원은 세무관으로 일할 적에도 간간히 의술을 쓰고 있었다. 의사들도 포기한 전염병이 돌았을 때는, 며칠씩 잠도 안자고 연구해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도 했다. 그리곤 다시 세금을 걷는 업무를 봤다. 세금을 걷는 일은 세상의 흐름을 읽는 일과 같았다. 태평한 시절에는 세금도 잘 걷혔다. 그리고 그건 쉽게 말해 백성들도 잘 먹고 잘 자고 똥도 잘 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가뭄이 왔을 때는 세금을 걷기도 힘들다. 그건 곧 굶어죽거나 야반도주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백성들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이런 생리를 오랜 세무관의 경력으로 터득한 이동원은 다른 의사들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았다.
 
 임진(1232년) 개원에 경사의 계엄이 3월 하순에 이르렀는데, 변고를 당한지 보름 정도 되었다. 포위를 푼 다음 도인(都人)들이 병들지 않은 사람이 만 명 중에 한두 명도 없었으며, 이미 병들어 있다가 죽는 사람이 계속 끊이지 않았다. 도문 12곳에서 매일 실려 나가는 자가 많게는 2천이요, 적어도 천 명은 넘었는데, 이와 비슷하게 거의 3개월이나 계속 되었으니, 이 백만여 명이 어찌 한꺼번에 풍한의 외감으로 상하였겠는가. 대저 사람이 포위된 성안에서 음식부절하고 노역으로 상한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낮에는 굶주리다가 저녁에야 배부르게 먹고, 기거가 일정치 않고, 한온도 적당치 않은 상태에서 2, 3개월을 지냈으니 위기(胃氣)가 약해져 있음이 오래된 데다가, 하루아침에 (포위가 풀리면서) 배부르게 먹은 것이 지나쳐서 병이 든 다음 조치마저도 온당치 않았으니, 죽는 것이야 의심할 바가 없다.                                         
(이동원, 『내외상변감론』 상, 「논음증양증」)
 
이동원이 지적한 것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의론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기존에 의지했던 의론을 다 내려놓고 일단, 삶을 보라! 삶이 늘 먼저 있음을 잊지 말라!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세금의 생리로 꿰듯, 이동원은 우리 몸의 곳간에 해당하는 비위(脾胃)를 건강의 핵심으로 본다. 이를 정리하여 이른 바 ‘비위론(脾胃論)’이라는 새로운 의론을 내놓았다. 비위론. 이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음식을 먹으면 비위가 처음 그것을 소화시킨다. 이것이 생명활동의 시작이 된다. 비위에서 잘 분해한 정미로운 기(氣)는 오장육부에게 영양을 공급해 제각기 성질에 맞는 활동을 하도록 만든다. 이 활동이 막힘없이 잘 이루어지면 정(精)으로 저장되어 원기가 상하지 않게 하고, 신(神)도 잘 돌아가서 몸이 활기를 갖게 된다. 간단히 말해, 먹은 음식이 우리 몸에서 기(氣)로 잘 변해, 제 성질에 맞게 운동하다가 똥오줌으로 다시 잘 배출되는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특별히 비위가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의 시작이자 토대가 바로 비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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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아, 옳아! 배고픈 건 분명 병이야!
 
하나 더. 비위론은 이동원 자신의 삶과 연동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는 병을, 외부의 사기와 자기 안의 정기가 벌이는 전쟁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몸 안의 기가 외부의 기와 만나 순환시키는 과정에 차질이 났을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비위는 이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다. 비위야말로 외부의 기인 음식이 직행하는 곳이자, 몸의 중앙에서 기의 순환을 도와 내부의 정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즉 비위론이란 외부와 내부, 그리고 내부의 기 순환의 축이 되는 비위의 기를 보강함으로써, 잃었던 균형을 스스로 회복하게 하는 의론인 것이다. 한 마디로 비위는 이질적인 기운들을 조정하는 지휘자다. 헌데 젊은 날, 이분법적인 사고를 했던 이동원이라면 이런 의론을 생각해낼 수 있었을까? 비위론은 그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 또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훗날 이동원은 사람들에게 동원노인(東垣老人)이라 불렸다. ‘노인’은 높은 인격을 가진 어른에게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붙여주는 호칭이었다. 그렇다. 의사의 길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터득한 가운데, 그는 비위론과 만났던 것이다.
 
개봉성에서 이동원은 비위의 기를 보하는 약재를 써서 죽어가는 환자 하나를 치료해보았다. 그 환자는 곧 나았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이동원은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기 시작했다. 반면 금제국의 생명은 위독했다. 황제가 개봉성을 버리고 몰래 빠져나가버렸다. 성 안에 남은 정치세력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립이라는 금나라의 장군은 몽고군에게 투항하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1232년 금의 관리들은 몽고군에 의해 산둥의 동평으로 귀향살이를 가게 된다. 이 대열에 이동원도 있었다.  
 
 
의론으로 남은 의사
 
인생살이 새옹지마! 산둥지방으로 간 이동원은 그동안 방치했던 의학공부를 가열 차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난다. 그는 스승에게 물려받은 원고를 정리하여 그 맥을 잇되, 자신의 경험을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동원은 그곳에서 범존사라는 도가에 능통한 인물과 만난다. 그는 도가의 전진교파에서 갈라져 나온 전진 화산파(華山派)의 교주 학대통의 제자로 본명은 범원희(范圓曦)다. 동평에서의 삶은 단순했다. 의서를 집필하거나 범원희가 있는 정일궁에 찾아가서 그와 대화를 나누거나. 그런데 이동원의 마음이 마냥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이동원은 책을 집필하다 붓을 팽개치고, 답답한 심정으로 정일궁에 들렀다. 범존사는 이동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이동원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의론에 한계를 느끼고 있음을 토로했다. 이동원이 보기에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비위의 기가 약해져 건강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환자에게 자신이 창방한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을 처방해주었다. 얼마 후 환자는 곧 기력을 회복했지만,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혼란한 시대가 진정되지 않는 한, 환자는 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불안정한 거처와 기아, 지나친 노역으로 삶의 균형은 허물어져 있었다. 이동원은 허탈감에 빠졌다. 이동원의 탄식을 들은 범존사는 그를 위로했다. “절대 포기 하지 마라. 지금 네가 생각하는 걸 하나하나 적어두어라. 언젠가는 아침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을 고민하고 신경 쓰는 시대가 온다. 의사로서 지금은 하지 못한 일들이 후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모조리 기록으로 남겨라.” 
 
이동원은 이때 깨달았다. 의론은 자신을 떠나있음을. 선배들이 그러했듯, 자신의 스승이 그러했듯 의론만이 남겨질 뿐이었다. 그리고 의론은 시간에 의해서든 사람에 의해서든 손을 타는 물건이었다. 마치 자신이 장원소의 의론을 곧이곧대로 계승한 게 아니듯 말이다. 12년을 동평에 있던 이동원은 자신의 의론에 확신을 갖고 1244년, 65세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온다. 이동원의 의사로서의 활동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오자마자 수소문하여 자신의 의론을 전할 제자부터 구했다. 낮에는 환자를 돌보고, 밤에는 제자를 가르치고, 책을 썼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남은 기력을 모두 바쳤던 이동원은 이때 건강을 많이 잃었다. 명색이 비위론의 창시자인데 비위병을 앓게 되었고 눈과 귀는 기능을 거의 잃었다. 눈을 감으면 혼이 나가는 것 같다고까지 표현한 걸 보면 그의 병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귀향하자마자 『내외상변혹론』을 3년 만에 완성하고, 그 미혹한 바를 2년 뒤 『비위론』에서 정교화 하였다. 
 
참 궁금하다. 건강을 제일로 여기는 사람이 자신의 정기신을 다 바쳐 책을 쓰고 환자를 보고 제자를 가르쳤던 이유는 뭘까? 이 질문이 들었을 즘, 이동원은 잊고 있었던 금을 불쑥 꺼내놓는다. 자신의 제자 나겸보(羅兼補)를 앉혀놓고 그는 말을 잇는다. “내가 너를 3년 동안 지켜보았지만, 넌 단 한 번도 공부에 게으르지 않았다. 너의 생계가 매우 어려운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마음이 동하여 중도에 포기할까 두려우니 이것을 네 처자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그의 일생에 등장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금이다. 결국 이동원이 태어나기 전 그에게 주어진 금은 그의 스승에게, 제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의학을 배우기 위해 쓰였고 의학을 전하기 위해 쓰인 셈이다. 여기에 질문의 실마리가 있다. 애초부터 금에는 주인이 없었다. 이동원의 조상도 땅에서 주은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의론 역시 마찬가지다. 이동원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이어져왔다. 잠시 맡아 자신의 주물대로 만들었다 넘기면 나머지는 제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의론으로 남고자 한 이동원. 그는 자신이 금을 맡고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모양을 완성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1251년, 입춘은 지났으나 여전히 추운 날이었다. 하루는 이동원은 방에 가지런히 자신의 의론을 담은 원고를 쌓아 놓고 나겸보를 불렀다. 기력이 많이 쇠해져 말소리는 가늘었다. 그는 제자에게 아무래도 명을 다한 것 같다며 부탁했다. “이 원고들을 네게 줄 것이니, 이는 나나 너를 위한 것이 아니고 후세를 위한 것이다. 삼가 매몰되지 않게 하고 넓혀 행하도록 하거라.” 이동원은 이틀 뒤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중심. 그가 비위론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한마디였다. 그러나 비위론에서 말하는 ‘중(中)’은 한 곳에 뿌리박아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 아니다.
『내경』에 이르기를 …… “오직 양명궐음은 표본을 쫓지 않고 중(中)을 따른다.”고 하며 그 주(註)에 양명재상(陽明在上)하면 중견태음(中見太陰)하고 궐음재상(厥陰在上)하면 중견소양이라고 설명하였는데, 그러나 내가 유독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 ‘중(中)’의 의미가 내외의 중도, 또한 상중하의 중도 아닌 정해지지 않은 말씀이기 때문이니,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병의 소식(消息)에 임하여 작중하여 용약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비위론』「비위승쇠론」-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양명궐음은 비위를 의미한다. 전문적인 내용을 건너뛰고 보면(^^;), 결국 중(中)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중(中)이란 없다. 그저 때와 상황 안에서 매번 길을 찾을 뿐. 이것은 당대의 의론을 날카롭게 겨냥한 말이기도 했으며, 자기 삶의 철학이기도 했다. 고결한 부잣집 도련님에서 세무관으로 그리고 의사로. 이동원의 삶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스텝을 밟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자유자재로 변주될 수 있는 의론으로 남기를 자처했다. 이는 몸의 원리로부터 구한 그의 삶의 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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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잡는다는 것. 순간 순간 답이 달라지는 것.
중심. 온 존재를 던져야 만나는 순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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