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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혁명가, 육조 혜능 - 나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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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9-12 00:32 조회7,08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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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혁명가, 육조 혜능
 
나선미(감이당 대중지성)
 
 
 “쌀은 다 찧었느냐?” “방아는 다 찧었습니다만 아직 쌀 속에 섞여 있는 뉘를 고르지 못했습니다.” 오조는 능행자의 말을 듣고는 주장자로 디딜방아를 세 번 탁탁 친 후 방장실로 돌아갔다. 능행자가 오조의 마음을 알아채고 삼경에 방장실로 찾아가자, 오조는 가사로 문을 가려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고는 능행자에게 <금강경>을 강해해주었다. 그는 한 번 듣고는 단박에 깨쳤다. 오조는 그에게 선종의 법통을 이을 사람이라는 표시로 가사를 전해주면서 일렀다. “이제 너는 선종의 6대 조사가 되었다. 그러나 예부터 법을 받은 자의 목숨은 실낱과 같다. 대중들이 너를 해칠까 두려우니 즉각 길을 떠나라.” 오조는 그 밤에 그를 직접 데리고 강을 건네주었다. 그는 오조의 뜻에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수년간 나타나지 않았다. 달마대사로부터 시작한 중국 선종의 6대 조사 혜능(惠能, 638~713)이 탄생하는 순간은 이처럼 은밀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혜능은 몰락한 노씨 집안의 늦둥이 아들로, 영남 신흥현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다 팔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나무를 팔러 갔다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마음이 맑아지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오조 홍인대사(弘忍, 601~675)가 법을 펼치고 있는 동산법문을 찾아간다. 3000리 길을 한 달 동안 걸어서 도착한 그에게 홍인대사는 “너는 영남사람으로 오랑캐인데 감히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꾸짖는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으로는 화상과 같지 않으나 불성에서 보면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혜능의 대답이 당당하고 맹랑하다. 순간 홍인대사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머리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홍인대사가 7살 때 사조 도신대사(道信, 580~651)를 만났는데 도신대사가 “성이 무엇이냐?”고 묻자 “성이 있으나 예사 성이 아닙니다.” “어떤 성이냐?” “불성(佛性)인 성입니다.”라고 답했었던 것.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닌가. 혜능은 홍인대사와 닮은꼴이었다. 홍인대사는 바로 혜능의 근기를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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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불교계는 경전에 의지하여 공부하니, 문자를 아는 귀족들이 중심이었고, 대다수 백성들은 불교를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홍인의 동산법문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자기 마음을 바로 보면 부처가 된다”고 가르쳤다. 혜능은 글자를 모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여덟 달 동안 묵묵히 방아 찧는 일을 한다. 홍인대사는 이제 혜능에게 법통을 상속할 결심을 한다. “자성을 깨달은 게송을 짓는 자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겠다.”고 공표한다. 동산법문에는 수년간 수행하며 후배들을 지도하던 신수상좌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불교와 유교, 도교 경전에도 해박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포기했고 신수상좌와 20대 까막눈 혜능행자의 게송 배틀이 시작된다. 신수 상좌가 고민 끝에 게송을 지었다. 소심한 신수는 홍인대사에게 직접 드리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에 벽 위에다 게송을 써놓았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 먼지 안 묻게 하리” 모범생의 교과서적인 게송. 그는 쉼 없는 노력으로 번뇌를 닦아서 번뇌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어딘가에 있는 완전한 것’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노래했다. 홍인대사는 “아직은 문 밖이지 방 안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네. 모름지기 문 안으로 들어와야만 스스로의 본성을 볼 수 있네”라며 만점을 주지 않았다. 신수는 계속 고민했다. ‘문안으로 들어와 본성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답을 내지는 못했다.
 
혜능이 신수의 게송을 듣고 ‘이건 아닌데’ 싶어 스스로 게송을 지었다. 글자를 몰라서 다른 학인에게 부탁해 신수의 게송 옆에 써 놓게 했다. “보리수도 본래 없으며/ 밝은 거울 또한 없다/ 불성이 항상 청정하거늘/ 어디에 티끌 먼지 있을까” 하나로는 모자라 하나 더 지었다. “마음은 보리수요/ 몸은 밝은 거울/ 맑은 거울이 본래 청정하거늘/ 어디가 티끌 먼지로 물들까” 누구는 열심히 쓸고 닦아 티끌 먼지 안 묻게 하려 애쓰는데 그는 ‘있지도 않은 티끌 먼지를 닦느냐’며 ‘몸도 마음도 청정하다’고 한다. 그렇다. 바로 그것, 몸도 마음도 청정하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홍인대사는 혜능의 게송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으나 대중들이 그를 해칠까 두려워 게송에 점수를 주지 않았다. 대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불러 법과 가사를 전하고 멀리 남쪽으로 떠나보낸 것이다.

돈오, 마음의 혁명
 
이렇게 사라진 혜능이 다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그 기간은 기록에 따라 3년부터 17년까지 다양하다. 하여간 그는 몇 년 동안 산 속에서 사냥꾼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은둔생활만 하다가는 불법을 전파할 시간이 없겠다고 생각한 혜능은 산을 내려와 법성사(광효사)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인종대사의 <열반경>강의를 들으며 행자생활을 한다. 어느 날,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날리는 것을 보고 스님들이 “저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며 다투고 있었다. 이를 본 혜능이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이른바 풍번문답(風幡問答). 헉! 인종대사는 그가 이미 깨달았음을 알아본다.
 
혜능의 깨달음은 바로 이것이다. 외부의 현상은 덧없고,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이미 청정하다는 것. 중생은 그것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무언가를 구하고 그것을 이루려 하며, 그래서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며 서로를 주장한다. 분별하여 옳고 좋은 것을 가지려 집착하는 게 중생의 번뇌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단박에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겐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다 보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신수가 차라리 더 가깝게 느껴진다. 신수도 마음을 맑은 거울이라 했다. 맑은 거울에 티끌 먼지 안 묻게 하려면 열심히 닦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은가? 세상이 내 마음에 만들어 놓은 허상에 집착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수행하여 그런 내 마음을 닦아 깨끗하게 해야 하지 않는가. 혜능이 수행을 하지 말라 한 건 아니다. 그도 조계 보림사에서 문인들에게 법을 펴고 수행을 하도록 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은 순간순간이라는 것. 그래서 수행은 점수(漸修), 깨달음은 돈오(頓悟)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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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 혜능은 바로 자신의 삶에서 깨달았던 것이다. 힘들게 살면서 어딘가에 있을 복을 구하여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싶었으나 <금강경>의 한 구절과 만나는 순간 현재 자신의 삶 자체가 이미 그것으로 완성된 것임을 깨달은 것. 신수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으나 아직은 되지 못했다고 자신의 마음을 소외시켜 문밖에 서 있었지만, 순간순간이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의 실체를 깨달은 혜능은 이미 문안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일자무식에 일개 나무꾼이었던 젊은 친구가 이렇다 할 수행 경험도 없이 불쑥 깨달아 당대 불교의 최고 자리에 오른다. 혜능은 이렇게 스스로의 삶을 통해 깨달음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음은 닦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불성을 가진 청정한 존재이며, 그래서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이건 오랑캐 출신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깨달음은 나무꾼이냐 사냥꾼이냐에 있지 않다. 깨달음은 나무꾼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순간, 사냥꾼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발 내딛는 바로 그 순간에 있다는 것을... 혜능의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법문을 듣는 제자들을 보고 ‘선지식(善知識)’이라 부른다. 선지식은 ‘바른 스승’을 말하는데, 가르치는 혜능이 배우는 제자들에게 선지식이라고 하다니 뭔가 이상한 것 같다. 그러나 혜능에게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따로 있지 않다. 스승이 제자에게 배우고 제자도 스승을 가르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위계는 없다. 함께 법을 배우는 도반일 뿐. 여기서 우리는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혜능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법달이라는 스님이 7년간 <법화경>을 외웠으나 마음이 트이지 않아 혜능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법화경>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습니다.” “경전 자체에는 의문이 없는데 그대의 마음에는 의심이 있네그려. 의심하는 그대 마음에 잘못이 있는데도 그대는 그것을 모르고 바른 법을 구하는구먼. 마음으로 실천하면 <법화경>의 가르침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만 실천하지 못한다면 <법화경>에 의해서 얽매이게 되며,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자기 뜻대로 굴릴 수 있으나 마음이 삿되다면 <법화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굴림을 당하게 되네.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의 가르침이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가르침과 같고 중생의 지견을 갖는다면 <법화경>에 의해서 묶이게 되지.” 부처의 마음으로 실천하면 부처가 되어 경전의 가르침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것. 이미 갖고 있는 인식의 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인식의 근거를 전환시키는 것이 경전이고 그것이 가르침이라는 것. 이렇듯 인식의 근거를 전환시키는 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노래하는 혜능
 
혜능은 풍번문답을 계기로 법성사에서 계를 받고 드디어 스님이 되었다. 이미 깨달아 자유인이 되었지만 불법을 전승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승단의 일원이 된 것이다. 정식 비구스님이 된 혜능은 조계 보림사(남화선사)로 떠난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소주 자사가 법문을 해달라고 초청하여 대범사에 가서 법을 설하게 되었는데, 이 법문을 제자인 법해스님이 기록한 것이 <육조단경>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한 책에만 붙이는 “경(經)”자를 부처님 제자의 법문집에 붙인 것은 <육조단경>이 유일하다. 그만큼 중국 선종 역사에서 <육조단경>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노래를 자주 부른다. 노래에 의지해 공부하라며. "선지식들이여, 수행하고자 한다면 출가하지 않고서도 가능합니다. 출가하여 절에 있어야만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곳에서 마음을 청정하게 닦으라는 것입니다.”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닦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선지식들이여, 제가 출가한 사람과 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양 없는 노래(無相頌)를 지어드리리니 모두들 외우시고 이 노래에 의지하여 수행하십시오.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저와 함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로 ‘모양 없는’ 노래(無相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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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의 허물과 장애를 없애는 ‘모양 없는’ 참회(無相懺悔), ‘모양 없는’ 삼귀의계(無相三歸依戒), 허물을 없애는 노래(滅罪頌).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 자성진불해탈송(自性眞佛解脫頌).  혜능스님이 ‘모양 없는’ 무상송에 의지해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인연으로 드러나고 있는 모양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도 모양 지을 수 없는 ‘관계성’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相)은 기억일 뿐 인연의 실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 기억은 만들어 갖고 있는 것과 같이 집착이 되며 집착이 된 기억은 생각의 길을 일정하게 만들게 되므로 생성과 소멸을 다 담아 늘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하여 단경을 지침으로 삼아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단경을 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단경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단경의 가르침이 마음 하나에 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수행자가 의지할 경전(所依經典)이라는 뜻이다. 
 
육조 이후 의발을 전수하는 것은 중단되었다. 오조 홍인이 당부하기도 했거니와 육조 혜능 이후에는 제자들이 워낙 많아서 한 사람으로 법통을 이어가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의발 대신 모양 없는 노래를 부르는 혜능의 단경이 전수되고 있다.

단도직입, 혜능
 
혜능은 자기 마음(自性)을 단박에 보라 한다. 그러면 곧바로 깨닫는다(頓悟). 혜능과 게송배틀을 했던 신수대사는 주로 낙양과 장안에서 활동하면서 중생이 번뇌를 부지런히 털고 닦는 좌선을 해서 깨달아야 부처가 된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이것을 돈오와 대비해 점오(漸悟)라고 한다. 신수대사가 혜능의 소식을 듣고 문인인 지성스님을 혜능에게 보내 은밀히 혜능의 가르침을 알아오라고 시킨다. 자신과는 다른 혜능의 가르침이 궁금했던 것. 그러나 지성스님은 혜능의 법문을 듣고 바로 깨달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혜능의 제자가 된다. 혜능은 단박에 깨닫는 것과 점차로 깨닫는 것에 대해 그에게 일러준다. “법에는 점차로 깨닫는다는 것과 단박에 깨닫는다는 것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둔함이 있기 때문에 점오와 돈오라는 개념이 있다.”고 하면서, 신수의 가르침은 근기가 낮은 사람에게 권할만한 가르침이라고 일갈한다.
 
홍인의 문하에서 신수가 게송을 지었을 때 홍인대사가 “범부가 이 게송을 의지해 수행한다면 타락하지는 않겠지만, 이와 같은 견해로써 위없는 지혜를 찾고자 한다면 찾을 수 없을 것이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청정한 마음 자체는 수행을 통해 성숙된 마음이 아니므로 마음의 본모습을 바로 본다면 단박에 수행이 완성되지, 알아차리는 마음의 본바탕은 점점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말은 번뇌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변해 깨달음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그것이 번뇌인 줄 알아차리는 마음, 그래서 번뇌가 번뇌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곧 반야(지혜)라는 뜻이다. 번뇌도 깨달음도 자성이 없음을 알고 무상한 변화의 흐름 속에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의 자유가 곧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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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이 말하는 수행은 절이나 출가, 좌선과 같은 형식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그 마음에 주목한다. 수행 특히, 단박에 닦음(頓修)은 본래 부처가 중생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므로 ‘닦되 닦음이 없다’라고 표현한다. 엄밀히 말하면 돈수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돈오가 있을 뿐. 단박에 깨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혜능대사는 단호하고 명쾌하다. 대범사에서 설법할 때 소주 지사 위사군이, 그러니까 법문을 듣는 이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제자에게 질문이 있는데 스님께서 대자대비로 대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며 청하자 대사는 “질문이 있으면 바로 물으면 되지, 거듭거듭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일침을 날린다. 또 달마대사와 양무제 이야기를 하면서 “달마대사가 공덕이 없다고 했는데 저는 공덕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잘 설명해 주십시오,” 하자 “참으로 공덕이 없습니다. 그대는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돈교의 법문에 대해 “항상 마음깊이 새겨 함께 보고 함께 실천하되 부처님 섬기듯 하겠다고 발원하고 받아 지니십시오.”라고 이야기 한 후 “만일 이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뜻도 없다면, 그곳에서는 쓸데없이 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닦는 그의 수행 방법과 잘 맞는다. 단도직입!
 
신회스님이 혜능대사에게 “스님께서는 좌선을 할 때 봅니까, 보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대사는 신회스님을 세 차례 때리고 나서 물었다. “아픈가, 아프지 않은가?” 신회가 청정한 마음을 보지 못했으면서도 마치 청정한 마음을 본 듯 혜능에게 묻는 것에 대해 엄격하게 꾸짖는다. “그대의 마음이 미혹하여 청정한 마음을 보지 못했다면 선지식께 물어서 길을 찾아야 하고, 마음이 각성되어 스스로 청정한 마음을 보았다면 마음법에 의지해 수행하게. 나의 봄은 나 스스로 알 수 있으나 그대의 어리석음을 대신할 수 없고, 그대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본다고 할지라도 나의 어리석음을 대신할 수 없지. 그런데도 어찌 스스로 닦지 않고 나의 봄에 대해서 묻는가?” 스승에게 맞고 나서 깨달은 신회는 혜능의 가장 가까운 제자가 된다.

<단경>으로 전해지는 법
 
올해는 혜능대사가 열반한지 1300년이 되는 해이다. 혜능은 713년 8월 3일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혜능은 문인들을 불러서 마지막 작별을 한다. “다음 달이면 내가 세상을 뜰 것 같네.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보게. 그대들의 의심을 해소해 헤매는 일이 없게 하고 평안하게 해 주고 싶네. 내가 간 후에는 그대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겠지.” 법해 등 여러 스님들이 슬피 우는데, 오직 신회스님만이 움직이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신회는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좋고 나쁜 일에 평등한 마음을 얻어 움직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여러 해 동안 산중에서 도를 닦았는데 무슨 도를 닦았으며 슬피 우는데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우는가? 내가 갈 곳을 모를까봐 근심하는 것인가? 그대들이 슬피 운 것은 내가 갈 곳을 그대들이 몰라서 그럴 것이니, 내가 갈 곳을 안다면 울지 않으리라. 청정한 마음 바탕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없으며 가고 옴도 없네.” 그러면서 혜능은 참과 거짓 그리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노래한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를 불러준다.
 
“어디에도 진실이 없으니/ 진실을 보려 하지 말라/ 진실을 보았다고 하면/ 보는 것이 도리어 진실이 아니네// 자기에게 진실이 있을 수 있다면/ 거짓을 떠난 그 마음이 진실이니/ 자기 마음에서 거짓을 보내지 못하면/ 진실이 없으리니 어디에 진실이 있을까// 유정은 움직일 줄 알고/ 무정은 움직일 줄 모르니/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도를 닦는다고 하면/ 움직이지 않는 무정과 같으리//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는 것은/ 움직임 그 자체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에만 머문다면/ 정도 없고 부처될 종자도 없으리라// 갖가지 모양들을 잘 분별하나/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깨우쳐 이같이 볼 수 있다면/ 잘 분별해 보는 것, 그것이 곧 진여의 작용이다// 도를 배우는 모든 이들에게 고하나니/ 부지런히 마음을 써서 배우되/ 대승의 문에 들어가고자 하면서/ 도리어 생사에 집착하는 알음알이를 내지마라// 눈앞에 있는 사람과 뜻이 통한다면/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으로 통하지 않는다면/ 그냥 인사 나누고 착한 일을 권하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부터 논쟁하는 데에 없으니/ 논쟁하지 않는다고 도의 뜻이 없어지겠는가/ 미혹하여 법문으로 논쟁하기를 집착한다면/ 청정한 마음이 생사 속으로 들어가리라” 
 
제자들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서 스승의 뜻을 알게 되었다. 논쟁하지 않고 가르침에 의지해서 수행하고자 다짐한다. 대사께서 살아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줄도 알게 된다. 이번엔 제자가 묻는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가사와 법을 누구에게 당부하시겠습니까?” “법은 이미 두었으니 그대들은 그리 알고 있게. 내가 죽고 나서 20년쯤 지나면 삿된 법이 요란을 떨어 내가 가르쳐 준 근본 취지(종지)가 혼란스럽게 될 때 한 스님이 나와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옳고 그름의 근거를 정하여 종지를 수립할걸세. 그것이 내가 전한 바른 법이네.” 20년 후의 그 주인공은 바로 신회이다. 스승에게 대들었다가 한 대 맞고 깨달은 신회, 스승이 돌아가신다는데 울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그 신회다. 신회는 남종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투쟁했다. 신회는 “이후로 법을 전할 때는 서로 서로 단경을 가르치고 전수하여 본래의 종지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혜능의 당부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신회를 비롯한 열 명의 제자가 혜능 사후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각 지방으로 나가 <단경>을 가르치고 전수하여 남종선이 선종의 맥을 잇게 되었다. 7세기 이후 혜능의 남종선은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와 전통문화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바로 혜능대사로부터 온 것이다. 혜능대사가 불법을 펼친 곳이 조계 보림사였던지라 ‘조계혜능대사’라 불린다. 그 조계 이름을 따 조계종이라 한 것. 조계종에서도 <단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음은 1300년 전 혜능의 가르침이 지금 이곳에서도 펼쳐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단경을 얻은 사람은 나를 만나 직접 전수받은 것과 같네. 단경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청정한 마음자리를 볼 것이네.” 혜능은 그렇게 지금, 우리와도 함께 하고 있다. “그래, 단경을 얻었느냐?”  “단경을 읽기는 읽었습니다만 아직 그 안을 다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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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님의 댓글

명도 작성일

반갑습니다~ 그래서 6조 이후, 황벽희운, 마조도일, 석두희천, 임제의현, 백장회해, 남전보원, 조주행심 등 기라성 같은 선사들이 등장하는데요, 학인이 법을 물으면- 뜰앞의 잣나무, 마삼근, 마른 똥막대기다.... 이렇게 말했지요.

이리저리 분별치 말고 바로 그 자리를 단도직입으로 가리키지요.(직지인심 견성성불)- 그래서 법 공부는 절대로 수행해서 가는 소승이 아니고 원래 깨달아있는 자리를 바로 가리키는 대승입니다.

본래 다 깨달아있는 <본래면목>만 확인하면 되지요.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견성만 하면 된다.....
*일대사인연 이라고 이 공부가 가장 큰 공부라 여겨지며 이걸 알면 고요하나 태풍이 부나 항상 똑같은 이 하나의 일입니다. 
* 지식이나 생각으로 하지 않는 실재- 당체, 당처를 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