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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건강하고 고귀한 삶의 철학자
 글쓴이 : 임수 | 작성일 : 13-09-13 02:32
조회 : 6,009  
                
  니체, 건강하고 고귀한 삶을 탐구한 철학자
 
                                                                                                                                        송미경 (감이당 대중지성)
 
“나는 지난 천 년과 앞으로 올 천 년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적인 사건이네”(우상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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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를 지배해온 기독교 가치체계에 도전해 “신은 죽었다”고 선포했던 철학자 니체. 그는 신이 없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주인이 될 것인가 고뇌하며 자신의 철학적 분신인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근대 이후의 인류의 길을 제시한 철학자이다.
 
 그가 자신의 말대로 인류사의 사건이자 운명이 된 것은 자기 시대의 ‘가치의 가치’를 질문했기 때문이다. 그의 질문은 근본적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생각의 전제들을 되묻고,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런 전제들을 갖게 되었나를 되짚어 보았던 것. 그가 의도적으로 인류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고민을 해서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은 아니다. 그의 철학적 목표는 아주 단순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은 존재하는 바의 자기가 되는가’ 즉, 그의 질문은 결코 형이상학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철학은 심리학이고 생리학이며 의학이었다. 

 그는 자기 시대의 도덕과 가치에 맞서 고독한 사유의 전쟁을 벌이는 동안 인간의 심리와 생리를 관통하여 건강하고 고귀한 삶의 통찰에 이르렀다. 그의 철학은 여전히 인류에게 신, 국가, 자본 등 외적인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자유롭고도 고귀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르침이 되고 있다. 그가 삶이라는 철학적 과제를 어떻게 탐구하였는지 그의 삶을 따라가 보자.
 

그의 또 다른 이름, 디오니소스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프로이센(독일) 라이프니치 근처의 뢰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침 그날이 프로이센 왕의 생일이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니체. 어릴 때는 친구들에게 ‘작은 목사’라 불렸을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점점 니체는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된다. 신에게 자신의 삶의 주권을 맡기는 기독교의 수동적인 삶의 태도가 강하고 고귀한 인간을 꿈꾸는 니체에게는 마뜩잖은 문제였다. 
 
“한 철학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에도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기가 사는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를 그 시대의 아들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사유했던 니체에게 기독교는 공허한 관념이 아닌 자신의 시대적 조건이었고 이것들과의 대결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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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철학적 사유의 원천, 사유의 무기가 된 인문학적인 교양은 청소년기에 이미 갖춰지기 시작했다. 1858년 열네 살 되던 해 슐포르타에 입학해 그리스어와 라틴어, 독일문학 등 문학 교육과 글쓰기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게르마니아’라는 서클을 조직해서 음악과 문학 비평의 소모임 활동을 한다. 작시, 작곡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도 프로급이었으며 “음악을 듣지 못하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생각된다”고 피력했을 정도로 음악에 심취하여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기 전에는 음악 평론가가 될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슐포르타 시절 그가 읽은 책은 엄청났다고 한다. 특히 매혹된 인물은 휠덜린과 바이런과 나폴레옹. 그가 감동받은 부분은 이들의 숭고하고 영웅적인 면모로, 이때 벌써 초인 사상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그리스 고전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후 그리스적 세계관은 그의 사상의 중요한 키가 되기 때문이다. 고통, 심판, 죄의 어두운 기독교 세계와 대비되는 고대 그리스 문화, 특히 디오니소스의 세계관-삶에 대한 완전한 긍정에서 니체는 자신의 삶의 모델을 찾은 것이다.

 본 대학에서 니체는 문헌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신학은 어머니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니체는 신학 대신 철학을 선택한다. 문헌학과 철학 공부를 하던 중 니체는 리츨교수를 만나게 되고, 그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난다.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마침 얻게 된 방이 헌 책방 주인의 집이었는데 그곳 서점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고 그의 철학 세계에 빠져든다.
                                                                                                                                                                                                                  
바그너2.png
 바그너는 아나키스트인 바쿠닌의 열정에 이끌려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 단장으로 일하던  1849년, 드레스덴 혁명봉기의 선두에 선다. 바그너는 12년 가까이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인간 세계가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로 가득 차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니체가 바그너에 경도된 것은 디오니소스적 음악가의 전형을 바그너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삶은 근원적으로 비극적이며, 그 비극성을 견딜 수단은 예술밖에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예술관이자 자신의 예술관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구현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라이프니치 대학에서 수학 중이던 1869년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의 나이 25세. 박사 학위도 취득하기 전에 이루어진 일로 그만큼 니체는 문헌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1870년 그는 독일 민족주의에 관심을 갖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간호병으로 자원해 참가하나 이질과 디프테리아로 한 달 만에 바젤로 돌아온다.
 
 요양 중 쓴 글이『비극의 탄생』. 바그너의 음악에서 생의 고통과 무상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흔쾌히 긍정하는 정신이 부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후 바그너의 가극이 기독교적 구원의 냄새로 가득 차 있으며 권력의 눈치를 보며 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니체는 1876년 바이로이트 여름 축제극을 계기로 바그너와 결별한다.  1878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이르러서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세계와  바그너의 예술철학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바그너와의 결별을 통해 예술로서만 삶을 구할 수 있다는 예술구원론적인 생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이제 삶의 부정을 벗어나 삶 그자체로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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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비극과 디오니소스의 무한히 끈질긴 생명력과 창조성에서 빛을 찾았던 니체. 바그너와의 필생의 전투는 1888년까지 계속되어『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니체 대 바그너』,『디오니소스 송가』를 낳는다. 삶에 대한 완전한 긍정의 정신으로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고통과 시련과 두려움을 이겨낸 뒤 ‘삶이여 한 번 더’를 외치는 디오니소스. 니체는 그의 한없는 긍정에서 허무의 시대를 견뎌나갈 정신의 강함과 위대함을 본다. 그리고 말년에는 자신을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디오니소스’라 한다.
 
 
 
망치를 든 삶의 철학자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하지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질문하라”(1865년 6월 11일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
 그는 평화 대신에 전쟁을 권한다. 전쟁은 힘의 겨룸을 통해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기만적인 행복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진실을 찾아간다. 그는 행복을 원하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최후의 인간’에 속한다 본다. ‘최후의 인간’이란 고통 없는 안락을 추구하여 부담과 고통에서 도피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니체에게 행복은 고통의 제거나 회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고양되는 생의 의지에서 온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행복이냐 불행이냐가 아니라 그것을 떠난 삶 그 자체이다. 무언가를 행복이나 불행으로 규정하는 우리들의 가치 규범 너머 삶을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수동적이고 위축된 삶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힘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며, 보다 천박해지며, 보다 선량해지며, 보다 신중해지며, 보다 안락해지며, 보다 범용해지며, 보다 냉담해지며, 보다 중국적인 것으로, 기독교적인 것으로 되어가리라고 우리는 예감한다.”(도덕의 계보, 51쪽, 청하)
 니체는 인간이 왜소화 되고 평준화되는 것을 인류의 위험으로 본다. 그는 기독교가 약자의 도덕, 노예의 도덕으로 부르조아 문화의 본질인 데카당스를 이룬다고 본다.  그가 기존 도덕과 가치의 가치를 질문했을 때 그는 기존의 도덕과 가치의 파괴자이자 반시대적인 철학자가 된다. 그에게 이성이란 것은 객관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삶을 왜곡하는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진리와 가치란 고정되어있지 않는다는 것과 지금의 진리란 보편적인 거짓말이었다. 도덕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한때의 유행같은 것으로 지금의 도덕은 약자의 승리일 뿐이었다. 따라서 가치의 척도는 진리나 도덕에서 나오는 선악이 아닌 개인적인 취향인 좋고 나쁨이어야 한다. 이 좋음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강자이고 고귀한 자이다. 외부대상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더 나은 것, 더 높은 것, 더 고결한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고귀한 것은 자기극복이다.
 
  니체는『아침놀』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상실시키는 도덕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다.『선악의 저편』에서는 인간을 왜소화하고 고립시킨 근대성을 비판하고 『도덕의 계보학』에서는 기독교의 도덕 심리를 계보학적으로 비판한다. 이 저서들은 선악에 대한 도덕적 판단,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 국가와 민주주의 등 그동안 믿어 왔고 교육 받았던 모든 가치의 토대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 과정에서 모든 가치의 전환을 이뤄낸다. 그것은 통념을 깨는 사유의 전쟁이었다.
 
 
 고통 속에서 찾아낸 위대한 건강
 
 1879년 니체의 건강상태는 최악이었다. 118번의 심한 발작을 일으켰으며 머리와 눈의 통증, 위경련, 구토, 탈진이 이어졌다. 3월부터 6달 동안 16번이나 체류지를 옮겨야 했을 정도였다. 그 해 6월에 그는 10년 동안의 문헌학 교수로서의 삶을 접고 저술가의 길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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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젤대학으로 오면서 니체는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다. 그러나 새로 스위스 국적을 얻지는 못했다. 이후 니체는 무국적자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몸에 맞는 기후를 찾아 여름에는 스위스 고지대로, 겨울에는 따뜻한 이탈리아로 떠돌며 유목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대지, 기후, 풍토가 삶과 사유를 키워낸다고 보고 건강과 앎을 구하며 자유로운 정신의 투지를 발휘했다. 
 
 당시 니체는 하루 2시간 이상은 책을 볼 수도 없었지만, 신체가 허락하는 시간을 훌쩍 넘어 책을 보았다. 짧은 파편적, 잠언적 스타일의 글쓰기는 긴 글을 쓰기 힘들었던 당시 그의 건강 상태가 반영된 것. 그는 철학은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그의 질병과 그의 철학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그는 아팠는데도 건강했었다는 말이 성립되어야 그의 철학이 설명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병에 걸렸지만 한 번도 병에 걸리지 않았으며 건강한 방식으로 병에 걸렸다고 했다. 
 “병이 나를 서서히 해방시켜 주었다.······병은 모든 나의 습성을 바꿀 수 있는 권리를 나에게 부여하였다.······끊임없는 중압감 속에서 파묻히고 침묵하여 있던 맨 밑바닥의 자아는 서서히 수줍어하며, 미심쩍어하면서 깨어났다. 그리하여 결국 그 자아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병 속에서 시달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보다 내 생애 더 큰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이 사람을 보라, 261쪽, 청하)
 질병은 익숙한 사고를 떠나서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생명의 의지를 끌어낸다. 이런 것이 건강한 방식으로 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상태를 ‘위대한 건강’이라고 말했다. 그는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풍요로운 삶을 위한 적극적 계기로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고통의 체험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고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 낸다. 그는 “수많은 건강 상태만큼이나 다양한 철학이 존재한다”(『즐거운 지식』)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질병을 이질적인 힘들의 공존 상태로 만들었다. 질병을 통해 수 백 가지의 다른 힘들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신체를 가지게 됨으로써 다른 존재, 새로운 철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위대한 건강은 질병을 더 큰 사유의 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건강을 넘어선 건강, 곧 위대한 철학이다.
 
니체는 질병을 건강이 결여된 상태로 보지 않았기에 병에 갇히거나 휘둘리며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혹한 고통조차도 자신의 삶으로 힘껏 끌어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철학을 생산해냈다. 결코 고통을 결핍으로 보지 않으며 고통을 통해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삶의 높이를 끌어올린다. 그리고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우상의 황혼』)고 씩씩하게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나는 실바플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다. 수를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때 이 생각이 떠올랐다(『이 사람을 보라』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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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1년 8월 6일. 영원회귀 사상이 비둘기처럼 조용히 니체를 찾아왔다. 그리고 두 해의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1883년, 인류에게 보내는 최고의 선물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세상에 보낸다.
 
“가장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있는 혼,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갈 수 있는 혼-자기 자신 속에서 가장 멀리 달리고 방황하며 방랑할 수 있는 혼, 기꺼이 우연 속으로 뛰어드는 가장 필연적인 혼, 생성 속으로 뛰어드는 존재의 혼, ‘소유’하고 있으나 소망과 의지를 ‘원하는’ 혼,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여 가장 넓은 원을 그리며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혼, 가장 달콤하게 어리석음을 타이르는 현명한 혼,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혼, 그 혼 속에 모든 것은 자신의 격류와 역류, 밀물과 썰물을 가지고 있다”(이 사람을 보라, 277쪽, 청하)
 니체가 본 차라투스트라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답하는 자신의 분신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죽었다고 외친다. 늘 신앙의 대상을 찾아다니는 인간은 이제 신을 대체해 국가며 자본을 섬기거나 의미도 목적도 없는 삶의 허무를 지닌 채 산다. 그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니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는 초인이 되라 한다. 이런 초인의 모습은 영원회귀와 운명애 속에서 여러 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디오니소스의 모습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지금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 번, 아니 수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만 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나기를 영원히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맹목적으로 순환하는 것 같은 삶의 과정을 자기 고양의 필연적인 계기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라면 영원회귀를 원할 수 있다. 이처럼 우연을 자신을 위한 내적인 필연으로 만드는 능력이 운명애다. 이로써 차라투스트라는 생의 절대적인 긍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매순간 삶은 새롭게 시작된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살아보라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게 된다. 필요한 것은 오직 주어진 이 순간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

 초인은 자신의 고유한 입장과 관점으로부터 가치를 만들어내고 삶의 양식을 만드는 입법자이며 창조하는 인간이다. 그가 고민했던 ‘나 자신인 나’란 차라투스트라의 초인 되기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해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어찌 보면 말장난 같은 역설이 니체가 지향한 삶의 모습이었다.

  1888년 니체는 심한 울증과 조증을 번갈아 앓는다. 무한한 자신감이 폭발하는 광증을 보이기도 한다.『우상의 황혼』,『바그너의 경우』,『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를 쏟아내며 자신이 그동안 사유했던 주제의 연장에서 바그너와 기독교 도덕을 비판하고 자신의 저서를 정리해낸다. 1888년 가을 이후 그는 가벼운 조증 상태를 넘어 폭발할 것 같은 광증을 보인다. 무수한 불면의 밤을 보내고 1889년 1월 3일 마침내 정신발작을 일으킨다. 토르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마부가 난폭하게 말을 다루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에게 달려가 목을 안고 쓰러져버린다. 그 후 10년 동안 정신이상으로 어머니, 누이의 보살핌을 받다가 1900년 8월 25일 눈을 감는다.
 습속을 깨고 새로운 사유를 하는 것, 새로운 삶의 길을 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니체는 스스로를 광기로 몰고 가면서까지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광기의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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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그 누구의 삶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용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니체. 그가 우리에게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너의 삶을 살아라! 그가 자신의 삶을 약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모든 가치와 도덕에 의문을 던지고 두드리고 깨고 극복했듯 이제 그가 대결했던 철학적 질문들은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자기 자신이 될 만큼 용기를 내보겠는가? 다르게 살 만큼 강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여 고귀한 자가 되겠는가? 어떤 삶이라도, 어떤 고통 속에서라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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