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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공부, 하나의 길 - 주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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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시성 작성일13-09-14 21:54 조회6,9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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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공부, 하나의 길
-금원사대가 주단계
 
 
류시성(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漢)나라 성도(成都:청도)에 엄평군(嚴平君)이라는 점쟁이가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두루 박학(博學)했던 그는 여러 분야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허나, 재주 많은 자의 비극이었을까. 팔자가 꼬인 탓일까. 평생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는 길바닥의 점쟁이로 살아야 했다. “나도 세상을 버렸고, 세상도 나를 버렸다!” 특이하게도 그는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의 도리에 대해 가르쳤다. 세상을 등진 점쟁이가 웬 사람의 도리? 하지만 그는 고객(?)들이 찾아오면 괘상(卦象)을 들먹이며 어김없이 사람의 도리에 대해 말했다. 자식이 된 자가 찾아오면 다른 점괘가 나왔음에도 그는 효도(孝道)해야 한다고 점괘를 풀이했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우가 되는 사람이 찾아와 물으면 공순(恭順)해야 한다고 했고, 신하가 된 자가 찾아오면 충군(忠君)하라고 조언했다. 황당한 점괘에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하지만 엄평군은 엉터리 점괘 풀이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대체 왜 이렇게 했던 것일까.
 
뜻밖에도 이 이야기는 정충(程充)이 지은 「단계옹전(丹溪翁傳)」에 등장한다. 단계를 존경하여 그의 삶을 토대로 전을 지은 정충은 단계를 엄평군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의사를 찾아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늘 정기(精氣)를 보전하고 신기(神氣)를 양육하는 것으로 그들의 사상을 계발하였다.” 의학을 통해 사람들의 사상적 지평을 열어주고자 했던 의사라는 것이다. 정충은 단계가 이 일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구절까지 덧붙였다. “권태를 모르고 훈계하여 가르치고 타일러 사람으로 하여금 즉시 분발 격동케 하고 감개하여 끊임없이 스스로 힘쓰게 하였다.” 뭔가 꼰대의 체취가 물씬 풍겨온다. 허나, 정충은 이 장면이야말로 단계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서술했다. 엉터리 점쟁이와 꼰대 스타일의 의사. 정충은 왜 그들의 삶이 서로 닮아 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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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넘어 혹은 나를 넘어 – 주자학과의 만남
 
꼰대 스타일의 의사. 그의 이름은 주단계(朱丹溪)다. 본명은 진형(震亨)이고 자는 언수(彦修)였던 인물. 그는 원(元)나라를 대표하는 명의(名醫)이자 우리에겐 금원(金元)시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의사들,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단계는 1281년 음력 11월 28일 중국 절강성 무주 의오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시대는 원제국의 팽창기였다. 동아시아를 넘어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원(元)나라. 그러나 속은 이미 곪아터지고 있었다. 권력의 암투가 벌어져 30년 동안 8명의 황제가 바뀌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은 물론 하북의 홍수와 강남의 가뭄, 전염병과 같은 자연재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다 홍건적이라고 불리던 도적떼가 출몰하고 백련교와 같은 미륵사상이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이른바 ‘말세’라고 불리던 시절. 단계는 이 암울한 제국의 한복판을 살다간 의사였다.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제자 송렴이 쓴 묘비명과 후대 그를 기리며 정충이 지은 「단계옹전」이 전부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청년시절의 단계는 협기를 무척이나 숭상하는 젊은이였다. 간혹 세력이 있는 가문이 마을에서 행패를 부릴 때면 단계는 “번개처럼 격렬하게 성내며 벼슬아치에게 공정히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한 성질 제대로 하는 단계 때문에 마을의 상하에선 “손을 흔들며 서로 경계하여 경솔하게 일을 저지르지 않”을 정도였다. 재밌는 것은 혹시나 잘못을 하게 되면 “선생이 알까 두려워서 깊이 숨고 몰래 덮었다”는 기록이다. 그럼 이때 단계의 직업은? 의사? 마을이장? 청년회장? 아니다. 백수였다. 언제 다시 시행될지 모르는 과거시험만 바라보고 사는 만년 고시생. 이 고시생이 무서워 벌벌 떠는 마을사람들. 뭔가 좀 우습다. 헌데, 그 성질머리 때문에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포은령(包銀令)이 내리자 군수를 직접 찾아가 따지고 대들기 시작했던 것. 포은령은 원(元)나라가 한족(漢族)을 상대로 부과한 인두세와 같은 세금이었다. 당시 단계가 살던 마을에선 세금을 낼 처지에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자 마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단계가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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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놈이 찾아와 대들자 이렇게 협박했다. “이는 특별한 법인데 너는 네 머리를 아끼지 않는가?” 한마디로 ‘뒤질래?’라고 협박했던 것. 하지만 쉽게 물러설 단계가 아니다. “군수는 벼슬이니 물론 머리를 아껴야 하지만 백성은 아끼지 않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 이판사판이다. 헌데, 단계는 분이 덜 풀렸는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군수를 향해 온갖 저주를 다 퍼붓기 시작했다. “이 해독은 자손을 해치고 반드시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니 백성들은 나에게 재산을 갑절로 바치며 이 일에 대항해줄 것을 원할 것입니다.” 집안 말아먹을 짓은 그만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젊은 놈. 뭐 이 정도면 목이 날아가도 문제가 되지 않을 판이다. 하지만 결국 군수 또한 단계의 협기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고 만다.
 
그런데 협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불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도한 것이다. 과도하게 세금을 물고 힘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불의한 것이다. 하지만 불의란 도(道)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불의란 내 안에도 있다! 한번은 단계가 살던 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장갑이 오솔길을 가는데 이을이 지게를 지고 가다 하마터면 장갑의 눈을 찌를 뻔했다. 장갑은 곧 불같이 화를 내더니 급기야는 이을의 귀를 주먹으로 쳐서 이을을 죽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불러온 것. 불의란 이런 것이었다. 우리들의 감정과 욕망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것. 그것으로 인해 남들을 괴롭히고 번뇌에 빠뜨리는 것. 세상의 모든 불의란 우리 안의 불의함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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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또한 자신의 불의함에 직면했다. 알고 보니 협기 또한 불의한 행동이었던 것. 불의한 상황을 바로 잡는답시고 이리 설치고 저리 설치는 것이 불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군수에게 저주를 퍼붓는 그것은 과연 의로운 것인가. 이 깨달음은 주자학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단계는 이때의 자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장부가 배움에 있어서 도(道)를 듣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협기만을 숭상하니 어찌 미혹되지 않겠는가?” 오직 협기로만 살아온 청년시절. 그는 주자학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협기 또한 사람을 미혹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혹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언가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타고난 기질에 홀려 협기만을 쓰는 것 또한 미혹이고 불의한 것이었다. 주자학은 단계에게 자신의 기질을 넘어서는 공부의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계는 이때 “지난 일에 대해 옷자락을 들어 올려서 뉘우쳤다”고 적었다.
 
그의 나이 36세. 본격적인 주자학 공부가 시작됐다. 가정형편과 어머니의 병환으로 스승을 찾아가 정식으로 공부할 수 없었던 단계는 이때부터 허문의를 스승으로 삼고 주자학에 매진한다. 때마침 폐지되었던 과거제도 또한 2년 전부터 다시 시행되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더구나 그가 찾아간 허문의는 너무나도 잘 나가는 스승이었다. 주자학에 정통했던 허문의의 강연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다. 문인 또한 천여 명에 달하고 사방에서 그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이런 스타강사 허문에게도 단계는 특별한 제자였다.
 
공은 천명인심(天命人心)의 비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미세함과 깊이를 열어서 밝혔다. 선생은 이를 듣고 과거의 침명(沈冥)과 전제(顚隮:전복되고 멸망한다는 뜻)를 스스로 뉘우쳐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리하여 날마다 깨닫는 바가 있어 마음이 밝아지고 확 트였으며 체부(體膚)가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 있었고, 매일 밤 책을 끼고 사고(四鼓:새벽 2~4시)까지 앉아서 몰두하여 조용히 고찰하고 반드시 실천에 옮겼다. 그 거칠고 난폭한 성질이 억제되어 순수하고 평온해졌으며 리욕(理慾)의 관계, 성위(誠僞)의 한계를 엄격히 변별하고 굳게 지켰으며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거나 스스로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몇 년 되니 그 학문이 확고하게 되었다.  -『단계의집』, 「고단계선생주공석표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p.449
 
고3 수험생을 방불케 하는 열공 모드. 이런 제자를 어느 스승이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단계에게 주자학은 스승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거칠고 난폭한 성질이 억제’되는 것은 물론 주자학을 통해 단계는 모든 것이 자기 안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명(天命)을 받아 행하는 것도 나고 인심(人心)을 가지고 태어나 욕망의 늪에 빠지는 것도 나다. 내 안으로부터 이것들을 조절할 줄 안다면 안으로는 성인이고 밖으로는 왕이나 다름없다.(內聖外王) 그의 말대로 주자학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體膚)를 전율케 했다. 그렇다. 모름지기 공부란 이런 것이었다. 익숙한 습속에 젖어있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일. 그것으로 세상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는 일. 단계는 주자학을 통해 그것을 만끽하고 있었다.
 
무식유죄 – 의학과의 만남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단계는 허문의 밑에서 배운지 2년 만에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하고 만다. 다시 2년 후에 재시에 도전하지만 또 낙방. 그러자 허문의는 단계를 조용히 불러들인다. “나는 병에 걸려 누운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의술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나의 병을 치유할 수 없다. 자네는 보통 사람에 비해 유달리 총명하니 의술을 배워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가?” 협기도 버리고 도(道)를 추구하겠다는 제자에게 업종변경을 권하는 스승. 하지만 단계의 반응은 의미심장했다. “선비가 만약 어떤 기예에 정통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확대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이런 인애심성(仁愛心性)이 있다면 비록 살아 있을 때 벼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벼슬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실 단계의 삶에 있어서 이 대목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단계는 주자학을 통해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의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것은 낙방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관리가 되는 것이나 자신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인애심성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무엇을 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깨달은 바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궁하여 아래에 있으니 은혜를 멀리 보낼 수 없으므로 멀리 보내려면 의학이 아니고서 어떻게 추구하겠는가?”
 
그러나 단계에게 의학공부는 처음이 아니었다. 30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비병(脾病)을 앓자 그는 직접 『황제내경』을 읽은 바 있다. 이는 그의 가족사와 관련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병을 얻기 전 단계의 아버지와 어린 동생은 의사들이 치료를 했음에도 목숨을 잃고 만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단계로서는 그런 의사들에게 어머니를 맡길 수 없었다. 단계는 곧 『황제내경』 연구에 돌입했다. 3년간의 탐독과 2년 동안의 치료가 이어졌다. 그리고 장장 5년에 걸친 공부의 성과는 어머니의 치료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쁨보다도 분노의 감정이 찾아왔다.
 
이미 사망한 부친의 내상(內傷), 백부의 무민(瞀悶), 숙부의 비뉵(鼻衄), 어린 아우의 퇴통(退痛), 아내의 적담(積痰)을 탐구하니 모두 약을 잘못 써서 죽은 것이었다. 간담이 떨어지고 비통하여 회상할 수 없었으나 아직 배운 것이 명백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40세가 되어 다시 『소문』을 들고 읽었다. 자질이 우둔한 것을 고려하여 조석으로 깊이 연구하였는데 의심스러운 것은 당분간 보류해 두고 통달할 수 있는 문제부터 먼저 정통했다.
 -『단계의집』, 「격치여론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p.5
 
무식유죄(無識有罪)! 단계는 가족들의 죽음에 의사들의 경솔한 처방이 있었음을 『황제내경』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의사들은 모두 『화제국방』이라는 표준방제서에 따라 진단하고 처방했다. 그들은 환자가 왜 병에 걸린 것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약을 처방했다. 병이 낫지 않으면 약을 더 많이 먹고 오래 먹어볼 것을 권장했다. 그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물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와 어린 동생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이었던 것. 이는 증상과 방제만을 싣고 있는 『화제국방』에서 비롯된 재난이었다. 아니 그것만은 믿고 따르던 의사들의 책임이 더 컸다. 이후 단계가 『국방발휘』라는 의학비평서를 쓰는 일에 전력을 다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화제국방』을 잘못 쓰면 사람을 죽인다. 무식하면 사람이 죽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고백하듯 너무나 많은 것을 몰랐다. 스승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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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는 곧 의학스승을 찾아 절강성 지역을 이 잡듯이 떠돌았다. 이 탐색은 강남일대의 명의란 명의는 다 찾아가 궁금한 점을 묻고 배우는 배움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탐색의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의학스승 대신 단계가 얻은 것이라곤 두 권의 책이었다. 유완소와 이동원의 저서가 그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단계는 북방의학을 접하게 됐다. 거기엔 남방에서 유행하던 치법들과는 완전히 다른 치법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책을 독파하는 데도 길잡이가 필요했다. 
 
단계는 발길을 돌려 항주로 향했다. 여기서 우연히 만난 친구 진지언으로부터 나지제를 알게 된 단계는 곧 그를 찾아갔다. 나지제는 유완소의 수제자였던 형산부도의 문하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이동원과 장종정으로 대표되는 북방의학을 섭렵한 인물이었다. 단계가 살던 남방은 남송이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던 지역이었던 탓에 북방의학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지제는 단계를 쉽사리 만나주지 않았다. 일단 성격이 까칠했다. “성질이 몹시 오만하여 선생이 알현하려고 10번이나 왕복하였으나 통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단계가 아니었다. 단계는 이때부터 나지제의 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한다. “선생의 뜻은 더욱 굳어져서 낮에 손을 마주 쥐고 그의 문에 서 있었으며 큰 풍우에도 변하지 않았다.” 이러기를 석 달째, 나지제는 단계를 불러들였다.
 
이전에 배운 것을 철저히 포기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정확하지 못한 것들이다. (…) 의학의 요점을 배우려면 반드시 <소문>, <난경>에 근거해야 하며, 습열상화(濕熱相火)에 의한 병이 가장 많으나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겸하여 장사(長沙:장중경)의 책은 외감(外感)에 관하여 상세하고, 동원의 책은 내상(內傷)에 상세하니 반드시 두 가지를 다 써야 질병 치료에 유감이 없게 된다. 보잘 것 없는 진·배의 학문(진사문과 배종원-『화제국방』의 대표저자들)에 얽매이면 사람을 죽인다. -『단계의집』, 「고단계선생주공석표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p.453
 
그렇다. 배움은 비움으로부터 출발한다. 나지제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계는 주자학을 배울 때처럼 그의 의론들을 차례로 섭렵해 나갔다. 나지제 또한 그런 단계를 무척이나 아꼈다. “나는 이제 주단계가 있으므로 내가 나의 일생동안 배우고 경험한 지식을 전수해 줄 사람을 찾으려고 더 이상 고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나, 나지제와의 인연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나지제로부터 배우길 4년. 스승은 돌연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의(醫)란 의(意)다 – 주자학과 의학의 만남

나지제로부터 배운 의학의 핵심은 간단했다. 습열(濕熱)과 상화(相火)로 인한 병이 대부분이라는 것. 습열이 주로 외감의 문제라면 상화는 내상의 문제를 야기했다. 단계는 나지제로부터 전수받은 의학을 상화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주자학과 의학이 상화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단계는 상화론을 통해 그 길을 만들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청년시절의 경험과도 맞닿아 있었다. 주지하듯이 단계에게 주자학은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병 또한 마찬가지다. 병은 외감보다는 내 안으로부터 생겨난다. 이 깨달음을 몸에 도입하기 위해 단계는 육기(六氣), 즉 외부의 여섯 가지 기운 가운데 하나였던 상화를 몸 안으로 귀속시켰다.
 
상화는 천지의 생명력을 주관하는 불이다. 우리 몸의 생명력 또한 상화가 그 원천이다. 그러나 감정과 욕망의 과도함은 상화를 생명력의 원천이 아닌 병의 원인으로 작동하게 만든다. 이 순간 우리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욕망이자 감정이 된다. 단계에 의해 욕망의 문제가 의학사에서 전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욕망을 무엇으로 제어하고 무엇으로 절제할 것인가. 그것은 약이나 침으로는 제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주자는 과감하게 의학을 소도(小道)라고 규정했다. 해답은 마음에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단계는 그 길을 주자학으로부터 찾았다. 중정(中正).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절할 줄 아는 것. 그 상황에 맞게 할 줄 아는 것. 그것을 죽는 순간까지도 훈련하는 것. 이 길은 단계가 자신의 불의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걸었던 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자학의 훈련을 그의 의학스승인 나지제는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련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옛 처방으로 지금의 병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낡은 집을 무너뜨리고 새 집을 짓는 것과 같으며 그 재목이 같지 않으니 다시 목수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 어찌 쓸 수 있단 말인가?” 재목이 아니라 목수가 중요하다는 것. 훌륭한 목수는 연장이나 나무를 탓하지 않는다는 것. 오직 만들고 고칠 뿐. 이것이 스승이 단계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길이었다. 이 배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단계는 스스로의 말로 변주해 자신의 책 서두에 실었다. 
 
(醫)란 의(意)다. (…) 왜냐하면 전수하는 의리는 비록 명백하고 배운 의리는 심오하지만, 임상에서 복잡한 변화에 대처할 때는 마치 큰 적을 직면한 사령관이나 배를 조정하여 거칠고 사나운 파도를 항해하는 키잡이와 같으며, 만약 성현처럼 때에 맞게 처리하는 묘용을 취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의(醫)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계의집』, 「국방발휘」,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p.53
 
의사를 이토록 멋지게 정의한 것이 또 있을까. 단계에 따르면 의사란 뜻을 아는 자다. 몸에서 생기는 병, 만물이 생장수장(生長收藏)하는 흐름, 인생의 새옹지마, 내 마음 속의 변화. 의사는 이 변화와 흐름의 뜻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환자를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사는 파도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키잡이이자 무서운 적을 앞에 두고도 흔들림이 없는 사령관, 이런 조건 위에서 때에 맞게 하라는 성현의 말씀을 실천해나가는 존재여야 했다. 이상이 너무 높은 거 아니냐고? 맞다. 허나, 단계는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훈련하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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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는 의사들뿐만 아니라 환자들에게도 그 길을 가야한다고 조언했다. 욕망을 줄이고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해나가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를 치료하는 자가 되는 것. 단계를 이를 수치(修治)라고 명명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닦아서 치유하라. 그는 그것이 곧 주자학에서 말하는 도(道)이자 자기 삶을 구원하는 기술,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깨달음은 배움에 뜻을 두고 공부한지 30년이 지난 어느 날 불현 듯 찾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단계는 환자를 치료하고 그 깨달음을 책으로 쓰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온갖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의 의학이 고향의 의사들이 업으로 삼고 있던 의학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단계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오직 스승 허문의뿐이었다. “나의 병이 곧 낫게 되었구나.” 실제로 단계의 치료로 허문의는 10여년이 넘게 앓아온 풍습(風濕)병으로부터 해방됐다. 스스로 폐인이 되었다고 호소하던 이 선생은 단계의 치료를 받은 다음 해 아들 하나를 낳고 14년 뒤에 사망했다. 단계에게 단계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때부터였다. “학자들은 그를 존중하여 자를 감히 부르지 못하고 그 지명에 따라 단계선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사방에서 병으로 맞이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고, 선생은 즉시 가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며 비록 비와 눈이 길에 가득 차도 멈추지 않았다.” 하루는 마부가 단계에게 피곤을 호소하자 단계는 마부를 꾸짖었다. “병자는 일각을 지내기가 하루와 같은데 어찌 자신의 안일만을 바란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여름, 단계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환자를 보고 와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느끼고 침대에 누운 지 3일만의 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선승들의 죽음을 연상시킬 만큼이나 깨끗했다. 조카를 불러 의학 또한 정통하기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앉아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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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옹전」의 마지막엔 의미심장한 구절이 하나 나온다. 한 남자가 엄평군을 찾아와 과거 영웅들의 명성과 기개가 탐난다고 말한다. 그러자 엄평군은 그에게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엄평군은 이렇게 생각했다. 좋은 삶이란 자신의 삶에서 길을 찾으려 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그 남자에게 그 일에 소홀하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엄평군은 점괘를 통해 이 보편적인 삶의 이치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다. 정충은 단계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좌구명이 말하기를, 인인(仁人) 군자의 말은 그 이로움이 매우 넓다고 하였으니 정말로 그러하다. 단계옹과 같은 이런 사람은 대개 고대에서 말하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견문이 많아서 사람에게 유익한 벗이니, 또 어찌 의사라 하여 깔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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