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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된 유랑민, 유완소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3-10-05 22:11
조회 : 5,904  
 
유완소, 의사가 된 유랑민

김동철(감성 3학년) 


삼재(三災)의 유년 시절

유완소는 중국 금나라 시대의 의사이다. 중국의학사에서 그는 의학이론의 중흥을 이룩한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 즉 금·원(金·元)시대의 뛰어난 의사 4명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이런 명성의 이면에는 암울한 유년시절이 있었다. 3번의 시련이 연거푸 그를 찾아온 것이다. 첫 번째 시련으로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읜 후, 숙녕현(肅寧縣)에 자리한 고향마을에 수해가 몰아닥친다. 이때의 여파로 고향을 등지게 되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마저 병마로 쓰러진다. 그의 나이 10살 남짓 무렵이었다. 소년 유완소는 백방으로 의사를 모셔오려 하나,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가난뱅이인 유완소의 집에 왕진을 가봤자, 진료비 한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세 번 의사를 초빙했다고 하는데, 어디 세 번뿐이었겠는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어머니는 서서히 죽어간다. 그의 유년시절에 닥친 두 번째 시련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삼재(三災)가 있다고 한다면, 그의 세 번째 고난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조실부모에다 천재지변으로 고향조차 파괴된 무일푼의 혈혈단신 떠돌이 신세!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어 보이나, 유완소의 유년기를 완성하는 사건은 그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유완소는 본래 북송(北宋)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하북성(河北省) 하간현(河間縣)에 대대로 ‘유가촌(劉家村)’이라는 이름의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유완소는 나고 자란 숙녕현 마을이 수해로 파괴되고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홀로 하간 땅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간 지방은 당시 송나라와 금나라의 접경지역으로 군사적 긴장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마침내 1127년, 그의 나이 17세 즈음에 금나라가 대대적으로 침공하기 시작한다. 금나라의 목표는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부였으며, 그곳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할 길목이 다름 아닌 하간 땅이었다. 금나라 군사의 말발굽과 창검이 밀려들어왔다. 송나라의 군사는 허약했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유완소의 세 번째 고난은 바로 전란의 소용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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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에 자연재해와 전쟁까지 3연타가 한꺼번에 몰아치니, 그의 10대를 정의하는 키워드는 ‘유랑’이었다. 이때의 유랑은 그저 천하를 주유하는 ‘방랑’이나 ‘여행’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생존을 담보로 한 유랑은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연속과도 같았다. 금나라 군대의 약탈과 살육을 피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송나라 관군이 그들을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것 또한 무리였다. 왜냐하면 송나라 말기의 조정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오히려 송나라 관군을 금나라만큼 증오하고 있어, 각지에서 강도와 산적들이 창궐하고 있었다. 108호걸이 모인 산동의 ‘양산박(梁山泊)’을 소재로 한 <수호지(水滸誌)>는 바로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서술된 소설이었다. 금나라 군대, 송의 관군, 산적패들이 설치는 와중에, 어디에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피난민의 신세! 그것이 유완소의 암울한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유랑의 길에서 의학을 만나다
  
유랑을 하며 그는 길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더미, 불타는 마을,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들, 적군과 아군 누구 가릴 것 없이 야수로 돌변하는 세상인심. 그야말로 무정부상태의 혼돈 한복판에서 유완소는 삶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에 직면한다. 그것은 바로 그의 뇌리에 박혀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유완소는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했다. 이때의 충격은 그로 하여금 깊은 슬픔과 함께 굳은 결심을 품게 한다. 그것은 바로 의학공부에 뜻을 두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유완소의 의학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머니의 일이 결정적 계기였다면, 유랑 생활은 의학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제공했다. 소싯적부터 떠돌이 생활을 한 유완소는 항상 죽음의 위협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후와 풍토가 다른 지방을 넘나들며 전염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산 넘고 물 건너며 소소한 상처라도 나면 어찌할 것인가? 아프다고 병원을 갈 수도 없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돌볼 줄 알아야 했다. 아마도 유완소는 유랑 중, 의술에 대한 필요성을 자연스레 절감했을 것이다. 유랑은 낯선 곳을 맨몸으로 부딪치는 경험이다. 그 와중에 기이한 인물과 사건을 만나기 마련인데, 야사에 의하면 유완소가 꿈속에서 스승을 만난 일화도 유랑 길에서 벌어진 일이라 한다. 그가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 하루는 폭풍을 피해 묘당(廟堂) 안으로 몸을 피했다고 한다. 비에 흠뻑 젖은 데다 굶주려 녹초가 된 그는 묘당 내부에 놓여 있는 술병을 보고, 앞뒤 가리지 않고 입에 털어 넣는다. 어느새 크게 취한 그의 앞에 문득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 말을 건넨다. “자네, 의술을 배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 주지.” 노인은 유완소에게 의술의 기본 초식과 진단법 등을 가르치고는 홀연 사라진다. 유완소가 놀라며 잠에서 깨자 모든 것이 꿈이었고, 술병이 놓여있던 자리에는 의서(醫書)가 한 권 놓여 있었다. 그 의서에는 ‘진희이(陳希夷)’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진희이는 역법과 관상 등에 통달한 송나라 초의 도사이며, <자미두수>와 <마의상법>을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 이후 유완소의 의술 실력은 크나큰 진보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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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는 물론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다. 그런데 어떤 난관에 처했을 때, 꿈에 신령스러운 인물이 나타나 해결방법을 일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꿈은 사람의 무의식이 발현된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은 곧 의식과 연동되어 있어, 의식 수준에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거나 매진하면 그것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일상에서 고민하는 문제가 꿈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단지 꿈에서는 기이한 상징 등으로 표현되기에, 언뜻 봐서는 상호간의 의미를 연결 짓기 어려울 뿐이다. 더구나 꿈은 깨어나자마자 망각 속으로 날아가 버리지 않는가? 따라서 선명한 꿈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높은 수준의 몰입과 비례한다. 일상의 삶이 촘촘하고 밀도가 있으면 그것은 곧 꿈으로도 나타날 뿐더러,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히 각인된다. 한마디로 의식과 무의식이 따로 놀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유완소가 꿈속에서 의술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그의 심신과 일상이 자나 깨나 의학공부를 향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내경(內經)>을 재해석하다
 
유완소가 매진한 의학공부는 바로 <황제내경(黃帝內經)>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이름인 완소(完素)가 본명이 아니라, <내경>의 소문(素門)편을 완(完)전히 통달해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할 정도였다. <내경>은 중국의학의 뿌리이자 총체적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살아있는 고전이었다. 그가 <내경>에 매달린 것은 의학공부를 위한 당연한 수순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나 이름은 들어 알고는 있지만, 정작 내용을 물어보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 고전의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이런 양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나 보다. 유완소가 의학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내경>과 <상한론(傷寒論)> 같은 고전들은 의사들의 집중적인 연구 텍스트인 동시에, 읽어내기에는 너무나도 난해한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헐렁한 의사들은 고전 읽기를 제쳐두고 매뉴얼화된 의학처방에 의존했다. 말하자면 의학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탐색하기보다, 이 병에 이 약! 저 병에 저 약! 하는 식으로 기계적인 진단과 처방을 구태의연하게 일삼았다. 그렇게 한 까닭은 일단 환자 보는데 골머리 썩히지 않고, 쉽게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의사들이 대다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질병의 추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신종 전염병에 걸려도, 옛 진단과 처방의 구습을 반복하는 의사들로 인해 죽어갔다.
 
그가 살다간 90년의 세월은 중국 대륙에서 격동의 시기였다. 송·금·몽고의 군사적 충돌로 야기된 중원의 분열과 함께, 의학을 구성하는 지층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당시 유행한 열성(熱性) 전염병은 기존의 담론으로 해결이 불가능했다. 마치 송나라가 내부의 안일함에 빠져 북방민족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듯이, 사람들의 신체는 낯선 질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사들은 여전히 <상한론>의 처방을 고집했으나 소용없었고, 이는 시대의 아이러니였다. <상한론> 자체가 후한(後漢) 말 돌연 등장한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저술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새로운 이론의 탄생을 막는 걸림돌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한론>의 저자 장중경(張仲景)의 잘못인가? 유완소는 이렇게 말한다. “중경의 글이 현묘해 학자들이 어렵게 여겨 근래의 방론이나 익힐 뿐, 그 말단만 연구하고 근본을 추구하지 않는다.” 결국 학자의 구태의연함, 게으름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천하의 신묘한 의서와 의술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갱신되지 않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었다. 유완소는 <내경>이나 <상한론>과 같은 고전 역시, 시대의 추세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함을 절감했다. 이는 보수적인 학술 풍토에서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의 ‘주화론(主火論)’은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했다. 주화론은 <내경>의 내용을 유완소만의 시각으로 풀어낸 이론인데, 풍·한·습·조의 기가 일정한 조건에서 모두 화열(火熱)로 변한다는 주장이었다. 열성 전염병이 창궐하고 갖가지 질병의 양상이 모두 화열로 수렴되는 상황에서, 유완소는 선언한다. “육기(六氣)는 모두 화열을 따라 변한다.” 유완소는 질병의 원인이 육기에서 비롯한다고 봤다. 육기는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로 구성된 외부 기후 조건을 가리킨다. 육기는 오운(五運)과 결합해 오운육기(五運六氣)라 하고, 이는 곧 운기학설을 이룬다. 그래서 유완소를 ‘육기병기학파(六氣病學機派)’라 부르기도 한다. 유완소는 질병의 요인이 육기 중 ‘화(火)’로 환원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목·화·토·금·수 오행이 서로 대등하게 상생·상쟁하는 차원을 벗어나는 파격적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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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유완소와 라이벌 관계였던 보토파(補土派) 계열의 장개빈(張介賓) 같은 의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장개빈은 호가 경악(景岳)으로 명대(明代)의 명의다. 그는 ‘주화론’을 겨냥해 유완소가 모든 질병의 원인을 무리하게 화열로 귀결시켰다고 혹독히 공격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였다. 실제로 유완소는 모든 병에 화열을 적용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맞는 처방을 썼다. 그가 ‘한량파(寒凉派)’ 혹은 ‘주화론’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까닭은 전략적 선택이었다. 당시 사회는 복석(腹石), 즉 신선이 되기 위해 단약을 먹는 풍조가 유행했다. 사이비 도가의 설법은 단약을 복용하면 양기가 생성되어, 음체(陰體)인 육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육체를 버리고 승천해 하늘나라의 신선이 된다는 논리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잦은 단약 복용은 양열(陽熱)을 타오르게 해, 열병으로 죽을 수 있다. 이래저래 육신을 버리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니 사이비 도사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의사들도 이런 허무맹랑한 설에 홀렸으니 유완소는 “요즘 의사들이 양(陽)이 생(生)을 주(主)하고, 음(陰)이 사(死)를 주(主)한다고 하니, 양열한 것만 기르는 것은 오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풍조가 화열을 북돋는 쪽으로 치우치니, ‘한량파’라는 명칭은 이를 경고하기 위해선 안성맞춤이었다.
 
금원사대가의 문호를 열다
 
유완소의 전략적 판단 이면에는, 인간이 갈수록 화열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암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유완소를 필두로 이후 줄줄이 나타나는 장종정(張從正), 이고(李杲), 주진형(朱震亨)은 그 의론은 각각 다르나 한결같이 ‘화기(火氣)’의 문제로 귀착된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금·원(金·元)시대에 이 네 사람이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로 묶여 의학상의 한 시대를 연다. 이는 중국의학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내경>과 <상한론>의 지층에 놓여있던 의학은 금원시대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킨다. 물론 이 말이 <내경>과 <상한론>을 대체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경>과 <상한론>을 낯설게 변주해 실제 임상에 적용했다는 의미이다. 800년의 장구한 세월 속에, 해석되기를 기다리며 침잠해있던 위대한 경전들이 새롭게 빛을 보게 되었다. 결국 금원사대가가 학파를 결성해 이론연구를 진일보시키고 상호 투쟁을 벌인 것은, 다시 말해 인류가 ‘화열’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기원후 12~13세기에 걸쳐 벌어진 의학사적 단절의 순간이었다. 하늘은 항상 화(火)하고, 사람은 항상 동(動)한다. 그럼 단절은 어디서 어떻게 비롯한 것인가? 왜 갑자기 화열이 등장한 것일까? 원래 화열로 인한 온병(溫病)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예전에는 상한론의 치료 범위 내에서도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완소의 등장으로 ‘화열’이 의사들 사이에서 주요 담론으로 떠오르며, 마침내 청대(淸代)에 와서는 상한론에서 독립한 온병학(溫病學)이 생기게 된다.
 
질병의 변천사는 문명사적 전개와 맞물려있다. 다시 말해 질병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시대상은 사람들의 일상과 연동되어 있다. 유완소의 운기학설을 빌리면 운기는 사람의 생활, 즉 문명과 연동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요컨대 운기로 질병을 예측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질병을 관찰해 운기 변화를 추론할 수도 있다. 이는 결정론의 견해를 넘어서, 인간과 우주가 서로 조응(照應)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리듬을 연출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운기학설에서는 주기(主氣)가 우주의 보편적 운행원리로써 봄·여름·가을·겨울의 사시(四時)와 같은 일정한 규율을 만든다면, 객기(客氣)는 만물이 우주의 운행에 개입해 특수한 질서를 빚어내는 것이다. 주기와 객기가 한데 합쳐서 마침내 운기의 리듬을 생성하니, 변화의 동력은 객기가 틀어쥐고 있다. 이 객기가 바로 천지자연을 이루는 만물에서 비롯하니, 여기에는 인간 또한 포함된다. 인간은 그 스스로 객기로써 우주의 리듬을 연주하는 자리에 참여한다. 그래서 ‘함부로 객기 부린다’는 말은 법도에 거스르는 자를 가리킬 때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법(法)은 바로 물(水)이 가는(去) 것을 형상화한 글자이니, 이는 곧 자연의 이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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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스스로 운기를 구성하는데 참여하니, ‘화열’의 갑작스런 등장은 인간 문명의 변천과 맞닿아있다. 기원후 12세기 무렵의 중국대륙에서는 북송(北宋)이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성장이 극에 다다르고, 그에 따른 소비가 과잉되어 송대 도시문화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한다. 덕분에 각종 조합과 사학(私學)이 성행해 ‘학파’가 태동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때 신유학의 여러 학파와 소림파와 같은 무림(武林), 그리고 금원사대가와 같은 의학학파가 동시에 융성함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때의 도시 풍경을 그린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와 도시 생활을 기록한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이 그 번화함을 오늘날에도 증언하고 있다. 문명이 성장할수록 인간 삶은 복잡해지고 분주해진다. 유완소는 열성 전염병의 출현을 두고 하나의 잠언으로 답을 대신한다. ‘하늘은 항상 화(火)하고, 사람은 항상 동(動)한다.’ 이 아포리즘은 본래 역경(易經)에 있는 말로, 인간 자체가 근원적으로 동(動)하려는 존재임을 뜻한다. 동하기에 양(陽)하고, 양하기에 열(熱)하며 화(火)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화열 덩어리이다. 그 주체하지 못하는 양기로 거대한 문명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유완소의 시대에 화열이 질병으로 나타난 것은, 음양의 조화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양기만이 그 끝을 알수 없을 정도로 불타오르는 일만 남았을 뿐, 그래서 어쩌면 유완소의 ‘주화론’은 오늘날에도 ‘효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랑 혹은 유동하는 의사
  
금원사대가의 시초로 하간학파(河間學派)를 열며 유완소는 중원 땅에 명성을 떨친다. 그 소문은 금나라 황실에까지 전해진다. 당시 황제인 장종(章宗)은 그를 대단히 아껴, 금나라 어의로 초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유완소의 대답은 ‘No!’였다. 이 장면은 과거의 한 순간을 오버랩시킨다. 바로 그의 어머니가 위중할 때, 방문하기를 거부한 의사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맥락은 전혀 다르다. 옛날 유완소의 청을 거절한 의사들이 돈벌이에 연연했다면, 황제의 부름을 거부한 유완소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재물과 명예라면 이보다 높은 영광은 없었다. 사서에서는 북송의 유민으로 조국을 멸망시킨 금나라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그런 면이 혹여 있을지 모르나, 한 인간의 궤적을 그저 충의(忠義)와 절개로만 귀결시키기엔 좀 미흡하다. 한편으로는 그가 귀족들의 안위보다는, 의료대책이 빈곤한 백성 곁에 남고 싶어 했다는 견해이다. 이 또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의술에 어디 금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귀족과 백성이 따로 있으랴? 오히려 나는 유완소가 기질적으로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있을 것 같지 않다. 두 발로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이 ‘유랑민’ 유완소에게 어울리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면 그의 의학담론의 정수인 ‘운기학(運氣學)’은 참으로 그 자신과 닮았다. 바람·차가움·더움·습함·건조함·뜨거움이라는 기상 요건이 인체의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운기학이다. 기상과 기후는 지방마다 풍토가 다른 것처럼 시시각각 변한다. 여행을 다니면 그곳의 날씨에 따라 활동에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아마도 유완소는 유랑을 하면서 변화하는 운기에 자연스럽게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방을 가면 이런 병이 많고, 저 지방을 가면 저런 병이 많음은 일찍이 <내경>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지점이다. 유완소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지역마다 다르게 전변하는 질병의 특성에 관심을 가졌을 터이고, 그런 의문이 꼬리를 물어 마침내 <내경>의 구절과 어우러져 운기학을 실질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 사람의 이론은 곧 그 사람의 행적 혹은 기질과 절대적으로 밀접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보면 유완소는 그의 의학담론부터가 정주민의 신체가 아닌, 유동하는 신체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유동하는 기질을 지닌 그가 어찌 아늑한 궁궐에 머물겠는가? 그것이 바로 유완소가 황제의 명을 세 차례나 거절한 진짜 이유이다. 하는 수 없이 금나라 황제는 ‘고상선생(高尙先生)’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그를 초빙하려던 계획을 포기한다. 유완소는 그렇게 평생 외길을 걸으며, 세상의 변화하는 이치에 주의를 기울이며 일상을 보낸다. 그 결과물로 만년에 하간육서(河間六書)로 불리는 저작들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유완소가 금원사대가의 맏형으로 불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학담론을 글로 남겼기에 가능했다. 또한 고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풀어내려는 독창성 덕분에, 의학이론의 중흥이라는 의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향년 90세의 일기로 유완소는 세상을 뜬다.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그의 주화론은 청대 이후 온병학과 같은 전염병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열성 질환이 점점 늘어나는 오늘날에도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_(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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