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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자 행성 - 2학년 밴드글쓰기(박소영, 한성준, 장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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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10-24 19:54 조회6,4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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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
 
 
박소영, 한성준, 장예진(감성 2학년, 밴드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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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 생활을 단 한 주도 못해보고 아줌마가 되었구나.” 열아홉 살의 린 마굴리스가 결혼하는 날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전보의 내용이다. 새 며느리에게 보내는 첫 편지 치곤 좀 고약하다 싶지만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대학을 조기 졸업한 마굴리스는 졸업식이 있은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당시 대학원생이던 칼 세이건과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 자신의 글 여기저기서 아들 딸 이야기를 늘여놓으며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식상 발달형’ 아줌마의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의 생물학자들에게 린 마굴리스는 현대 생물학의 혁명가 중 하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생물들이 경쟁이 아닌 공생을 통해 진화한다는 그녀의 ‘공생 진화론’은 20세기 생물학이 생명을 사유하는 방식을 뒤바꾸어 놓았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는 누구보다 치밀한 실험과 논증으로 당시 생물학계에 팽배하던 신다윈주의 논리와 인간 중심적 사고에 맞서 싸워야 했다. 아직도 공생 이론은 많은 이들에게 낯설지만 그래도 그것이 감이당 커리큘럼에까지 들어오게 된 데엔 마굴리스의 역할이 컸음이 분명하다.
 
주류에 저항하는 과학자와 아이 넷을 낳아 기른 가정 주부. 린 마굴리스의 삶은 대개 서로 다른 이 두 개의 키워드로 축약되곤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를 볼 때면 우리는 으레 생각한다. 일상에서 그 두 역할을 한꺼번에 해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모르긴 몰라도 그 모순된 두 일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그녀는 수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었을 거다.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는 ‘좋은’ 주부로 사는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했을 테고, 엄마로서의 책임감은 자신의 공부에 때로 장애물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워킹맘’, ‘슈퍼우먼’의 삶이 아닌가. 
 
그런데 재미있게도 정작 마굴리스의 글에서는 그런 노고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과 유전학을 공부하는 것 모두를 얼마나 원했는지 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애나 가정 때문에 공부가 힘들었다는 불평도, 공부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그녀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나는 마굴리스의 책을 읽으면서 그 점이 가장 의아하고 신통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아쉬움이나 후회가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과학자로서의 삶과 ‘아줌마’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낸 것에 대해 당황스러우리 만치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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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는 마굴리스가 삶을 대하는 이 같은 태도가 그녀가 주장하고 있는 공생 이론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요컨대 공생 이론은 하나의 생물학 이론이기 이전에 린 마굴리스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 마굴리스의 삶에서 이론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 즉 그녀가 자신의 일상을 통해 생물을 이해하고 또 생물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장면들을 따라가 보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앎과 삶을 일치시켜 가는 그녀만의 노하우를 엿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획일화된 삶을 거부하다
 
핵가족에서 내조하는 아내 역할이나 편집광처럼 세포핵에만 초점을 맞춰 연구하는 것은 내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많은 아내들이 그렇듯이 내 관심사도 분열되어 있었다. 친구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은 현대 여성을 ‘주변인’이라고 표현한다. 여성은 살아남으려면 다방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베이트슨은 한 팔로 아기를 안고, 다른 팔로 냄비를 저으면서 눈으로는 기어 다니는 다른 아기를 지켜본다고 말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치가든 여성 운동가든 이런 다중적인 스트레스를 없애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 린 마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공생자 행성』, 사이언스 북스, 2007. 45쪽.
1960년대에 20대를 보낸 린 마굴리스는 여느 현대 여성들과 다르지 않은, ‘분열된’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잠시도 가만 있으려 하지 않는 두 아들의 엄마’이자 칼 세이건의 부인이었다. 친구 베이트슨의 경우처럼 그것만으로도 두 팔 두 다리가 모자랄 지경이었을 텐데, 마굴리스에겐 가사 이외에도 또 하나의 커다란 관심사가 있었다. 다름 아닌 유전학. 마굴리스에게 유전학은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에 어떤 생명체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 생물들은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즉 생명 기원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학문이었다. 학부 때부터 그녀는 유전학이 던지는 그러한 질문들에 매료되었고, 따라서 결혼 후 아이를 임신하고 기르는 와중에도 공부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을 병행하기 위해 그녀는 한꺼번에 수많은 일들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이와 공부 둘 다 그녀 자신이 원해서 택한 것이기에 ‘멀티태스킹’을 하며 살아가는 일상은 불가피한 것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것은 여성 운동가들조차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만큼 주변 여성들 사이에서 이미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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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전학 공부를 하다 보니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세포의 유전을 연구할 때 오로지 세포의 핵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세포에는 핵뿐 아니라 미토콘드리아나 색소체, 섬모와 같은 여러 다른 구조물들이 존재한다. 세포핵은 세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관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학자들은 생물체의 유전 정보가 핵의 DNA 구조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유전 연구에서 핵 이외의 세포 기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린 마굴리스에게는 생명체에 오직 하나의 유전 체계(핵 유전자)만 존재한다는 말이 여자가 내조하는 아내 역할만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이상하게 들렸다. 작은 핵 하나가 세포 전체의 특성을 모두 결정짓는다니. 그렇다면 핵 이외의 나머지 것들은 단지 핵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 부품 같은 것들이란 말인가. 인간의 삶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마치 인생에서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선 나머지 것들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얘기와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마굴리스의 말대로 라면 그렇게 사는 삶은 그녀에게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앞서 보았듯 그녀는 가정 주부 혹은 과학자라는 하나의 타이틀로 환원되는 삶을 거부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꼽을 수 없듯 우리의 세포 안에도 핵 이외에 중요한 것들이 많을 거라는 것, 그것이 마굴리스가 가진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굴리스는 남들이 무시하던 세포핵 주변의 기관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자기 이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에 관심을 보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20세기 초반부터 몇몇 과학자들은 세포핵과 마찬가지로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 같은 세포 기관도 각자의 DNA와 번식 주기를 갖추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그 각각의 세포 기관들이 사실 오래 전에는 각자 '개인플레이'를 하던 세균들이었다는 연구 결과였다. 즉 우리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의 세포가 실은 저마다의 유전 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생물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름 하여 '공생 이론'. 이후 마굴리스는 이 이론을 증명하는 데 일생을 바치게 된다.
 
우리는 저 작은 세포 차원에서부터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냄비를 저으면서 눈으로는 다른 아이를 지켜보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 생명의 공생에서 마굴리스가 주목한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요컨대 우리는 태생적으로 각기 다른 욕망을 지닌 세균들의 공생체이며, 따라서 그 가운데 하나의 중심을 세운다는 건 생물학적으로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걸 공생 이론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살림만 하는 여자가 각광받던 시절, 20대의 마굴리스가 원하던 새로운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공생 이론은 그런 그녀로 하여금 하나로 모아질 수 없는 자신의 다양한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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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공생 이론이 우리에게 '워킹맘'이 되라고, '투잡', '쓰리잡'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생각해선 곤란하다. 사실 린 마굴리스가 그토록 바라던 삶도 이제는 주류적 삶의 행태가 된지 오래다. 바야흐로 여자가 집에만 있다가는 도리어 무능력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마굴리스가 살던 60년대나 지금이나, 사회는 여전히 그 구성원들에게 획일화된 '라이프스타일'을 요구한다. 우리의 다양한 욕망들은 경제적 가치로만 환원되고 다채로운 삶의 결들이 상품성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재단된다. 공생 이론이 던지는 메시지가 우리에게도 유효한 건 이 때문이다. 이 획일화된 삶 속에서 공생 이론은 하나의 중심이란 게 따로 없는, 서로 다른 것들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핵이 지배하지 않는, 다양한 미생물들이 공존하는 세포 같은 삶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린 마굴리스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고 또 그것을 이론으로 증명했다. 아이도 공부도 자신이 원한 것이었다고 단언하는 그녀의 당당함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에 맞서다
  
린 마굴리스가 삶을 대하는 이 같은 태도는 그녀가 '가이아 이론'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가이아 이론은 우리의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공생 현상을 지구 전체의 차원으로 확장시켜서 본 이론이다. 앞서 보았듯 다양한 미생물로 이루어진 세포는 누가 하나 나서서 주도하지 않아도 생명 활동을 잘 이어나간다.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의 환경도 누가 딱히 나서지 않아도 조절된다는 것이 가이아 이론의 핵심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지구에 검은 꽃과 흰 꽃만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검은 꽃은 열을 잘 흡수하고 흰 꽃은 열을 반사한다. 따라서 지구의 온도가 낮아지면 열을 흡수하는 검은 꽃이 잘 자란다. 그렇게 검은 꽃의 수가 많아지면 꽃이 흡수한 열에 의해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온도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높아지면 이번에는 열을 반사하는 흰 꽃이 검은 꽃보다 잘 자란다. 그리고 이 흰 꽃에 의해 지구의 온도는 차차 낮아진다. 이런 식으로 검은 꽃과 흰 꽃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지구의 온도를 적정 상태로 유지시킨다. 이와 같이 지구의 기온과 대기조성 등이 지구에 사는 생물들에 의해 저절로 조절되는 것을 가리켜 ‘가이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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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지구 자체에 어떤 의식이나 ‘뇌’가 있어서 지구의 환경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위의 꽃의 사례에서 보았듯 여기에는 어떤 주체의 의지나 목적이 필요하지 않다. 검은 꽃과 흰 꽃 각각의 생명 활동을 통해서 지구의 온도가 꽃이 살아갈 수 있는 적정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우리 인간이라는 종은 지구의 환경에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종종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한다던가 지구온난화 때문에 많은 생물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는 늘 ‘지구를 위한다’, ‘환경을 위한다’라는 명분이 붙는다. 그러나 마굴리스는 이러한 인간의 태도를 두고 인간이 우리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해서 하는 말이라고 비판한다.
 
내가 볼 때 인간이 살아 있는 지구를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그것은 능력은 없으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지구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우리를 돌보는 것이다. 혼란에 빠진 지구를 올바로 이끌라거나 병든 지구를 치유하라는 우리의 주제넘은 도덕적 명령은, 우리가 자기기만에 빠질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 린 마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공생자 행성』, 사이언스 북스, 2007. 202쪽.
실제로 화석 증거들은 핵폭탄 5천 개를 한꺼번에 터뜨린 것보다도 더 강한 충격을 지구가 수없이 버티며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산소도 처음에는 우리 인간이 만드는 어떠한 오염물질보다 훨씬 더 위험한 독소였다. 하지만 지난 30억 년 동안 생명은 그러한 변화에 끄떡없이 버티며 수많은 위기에 적응해 살아왔다. 마굴리스는 이러한 증거들이 인간은 지구를 파괴할 수도 지킬 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마굴리스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공생 이론을 연구해온 과학자들조차 지구상에서 인간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관점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번 학기에 배운 또 다른 공생학자인 톰 웨이크퍼드는 생물들의 공생 관계를 이야기할 때 ‘관리한다’라거나 ‘길들인다’라는 말을 쓰면서 인간이 지구의 ‘현명한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중심에 서서 지구를 관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굴리스는 그러한 인간 중심적 사고가 ‘그저 그런 포유류라는 우리의 진정한 지위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 반론한다. 세포 전체를 핵이 좌지우지하지 못하듯 인간도 지구를 좌지우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굴리스는 가이아 이론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인간은 생명의 중심이 아니며, 다른 종들 역시 그렇다.’
  
‘나’, 무수한 타자들의 집합  
 
세포의 중심에 선 핵, 그리고 지구의 중심에 선 인간. 린 마굴리스의 탐구는 이처럼 우리가 흔히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까지 보아왔듯이 그녀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중심에 서서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생각에 대해 '선천적인 알레르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세포 유전에서 핵이 가장 중요하고, 지구상에서 인간이 가장 특별하다는 생각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단순히 의문을 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생명의 공생 현장을 지배하는 하나의 중심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기어코 증명해 냈다. 앞서 살펴본 공생 이론과 가이아 이론을 통해서 말이다. 생물학의 모든 위계적 관계는 마굴리스의 눈에 띄었다 하면 수평적 관계로 변신했다.
 
그러나 마굴리스에 의해 '중심'이 무너지자 더 큰 질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생 이론은 오랜 옛날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세균들이 모여서 우리 인간과 동식물의 세포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세포가 60조 개 모여서 만들어진 존재가 ‘나’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내 의지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공생 이론에 따르면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세균이고 생각하는 것도 세균이고, 밥을 소화시키는 것도 세균, 호흡을 하는 것도 세균, 자식을 만드는 것도 세균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세균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그중에는 특별히 ‘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던 ‘나’란 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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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균이라고 하면 흔히 질병을 일으키거나 쓰레기에서 악취를 풍기게 하는 병원균을 떠올리기 일쑤다. 그 더럽고, 또 한편으론 무서운 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니,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병원균의 존재가 밝혀진 19세기 이후로 항생제나 백신을 개발해 그것들을 죽이고, 주방이나 욕실로부터 퇴출시키는 데 주력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세균은 늘 '적'이었고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공생 이론은 나에게 객체로만 존재하던 그것들이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해도 (...) 지구의 이 이질적인 존재들은 우리의 친척이자, 우리의 조상이자, 우리의 일부다. 그들은 우리의 물질을 순환시키고, 우리에게 물과 양분을 준다. '남'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 린 마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공생자 행성』, 사이언스 북스, 2007. 196~197쪽.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관계 속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 상대방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인간이 세균을 다 죽일 수 있다고,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거나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만 봐도 그렇다. 한 예로,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그러하다. 아버지는 내가 이곳 감이당에서 하는 공부를 싫어하신다. 내가 취업이나 결혼에 대해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게 된 게 이 공부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까닭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번 추석에 산에 올라가셔서 목표를 하나 세우셨다. 일명 내 ‘개똥철학’을 그만두게 하는 것. 그러면서 아버지는 인생의 3대 불행이 초년성공, 중년상처, 노년빈곤이라 하시며 돈과 직업,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관해서 설파하셨다. 거기에 대고 나는 나대로 장자가 어떻다느니 부처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반박했다. 내 개똥철학을 도리어 아버지께 ‘전도’하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아버지도 상대를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각자가 이 관계의 중심에 서고 싶어 했고 상대가 나와 동일한 욕망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마굴리스의 눈을 통해 본 공생 이론과 가이아 이론은 그처럼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망상인지를 보여준다. 주체로서의 '나’를 지키고자 하는 집착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행성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마굴리스의 두 이론이 보여주는 생명의 세계에는 세포핵이나 인간뿐 아니라 '나'라는 중심도 없다.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세균들의 집합, 그것이 마굴리스가 말하는 ‘공생자 행성’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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